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웅을 다시 만났습니다”
세계여성학대회 셋째날
한국계 美작가 켈러씨, 위안부 할머니 황금주씨와 재회
“12년전 黃할머니 증언 한국인 정체성 일깨워”
함께 온 어린 두 딸도 할머니 품에 덥석 안겨
유석재기자
입력 200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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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내 인생의 영웅(hero)을 다시 만났습니다."(켈러)
22일 정오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아름다운 만남이 이뤄졌다.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노라 옥자 켈러(Nora Okja Keller·40)씨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주인공' 황금주(黃琴周·86) 할머니와 12년 만에 눈물과 감격의 재회를 했다.
켈러씨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한국계 여성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97년 발표했던 소설 '종군위안부'(Comfort Woman)로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가 선정한 '1997년 최고의 도서', '1998 아메리칸 북 어워드'를 수상했다. 일본군 위안부였던 황 할머니는 소설 '종군위안부'를 탄생시킨 주인공이었고, 켈러씨가 말한 '영웅'이기도 했다.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에 초청 연사로 참가한 켈러씨는 이날 제662차 정신대 수요집회에 참석했다가 오랜 꿈이었던 황 할머니와의 재회를 이룬 것이다.
"할머니,12년 만이에요"노라 옥자 켈러(왼쪽에서 두 번째)씨가 두 딸 채자·선희와 함께 황금주 할머니를 만나 기뻐하고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할머니는 오히려 더 강인해지신 것 같아요. 하와이에서 처음 뵈었을 때에도 작은 체구와 옹골진 주름에서 힘이 펄펄 난다고 느꼈거든요."(켈러)
이날 집회에 켈러씨는 71세의 어머니와 두 딸과 함께했고, 황 할머니는 젖은 눈으로 채자(11), 선희(6)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두 소녀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거친 볼을 비벼댔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 못생긴 할머니를 만나러 예쁜 아기들이 먼 데까지 와줘서. 뭘 사줄까? 나는 뭘 선물해줄까?"(황)
한국인 어머니와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켈러씨가 황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그의 나이 28세, 임신 3개월 때의 일이다. 1993년 미국 하와이대에서 열린 인권집회에서 황 할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 비극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처음 듣는 사실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비극을 세계가 모르고 있었을까 의아했지요."(켈러)
집회에 함께했던 미국인 친구에게 그것을 글로 써보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친구의 대답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켈러씨의 '정체성'을 일깨웠다. "네가 써야지. 넌 한국 사람이잖아."
이 소설은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인과 결혼한 종군위안부 출신 여성이 딸과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 어머니의 유품을 통해 딸도 그 슬픔을 이해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에는 작가 본인의 고통스러웠던 유년의 경험도 오버랩돼 있다. 켈러씨 자신도 강보에 싸인 채 하와이로 건너왔다. 부모는 곧 이혼했고, 그는 가난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엄마를 몹시 괴롭힌 딸이에요. 김치는 '냄새난다'고 안 먹었고, 영어를 못 한다고 엄마를 흉봤어요. 정말 버릇없었죠."
그런 딸에게 어머니는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았다. 모국어를 배우지 못한 것은 켈러씨에게 지금까지 후회되는 일이다. '엄마' '노들강변' 같은 한국어가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런 자의식의 표출이다. '종군위안부'를 쓰면서 악몽을 많이 꿨다는 그는,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야 거울 속 자신을 떳떳이 쳐다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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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 황금주씨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승인 2001.05.10 00:00
"어미도 없는 나라" '파렴치' 일본 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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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5일 스무 살에 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황금주 할머니(82)가 노구를 이끌고 현해탄을 건넜다. 1941년 강제로 만주에 끌려갔던 것처럼 이번 일본 방문 역시 자의는 아니었다. 일본 우익단체가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지 않았어도, 문부성이 개악된 역사 교과서를 통과시키지 않았어도,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할머니가 일본을 방문할 리 없었다.
4월26일 황 할머니는 우익 교과서 재검정을 촉구하는 항의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김윤옥 회장과 함께 일본 문부성을 찾았다. 이날 황 할머니는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너희 일본이 교과서에 위안부 문제를 넣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 책상을 내리치고, 명패를 내던졌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황 할머니는 "일본은 양심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나라다"라며 일본 관리들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꼭 10년 전에도 황 할머니는 일본을 방문했었다. 1992년 3월 도쿄에서 열린 정신대 문제 심포지엄에서 황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군 위안부였음을 숨기며 살아왔지만 "역사의 오점을 파헤치지 않고 그냥 둘 수 없었다"라며 증언 동기를 밝혔다. 그때부터 일본의 사죄를 받기위해 할머니는 온몸을 내던졌다.
그러나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일본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다. 황 할머니의 거친 항의가 있었는데도, 일본 문부성 관리는 위안부 문제는 애초부터 검정 대상이 아니었다는 궁색한 답변만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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