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 - 의사 오인동의 북한 방문기
오인동 (지은이)창비201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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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천안함사건으로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던 지난 6월, 평양에서 북녘의사들과 함께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있었다. 세계적 인공관절수술 전문가 오인동, 바로 그 사람이다. 이번 수술여행은 그의 네번째 방북이었다. 이번에 그는 천안함사건에 대한 북녘사회의 반응을 현지에서 지켜보았고, 평양에서 6?25 기념일을 맞았으며, ‘지도원 동무’와 함께 북한팀의 축구경기를 응원했다(고려호텔에서 정대세 선수를 만나기도 했다). 이 책은 그가 1992년부터 2010년까지 지난 20여년간 평양을 방문하며 북녘동포들과 나눴던 소통과 신뢰를 담은 방북기다.
목차
책머리에
1장 닥터 오, 평양에 갑시다
-1992년 10월
평양에 갑시다!
잠 못 이루는 평양의 첫날 밤
만경대고향집에서 대동강까지
사회주의사상만큼이나 거대한 건축물들
고려호텔로 숙소를 옮기다
돈 한푼 안 낸다는 사회주의 의료제도
강연중에 화를 내고 만 나의 오만
묘향산 보현사와 국제친선전람관
그리운 금강산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북한의사들
평양의 마지막 밤
2장 가는 길 험해도 웃으며 가자
-1998년 1월
Korea-2000의 결성
끝내 이루지 못한 다리수술
6년 만에 다시 평양으로
금수산기념궁전에서
그들의 눈물은 자발적인 것인가
“가는 길 험해도 웃으며 가자”
한자리에서 오래 일하는 전문가들
“나중에 웃는 자가 더 행복하다”
다시금 꽉 맞잡은 두 손
냉방 초대소에서의 따뜻한 대화
평양에서 서울로, 다시 미국으로
3장 평양으로 떠난 수술여행
-2009년 5월
평양에서 접한 노대통령 서거와 북핵실험
평양으로 떠난 수술여행
고난의 행군은 끝난 것인가
17년 만에 다시 만난 정형외과 의사들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의 어린이들
인공고관절수술을 집도한 첫 외래의사
두 여성이 불러준 통일 아리랑
강연장을 꽉 메운 의료인들
사회과학자들과 논한 통일국호 Corea
손가락 걸고 약속한 재회
인민대학습당을 둘러보다
어느 초대소에서 나눈 이야기들
다시 가야 할 그곳
4장 다시 두고 온 수술가방
-2010년 6월
천안함, 또하나의 대형사건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다시 찾아간 평양의학대학병원
고구려의 흔적, 대성산성과 안학궁터
1년 만에 확 달라진 병동
월드컵 축구와 호텔에서 마주친 정대세 선수
평양에서 맞은 6?25 기념일
개선청년공원에서 들은 웃음소리
북한식 야외 바비큐파티
신뢰, 통일로 가는 원동력
평양거리를 걷는 인민들의 모습
다시 두고 온 수술가방
안경호 위원장과 나눈 대화
접기
추천글
오인동 선생과의 인연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적 인공관절수술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가 모국의 통일운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는 지난 20여년간 남북, 북미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던 때에도 평양을 방문해 북녘동포들과 진심어린 소통을 했다. 천안함사건으로 전쟁위기까지 언급되는 상황에서 6?15공동선언 10주년을 맞는 지금의 현실이 가슴 아프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가 말한 대로 통일이라는 대업(大業)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신뢰에서 시작될 것이기에. 그가 고친 것은 비단 북녘동포 환자들만이 아니라, 남과 북의 병든 마음이었다.
- 임동원 (한반도평화포럼 명예이사장 · 전 통일부 장관)
오인동 선생은 헌신적 민족주의자와 애국자의 폭넓은 시각을 갖춘 사람으로, 그동안 의술을 통한 대북 민간외교로 통일을 앞당기는 데 특별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통일을 향한 그의 헌신은 북핵위기로 몸살을 앓았던 지난 1998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 일본, 미국의 여러 세력들이 통일로 가는 길을 역행하려 했던 때 이루어진 것이기에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 쎌리그 해리슨 (미국 국제정책쎈터 선임연구원)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0년 9월 17일자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0년 9월 14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오인동 (지은이)
오인동 박사는 황해도 옹진에서 출생하여, 인천에서 제물포고교를 거쳐 가톨릭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의사이다. 군복무를 마치고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간 지은이는 정형외과의사로 하버드의대 조교수, MIT대학 강사를 역임하며 인공관절기 고안으로 의과학계에 크게 기여했다. 현재 로스앤젤레스 인공관절연구원 원장인 지은이가 남북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92년 한미의사회 대표단으로 북한에 다녀온 뒤부터이다. 분단 현실의 확인, 충격이었다. 그는 분단의 기원과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 모국의 근·현대사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분단극복을 위한 연구와 활동에 열의와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2008년에 펴낸 역사서 <꼬레아Corea, 코리아Korea>(책과함께)는 로마자국호의 연원과 통일국호의 문제를 넘어 우리 겨레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해 보고 미래를 모색해 보려는 지은이의 끈질긴 노력의 한 단면이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남과 북을 아우르는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며, 나아가서 민족의식과 세계(국제)인식의 균형을 강조한다. 지은이의 이러한 인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를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민족담론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려는 한국사회에 민족담론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지은이는 실증적으로 요구한다. 통일문제는 민족의 문제이고, 남과북이 주체적으로 접근하여 결실을 보아야 한다는 말을 재미한인동포의사로부터 듣는 일은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분명 신선하게 다가갈 것이라 확신한다.
한미연합회(Korean American Coalition)를 비롯하여 동포사회와 미국주류사회에서 활발하게 그리고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은이는 수필문학인으로 통일의 길에 대해 꾸준히 써 왔으며 평양의학대학병원에서 인공관절수술을 전수하며 북녘동포와 의학계를 돕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밖에서 그려보는 통일의 꿈>,<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 … 총 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20여년간 통일과 의업(醫業)의 두 길을 걸어온 한 의사의 진심어린 소통의 기록
저자 소개부터 하자면, 그 이력이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남한 출신 재미동포로, 하버드의대 정형외과 조교수와 MIT 생체공학 강사를 역임했다. 세계 3대 첨단의학 가운데 하나인 인공고관절수술법 개발과 고관절기 고안으로 11종의 발명특허를 획득하고 수차례 학술연구상을 수상한 저명한 의사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불편한 다리를 수술하기 위해 환자와 의사로서 특별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2장 참조).
저자 소개부터 하자면, 그 이력이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남한 출신 재미동포로, 하버드의대 정형외과 조교수와 MIT 생체공학 강사를 역임했다. 세계 3대 첨단의학 가운데 하나인 인공고관절수술법 개발과 고관절기 고안으로 11종의 발명특허를 획득하고 수차례 학술연구상을 수상한 저명한 의사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불편한 다리를 수술하기 위해 환자와 의사로서 특별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2장 참조).
한편 그는 『뉴욕타임즈』 『LA타임즈』 『노틸러스』 등의 매체에 남북문제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클린턴과 오바마 정부에 한반도정책 건의서를 전달하는 등 분단극복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여온 통일운동가이기도 하다(그가 이제껏 발표한 논문과 칼럼들은 이번에 함께 출간된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솔문)에 담겨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로스앤젤레스 인공관절연구원 원장과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으며 여전히 통일과 의업의 두 길을 걷고 있다.
한평생 인공고관절수술 연구에만 몰두해온 그가 북녘으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는 1992년 첫 방북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재미한인의사회 방북대표단에 속하게 된 저자는 미지의 땅에 대한 호기심과 북녘 의료계를 돕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생전처음 북녘 땅을 밟았다. 저자의 눈앞에 펼쳐진 북한의 모습은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었다.
1장 곳곳에서 ‘부끄럽다’는 단어가 눈에 띌 만큼 저자는 자신의 무관심을 탓하며 분단현실에 새로이 눈을 뜨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쏘드 하나. 북녘의사들을 상대로 의학강연을 하게 된 저자는 인공고관절이라는 최신의술을 전해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정작 시큰둥한 북녘의사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저자는 참지 못하고 강연 도중 버럭 화를 내고 만다(1장 참조).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의학을 얘기하러 온 사람이지, 여러분들의 의술을 훔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미국 CIA 지시를 받고 온 사람도, 남한의 안기부 끄나풀로 온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도 모르게 흥분되어 단숨에 내지르니 장내가 숙연해졌다. 강당 뒷자리에 앉아 있던 권회장과 이부회장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왜 그런 말까지 하느냐고 질책하는 듯했다. 반면 안기부까지 운운하며 떠들었는데도 리정호 동무는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의사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이러다가는 강연이 아주 중단되고 말 것만 같아 서둘러 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73면)
극도로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북녘사람들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하지만, 며칠 뒤 호텔로 찾아와 최신수술법에 대해 열심히 물어보는 한 의사를 보며 저자는 소통의 희망을 발견한다.
그후 저자는 본격적으로 모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97년에는 보다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Korea-2000’이라는 통일연구기구를 결성하는데, 그해 말 남한에서는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로동당 총비서로 추대되면서 남북관계에 새로운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에 Korea-2000 위원들은 통일의 염원을 담아 ‘조국통일정책건의서’를 작성했고, 저자는 이를 남과 북에 전달하기 위해 두번째 방북을 한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의학을 얘기하러 온 사람이지, 여러분들의 의술을 훔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미국 CIA 지시를 받고 온 사람도, 남한의 안기부 끄나풀로 온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도 모르게 흥분되어 단숨에 내지르니 장내가 숙연해졌다. 강당 뒷자리에 앉아 있던 권회장과 이부회장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왜 그런 말까지 하느냐고 질책하는 듯했다. 반면 안기부까지 운운하며 떠들었는데도 리정호 동무는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의사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이러다가는 강연이 아주 중단되고 말 것만 같아 서둘러 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73면)
극도로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북녘사람들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하지만, 며칠 뒤 호텔로 찾아와 최신수술법에 대해 열심히 물어보는 한 의사를 보며 저자는 소통의 희망을 발견한다.
그후 저자는 본격적으로 모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97년에는 보다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Korea-2000’이라는 통일연구기구를 결성하는데, 그해 말 남한에서는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로동당 총비서로 추대되면서 남북관계에 새로운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에 Korea-2000 위원들은 통일의 염원을 담아 ‘조국통일정책건의서’를 작성했고, 저자는 이를 남과 북에 전달하기 위해 두번째 방북을 한다.
당시 북한은 악화된 북미관계와 연이은 자연재해로 힘겨운 ‘고난의 행군’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난방조차 되지 않는 냉장고 같은 여관방에서 코트를 입은 채 새우잠을 자며 저자는 북녘인민들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온다.
세번째 방북은 2009년 5월에 이루어졌다. 인공고관절수술을 전수해주기 위한 본격적인 수술여행의 시작이었다. 1992년 당시 고려호텔 강당에서 저자의 강연을 들었던 의사들과 17년 만에 재회하여 함께 수술을 집도했다. 수술 도중 전력이 떨어지거나 사용하는 의학용어가 달라 우왕좌왕하는 일도 발생했지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수술을 마치고 나온 저자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북이 제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두 대형사건에 대한 평양의 반응, 그리고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북녘사회의 현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올2010, 6월, 저자는 또다시 인공관절기와 의료품으로 가득 찬 가방을 들고 평양으로 떠났다. 전력난을 겪었던 작년과 달리, 북한은 새롭게 변모하고 있었다. 전력문제로 수술이 중단되는 일도 없었고, 여기저기 공사가 재개되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눈에 띄었다. 한낮 동안 “원쑤 미제를 짓부시자”는 선동구호가 온통 신문을 장식한 6월 25일 밤, 북녘 텔레비전은 16강 진출이 달린 남한팀의 경기를 중계해주고 있었다. “‘남선(한국)’이라도 이겨야지요. 다 같은 우리 민족인데요”라는 북녘의사들의 반응은 저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무적인 변화는 바로 그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더이상 예전처럼 숨기거나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이제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 것이다.
통일이라는 대업도 결국은 사람 사이의 소통과 신뢰에서 시작된다
작년만 해도 의사선생들은 나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 그런데 이번 수술여행에서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먼저 나서서 무릎관절기뿐만 아니라 어깨와 팔꿈치 관절기에 대해서도 물어왔고, 고안연구를 도와달라고 청하기까지 했다. (…) 2년여에 걸쳐 함께 어깨를 비벼대며 수술을 하다보니, 부담감이 점점 없어져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게 무슨 뜻일까? 자신들을 진솔하게 이해해주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아니겠는가? (…) 평양의학대학병원 의사선생들과의 인연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결실은 바로 이 신뢰였다. 이 신뢰야말로 통일로 가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335~336면)
저자의 표현대로 지난 20여년에 걸쳐 그가 얻은 가장 소중한 결실은 바로 ‘신뢰’였다. 누구를 만나건 그는 마음을 열고 진심어린 소통을 시도했다. 그렇다고 그가 북한에 무조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랜 공부를 통한 균형잡힌 시각을 바탕으로, 때로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거침없는 비판을 내뱉는다. 고위직 관리 앞에서도 쓴소리를 마다않았다. 서로간에 신뢰가 있다면 비판이야말로 진정 그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모든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다름 속에서도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신뢰를 쌓은 것이기에 더욱 그 의미가 깊다.
평양을 떠나던 마지막날, 함께 수술했던 의사와 간호원들은 그에게 앞으로는 더 자주 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떠날 것이다. 또다시 꽉 채워온 인공관절기를 모두 기증하고 텅 빈 가방으로 돌아오겠지만, 그 안에는 신뢰와 형제애가 한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통일은 그만큼 한걸음 더 가까이 오지 않겠는가.
혹자는 너무 이상적이고 감성적인 이야기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통일이라는 대업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신뢰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10년, 문제의 해결은커녕 통일을 언급하기조차 어려워진 요즘, 사회과학도의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한 의사의 뜨거운 가슴으로 써내려간 이 방북기는 우리에게 통일을 향한 희망의 실마리를 보여줄 것이다.
나는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평양으로 떠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리고 언제든 다시 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내 수술가방을 평양에 두고 오지 않았는가? 이 방문기를 분단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한 재미동포 의사의 감성적이고 이상적인 감회일 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세상사 모든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신뢰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는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북녘동포들을 만나고 소통해왔다. _‘책머리에’에서
북플 bookple
눈을 감아도 더욱 뚜렷이 부각되는 일... 통일~~ 꿈에도 소원
한봉 2011-04-07 공감 (1) 댓글 (0)
이 시대의 통일교과서라고 불러다오.
연전에 캐나다 출신의 원어민 교사와 함께 수업을 한 적이 있다. J라고 부르는 그는 늘 수업에 충실했을 뿐아니라 낡은 틀에 안주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항상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중학생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았으나 내게는 신선한 수업이라 기대를 갖고 수업에 임하곤 했다.
수업을 하기 전에는 늘 지도안을 먼저 작성해서 어떤 수업을 할지를 예고하곤 했다, 그런 어느날, 북한에서 운영되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수업을 할 계획이라는 거였다.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내용까지 한번 훑어본다는 거였는데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시교육청 서버로 통제되고 있는 학교 컴퓨터로는 북한 사이트에 들어갈 수 없었다. 컴퓨터에도 휴전선이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 지칠줄 모르는 J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끝내는 북한 사이트에 접속해서 그가 하고자 하는 수업 내용을 확인시켜주었는데, 사실 그 내용은 보잘것 없었다. 김일성 사진과 찬양조의 글이 전부라고나할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조악해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반공/승공/멸공 교육을 받은 우리 한국인 교사들은 나를 포함하여 하나같이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색을 표함은 물론 쌍수를 들고 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교사로서의 자리를 보존해야한다는 절박함도 없지 않아 있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자유자재로 세상을 넘나들 수 었는 캐나다인 J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수업도 있었다. 세 가지 소원을 영어로 표현하는 시간이었는데 예로 들어준 소원이 무엇이었냐하면, "국경 없는 세상"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국경이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고 할까. 감동이라고 할까. 생각의 지평이 넓어진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읽으며 내내 그 J를 생각했다. 이 책을 쓴 저자가 섬에 갇혀있는 우리와는 처지와 입장이 사뭇 다른 재미교포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의사이다. '더군다나'라고 말하는 것은 의사라는 직업은, 하기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기에 더없이 부럽기 때문이다.
능력있는 의사로서 북한의 의술에 보탬이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감동적이면서 눈물겹다. 자신이 갖고있는 의술을 이렇게 보람있게 활용할 수 있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갈라진 우리 민족이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는 열망으로 헌신적으로 뛰고 있다. 남으로 북으로 그리고 미국에서.
그래서 국내의 한정된 정보에서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네와는 우선 시야부터가 다르다. 그렇다고 친북 일변도는 더욱 아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남과 북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려는 저자의 여러 생각들을 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땅의 통일을 위해 그가 '고난의 행군'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전에 읽은 권정생 선생의 <몽실언니>가 떠오른다. 그 책이 80년대의 통일교과서라면 나는 이 책을 이 시대의 통일 교과서라고 부르고 싶다.
이 책을 못 읽을 분들을 위해 인상적인 부분을 적어본다.
(325쪽)북한이 내일모레 망한다고 떠들어대는 지도자나 내외 언론인들은 내가 못 보는 무슨 다른 것을 보고 그런 얘기들을 하는 것일까? 그들은 북한에 몇번이나 와봤을까? 아니, 와본 적은 있을까? 김일성 주석 생전에 그가 죽으면 북한체제는 끝난다고 말했던 사람들이 지금 와서는 또, '김정일만 죽으면 통일이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 얘기하는 걸까? 반면 오랜 세월에 걸쳐 북한을 연구하고 방문한 사람들이 북한은 곧 망할 거라고 말하는 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다....북한의 체제와 특성, 북녘인민들의 민족성과 자부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런 허망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망하기는커녕 앞으로 더 발전해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는 더 강하게.
(336) 그래, 세상 모든 일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서로를 이해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평의대 의사선생들과의 인연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결실은 바로 이 신뢰였다. 이 신뢰야말로 통일로 가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57) 남북관계가 어려워지면 재미동포들은 모국의 분단극복과 통일을 위해 미국 정부와 의회를 설득하려 백방으로 뛰어다니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참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왜 우리 문제를 우리끼리 해결하지 못하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초라해져야 하는가? 그럼에도 우리끼리는 풀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캐나다인 J가 북한사이트 수업을 하자고 했을 때 기겁을 했던 일이 어떤 상징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정말 초라하다, 초라해.
- 접기
nama 2011-02-07 공감(3) 댓글(1)
가슴 뻐근하고 눈물겨운 우리들의 이야기
재미통일운동가 오인동 박사. 그는 인공고관절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형외과 조교수와 MIT 생체공학 강사를 역임했고, 인공고관절과 관련한 미국 발명특허를 무려 11종이나 가지고 있는 최고 전문가이다.
1970년 선진 의학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25년 간 정형외과의사로서 인공관절기 고안 연구와 수술법 개발에 몰두해 그 분야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분단된 조국에 눈을 돌릴 겨를은 솔직히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북과 특별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거창한 이념도 사상도 아닌, ‘같은 동포’라는 마음 하나 때문이었다. 같은 피를 나눈 동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도움을 주고 싶다는 지극히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오 박사를 두 번이나 뵐 수 있는 영광이 있었다. 지난 해 말 이 책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서울을 찾은 그를 처음 만났고, 최근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게 되어 서울을 찾은 그를 다시 만났다. 칠순이 넘은 연세에도 언제나 활기 넘치시는 오 박사는 한참 어린 나에게도 겸손함을 잃지 않으셨다. 진심으로 존경 받을 만한 분이란 생각을 뵐 때마다 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처음 찾은 오 박사는 난생 처음 밟은 북녘 땅에 큰 설렘과 함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던 북과 너무도 다른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아, 여기도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구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우리 땅이구나.’
이런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일 만큼 남쪽에서의 세뇌교육은 강력했다. 머리에 뿔 달린 빨간 괴물들이 살줄만 알았던 북녘 땅.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지극히 순박했고, 때 묻지 않은 예전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후 다시 민족사와 조국의 근대사, 한반도 분단의 역사를 공부하게 된 그는 자신이 지금껏 알고 있던 사실들이 얼마나 파편적이고 때로 왜곡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라는, 어쩌면 유리할 수도 있는 입장을 충분히 살려 조국의 평화와 통일에 기여하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지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미국 동포사회에서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이후 오 박사는 ‘Korea-2000’이라는 학술단체를 만들어 1998년 한반도 양쪽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총비서에게 각각 통일정책건의서를 전달하게 된다. 물론 두 사람을 직접 만나 전달할 순 없었지만, 오 박사는 동포들의 진심어린 고언을 전달하기 위해 직접 남북을 오가며 열심히 노력했다.
이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2000년 드디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된다. 마침내 통일을 향한 한반도 형제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오 박사는 멀리 이국에서나마 뜨거운 눈물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의 10년 세월동안 소중히 지켜온 남북의 화해와 협력 무드는 무지막지한 이명박 정부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다시 북녘의 동포들은 머리에 뿔 달린 괴물로 각색되고 꾸며지고 있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오 박사는 다시 평양을 찾았다. 이번엔 재미한인의사회 일원도 ‘Korea-2000’의 일원도 아닌 ‘동포 의사’로서 찾아갔다. 그리고 북녘의 의사들과 함께 인공고관절 수술을 하며, 선진 의학을 전수해주기 시작했다.
고가의 인공관절기를 최대한 기증받아 여행 가방 가득 채우고 떠나는 그의 평양행, 하지만 돌아올 때 그의 가방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북녘 동포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 그리고 뜨거운 우정을 대신 담고 돌아왔다.
이렇게 2009년부터 평양을 방문해 인공고관절 수술을 가르쳐 온 오 박사는 자신의 수술가방을 평양에 두고 돌아온다. ‘곧 다시 만나자’는, ‘꼭 다시 와 달라’는 북녘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사실 아무리 숨기고 왜곡하고 거짓말로 꾸미려 한다 해도,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우리가 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실들이 과연 사실인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만 단언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며 오 박사가 절감한 것은 바로 이런 잘못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역겨울 정도로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남쪽 고위 인사들의 한심함. 그는 구역질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고, 동시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주성과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북녘 동포들을 떠올렸다.
처음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오 박사에게 힘들고 어려운 모습을 감추었던 그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자 그들 역시 마음을 열게 된다. 처음부터 그들이 감추고 싶은 부분만을 드러내려 하는, 그래서 상처를 주고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이들이 바로 현 정권이었다. 비핵·개방·3000은 말 그대로 북이 발가벗고 항복하면 3000불 주겠다는 소리였다.
최근 정부의 정상회담 비밀 접촉 과정을 봐도 이러한 천박한 대북인식은 그대로 드러난다. 국민들에겐 정상회담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뒤에선 몰래 돈으로 정상회담을 사려 했다. 전 정권들을 그렇게 매도하더니, 자신들이 하는 짓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생각이다. 그게 한나라당이고, 그게 이명박 정권이고, 그게 이 시대 한반도를 잡고 있는 보수 세력들의 수준이다. 천박하고 반민족적이고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한심한 먼지들 말이다.
이런 권력, 사람들이 남북관계를 파탄 내는 과정에도 오인동 박사와 같은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북녘 사람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남과 북의 오해를 풀려 노력했고, 서로가 더욱 가까워지도록 힘썼다.
사람은 딱 아는 만큼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기형적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억지로 생각을 주입받으며 살면서도, 그것이 마치 자기의 생각인양 착각하고 산다. 더럽고 짜증나는 정치 이야기는 관심도 없다며 손사래 치지만, 정작 대선이나 총선이 오면 알아서 보수를 찍는 사람들. 투표로 나라를 망치는 이들이다.
오 박사의 삶을 보면 존경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역사를 깨우치고,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고, 동포들의 아픔에 눈감지 않았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헤어진 동포들이 다시 만나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를 오 박사는 단 한 시도 잊지 않았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이 도둑처럼 올 것이라 말했다. 좋은 말을 이렇게 나쁜 뜻으로 인용해도 되는가 싶다. 분노가 솟구친다. 그가 말하는 도둑처럼 오는 통일은 아마도 북의 붕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 그럼 과연 현 정부는 그처럼 떠드는 흡수통일에 자신이 있나? 또 다시 죽어라 서민들에게 세금만 걷어내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오인동 박사의 평양 방문기는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방북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역사와 북의 현재,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까지 조심스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필요한 사람들은 한 권씩 사주고 싶을 정도다.
오 박사는 다시 평양으로 떠날 것이다. 북녘 의사들에게 전달할 인공관절기를 구하는 대로 다시 떠날 것이다. 항상 건강하셔서 오래 오래 북녘 의사들과의 우정을 나누시길 바란다.
“남북관계가 극도로 나빠진 현 상태로는 정부가 교류·협력 사업이라도 다시 하려면 훨씬 크게 ‘더 퍼주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미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에서 그렇게 제안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그러니 이대로 나가다가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와 더불어 대북압박정책 3년여에 ‘중국에 잃어버린 북 5년’이 될 처지입니다. ‘화해협력 7년’으로 북과 동행하게 되었는데, ‘강압대결 3년여’에 한 푼 못 건지고 다 잃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G-20, 핵안보정상회의 등 ‘허장성세 행사 5년은 북 잃은 5년’이 될까 두렵습니다. ‘한미찰떡공조’와 ‘한중 갈등고조’를 잘 조율해야 할 일이며, 관계 단절로 ‘한반도의 섬 아닌 섬’ 남쪽의 대륙 진출 활로도 찾아야 합니다. ‘천안함 폭침 맞고 스텔스 무기 사고’ ‘연평도 쑥밭 되어 미사일 방어체계’하고, ‘국방개혁 307’해서 국방비 늘인다고 합니다. 65만 국군에 300억 달러 쓰고도 110만 인민군에 50억 달러 쓰는 북을 제어 못한다는데, 500억 달러를 쓰면 할 수 있을까요? 핵과 미사일의 비대칭 군사력에 대항해 ‘남핵 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리는데, 혈맹 미국이 들어 주려는지요? 가장 확실한 안보는 군비확충이 아니고 평화체제 구축입니다.”
아,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이번 6·15공동선언 11주년에 한 보수단체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인 웃지 못 할 퍼포먼스가 떠오른다. 분명 어디에서 ‘구입했거나 얻었을 미제 군복’을 입은 채, ‘6·15공동선언 폐기’를 주장하며, 그들은 선언문을 인쇄한 현수막을 찢고 불태웠다. 그들은 오인동 박사와 같은 연배로 보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증오이든, 사랑이든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다 같을 것이다. 모두 존중하자. 모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하나 더, 오인동 박사의 마지막 당부 역시 함께 가슴에 담자. 일단 그거면 됐다.
“남과 북, 모두 병든 다리를 갖고 있습니다. 다리 치료하는 이 정형외과의사의 말입니다. 한 발로 서자니 불안정하고 자신이 없습니다. 남과 북이 한 발씩 균형을 이루어서면 모국의 앞날이 창창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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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틀키드 2011-06-2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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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사가 평양에 수술 가방을 놓고 온 까닭은?
[프레시안 books] 오인동의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
그 의사가 평양에 수술 가방을 놓고 온 까닭은?
[프레시안 books] 오인동의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 기사입력 2010.10.01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창비 펴냄)의 저자 오인동 선생은, 책 뒤표지의 소개 글에 의하면, "통일과 의업(醫業)의 두 길을 걸어온" 재미 동포 의사이다.
부연하자면 저자는 한국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미국에 유학한 이래 정형외과 의사, 특히 인공 고관절(엉덩이관절) 분야의 전문가로 70대인 지금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처음 평양을 방문한 뒤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는 등 통일운동가로도 크게 활약하고 있다.
이제 북한 방문기는 책으로 출판된 것만 해도 적어도 100종은 될 것이며, 개인 블로그 등에 실린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 세상이 되었다. 그만큼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남북이 가까워진 덕택이다. 하지만 올해에 평양을 방문하여 그곳 소식을 전하는 한글 책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최근 들어 경색되고 악화된 남북 관계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북녘의 구체적인 모습을 처음 우리에게 전하고 그럼으로써 대중적인 통일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재미 동포들이었다. 북한에 대해 정부 발표 이외의 어떤 생각을 하는 것조차 금기였던 한국 사회에 전해진, 양은식·선우학원·최익환 등 재미 동포들의 방북기 <분단을 뛰어 넘어 : 북한 방문기>(1984년)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6월 시민 항쟁" 이듬해인 1988년 서울에서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까지 몇 해 동안 "불법 복사물"의 형태로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면서 읽혔던 이 책이 들려준 메시지는 대체로 북녘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메시지가 충격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오히려 당시 한국 사회의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오인동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그 무렵 이런 일도 있었다. 재미 동포인 홍동근 목사의 방북기 <미완의 귀향 일기>가 출판되자 1988년 11월 2일 그 일로 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런데 한 달 뒤 18년 만에 귀국한 홍 목사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재미 동포의 "특권"에 새삼 놀랐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북한 방문을 재미 동포들은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다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요즈음도 해외 동포들은 북녘 고향을 방문하여 헤어졌던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고 있다.)
이듬해에 문익환, 황석영, 서경원, 임수경 등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연이어 북한을 찾았지만 역시나 모두 중형을 받았다. 지난 6월 이 책의 저자인 재미 동포 오인동 선생과 한국인 한상열 목사가 각각 평양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한 목사는 구속되었고 오 선생에게는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다.
필자가 재미 동포를 시샘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의 그 동안 활동을 폄하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오인동 선생과 같은 사람들이 한국 정부에게서 처벌을 받지는 않더라도 실제 행동이나 생각과는 무관하게 동포 사회 등으로부터 "친북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적지 않은 냉대를 받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남북 관계가 어려울 때일수록 재외 동포들의 역할이 더욱 막중하고 소중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과의 의료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튼 것도 역시 재외 동포들이었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일 동포 의사 김만유 선생이 1986년 평양에 1000 병상이 넘는 대규모 현대식 병원인 "김만유 병원"을 세운 일이다. (김만유 선생 역시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리고 재미 동포 의사들도 1980년대부터 북한을 방문하여 새로운 의료 기술을 전수하고, 필요한 의료 시설과 장비들을 지원하는 협력 사업을 계속해 왔다.
북한이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분야는 의료와 교육이다. 1950년대부터 무상 의료와 무료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물론 그 내용과 수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자부해온 의료와 교육도 1980년대, 특히 1990년대 이래 어려움에 처했다. 북한 당국도 그러한 점을 인정하는 데 그리 인색하지 않다.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가 북한에 대해 본격적으로 협력과 지원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95년 이래 북한에 닥친 극심한 식량 위기가 계기였다. 기왕의, 또는 신설된 시민단체들이 북녘 "인민들"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 처음에는 식량 지원에 집중되었다. 기아로 어려움을 겪는 사회에 사상과 이념을 떠나 식량을 지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민족 이전에 인간에 대한 도리이고 예의였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자연히 알게 된 사실은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북한 사회의 많은 분야가 과거와 달리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의료의 경우도 의료 장비와 시설, 의약품이 크게 부족해졌다. 세운 지 오래 되어 노후해진 병원도 제대로 보수·개축할 수 없었다. 외부 세계와의 교류도 더욱 줄어들면서 의사들은 새로운 의료 지식과 기술에 접할 수 없게 되었다. 보건의료의 총체적인 위기였다. 보건의료의 위기는 곧바로 인간 생명과 건강의 위협으로 연결될 수 있기에 어떤 분야보다도 시급한 복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위기는 어느 사회에든 닥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적인 협력이 중요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과거 어려웠던 시절, 외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보건의료 분야가 특히 그러했다.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도리만도 아니다. 지금 어려운 사람과 사회와 국가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1990년대 중반 이래 국제 사회와 한국 사회는 북한 보건의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초기에는 의약품과 의료 도구 지원 위주였다. 그 뒤에는 그러한 물자를 만들 수 있는 생산 시설과 병원의 증·개축에도 지원과 협력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의료 지식과 기술을 전습하는 사업도 병행되었다. 적지 않은 한국 의사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그곳 의사들과 함께 수술 등의 진료를 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교환해 왔다.
필자도 지난 2001년부터 1년에 몇 차례씩 북한을 방문하면서 보건의료 협력 사업에 작은 힘을 보태어 왔다. 그러면서 가장 절실하게 체득한 것은, 오인동 선생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신뢰와 역지사지와 소통의 소중함이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오랜 동안 떨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오해도 없지 않았던 남북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간에 신뢰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 신뢰가 싹트려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상대방의 자리에 서려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주 만나야 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남북 간의 보건의료 협력 사업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성과는 서로 간에 신뢰가 형성되고 그러면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도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최근 2년 남짓 사이 남북 정부 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보건의료 협력 사업도 거의 중단된 상태이다. 의약품과 의료 소모품 지원도 끊겼고 병원과 약품 시설 증·개축과 신축도 멈추었다. 결핵약 공급이 끊겨 내성 환자가 더 많이 생기는 일조차 일어났다. 물론 그 동안 어렵게 이루어져온 남북의 신뢰가 하루아침에 파탄나지는 않을 것이지만 교류 중단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신뢰 관계에도 위기가 닥칠 수 있다. 그러한 위기를 막아 주고 있는 것이 오인동 선생과 같은 이들의 소중한 활동이다.
이 책을 통해, 1년 반 남짓 만나지 못했던 평양의학대학병원 의사들의 소식을 알게 된 것, 그리고 그 사이 병원이 오히려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아쉽지만 반가운 일이다.
북한의 보건의료를 지원하는 것은 나 자신의 오늘과 내일의 건강을 증진하는 일이다.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21세기에 우리와 바로 붙어 있는 북녘 사회의 건강 상태는 바로 우리의 건강 상태인 것이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5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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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처 꿰매러 나는 평양에 간다
의료지원 나섰다 북 실상 눈뜬
재미동포 의사의 인생 ‘2악장’
통일운동 헌신하는 과정 ‘생생’
“미 의존없는 남북 균형 이뤄야”
수정 2010-09-17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440431.html
천안함 사태로 남북관계가 경색될 대로 경색됐던 지난 6월 그는 평양의학대학병원에서 직접 환자 수술을 주도하며 인공무릎관절 수술법을 북의 의사들에게 전수해주고 있었다. 열흘 넘게 머문 그때의 평양방문은 4번째 방북이었다.
“닥터 오, 평양에 갑시다!” 1992년 가을 재미한인의사회 권영세 회장한테서 난데없는 전화를 받고 오인동(71)은 깜짝 놀랐다. 가톨릭 의대를 나와 1970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20세기 의학계가 이룬 가장 성공적인 3대 첨단의학 가운데 하나라는 인공고관절 치환수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됐고 하버드의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등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 성공을 배경으로 그는 한인동포 권익 옹호와 정치력 신장을 꾀하는 한미연합회 이사장이 됐고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교향악단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방북은 위험했다. 당시 재미동포사회에서조차 “방북 사실이 알려지면 예외 없이 친북인사, 용공인사, 심지어는 빨갱이로 낙인찍혀 동포사회에서 소외되고 경원당했다.”
하지만 ‘미국 시민’이었기에 그나마 그는 평양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평양에 가는 것을 망설여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평양으로 떠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리고 언제든 다시 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내 수술가방을 평양에 두고 오지 않았는가?” 그는 1970년대 중반 인공관절기를 고안하던 시절부터 모아온 각종 관절기와 기구 등 “내 기념비적 자산”을 모두 평양의대 정형외과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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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의사회가 북한과의 지속적인 학술교류 및 의료계 지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기획한 그 탐색방문단의 일원이 된 그때의 경험이 오인동의 인생을 바꾸어버렸다.
전세계를 누비며 눈코뜰새없이 바쁜 세월을 보내던 의사 오인동은 그 뒤 사재를 털어 북한 의료계를 지원하는 헌신적인 통일일꾼이라는 또 하나의 역정을 펼치게 된다. “모국의 근현대사를 다시 공부했다. 민족사의 재발견이자 분단 대결사의 재인식이었다.”
6월, 천안함 사태로 인한 남북 긴장 속에서도 평양은 조용했다. 청춘 남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연방 탄성을 터뜨리던(천안함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놀이기구들 때문에) 개선문 인근 개선청년공원에서 오인동은 생각에 잠겼다. “진정 여기가 북한인가? 바깥에서 조금만 더 조이면 금방 붕괴된다고 하는, 북한이 맞는가? 잠시 혼란스러웠다. … 북한이 내일모레 망한다고 떠들어대는 지도자나 내외 언론인들은 내가 못 보는 무슨 다른 것을 보고 그런 얘기들을 하는 것일까?
반면 오랜 세월에 걸쳐 북한을 연구하고 방문한 사람들이 북한은 곧 망할 거라고 말하는 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북은) 망하기는커녕 앞으로 더 발전해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강하게.”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
지난해 5월에도 그는 평양의대병원 고관절 환자 수술대 앞에 서 있었다. 오인동은 1992년과 1998년, 그리고 2009, 2010년 4차례의 방북 체험을 차례로 기술하면서 북이 여전히 어렵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는 오히려 호전돼 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방북 때마다 깊어지고 넓어진 그의 북한 실상 인식 수준의 발전 정도를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문한 대로 그런 대북 인식이 “분단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한 재미동포 의사의 감성적이고 이상적인 감회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마음이 따뜻한 그의 머리는 냉철하다. 그는 세계경제 10위권대에 오른 남쪽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통일과정에서도 남쪽의 역할이 더 클 것으로 기대하며, 북의 과오나 못마땅한 부분에 대해서는 북 당사자들 면전에서 거침없이 지적한다. 그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다. “나는 세상사 모든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신뢰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는다.”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은 그런 소통 체험들을 기록한 한 편의 논픽션 드라마다. 30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이젠 칠순에 든 재미동포 오인동이 50대 초반의 어느날 의사에서 조국통일운동가로 변신한 이후 20년간의 역정을 4번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방북 체험기를 중심으로 되짚어 보는 책이다. 북의 여러 의료 현장과 틈틈이 돌아본 다양한 생활 현장에서 그가 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순수함과 순박함과 인정이다. 그리고 그의 방북활동을 떠받친 에너지는 그들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다.
“밖에서 보면 남과 북처럼 한심한 나라도 없다”고 오인동은 얘기한다. 조국의 분단 현실을 재인식하면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이 분단 비극을 낳은 주요 당사자임을 발견했고, 그런 미국에 자신들의 운명을 내맡긴 채 서로 헐뜯고 있는 남과 북의 행태를 안쓰러워하고 비감해한다. 조국의 분단 상황이 해외동포들의 삶도 굴곡지게 만들고 있는 현실에도 눈을 뜬 그는 조국의 분단 상황 해소와 미국의 발전적 변화가 동전의 양면임을 자각하기에 이르렀고 그런 변화에 기여하는 것을 여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분단의 멍에를 져야 한다는 당위성과 책임감이 있다. 이 멍에를 내려놓지 않고는 그 누구도 자유로워질 수 없다. 부정하려 해도 달아날 길 없는 우리의 숙제다. … 남과 북이 한발씩 굳게 딛고 균형을 이루어 서면 모국의 앞날이 창창하리라 믿는다.” 그는 철저한 낙관주의자다.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는 그가 열심히 펼친 통일운동의 일환이자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뒷받침한,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토론자로 나섰을 때의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북한 방문 뒤 통일의 상대방인 북녘은 미국과 적대관계이고, 남녘은 미국과 동맹이라는 이 묘한 삼각관계, 그 속에서 어리석게 희생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참담함이 실질적으로 보였다. … 나로서는 놀라운 역사의 재발견이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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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2010
■ 지은이와 함께 / 오인동 박사
한승동 선임기자
“북의 중국의존 방치 말아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그가 고친 것은 비단 북녘 동포 환자들만이 아니라, 남과 북의 병든 마음이었다”며 오인동의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책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가 말한 대로 통일이라는 대업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신뢰에서 시작될 것이기에.”
1939년생인 오인동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이다. 38도선 이남이어서, 전쟁이 나면서 서쪽 바다 끝 덕적면 백아도와 인천 등지에서 피난 시절을 보냈지만 ‘이산가족’은 아니다.
군의관 3년 복무 뒤 미시간대 인턴십을 거쳐 클리블랜드 의대 수련의로 당시 특수과로 인기가 높던 정형외과를 공부한 뒤 하버드대 의대로 가서 교수단의 일원이 됐다. 매사추세츠공과대 생체공학부와 합동으로 인공관절 수술법을 개발하고 고관절을 연구하는 “기념비적인 실험”을 통해 많은 학술연구상을 받고 11종의 발명특허까지 얻어 미국 최대 아시아계 포털 웹사이트 ‘골드시’(www.goldsea.com)가 의료 부문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계 전문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인공관절 분야는 심장수술, 장기이식과 더불어 20세기 3대 첨단의학 분야였다.
세계를 무대로 뛰어다니던 그때는 너무 바빠서 북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강의나 강연 때 미국 국적의 그는 “당신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고,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인들은 내가 코리아 태생이라고 하면 사우스(남)냐 노스(북)냐를 꼭 물었다.”
1992년 첫 방북서 현실 직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1992년 북에 갔다 온 뒤 조국의 역사 공부를 다시 시작한 그는 1998년 두 번째 방북 무렵엔 동포 사회에서 “나 모르면 이상한 사람”이 될 정도로 통일 관련 글쓰기와 토론 등에 열성적이었다. 도널드 그레그, 셀리그 해리슨, 브루스 커밍스 등이 그의 친구가 됐다. “바쁘게 세상을 돌아다니며 온갖 것을 다 해줬으면서 정작 북의 어려운 동포들에겐 뭘 해줬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1992년에 가서 본 그쪽 사람들의 순수함과 순박함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들도 새로운 변화를 갈망했지만 전혀 여건이 되지 않아 실로 안타까웠다.”
비용은 다 자신이 번 “생돈”으로 충당했다. 항공료나 호텔비, 음식비 등을 북쪽이 대준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렇지 않단다. 1992년도엔 그랬으나 그 이후 북의 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모든 비용을 그 자신이 댔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전화 인터뷰를 한 지난 15일 아침에도 그는 병원에서 수술 2건을 집도했다. “응급수술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수술을 원하는 시간에 하는 최고가의 수술”이란다. 그렇게 번 돈을 그는 그렇게 쓰고 있다.
그는 남쪽이 큰 실수를 하고 있다고 했다.
- “(대북 대결정책으로) 얼마나 큰 손해를 보고 있나? 한 해 수백억달러를 날리고 있지 않나?
- 이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나?
- 이렇게 능력 있고 여유 있는 나라가 어려움에 빠진 북의 동족을 왜 이런 식으로 대하나?
- 어린애 산수로 셈하더라도 개성으로 금강산으로 자기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버리고 있다.
- 남쪽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민족사적으로 봐도 정말 다행이다.
- 북이 중국에 의지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
- 북이 경제를 남에 의존해가면 자연히 남북은 하나가 될 것이다.
- 졸부근성 버리고 접촉하고 대화하면 절로 신뢰가 쌓인다.
- 남쪽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4404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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