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02

정영환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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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에 대하여 역사

2014. 7. 1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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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본군 '위안부' 9명이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고 한다. 과거에 내가 지적했었던 일본군과 '위안부'의 '동지적인 관계'라는 기술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 단편적인 정보밖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송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다만 나 자신이 이 책의 내용에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전 기사에서는 부분적인 언급에 그친 『제국의 위안부』의 문제점에 대해서 약간의 코멘트를 하고자 한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그것은 분석이 세부적이거나, 복잡하게 뒤얽힌 논리 전개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검토 대상이 애매한데다가, 이용되는 개념이 이해 가능한 형식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국민동원'이라는 말의 특수한 사용). 이 책에서 박유하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가 놓인 상황은 다양했다고 여러 번 되풀이하는 한편, 자신은 개별적인 증언이나 들은 얘기, 문학작품의 묘사를 패치워크처럼 이어 맞추고 추측도 섞어 가면서 "그녀들은…"이라고 일반화시키고 있어 그 놀랄 만한 내용은 물론이고, 방법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을 '동지'라고 기술한 부분은 이러한 문제점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 부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기본적인 시각은 조선인, 대만인 '위안부'는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점령지의 '위안부'와는 다르다는 데에 있다. 박유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직업군인이었던 어떤 이는 중국인 등보다 조선인 위안부들을 더 많이 모집한 것은 그녀들이 자신이 알게 된 “적에게 통보하거나 군사정보를 흘리는 일이 없었"(121쪽, 센다 가코 『종군위안부: '소리없는 만가' 8만 명의 고발』--인용자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선인 위안부’는 그렇게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점령지/전투지의 여성들과 구별되는 존재였다. 말하자면 일본군과의 기본적인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달랐다. 식민지가 된 조선과 대만의 위안부들은 어디까지나 ‘준일본인’으로서 제국의 일원이었고(물론 실제로는 결코 ‘일본인’일 수 없는 차별이 있었다), 군인들의 전쟁 수행을 돕는 관계였다. 그것이 ‘조선인 위안부’의 기본 역할이었다.(『제국의 위안부』, 60쪽. 강조는 인용자, 이하 같음.)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일본군과의 기본적인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검토할 대상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전체가 아니고, 대일본제국의 '신민'이었던 일본인・조선인・대만인 '위안부'——즉 '제국의 위안부'로 한정했던 것이다. 물론, 조선과 중국의 '위안부'로서의 본연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주장 자체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벌써 수많은 연구가 일본군이 점령한 각 지역의 '위안부' 징집이나 성폭력에 나타나는 특징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특징은 그러한 차이를 파악하는 방법에 있다.


  위 인용문에도 있는 것처럼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군과의 기본적인 관계'에 있어서 다른 일본군 '위안부'들과 달랐다고 주장한다. 이 주제는 「제2장 위안소에서--풍화되는 기억들」의 「1.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지옥 속의 평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 절에서는 센다 가코 『종군위안부: '소리없는 만가' 8만 명의 고발』,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 『춘부전』,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 『개미의 자유』, 그리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지은 증언집을 이용해 논의가 전개된다. 여기서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다른 '위안부'와는 어떤 다른 특징이 있었다고 논해지고 있는지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을 통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1)'제국의 위안부'들은 가혹한 생활을 살아 남기 위해 국가가 요구한 육체적・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을 수용했다.

 센다의 책에 등장하는 어느 일본군 병사의 일본인 위안부에 관한 증언-- "멋지게 죽으세요!"라고 말했다고 하는 회고—를 소개하면서, 박유하는 일본국은 '제국의 위안부'에게 일본 군인의 신체적 '위안'과 더불어 정신적 '위안'도 요구했는데, 이러한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자기 존재에 대한(다소 무리한) 긍지가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61쪽)라며 다음과 같이 논한다.

물론 ‘조선인 일본군’이 그랬듯이, ‘애국’의 대상이 조선이 아닌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을 일본인위안부와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딜레마를 잊고 눈앞에 주어진 ‘거짓 애국’과 ‘위안’에 몰두하는 것은 그녀들에겐 하나의 선택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일본군과의 연애나 결혼이 가능했던 것은 그런 딜레마를 안을 것을 포기한 이들의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혹은 어리면 어릴수록 일본인 의식이 강했을 터이니 딜레마로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이 훨씬 더 많았을 수도 있다.(62쪽)

 또 같은 센다의 책에 등장하는 어떤 업자의 증언--일본인 위안부 안에는 빚을 갚아도 일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그것은 이런 몸이라도 군인을 위해, 국가를 위해 바칠 수 있는 것을 그녀들이 기뻐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기록--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물론 이것은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다. 그러나 조선인 위안부도 역시 ‘일본제국의 위안부’였던 이상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패전 전후에 위안부들이 부상병을 간호하기도 하고 빨래와 바느질을 하기도 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62쪽)

 즉, 일본인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위안부'였던 조선인 ’위안부’도 병사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는 역할을 맡아, 거기에서 괴로운 생활을 견뎌낼 ‘긍지’를 찾아냈다고 한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2)'제국의 위안부'들 중에는 일본군인과 '사랑'과 '동지의식'으로 연결되었던 이도 있었다

이것은 이전에도 논한 적이 있는데, 어떤 전 ’위안부’가 한 일본병사를 잊지 못한다고 말한 증언을 소개하면서 박유하는 왜 그러한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물론 이런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기억일 수밖에 없다. 설사 보살핌을 받고 사랑하고 마음을 허한 존재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부들에게 위안소란 벗어 나고 싶은 곳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녀들에게는 소중했을 기억의 흔적들을 그녀들 자신이 ‘다 내삐렀’다는 점이다. “그거 놔두면 문제될까봐”라는 말은, 그런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 그녀들 자신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 이후 내내 그렇게 ‘기억’을 소거시키며 살아 왔다.(67쪽)

계속해서 박유하는 후루야마 고마오의 소설 『개미의 자유』에 나타난 '위안부'의 묘사를 소개하면서 똑같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기에는 속아서 왔다면서도 ‘군인들이 총알을 맞는 것’과 ‘위안부가 된 것’을 그저 운이 나빴다는 식으로 간주하고 군인을 원망하지 않는 위안부가 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미 식민지가 된 지 오래된 땅에서 자라나 자신을 ‘일본’의 일원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성은 어디까지나 동족으로서의 ‘군인’일 뿐 적국으로서의 ‘일본군’은 아니다. 그녀가 일본군을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불행한 ‘운’을 가진 ‘피해자’로 보면서 공감과 연민을 표할 수 있는 것도 그녀에게 그런 동지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75쪽)

설명은 필요없을 수도 있지만, 일독하면 분명한 것처럼, 이와 같이 두 가지 '일본군과의 기본적인 관계'를 논할 때의 박유하의 수법에는 분명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

 먼저, (1)에서 박유하가 인용한 증언은 모두 일본군 병사나 일본인 업자가 말한 일본인 ’위안부’에 관한 증언이며, 조선인 ’위안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병사나 업자라는 ‘이용’ ‘관리자’의 시각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사실에 입각한 사료 검증을 하지 않고, 이것들을 일본인 ’위안부’의 실태, 게다가 ‘의식’을 나타내는 증언으로 이용하는 것은 문제이다. 이 일본인 ’위안부’의 발언 자체를 일반화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또 그것을 그대로 '제국의 위안부'였기 때문에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해서 조선인 ’위안부’에게 적용함에 이르러서는 완전한 비약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에 관한 박의 서술은, 이와 같이 이중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2)도 마찬가지이다. 일본군과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다, '동지의식이 있었다'고 하는 표현은 증언이나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박유하의 말이며 해석이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어떤 개인이 일본군인의 추억을 말하는 것과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이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해석 사이에는 너무나 먼 거리가 있다. 증언의 고유성이 너무나 경시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단부에 이르러서는 (1)에서 말한 센다가 모은 증언의 경우와 똑같이, 후루야마의 시각에서 그려진 소설의 묘사를, 마치 '그녀'의 의식을 나타내는 재료인 것처럼 이용하고 있다. 후루야마의 소설을 통해서 조선인 ’위안부’로서의 '그녀'의 의식, 그것도 일본군과의 '동지 의식'이라는 것의 존재를 논한다는 방법 자체가 이미 파탄난 것이다.

 박유하는 "사랑과 평화와 동지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소’가 지옥 같은 체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명예와 칭송이 따른다 해도 전쟁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76 페이지)라고 단서를 붙이고 있지만,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동지였다'고 하는 지극히 중대한 일본군 '위안부'의 자기 인식에 관한 추측을 제시한 것이야말로 최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박유하는 이 절에서의 검토를 근거로, 한국사회나 지원자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동안 위안부들은 그저 자신들이 겪은 일을 담담히 말해왔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가려서 들어 온 셈이다. 그건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는 이들이건 지원하는 이들이건 다를 바 없었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의 이미지는 증언의 한쪽 면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체험을 왜곡하는 데에 가담해 온 셈이다. 그곳에서 위안부는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위안부가 아니다. 그들의 기억은 듣는 이가 원하는 ‘새로운 기억’일 뿐이다.(80쪽)

그녀들은 그런 기억을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는다. 물건뿐 아니라 기억까지도 한 번 발화된 이후로는 우리 사회에서는 ‘내삐러’져 왔다. 말하자면 그녀들이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버리는 것은 그녀들 자신이 선택한 일은 아니다. ‘문제’삼을 것으로 여겨진 ‘사회’의 억압이다. 그건 그녀의 기억들이 ‘피해자로서의 조선’에 균열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는 무의식적 양해사항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안소의 고통을 잊게 해 주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기억들을 무화시키고 망각시키는 것은 그녀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니었을까.(68쪽)

그러나 지금까지 검토한 바에 따르면, 오히려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박유하 자신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다른 기억'을 강조하고 싶다면, 증언과 증언자의 고유성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안이하게 '그녀들은…' '조선인 위안부는…'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증언과 자료를 짜깁기하고 그 짜깁기한 자료군에서조차 이끌어 낼 수가 없는 근거없는 해석--그것도 전 '위안부'들이 일본군에게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중대한 해석--을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폭력'이 아닌가.






(정영환)






메이지가쿠인 대학 부교수 정영환



[원문] 朴裕河『帝国の慰安婦』の「方法」について(鄭栄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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