2018-04-01

민주민족혁명당 사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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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민족혁명당 사건

최근 수정 시각: 2018-03-12 02:34:28

분류
정치 사건사고
국민의 정부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정 사건사고 문서는 유머성 서술과 비하의 표현이 제한되며, 사실관계를 작성할 때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야 합니다.

1. 개요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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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9년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반체제 공안사건. 반체제 지하정당인 민주민족혁명당을 국가정보원이 적발하고 그 구성원인 하영옥, 김영환, 박XX, 이석기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여 법원이 유죄판결한 사건이다. 국정원은 당시 민혁당을 1980년대 학원가의 주사파 핵심세력들이 북한에 포섭돼 조선로동당에 입당하고 남한 내 혁명전위조직으로서 결성한 지하당으로 발표했다.

2. 상세[편집]


적발된 계기는 코미디 같은 황당함에서 시작되었다.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이 민혁당의 실체를 드러내게 한 중요한 시발점이다. 1997년 8월, 북한의 노동당 사회문화부 5과 소속인 부부간첩 최정남, 강연정은 공해상을 통해 우회하여 거제도에 상륙, 남한 사회에서 생활을 하며 재야인사 포섭 및 경북대 김순권 교수가 개발한 슈퍼옥수수의 종자를 획득할 목적[1]으로 침투한다. 이들은 1997년 10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줄여서 전국연합)의 울산지부인 울산연합의 간부 정모씨[2] 에게 접근, "김영환 소개받고 왔다. 북에서 왔으니 통일사업을 위해 함께 하자"[3]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정 씨가 "아무래도 북한에서 온 게 아니라 안기부에서 나를 검거하려고 함정을 파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여 이 남파간첩을 안기부에 신고하게 된다(...).[4][5] 그야말로 소 뒷걸음치다 쥐잡는 격으로 간첩을 하나 검거하게 된것. 그런데 최정남을 취조하던 중 "90년대 초반 남조선의 대학생들 두 명이 공화국을 찾아와 김일성 주석님을 만나고 갔다"라는 진술을 확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안기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남한에 북한과 연계가 있는 주체사상 지하조직이 있을거라는 추리를 하게 된다. 남한의 NLPDR계 내부에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친북 성향을 보이는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이들이 북한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6][7]

그러던 중 1998년 12월 대한민국 해군이 여수시 앞바다에서 북한의 공작원 6~8명을 태운 반잠수정을 격침시키면서 민혁당에 대한 보다 명확한 사항들이 파악할 수 있었다. 침몰한 반잠수정을 수색해서 북한 공작원들의 시신과 각종 유류품을 발견하였는데, 해당 반잠수정에 탑승한 공작원이 민혁당 인사들과의 접촉사실과 민혁당의 내부조직을 기록한 문서가 나온 것이다.

민혁당 자체는 '주사파의 대부'이자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이 1991년 북한에 밀입북하여 김일성과 만나고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후 공작금 20만불을 받아서 돌아와서 서울대학교 82학번 동기 하영옥 그리고 박XX와 함께 결성한 조직으로 그가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김영환, 하영옥, 박XX 3인이 중앙위원으로 지도부를 형성하고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를 두었다. 1997년 당시에 민혁당원은 전국적으로 약 100명 정도였는데 철저한 점조직, 단선조직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원 상호간에도 서로 몰랐다고 한다. 중앙위원 3인은 각기 전북(김영환), 수도권(하영옥), 영남(박XX)으로 나누어서 하부조직을 관리하였는데, 이석기가 경기남부위원장으로 하영옥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김영환은 90년대 이후 북한의 경직된 사회상 목격,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보며 1995년경부터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으며[8]1997년 중앙위원 투표를 거쳐서 민혁당을 해체하였다. 투표 결과는 해체찬성2 (김영환,박XX) vs 해체반대1 하영옥이었다. 이후 하영옥을 중심으로 해체반대파들이 전국을 돌면서 조직을 재건한 것이다.

당시 수뇌부인 김영환은 1999년 수사 당시 구속됐다가 준법서약서를 쓰고 공소보류로 풀려났다. 이후 데일리NK와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북한민주화운동에 나서고 있다. 사실 김영환은 그 전해인 1998년 진보언론 월간 말 5월호에 <북한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사기극>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주체사상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였으며 이후 뉴라이트의 토대가 되는 시대정신을 창간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박XX는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전향서를 제출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하였기 때문에 역시 풀려났고 지금도 신원은 비공개로 되어 있다.

함께 기소된 하영옥은 징역 8년형을 받았으며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였다. 출소후 대외활동 없이 학원강사를 하면서 살고 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 이후 보수언론들이 자신을 경기동부연합배후라고 지목하자 이제 자신은 평범한 생활인이자, 통진당 평당원일뿐이라며 반박하였다.

경기남부위원장 이석기는 사건 이후 3년을 도주하다가 2002년 5월 체포, 1심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2년이 선고되었으며 2003년 3월 2심에서 감형되어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이석기는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6일만에 이를 취하하여 형을 확정되었다. 2003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특별사면을 단행할때 민혁당 관련자 전원이 포함되었으나 이석기는 형이 확정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면대상에서 제외되었다.#이석기는 4개월 뒤 2003년 8월 광복절 특사 때 가석방되었다.[9] 하영옥, 이석기 등 민혁당 관련자들은 2년 뒤 2005년 광복절 특사 때 특별복권되어 공무담임권 및 피선거권 제한이 풀리면서 공직에 출마할 자격을 되찾았다.

1991년 김영환과 함께 밀입북했던 연락책 조유식은 수사에 적극 협조하였기 때문에 검찰에서 공소보류 처분되었다. 조유식은 이후 인터넷서점 알라딘을 창업해서 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이석기의 민혁당 판결에 대한 현재 태도는 사실상 판결 부정에 가깝다. 그는 “민혁당 사건 수사 때부터 재판 때까지 단 한 번도 혐의 사실을 인정한 적 없다”(<한겨레> 2012년 5월9일치 참조)거나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북한과의 아무런 연계가 없다”(5월17일 YTN 라디오)고 밝혔다. 이 의원은 재판 당시 “김영환의 진술 중 피고인(이석기)의 행위에 대한 진술은 전문진술(전해들은 말)이고 하영옥이 김영환에게 피고인의 행위에 대해 전달한 사실을 (훗날 재판에서) 인정하지 않은 이상 위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공안사건 관련자 가운데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수사기관이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고문수사·증거조작 등을 통해 사실을 부풀리는 일도 많았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주장이다.

현재 통합진보당 상당수가 이 민혁당 사건 관련자로 알려져 있다. 이석기 외에도 서울연합 출신으로 항상 경기동부와 함께하던 이상규는 민혁당 수도남부지역사업부를 맡고 있었으며 울산연합의 리더 김창현은 1999년 울산 동구청장 당선 23일만에 반국가단체인 민혁당 산하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던 박경순은 통진당내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을 맡았다.

하영옥씨와 이석기 의원은 모두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의 남편인 심재환(54) 변호사가 변호했다. <한겨레21>이 “이석기 의원이 법정에서 주체사상이나 민혁당과 관련된 내용을 진술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심 변호사는 “(나도) 물어봤는데 당시 이석기씨는 일관되게 그런 조직(경기남부위원회)은 없었다고 답했다”고 답했다. 심 변호사는 자신도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모른다며 법원 판결에 대해 “신뢰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동안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이 사건은 이후 통합진보당 설립 이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으로 인해 해당 구성원들이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사실상 이 사건은, 진짜 주사파의 실체가 드러난 사건이며, 이미 한총련 사태등으로 인해 운동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결정타를 날렸고 이들이 각자 살길을 찾으면서 좌우로 갈라져 좌측은 통진당 NL계, 우측 전향자들은 뉴라이트가 되는 분열의 시작이기도 한 것.

간혹 인혁당 사건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10], 인혁당 사건은 그야말로 무고한 시민이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지만 이 민혁당 사건은 남한 주민들이 북한 고위 간부와 접촉한 명백하게 실체가 있는 사건이다. 두 사건의 연결 고리는 그냥 이름이 비슷한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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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간첩 리철진(1999년작)이다. 이 영화에서 옥수수가 돼지로 바뀌었을 뿐 리철진이 남한으로 잠입한 이유는 실제 사건과 거의 같으며,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이들 간첩은 생각보다 좀 얼뜬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2] 북한은 오랜기간 남한 내 지하 조직망 구축을 위해 운동권 및 정치인들의 명단을 확보, 포섭대상을 분석 후 접근하곤 하였다. 후술되는 주사파 대부 김영환도 이런 과정 속에서 북에 포섭된 인물이다. 참고로 정 씨는 총학생회장 출신인 인물로,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3] 이 멘트는 북한 당국의 지시였을뿐, 실제 김영환이 소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 김영환은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감으로 거의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4] 여기에는 주사파 특유의 순진함(...)이 한몫했다고 한다.
[5] 15대 대선 불과 두달전 이었던 시기도 주목해야 한다. 당시 김영삼정부는 레임덕과 경제위기로 이미 식물정권인 상태였고, 집권당 이회창 후보는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으로 만신창이였던데다, 이인제는 독자출마를 선언한 상태였다. 때문에 재야와 운동권사이에서 궁지에몰린 정권이 대형간첩단 사건을 터트려서 북풍으로 반전을 노릴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했다. 실제 매번 선거를 앞두고 그래왔으니까. 마침 그런때에 난데없이 북에서 왔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당연히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의심한 것이다.
[6] 남한의 주사파는 1980년대 초중반 자생적으로 형성되었고, 1990년대 후반까지는 범NL계도 주체사상의 수용에 있어서도 다양한 온도차이가 있었다. 주체사상을 말 그대로 교조적으로 수용하고 북의 지도를 수용하는 그룹(자주단결)이 있는가 하면, 주체사상은 믿지만 북과의 연계는 거부하는 그룹(사람사랑), 수령론을 빼고 주체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변형한 그룹(새벽), 아예 주체사상 자체를 거부하는 비주사NL 등 다양한 분파가 모여있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7] 하지만 이미 1992년에 북의 거물 공작원 리선실이 재야와 학생운동권 간부들을 포섭해서 반체제 지하당을 조직했다는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 있었다. 다만 이 사건의 경우 조작 혹은 과대포장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8] 1995년 진보월간지 과의 인터뷰에서 주체사상에 대해서 일부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9] 국회의 동의도 거쳐야 하는 일반사면과 달리 특별사면은 국회 동의 절차 없이 대통령의 직권으로 단행할 수 있다. 현행 헌법과 사면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고유권한으로 특정인들에 대한 형 집행을 면제해주거나 유죄 선고효력을 정지시키는 등의 특별사면을 실시할 수 있으며, 청와대 민정수석(당시 민정수석은 문재인)이 특별사면 대상자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정하면 사면심사위원회 심사, 법무부 장관 상신, 대통령 결정 등의 절차를 거친다.[10] 박근혜 전 대통령도 후보 시절 연설 도중 혼동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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