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1
일제 끄나풀 김성수의 미군정 장악&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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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끄나풀 김성수의 미군정 장악&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
엄택곡부
2004. 6. 16. 20:25
한 고대 교수가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을 잠시 보자.
작성자 : 고려대교수 (koreauni@yahoo.co.kr)
-대한민국 제1호 범죄자 김병관의 비밀
동아일보는 어떤 신문사인가? 젊은 학도여 일본 천황을 위하여 피를 뿌리라고 휘갈기고 외친 김성수의 터밭이었다. 김성수는 누구인가? 왜놈에게 충성한 대가로 이용익 선생이 1만명의 헌금을 모아 세운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 을 빼앗은 사람이다. 이렇게 하여 악성 친일파 김성수는 언론의 제왕, 교육의 제왕으로 우뚝 서서 해방을 맞이한다. 그리고는 부통령에 당선되어 언론, 교육, 정치를 망라하는 제왕이 된다.
김성수가 사망하자 세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첫째로,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키는 작업을 벌인다. 동아일보는 인촌상을 제정하여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키고 강만길 교수가 김성수를 애국자로 변조하는 집필을 맞는다. 동아일보는 인촌 탄신일을 국경일처럼 미화하며 호들갑을 떨고 사회 저명인사들을 내세워 인촌상 시상식을 벌인다.
둘째로, 고려대에 거대한 인촌 묘소를 꾸미고 인촌 동상을 세운다. 영특한 고대생들은 교주가 친일파라는 것을 갈파하고 오줌, 똥을 인촌 묘소에 누고 또 누어 그 아들 김상만은 극비리에 묘소를 경기도 모처로 이장한다. 고대생들은 물러나지 않고 김성수 동상에 수의를 입히고 새끼를 한달간 꼬아 동상 목에 걸어 잡아당긴다(1989년 4월 사건). 그러나 철심이 얼마나 깊이 박혔던지 끄떡도 안하여 쓰러트리지 못한다.
불의에 굴치 않는 고대생 덕택으로 고대의 명성이 하늘로 치솟자 아들 김상만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고려대를 철두철미한 이윤 추구의 목적으로 이용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20여년간 부정입학생을 뽑아 천문학적인 부를 취할 때 꼬리가 잡히게 된다.
1989년 5월. 고대생 1,000 여명이 본관을 점거하여 교무처와 총무과 캐비넷과 총장실 금고를 열고 기절초풍할 문건을 발견하게 된다. 어마어마한 부정입학 증거 자료였다. 심지어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입학시험 점수를 조작한 데이터, 탄로날까 두려워 교수와 교직원 자녀들까지 점수를 고쳐주어 부정입학 시킨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고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당시 총장 이준범과 교무처장 안창일 교수는 구속이 임박하자 노 태우 대통령에게 특사를 보내어 거액을 건네어 가까스로 형무소행을 면한다. 사건이 이렇게 발전하자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1960년대 말부터 1989년까지 보관해 오던 입학시험 답안지를 몽땅 제지공장에 보내어 폐기 처분한다. 그 때 고려대에 특별 감사를 나온 문교부 감사반의 말: 시험답안지를 폐기처분 하다니, 이런 대학이 어디 있어요?
그 때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다. 부정입학을 반대하고 범죄자 처벌을 홀홀 단신으로 요구하던 신문방송과 윤용 교수를 전격 해임한다. 정의의 씨앗을 싹뚝 잘라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12년간, 고려대는 두 다리 쭉 뻗고 부정입학을 저지를 수 있었다. 훼방꾼을 제거한 부정입학 꾼들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재하게 된다.
윤 용 교수보다 2개월 먼저 고려대를 사직한 도울 김 용옥 교수는 그의 노자 사상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이 준범 총장은 부정입학의 총 지휘자요 부정입학의 괴수다. 그가 벌은 부정입학금은 500억 원이 넘는다.
이 준범이 검찰에 입건되자 당시 고려대 교우회장 김일두 변호사는 고려대 60만 교우를 총 동원하여 검찰에 이준범 총장을 관대하게 처리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여 1백만 원 약식 기소로 풀려난다. 이 준범과 안 창일은 입학생의 5% 혹은 그 이상을 대상으로 두 당 5억 원 - 10억 원을 받고 뒷문 입학을 시켜 상당액을 재단이사장 김 상만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요리해 먹었다.
이준범의 부친은 김 성수 부친의 마룸(소작농 관리인) 이었다. 고창에서. 김 상만은 부정입학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하여 할아버지가 종처럼 데리고 있던 자의 자식을 총장에 앉혔던 것이다. 김 상만이 사망하자 동아일보의 족벌 체제는 어김없이 이어진다. 그 아들 김 병관에게 승계되어 바른 손에 고려대학교, 왼손에 동아일보를 거머쥔 것이다.
희대의 난봉꾼이며 알콜 중독자이인 김병관. 이 사람이 조중동(조선, 중앙, 동아) 삼총사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김 병관은 자기 애비를 뺨치게 고려대 부정입학을 저질렀다. 장관, 재벌, 청와대, 검사, 공기업 회장, 군장성...자녀들을 뒤로 뒤로 부정입학을 시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다.
고위층 자녀를 무료로 부정입학 시켜주기도 하여 보호막을 쌓았다. 김 병관은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기자의 판공비, 출장비, 상여금까지 떼어먹으며 돈, 돈, 돈 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덜미가 잡힌 것이다. 동아일보 김 병관의 범죄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고려대의 미래를 위하여, 동아일보의 어용화 방지를 위하여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고려대 서창캠퍼스 교수는 엄숙히 김 병관 범죄자의 구속을 요구하는 바이다. -
고려대 김병관재단이사장은 작은이익앞에 비정한 냉혈한인가?!! Click here!
삼성, 조중동 등 얼키고 설킨 한국내 친일파 혼맥-수구,보수로 고착화된 이들 혼맥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질기게 재계, 정계로 얼켜 정경유착의 부패구조가 더욱 심화되었다Click here!
아무튼 미국은 이러한 일제의 조작된 정보를 기초로 해 한국을 통치할 대국적인 정책을 수립했는데, 일제의 기획에 의해 처음부터 빗나간 이러한 정책은 바로 9월 8일 입국한 하지 중장의 미군정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서 전해주는 일방적인 공작정보에만 의존하게 만들었으며, 뿐만 아니라 각종 친일파 구더기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해방정국을 추스려 나가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일본의 공작정치에 놀아난 하지 미군정 초기의 대(對) 한국 정책은 당연히 그들의 입맛에만 초점을 맞춘 인분같은 것이었고 그런 면에서 정통 민족주의 진영인 김구의 한독당과 불화해 정치기반이 없이 떠돌던 이 승만을 비롯해 민족주의라는 허울좋은 가면을 쓴 친일파 일색의 장 택상, 김 성수, 송 진우 등 한민당 구더기들이 몰려든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이런 자들이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애국지사로 변신해 누워있는 왜곡된 역사 상황에서 사회질서가 어지럽지 않으면 오히려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9월 8일 미군의 남한 상륙이 있기 이틀 전인 6일, 미군의 선견군사(先遣軍使) 해리스 준장 이하 31명이 서울 들어와 7일 원등 정무총감과 가진 회담에서 해리스는 한국을 총독의 총괄 하에 두고 간접 통치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일제의 공작에 놀아난 하지 사령관 역시 총독정치의 연장을 고려했다가 한국인의 민심비등과 태평양 미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미군정 친정 계획으로 군정실시로 방향을 정했을 정도였다.
당시 몽양 여 운형은 항일운동 단체 '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가지고 해방을 맞이해 조선 총독부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 총독으로부터 치안유지권을 인수받아 치안유지대도 만들고 '건국준비 위원회(건준)'를 만들어 국내 정치세력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때 3.1 운동 이후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몽양은 척식국 장관 고가(古賀廉造)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서 자치론자가 되어 달라는 부탁에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한일합방은 강제적인 것으로 정치적, 경제적 불공평으로 우리 민족의 앙화요 수치인 바, 동양의 환란과 열강의 시기가 여기에서 생겨난 즉, 독립운동자가 되겠노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일찍이 신 용하 교수가 '신한청년당은 3.1운동의 진원이며 뿌리'라 함과 같이 독립운동사 내지 정치사적으로 보면 3.1운동의 뿌리는 단연 여 운형이었다. 물론 신교 정신 사혼의 추적으로 본 문화사적인 입장은 필자의 저서 <통곡하는 민족혼> 89년 대원 刊 365쪽에 이미 상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신한 청년당은 여 운형, 장 덕수, 김 철, 선우 혁, 한 진교, 조 동호 등 6 인이 1919년 8 월에 창립하여 1922년 12 월에 해산된 50 정도의 당원을 지닌 미니 정당이었다. 신 교수에 의하면 신한 청년당은 김 규식을 민족대표로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하고, 여 운형을 만주와 노령, 연해주에 파견한다.
여 운형은 그 곳의 독립운동가들과 동포들에게 신한청년단이 파리 평화회의에 김 규식을 대표로 파견했음을 알리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다. 또한 국내에는 당원 장 덕수, 선우 혁, 김 철, 서 병호, 김 순애, 백 남규 등을 파견하여 3.1 독립 운동의 봉기를 역설하였다. 장 덕수는 국내 1차 파견에서 3 천원을 모금하고, 2차 파견에서는 이 상재, 손 병희 등을 비롯한 다수의 지도자들을 만나 3.1 운동 봉기를 촉구한다.
선우 혁은 1919년 2 월 경 평안북도에 도착하여 양 전백과 이 승훈을 만난다. 그들에게 3.1 운동을 일으킬 것과 민족대표가 파리에서 사용할 운동비 모금을 부탁하여 적극적인 찬동과 약속을 받아낸다. 이어 강규찬, 안 세환, 변 린서 이 덕환 등을 만나고 평양, 서울을 거쳐 상해로 돌아간다.
평양에서는 숭실 전문학교, 숭의 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윤 원삼, 안 세환 등 여러 사람이 주동이 되어 고종 국장일에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시위운동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신한 청년당은 김 철을 국내에 파견한다. 김철은 서울에서 여러 동지들을 만나고 특히 천도교 측을 만나 독립운동 자금 3 만원을 갹출하여 송금할 것을 약속받고 상해로 돌아간다. 한편, 서 병호, 김 순애(김규식 부인), 백 남규 등은 서울, 대구, 광주 등지에서 모금과 3.1 독립 시위를 촉구하고 상해로 돌아간다. 신한 청년당은 일본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재일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을 종용한다.
1 차로 조 소앙, 2차로 장 덕수, 3차로 이 광수를 파견하여 재일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을 준비하도록 한다. 장 덕수는 유학생들로부터 8백원을 모금하여 상해 조 동호에게 보낸다. 재일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은 국내 3.1 운동의 전주곡이 된다.(<몽양 여운형> 이기형 著 실천문학사 刊)
몽양은 미군정이 들어서기 전 정치적 기득권을 얻으려는 목적과 장차 입국할 임정의 우익에 대결할 보다 영향력 있는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박 헌영의 공산당과 제휴해 하지 미군정이 입국하기 이틀 전 9월 6일, '조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하지 군정이 들어온 지 한달 뒤 아놀드 미 군정장관은 몽양의 '조선 인민공화국'은 물론 군정 외에는 일체의 정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했다.
한편 일본의 합방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면서 일본이 눈감아주는 한계 내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조선민족을 자치하면서 자활하자던 친일 점진주의 모리배들인 김 성수, 김 준연, 장 택상, 서 상일, 설 의식, 김 동원 등은 9월 16일 한민당을 만들었다.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민규식, 이완용을 외숙으로 둔 한상룡 등 조선 최대 친일매판 재벌로부터 자금을 공급받고 있었던 한민당은 당시 빗발치듯 공격당하는 친일집단이라는 비난을 막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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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룡)) 일제하 최대규모의 은행인 한성은행은 일본 제일은행이 출자해서 만든 은행으로 은행장은 나라를 넘기고 작위를 받은 이 완용의 형, 이 윤용이었고 전무인 한 상룡은 그 조카였다. 그는 전무로 있으면서 한일합방 유공자인 이 완용이 나라를 넘긴 대가로 받은 하사금인 주식 "은사공채(恩謝公債)"를 한성은행의 자본금으로 흡수하여 국내 최대규모의 은행으로 만든 금융계의 황제로 이 주식을 양도하는 대신 일제로부터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았으며 이 자금의 일부를 김성수 장택상 등 친일파 인사들이 만든 한민당에 정치자금으로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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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환국 환영회'를 열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정통 민족주의자들의 후광을 업고 순진한 백성을 호도, 기만하려 했으며 해외임정 추대라는 그럴듯한 구실로 미군정에 접근해 미군정 입국 한달도 채 안되어 미군정의 한국인 고문단을 선점, 독식해 버렸다.
이때 군정장관 고문에 김 성수(고문단 단장), 송 진우, 김동원 등 11명의 고문단이 모두 일제하에서 단물을 빨며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제 살 길을 찿던 한민당 계열 사람이었는데 처음엔 여 운형도 끼어 있었으나 한민당의 둘러리인 것을 눈치채고 빠져나가 결국 한민당이 자리를 싹쓸이했다.
미군정이 입국한지 한 달도 안되어 한민당 친일파들이 미군정의 고문단으로 손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그들이 조선총독부가 이미 미군정 입국전 오끼나와 미 24군에게 정치공작을 하면서 천거한 친일파 끄나풀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들 친일 매국배들을 단지 정치사적인 측면으로만 보아 한국의 토착 민족주의로 분류한 일부 학자의 견해는 실로 국적이 의심스러우며, 나아가 넋빠진 식민사관의 노예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본래 학술적으로는 자치론과 점진주의를 구분하고 있지만 이 둘은 근본에 있어서는 무장 항쟁에 의한 독립론에 대치되는 같은 친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여 운형과 같은 독립론자들을 자치론자로 회유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 것이다.
이를 춘추사관에 의해 엄격히 구분하고자 한 대표적인 이가 바로 단재 신 채호 선생인데 그는 이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어 말했다. '미국의 <대한인 국민회>에서 이 승만, 정한경, 민 찬호 세 사람을 선정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코자 하였으나 미 국무성에서는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그들의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이 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그들은 3.1 운동 직전에 독립대신 위임통치 및 자치문제를 주장한 바 있었다.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상해 프랑스 조계의 한 허름한 집.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독립투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신 석우가 이 승만이 수반 적임자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순간 사학자 단재 신 채호가 천부당 만부당이라고소리 치며 열기를 뿜었다. "이 승만은 이 완용 보다 더 큰 역적 놈이다. 이 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 승만은 아직 나라를 찿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이에 응답했다. "사실 여부를 잘 알아보기도 전에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지 않은가?"
신 채호는 다시 큰 소리로 노호(怒號)했다. "너희같은 더러운 자들과는 자리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여러 사람이 말렸으나 단재는 기어이 나가고 말았다. 혁명의 선비 단재다운 기개였다.'(<몽양 여운형> 이 기형 著 실천문학사 刊)
출처:http://www.cheramia.net/board/view.php?id=bbs4&page=2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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