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생 탄광 수몰사고
| 날짜 | 1942년 2월 3일 |
|---|---|
| 시간 | 오전 6시 |
| 위치 |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연안 |
| 좌표 | 북위 33° 33′ 51″ 동경 131° 10′ 58″ |
| 원인 | 탄광 수몰 |
| 결과 | 노동자 전원 사망 |
| 사망자 | 183명 |
| 조사 | 1991년 장생탄광의 물비상(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새기는 모임) 창설 2024년 9월 갱도 입구 발견 2024년 9월 갱도 입구 진입 시도 2025년 1월~2월 수중 조사 2025년 4월 구조물 철거 작업 2025년 6월 수중 조사(예정) |
장생 탄광 수몰사고 또는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일본어: 長生炭鉱水没事故/ちょうせいたんこうすいぼつじこ)는 1942년 2월 3일 일본 제국 야마구치현의 우베 탄광 중 하나인 장생(조우세이) 탄광에서 발생한 해저 광산 사고이다.
개요
[편집]광산이 많은 우베시에 있는 광산들 중 하나인 장생 탄광은 1932년에 본격적으로 조업이 시작된 해저 탄광이다.[1] 해저 탄광은 급여가 높았지만 위험하다는 인식 때문에 기피하는 경향이 컸으며, 이에 일본은 조선인들을 고용했다.[2] 여기에는 당시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광부로 일하고 있었다.[3] 이날 오전 6시 즈음, 육지의 갱도 입구에서 약 1.1킬로미터 우베시 앞바다에 위치한 해저 갱도의 천장이 붕괴했다. 이에 따라 갱도 내부에 있던 한반도 출신자 136명, 일본 열도 출신자 47명, 합쳐 183명이 매장당했다.[1]
희생자의 인원수는 장생 탄광 부근에 있는 니시코지의 위패에 있는 이름과 후쿠오카현에 있는 산업피해자 명부에 기재된 이름이 일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부상자 및 생존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갱도 내부와 외부에서 약 1000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매일 일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고의 원인은 해저에서 너무 근접한 거리에서 채굴 작업 때문이었다. 본래 해저탄광은 얕은 깊이에서 채굴할 경우, 해저에서 깊이 47m 이상의 부분에서 작업을 할 필요가 있었지만 장생탄광에서는 최심부가 기준을 휠씬 넘는 37m라는 불법 상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에 태평양전쟁에 의한 일본제국의 군수물자 필요, 즉 석탄의 증산이 급선무가 된 것도 또다른 원인으로 겹쳐지게 되어, 무리한 채굴을 계속함으로써 사고가 발생했다.[4]
사고 당일, 갱도 입구에서 여자 아이가 울고 있었지만, 곧 헌병대에 의해 갱도 입구는 봉쇄되었다.[1]
1945년 장생 탄광은 폐광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베탄광에서 발생하였던 1915년 히가시미 초탄광의 사망자 235명에 이어 희생자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이 개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 통제가 이뤄짐에 따라, 사고가 세간에 의해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1982년 4월 17일 자치회장 등 지역 유력자에 의해 '장생탄광 순난자의 비'가 건립되었다.[5][6]
1991년 1월, 일본의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새기는 모임)이 발족했다.[7] 같은 시기에 조선인 희생자의 명부가 발견되어 40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유족들에게 사망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 덕분에 한국에서도 1992년에 조세이 탄광 희생자 대한민국 유족회가 발족했다.[8] 1992년 이후의 추도 집회는 한국에서 희생자의 유족을 불러 실시되기 시작한다.
1994년에는 일본의 작곡가인 이케베 신이치로가 본 사고를 다룬 여성 합창조곡 '바다의 묘표'가 발표하였다.[9][10]
2013년 2월, 「새기는 모임(刻む会)」에 의해 「장생 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 추도비」가 준공되었다.[7]
2007년 1월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무총리실 소속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일본의 장생탄광수몰사고에 관한 진상조사'를 정리했다.[11][12]
2023년 4월 이후, 참의원의 위원회에서 수 차례의 질의 응답 및 조서를 통해[13][14], 조선인 유골 반환 문제가 논의되었다.[15][16]
2024년 10월에 크라우드 펀딩에 의한 자금으로 갱도 입구가 발굴되어 잠수부에 의한 해저 조사도 실시되었다.[17] 그러나 갱도 내부는 탁한 물과 진흙, 파손된 파이프 등으로 막혀 있어서 유골 발견은 하지 못헀다.[18][19] 후쿠오카 다카마로 후생노동대신은 “해저의 갱도 내부가 수몰한 상황에서, 사망자들의 유골의 구체적인 소재를 특정할 수 없는 것 외에도,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다. 우선 한국인 및 일본인의 유골과 혼재되어 반환이 어려운 것,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것을 고려하여, 국가에 의한 실지 조사나 민간 조사에 대한 협력은 현시점에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시민 단체는 「매우 유감」이라고 하면서, 앞으로도 활동을 계속해 국가에 협력을 요구하고 싶다고 말했다.[20]
2025년 2월에는 장생 탄광 83주기 추모식을 현장에서 개최하였으며,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국회의원, 행정안전부 김민재 차관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및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관계자, 일본 참의원 및 중의원의 전직 및 현직 의원들과 지역 관계자들이 참석하였다.[21][22] 행정안전부는 2025년 희생자 유족들에 대해 DNA 검사를 실행하고 있다.[23]
비판
[편집]일본 제국과 당시 탄광을 소유하고 있었던 우베흥산[24][25]은 장생 탄광이 수몰되고 나서 쉬쉬하기 바빴다. 대한민국 정부 또한 장생 탄광 수몰사고의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관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아서[26][27], 국가가 아닌 시민 단체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 이르렸다. 일본의 시민단체 장생탄광의 물비상(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새기는 모임)은 한국의 시민 단체와 협력하고 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西田直晃 (2024년 8월 21일). “こちら特報部 82年間、海底炭鉱に放置された朝鮮人の遺骨 坑内に生き埋め…「どうしても償いたい」回収に奔走する人たち”. 《東京新聞》. 2024년 10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4년 10월 19일에 확인함.
- ↑ “日 해저 탄광서 수몰된 136명의 조선인 넋 기리려면 [정원석의 인사이트 재팬]”. 2024년 11월 25일.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 ↑ 길윤형 (2015년 3월 29일). “아버지…아직 끝나지않은 73년 전 ‘조세이의 비극’”.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 ↑ 김영화. “일본 바다에 잠든 강제징용 조선 노동자 136명...'장생탄광' 83년 만에 유해발굴 현장”.
- ↑ 常盤校区コミュニティ推進協議会 わくわく常盤 (2013년 3월). “常盤ふるさとまっぷ” (PDF). 宇部市教育委員会. 2024년 10월 19일에 확인함.
- ↑ 그러나 순난자의 비에는 강제로 끌려와 희생된 조선인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 ↑ 가 나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市民活動団体)”. 《市民活動団体データベース》. 宇部市. 2021년 8월 12일. 2024년 10월 19일에 확인함.
- ↑ “‘역사를 새기는’ 이유···“진실을 안 일본 사람들은 손을 내밀었어요””. 2024년 12월 3일.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 ↑ “朝・日作曲家対談 金学権さん×池辺晋一郎さん”. 《朝鮮新報》. 2007년 11월 12일.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 ↑ 池辺晋一郎; 芝憲子詩 (1994). 《海の墓標 : 女声合唱組曲》. Zen-on Music. ISBN 4117189867.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池辺晋一郎; 芝憲子詩 (1994). 《海の墓標 : 女声合唱組曲》. Zen-on Music. ISBN 4117189867.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 ↑ 許 光茂; 大和 裕美子; 金 炳辰; 堤 美貴 (2015). 《日本の長生炭鉱水没事故に関する真相調査 : 真相調査報告書2007年01月26日議決》. ソウル : 対日抗争期強制動員被害調査及び国外強制動員犠牲者等支援委員会.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 ↑ 허, 광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대한민국 국무총리실 소속 (2007). 《일본 조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 진상조사》 (일본어). 국무총리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 ↑ “第213回国会 厚生労働委員会 令和6年3月22日(金) 第2回”. 《委員会・調査会・憲法審査会質疑項目》. 参議院. 2024년 3월 22일. 2024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第211回国会 政府開発援助等及び沖縄・北方問題に関する特別委員会 令和5年4月7日(金)第4回”. 《委員会・調査会・憲法審査会質疑項目》. 参議院. 2023년 4월 7일. 2024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福島瑞穂 (2023년 11월 21일). “第212回国会(臨時会)質問主意書 質問第六〇号 日本の朝鮮植民地時代の民間徴用者の遺骨問題に関する質問主意書”. 《質問主意書》. 参議院. 2024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内閣総理大臣臨時代理 国務大臣 松野博一 (2023년 12월 1일). “第212回国会(臨時会)答弁書 内閣参質二一二第六〇号”. 《質問主意書》. 参議院. 2024년 10월 30일에 확인함.
- ↑ “遺骨収容は可能だ!坑口を補強し、遺骨をご遺族の元へ!” (일본어).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 ↑ “海につかったままの「戦後」(その1) 183体遺骨眠る長生炭鉱、民間調査”. 《毎日新聞 東京都版》 朝刊판. 毎日新聞社. 2024년 11월 5일. 1면.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 ↑ 森本智之 (2024년 11월 7일). “「一片でも良いから遺骨を…」水没で183人亡くなった長生炭鉱事故、調査開始に「知恵と技術の支援を」:東京新聞デジタル”. 《東京新聞デジタル》 (일본어). 2024년 12월 22일에 확인함.
- ↑ 日本放送協会 (2024년 11월 5일). “「長生炭鉱」事故 海底の遺骨調査 “現時点では考えず”厚労相 | NHK”. 《NHKニュース》. 2024년 12월 22일에 확인함.
- ↑ “수몰된 일본 해저탄광엔 아직도 조선인들이…국가의 존립 이유는?”.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 ↑ “"83년 기다려"... 해저 유해 발굴 '장생탄광' 유족의 눈물”. 2025년 2월 2일.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 ↑ 행정안전부. “강제동원 희생자(조세이탄광 수몰사고관련)유족 대상 2025년 상반기 유전자 검사 계획 공고”.
- ↑ “UBE Corporation” (영어).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 ↑ “UBE株式会社 - UBE Corporation” (일본어).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 ↑ 홍석재 (2025년 4월 7일). “이시바 “조세이탄광 조선인 유해 발굴…정부 지원 검토 원해””.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 ↑ “'장생탄광' 83년 만에 유전자 조사 착수…피해자 측 "136명 전부 해야"”.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2일에 확인함.
참고문헌
[편집]- 李修京; 湯野優子 (2008). “宇部の長生炭鉱と戦時中の朝鮮人労働者”. 《東京学芸大学紀要. 人文社会科学系. I》 (東京学芸大学紀要出版委員会) 59: 105-119. ISSN 1880-4314.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李修京; 湯野優子 (2008). “宇部の長生炭鉱と戦時中の朝鮮人労働者”. 《東京学芸大学紀要. 人文社会科学系. I》 (東京学芸大学紀要出版委員会) 59: 105-119. ISSN 1880-4314.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 大和裕美子 (2014년 3월). “<博士論文>山口県長生炭鉱水没事故をめぐる社会的記憶の構図と記憶実践 :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を事例に”. 九州大学附属図書館. doi:https://doi.org/10.15017/1441000
|doi=값 확인 필요 (도움말). 2024년 10월 19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편집]-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 - 공식 웹사이트(일본어)(한국어)
長生炭鉱水没事故
| 長生炭鉱水没事故[1][2] | |
|---|---|
| 場所 | |
| 座標 | 北緯33度56分27秒 東経131度18分08秒 |
| 日付 | 1942年2月3日[2] |
| 原因 | 落盤[1] |
| 死亡者 | 183人(うち朝鮮半島出身者136人)[1] |
| 遺族会 | 「長生炭鉱犠牲者大韓民国遺族会」[3] |
長生炭鉱水没事故[1](ちょうせいたんこうすいぼつじこ)は、1942年2月3日、山口県の宇部炭鉱のひとつ長生炭鉱で発生した鉱山事故である。
概要
[編集]現場は1932年に本格操業が開始された海底炭鉱[4]。この日の午前6時頃、陸上の坑口から約1.1キロメートル沖合に位置する海底坑道の天盤(天井)が崩落した。これにより坑内にいた朝鮮半島出身者136人、日本列島出身者47人、合わせて183人が生き埋めになった[4]。犠牲者の人数は長生炭鉱付近にある西光寺の位牌にある名前と、福岡県にある殉職産業名簿に記載された名前が一致した事によって判明した。負傷者・生存者についての記録は殆ど残されてないが、坑内外で約1000人が連日働いていたとされる[5]。
この事故の原因は海底から近すぎる距離での採掘であった。本来、海底炭鉱は浅瀬で採掘する場合、海底から深さ47m以上の部分で採掘する必要があったが、長生炭鉱では最深部が37mという違法状態で運営されていた。これに太平洋戦争による石炭の増産が急務となったことも重なり、無理な採掘を続けたことで事故が発生した[6]。
事故当日は坑口で女子供が泣き叫んでいたが、間もなく憲兵隊によって坑口は封鎖された[4]。
1945年、長生炭鉱は閉山となった[7]。同じく宇部炭鉱による1915年東見初炭鉱の死者235人に次ぐ犠牲者が生じたにもかかわらず、太平洋戦争開戦間もなくであったため情報統制がなされ、取り上げられることはなかった[5]。
1982年4月17日、自治会長など地域の有力者により「長生炭鉱殉難者之碑」が建立された[8][9]。
1991年1月、市民団体「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が発足[10]。同時期に朝鮮人犠牲者の名簿が発見され、40年以上の月日を経て初めて朝鮮人遺族に訃報が届けられる事となった。1992年以降の追悼集会は、韓国から犠牲者の遺族を招いて実施される事になった[要出典]。
1994年、芝憲子 詩、池辺晋一郎作曲で、この事故を扱った女声合唱組曲「海の墓標」が発表された[11][12]。
2013年2月、「刻む会」により「長生炭鉱水没事故犠牲者追悼碑」竣工[10][13]。
2007年1月、大韓民国国務総理所属の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は、『日本の長生炭鉱水没事故に関する真相調査』をとりまとめた[14][15]。
2023年4月以降、参議院の委員会質疑[16][17]や質問主意書[18][19]で、複数回にわたって遺骨返還問題が取り上げられた。
2024年10月にクラウドファンディングによる資金で抗口が発掘され、ダイバーによる潜入調査も実施された。内部は濁った水と泥、破損したパイプ類などで遮られ、遺骨発見には至っていない[20][21]。福岡資麿厚生労働大臣は「海底の坑道内が水没し、遺骨の具体的な所在が特定できないほか、日本人の遺骨と混在しており返還が難しいこと、安全性が確認できていないことなどを考慮すると、国による実地調査や民間調査への協力は現時点では考えていない」とコメントし、これに対して市民団体は「非常に残念」としつつ、今後も活動を続けて国に協力を求めたいと話した[22]。
脚注
[編集]- ^ a b c d “長生炭鉱水没事故 市民団体が遺骨収集で入り口掘り起こしへ”. 山口 NEWS WEB. NHK山口放送局 (2024年7月16日). 2024年7月17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24年10月19日閲覧。
- ^ a b “長生炭鉱の掘削作業開始 「遺骨一日も早く遺族に」”. 毎日新聞 (2024年9月24日). 2024年10月18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24年10月19日閲覧。
- ^ “〈長生炭鉱水没事故〉「骨を返して」訴え30年/進まぬ遺骨調査、遺族らの思い”. 朝鮮新報 (2023年2月9日). 2024年10月30日閲覧。
- ^ a b c 西田直晃 (2024年8月21日). “こちら特報部 82年間、海底炭鉱に放置された朝鮮人の遺骨 坑内に生き埋め…「どうしても償いたい」回収に奔走する人たち”. 東京新聞. 2024年10月18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24年10月19日閲覧。
- ^ a b 李・湯野2008
- ^ KRY山口放送ニュース公式チャンネル (2024年10月9日). 水没事故から82年:旧長生炭鉱 犠牲者遺族の思い/山口県宇部市. YouTube.
- ^ 李・湯野2008、p.111
- ^ 常盤校区コミュニティ推進協議会 わくわく常盤 (2013年3月). “常盤ふるさとまっぷ” (PDF). 宇部市教育委員会. 2024年10月19日閲覧。
- ^ 大和2014、p.18-19
- ^ a b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市民活動団体)”. 市民活動団体データベース. 宇部市 (2021年8月12日). 2024年10月19日閲覧。
- ^ 池辺晋一郎、芝憲子詩『海の墓標 : 女声合唱組曲』Zen-on Music、1994年。ISBN 4117189867。
- ^ 「朝・日作曲家対談 金学権さん×池辺晋一郎さん」『朝鮮新報』2007年11月12日。
- ^ 大和2014、p.141
- ^ 許 光茂、大和 裕美子、金 炳辰、堤 美貴『日本の長生炭鉱水没事故に関する真相調査 : 真相調査報告書2007年01月26日議決』ソウル : 対日抗争期強制動員被害調査及び国外強制動員犠牲者等支援委員会、2015年。
- ^ 허, 광무、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대한민국 국무총리실 소속『일본 조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 진상조사』국무총리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2007年。
- ^ “第211回国会 政府開発援助等及び沖縄・北方問題に関する特別委員会 令和5年4月7日(金)第4回”. 委員会・調査会・憲法審査会質疑項目. 参議院 (2023年4月7日). 2024年10月30日閲覧。
- ^ “第213回国会 厚生労働委員会 令和6年3月22日(金) 第2回”. 委員会・調査会・憲法審査会質疑項目. 参議院 (2024年3月22日). 2024年10月30日閲覧。
- ^ 福島瑞穂 (2023年11月21日). “第212回国会(臨時会)質問主意書 質問第六〇号 日本の朝鮮植民地時代の民間徴用者の遺骨問題に関する質問主意書”. 質問主意書. 参議院. 2024年10月30日閲覧。
- ^ 内閣総理大臣臨時代理 国務大臣 松野博一 (2023年12月1日). “第212回国会(臨時会)答弁書 内閣参質二一二第六〇号”. 質問主意書. 参議院. 2024年10月30日閲覧。
- ^ 「海につかったままの「戦後」(その1) 183体遺骨眠る長生炭鉱、民間調査」『毎日新聞 東京都版』(毎日新聞社)2024年11月5日、朝刊、1面。
- ^ 森本智之 (2024年11月7日). “「一片でも良いから遺骨を…」水没で183人亡くなった長生炭鉱事故、調査開始に「知恵と技術の支援を」:東京新聞デジタル”. 東京新聞デジタル. 2024年12月22日閲覧。
- ^ 日本放送協会 (2024年11月5日). “「長生炭鉱」事故 海底の遺骨調査 “現時点では考えず”厚労相 | NHK”. NHKニュース. 2024年12月22日閲覧。
参考文献
[編集]- 李修京、湯野優子「宇部の長生炭鉱と戦時中の朝鮮人労働者」『東京学芸大学紀要. 人文社会科学系. I』第59巻、東京学芸大学紀要出版委員会、2008年1月、105-119頁、ISSN 18804314。
- 大和裕美子 (2014年3月). “<博士論文>山口県長生炭鉱水没事故をめぐる社会的記憶の構図と記憶実践 :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を事例に”. 九州大学附属図書館. doi:https://doi.org/10.15017/1441000. 2024年10月19日閲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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