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1

원불교에 바란다 오강남의 원불교 이야기 : 네이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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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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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표층과 심층: 21세기 원불교에 바란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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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껏 비교종교학 전공자로서 세계 종교들을 붙들고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세계 거의 모든 종교에는 표층(表層)이 있고 심층(深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도, 불교에도, 힌두교에도, 이슬람에도, 유교에도 모두 표층과 심층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나 일반적으로 표층이 심층보다 상대적으로 더 두꺼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종교 전통에 따라 어느 종교는 표층이 심층보다 더 두껍고, 어느 종교는 표층이 심층보다 압도적으로 더 두꺼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교는 표층과 심층을 같이 가지고 있다고 보아 틀릴 것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껏 관찰한 결과를 두고 볼 때, 우리나라에서 생긴 종교들 중 원불교는 천도교와 함께 심층이 가장 두꺼운 종교에 속한다고 확신합니다. 1916년 4월 28일 원불교 교조 원각 성조 소태산 대종사께서 얻으신 큰 깨달음,“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라는 진리나 그 궁극 진리를 법신불 일원상으로 밝혀주신 기본 가르침은 거의 모든 종교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요소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불교와 천도교처럼 심층을 강조하는 종교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종교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뿐 아니라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들이 비록 표층으로 시작하더라도 결국에는 심층으로 심화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종교에서 무엇이 표층이고 무엇이 심층입니까? 표층과 심층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산타 이야기를 예로 들어 봅니다. 네 살이나 다섯 살 된 아이들은 착한 일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벽난로 옆에 걸어놓은 양말에 선물을 많이 주고 간다는 것을 그대로 믿습니다. 아이가 자라 엄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아, 엄마가 산타였구나. 산타 이야기는 식구들과 선물을 나눈다는 뜻이구나.”라고 깨닫고 지금까지 받기만 하던 것에서 자기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주게도 됩니다. 좀 더 크면 가족뿐 아니라 온 동네, 좀 더 자라면 사회와 국가, 세계에서 불우한 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산타 이야기의 정신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될 경우, 무조건 사랑을 나누는 것 뿐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공평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참여하게 되기도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주 성숙하게 될 경우,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하늘을 영접하는 천지합일(天地合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뜻이 있구나, 내가 곧 하늘이고, 내 이웃도 하늘이고, 그러니 내 이웃을 하늘 섬기듯 섬겨야 하겠구나 하는 진리를 터득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기도 합니다. 표층에서 시작하여 점점 깊이 심층으로 들어간 경우입니다.


그러면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차이를 수십 가지로 열거할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가장 뚜렷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 몇 가지만 손꼽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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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무엇보다 큰 차이점은 표층 종교가 변화되지 않은 지금의 나,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용어를 빌리면 ‘제나’ ‘몸나’를 잘되게 하려고 애쓰는 것에 반하여, 심층 종교는 지금의 내가 궁극적 실재가 아님을 자각하고 나를 죽여 새로운 나, 참나, 큰나,‘얼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 헌금이나 시주를 바치는 것, 열심히 기도하는 것 등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내가 복을 많이 받아 이 땅에서도 병 들지도 않고 돈도 많이 벌어 남보란 듯 살고, 죽어서도 지금의 내가 그대로 어디에 가서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을 염두에 둡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심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일이 내 욕심을 줄여가고,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나아가 남을 생각하기 위한 정신적 연습이나 훈련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둘째, 표층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심층 종교는 ‘깨달음’을 중요시합니다.표층 종교에서는 자기 종교에서 주어진 교리나 율법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따르면 거기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층 종교에서는 지금의 나를 얽매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지금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깨달음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깁니다. 모든 종교적인 의례나 활동도 궁극적으로는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깨달음을 좀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의식의 변화’, 혹은 ‘주객초월적 의식의 획득’이나 ‘특수인식능력의 활성화’라 할 수 있습니다. 심층 종교에서는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진정한 해방과 자유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셋째, 표층 종교는 ‘신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식으로 신과 나 사이에 ‘영원한 심연’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과 인간이 관계를 맺으려면 신이 그 심연을 뛰어 넘어 인간에게로 오거나 인간이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거나 이 심연을 연결시켜줄 중재자가 있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일방적으로 신의 초월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종교는 신이 내 밖에도 계시지만 내 안에도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초월과 동시에 내재를 주장하는데, 이를 좀 어려운 말로 해서 ‘범재신론(panentheism)’의 입장이라 합니다.

넷째, 셋째 차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입니다만, 표층 종교에서는 신이 ‘저 위에’ 계시기 때문에 자연히 신을 내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심층 종교에서는 신이 내 속에 있고, 이렇게 내 속에 있는 신이 나의 진정한 나, 참 나를 이루고 있기에 신을 찾는 것과 참 나를 찾는 것이 결국은 같은 것이라 봅니다. 이런 생각을 연장하면 신과 나와 내 이웃, 우주가 모두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연히 하늘을 모시고 있는 나, 궁극적으로 하늘과 내가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됨으로 내 스스로 늠름하고 의연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나아가 내 이웃도 역시 하늘이기에 자연히 이웃도 하늘 모시듯 하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과 인간과 모든 만물이 하나이므로 모든 만물을 존경하게 됩니다.


다섯째, 의식의 변화를 통해, 깨침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신을 발견하는 일, 참 나를 찾는 일--이런 경험은 너무나 엄청나고 놀라워서 도저히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표현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상징적(symbolical)’, ‘은유적(metaphorical)’, ‘유추적(analogical)’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말은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보통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에 이런 엄청난 경험은 보통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층 종교의 사람들은 종교 전통에서 내려오는 경전들의 표피적인 뜻에 매달리는 ‘문자주의’를 배격합니다. 표층 종교에서 경전을 ‘문자대로’, ‘기록된 대로’, ‘그대로’읽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때 심층 종교는 문자 너머에 있는 ‘속내’를, 더 깊은 뜻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섯째, 표층 종교는 문자의 표피적 의미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기들의 가르침이 문자적으로 서로 조금만 달라도 이를 용납할 수 없어 서로 독선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지만, 심층 종교는 문자를 절대화하지 않기에 문자적으로 좀 다르다고 해서 이웃 종교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이 없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종교인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표층에서 시작합니다. 시대적으로도 역시 특별한 경우를 예외로 하고 옛날에는 이런 표증 종교인들이 절대다수를 이루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많은 종교인들이 개인적으로도 머리가 커졌고, 시대적으로도 인지가 고도로 발달한 상태라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표층적 종교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40이 되었는데 아직도 산타 할아버지를 위해 굴뚝을 쑤신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병이 나면 병원에 가고 돈이 필요하면 은행에 가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상당원에게 가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종교를 이렇게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요술방망이 쯤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종교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인가요? 오늘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서 떠나는 것은 대부분 표층적인 종교가 종교의 전부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종교에서 심층 차원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이런 심층 차원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시원함입니다. 종교의 이런 ‘심층’ 차원을 종교사에서 보통 쓰는 말로 바꾸면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일쑤입니다. ‘신비주의’라는 말의 모호성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말은 아니지만 신비주의라는 말 대신 ‘영성’이라는 말이라든가,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창안한 ‘영속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는 말을 쓰는 이도 있고 ‘현교적(顯敎的, exoteric)’ 차원과 대조하여 ‘밀의적(密意的, esoteric)’ 차원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아리송함을 덜기 위해 독일어에서는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뜻으로서의 신비주의를 ‘Mystizismus’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영매, 육체이탈, 점성술, 마술, 천리안 등 초자연 현상이나 그리스도교 부흥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광적 흥분, 신유체험 등과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거나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을 ‘Mystizist’라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의 가장 깊은 면, 만유가 하나, 신과 내가 하나라는 등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종교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신비주의는 ‘Mystik’이라 하고 이와 관계되거나 이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을 ‘Mystiker’라 합니다.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로 중세 이후 많이 쓰이던 ‘cognitio Dei experimentalis’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기’입니다. 하느님, 절대자, 궁극실재를 몸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안다’고 하는 것은 이론이나 추론이나 개념이나 논리나 교설이나 문자를 통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권위 있는 말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영적 눈이 열림을 통해, 내 자신의 내면적 깨달음을 통해, 의식의 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종교에서 이런 신비주의적 요소가 없는 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라 할 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신비주의’라는 말이 거슬린다고 생각하면, 일단 그것을, 우리가 여기서 하는 것처럼, ‘심층 종교’라 부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20세기 가톨릭 최대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84)는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주의자(mystic)가 되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독일 신학자로서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오래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 1929-2003)도 최근에 펴낸 󰡔신비와 저항󰡕이라는 책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 대중화를 주장했습니다.여기서 이 두 대가들이 거론하는 ‘신비주의’라는 말은 물론 한국에서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여러 종교 전통들을 관통해서 흐르는 종교의 가장 깊은 ‘심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1세기에는 이런 심층종교가 아니면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통신수단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인지가 향상된 현 사회에서 종교를 기껏 기복이나 성공 지상주의, 배금주의 등의 수단으로 여기고 이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종교는 그 자리를 잃게 되고 말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는 개인적 자존감의 회복, 사회적 정의 구현, 생태계 보전, 남녀평등 및 인권의 신장 등 생명과 평화입니다.

處處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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