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6

식민지 경험과 한국의 근현대사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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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자료-근현대

식민지 경험과 한국의 근현대사

두루미

2008. 8. 30.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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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경험과 한국의 근현대사

- 정 재 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1. 왜 식민지 경험인가?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제국일본의 식민지였다. 식민지시기는 어느 날 갑자기 불어와 헛개비처럼 사라져버린 회오리바람이 아니라, 그 처지로 전락하는데 오랜 기간의 전사(前史)가 있고, 또 그 질곡(桎梏)에서 벗어나는데 오랜 기간의 후사(後史)가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시기는 한국 근현대사라는 옷감을 짜는데 날줄 혹은 씨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국이 식민지였을 당시 세계의 여러나라가 그와 유사한 처지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국인의 식민지 경험도 대다수의 세계인과 공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시기에 관한 연구는 한국의 근대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근대사,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된 양자의 현대사를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의 역사학은 세계 역사학의 흐름에 맞추어 식민지시기의 성격에 대해 여러 가지 담론을 쏟아내고 있다. 연구자에 따라 입론(立論)의 주지(主旨)는 ‘식민지적 근대성론’, ‘식민지 근대화론’, ‘탈근대론(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론(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으로 각양각색이지만, 제국일본의 식민지지배를 ‘근대성’이라는 시각에 입각하여 새롭게 조명해보려고 하는 문제의식에서는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식민지시기를 ‘근대성’이라는 키워드로써 조망하는 것은 2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한국사의 정체성(停滯性)과 타율성(他律性)을 강조한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을 극복하는 것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과제였던 당시의 한국사학계에서 식민지시기에 대해 ‘근대성’을 운위(云謂)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역(叛逆)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식민지시기의 연구는 한국의 발전에 대한 일본의 왜곡, 한국의 저항에 대한 일본의 탄압 등을 서로 대립시켜 파악하는 것이 주류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 한국사학계를 풍미한 민족주의 역사학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이런 방식의 연구를 한껏 부추겼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미소냉전의 종언이라는 세계사의 전환을 배경으로 하여 식민지시기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연구경향은 급격히 변화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물론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각종 포스트주의와 문화이론이 폭발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연구자들의 담론도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창한 고담준론(高談峻論)에서 마을과 개인이라는 미세한 신변잡설(身邊雜說)로 바뀌어갔다. 한국의 식민지 연구가 세계의 식민지 연구와 연구방법을 공유하면서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식민지시기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여러 각도에서 묻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상황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식민지시기 연구를 ‘근대성’이라는 시각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하고, 논의를 좀더 심화시키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화제는 주로 식민지 근대를 둘러싼 몇 가지 담론의 주지(主旨), 한국 근현대사에서 식민지시기가 차지하는 위치, 식민지 근대의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사적 특수성 등이 될 것이다. 나의 천학비재(淺學菲才)함으로 인해 논의는 주로 사회경제사 연구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 글이 세계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한국의 식민지시기를 세계사와 한국사의 상호관련 속에서 새롭게 재검토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 식민지시기의 ‘근대성’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역사연구의 시각과 지향은 당시대의 과제와 역사가의 의식에 크게 좌우되게 마련이다. 해방 이후 자주적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마당에서 진행된 한국사학계의 식민지시기 연구는 제국일본이 만들어낸 식민주의사관을 비판하고 극복하는데 주력했다. 1960년대 이래의 ‘내재적 발전론’ 또는 ‘식민지 수탈론’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연구가 담고 있는 의미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후기 즉 17-18세기 한국의 각 분야에서는 자본주의 맹아라고 볼 수 있는 요소가 자생적으로 등장하여 근대사회로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변동은 서구 역사의 발전법칙이 한국역사에도 관철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내재적 발전은 19세기 중반 이래 제국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 왜곡 또는 압살되었다. 특히 식민지시기에는 제국일본의 억압과 수탈로 인해 한국의 사회경제는 몰락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저항과 해방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위와 같은 관점의 식민지시기 연구는 제국일본이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군수공업화정책 등을 통해 토지, 미곡, 자원, 인력 등을 얼마나 많이 수탈했는가를 밝히는 데 힘을 쏟았다. ‘식민지 수탈론’이라 불리는 연구가 그것이다. ‘식민지 수탈론’은 ‘내재적 발전론’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일제 침략이 없었더라면 조선후기의 자본주의 맹아(萌芽)가 더욱 성장하여 근대 자본주의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은 표리가 되어 한국민족의 항일투쟁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해방운동은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한 영역이 되고, 근대화성취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목표가 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학계에서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연구자들이 나타났다. 주로 한국근대경제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위와 같은 연구가 조선후기의 역사전개를 서구의 역사경로에 꿰맞추기 위해 근대적 요소만을 부조(浮彫)시켜 실증 면에서 약점이 많다고 비판했다. 또 성장하던 자본주의 맹아가 제국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 어떻게 변용되어갔는가를 밝히지 못함으로써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정합적(整合的)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두 가지 이론은 근대사회의 발전과정에서 국제적 계기 혹은 외래적 요소가 수행한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제국일본의 침략과 억압에만 눈을 뺏겨 그것의 문명화 작용 즉 개발의 측면을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위의 비판론자들에게 꼭 들어맞는 명칭은 아니지만, 이런 성향의 연구를 일단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부르겠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시기를 연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수탈과 억압’이 아닌 ‘개발과 성장’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개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개발을 통한 수탈’이라는 의미에서의 ‘식민지 개발’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인이 근대적 농민, 노동자, 자본가 등의 계급으로 변신한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개발’이다. 후자는 한국인을 식민지의 지배 대상 또는 저항 주체로서만 보지 말고, 식민지적 왜곡을 내포하면서도 근대적 민족으로서 자기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전면적 붕괴라는 세계정세와 한국 자본주의의 지속적 발전이라는 국내사정을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례로서 적극적․긍정적으로 활용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지(論旨)를 식민지시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초점을 맞추어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은 식민지시기에 본원적 축적이 급속히 진전되어 자본-임노동 관계가 확대되고 공장제 공업이 급속히 발흥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한국경제의 전개를 규정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 소유의 공장과 한국인 노동자의 숫자가 대폭 증가하고, 제한된 분야이기는 하지만 근대적 설비를 갖춘 기업이나 기능공 및 기술자도 출현했다. 한국인의 ‘자기성장’은 비록 식민지 체제의 제약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괄목할만한 현상이었다. 식민지시기의 이러한 변화는 한 번 일어나면 쉽게 되돌릴 수 없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로 이어지는 역사적 조건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바탕에 깔면서도 식민지시기의 사회경제를 경제성장사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국민경제계산의 틀에 맞추어 식민지의 경제통계를 정리하여 경제성장을 수량적으로 파악하고, 근대경제학의 개념과 분석 방법을 이용하여 성장요인을 구명한다. 그 결과 국민소득과 국제수지 등의 매크로 데이터가 정비되고, 식민지시기와 해방 이후의 경제상황을 연속 혹은 단절의 측면에서 검토할 수 있는 자료를 얻게 되었다. 또 한국경제를 일본제국주의의 경제권에 속한 다른 지역과 비교함으로써 그 특질을 구명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식민지에서 성립한 자본주의란 결국 본국 자본주의의 이식이기 때문에 한국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일본 자본주의의 연장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경제는 일본이 주도한 동아시아 지역 경제변동의 일환으로서 파악해야만 그 특성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위와 다른 견해를 가진 한국사 연구자 중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거세게 비판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비판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한국에서 제국일본의 ‘개발을 통한 수탈’을 말하면서도, 실은 제국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수탈과 차별의 측면은 무시하고 발전과 성장의 측면만을 부각시킨다. 또 한국인이 지식ㆍ기술ㆍ관리 등의 능력을 축적하여 근대민족으로서 성장해갔다고 말하지만, 식민지체제가 강고해질수록 자주적 민족의식이 쇠퇴하여 ‘친일’이 내재화되었다는 측면을 무시한다. 또 그들은 식민지시기의 한국경제의 발전을 한국인 경제의 발전이라는 잘못된 등식에서 출발한다. 식민지시기 한국농민의 소득변화를 보면, 농업투자로 인한 생산성 증가보다 일본인의 토지소유 증가율이 훨씬 높아서, 농업개발에도 불구하고 농업생산에서 차지하는 한국인 몫은 오히려 감소했다. 광공업의 개발과 더불어 한국인 노동자 수는 증가했지만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또 전시체제 말기 직전까지 성장의 경향을 나타낸 한국인 기업도 대부분 영세규모인데다가 특정한 분야에 몰려 있어 한국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기업의 수적 증가로 인한 소득창출도 크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인 기업은 한국에 투자하여 엄청나게 높은 수익을 올리면서 한국경제의 명맥을 장악해갔다. 그러므로 개발이라는 것은 토지ㆍ노동ㆍ자본의 세 가지 생산요소 가운데 일본인이 토지와 자본에 대한 지배력을 급격히 높여간 과정이었고, 한국인은 주로 노동 공급의 확대를 통해 거기에 참여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산업구조의 고도화나 양적 성장의 지표를 가지고 식민지 경제를 분석하는 것은 부당하다. 식민지를 독립된 국민경제인 것처럼 다루면 그 속에 감추어진 민족모순을 드러낼 수 없다. 또 해방 시점에서 한국에 남은 일본인 자산의 가치도 식민지 경제구조의 와해과정 및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급격히 줄어서, 1950년대 말까지 미국이 한국에 원조한 액수의 7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식민지의 물적 유산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시기의 연구는 오히려 일제의 수탈을 더욱 명백히 밝힘과 동시에, 그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저력이 어떻게 관철되어 갔는가를 구명해야 한다. 즉 식민지시기의 변화를 일제 지배의 소산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이 산업ㆍ교육ㆍ사상ㆍ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차별에도 좌절하지 않고 분투한 것으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식민지시기 연구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식민지 근대성’을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ㆍ민족ㆍ계급 등을 중시하던 거시(巨視) 담론은 약해지고 권력ㆍ문화ㆍ지식 등을 강조하는 미시(微視) 담론이 유행하게 되었다. 탈민족(脫民族)과 탈국가(脫國家)를 주창하는 포스트모더니즘도 등장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에서 종래 유행했던 사회사연구 등의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려는 연구방법론이었다. 사회사의 패러다임은 거대 구조와 그것의 형성 과정에 역사서술의 초점을 맞추고, 역사를 통일되고 일관된 체제로서 파악하며, 사회경제적 결정론에 입각하여 인과적 분석과 설명을 시도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은 역사가 인식하고 서술하려는 대상, 즉 역사적 현실이 본질적으로 매우 복합적이고 다채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도 대단히 불투명하고 모호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현실을 하나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일률적으로 설명하거나 통일된 체계와 의미를 부여하는 식으로 연구하는 것은 역사가 원래 지니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일이다. 특히 역사를 전체로 귀일(歸一)하는 하나의 일관(一貫)된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은 목적론적이고 결과론적인 관점에 불과하다. 역사는 단선적인 발전과정을 거치는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그 흐름이 서로 상충하고 모순되기도 하는 ‘복수의 역사’들로서 이루어진다. ‘복수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을 무시하고 역사를 단 ‘하나의 역사’로 축소하거나 통합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 선 역사연구자들은 자본주의․국가․민족․계급 등과 같은 거시적 언설 대신에 육체ㆍ욕망ㆍ문화ㆍ지식ㆍ권력 등과 같은 미시적 용어를 구사하여 민족주의에 경도된 식민지 연구를 비판한다.

탈국가와 탈민족을 지향하는 한국근현대사 연구자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의 신봉자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의 역사관에 프랑스 현대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포스트모던의 사고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은 틀림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민족이나 계급 등은 본질적으로 언어와 언설이 만들어낸 개념으로서,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고 인식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식민지시기의 연구는 정치ㆍ경제ㆍ제도 차원의 근대화 분석이 아니라, 감옥ㆍ경찰ㆍ군대 등의 지배기구 또는 학교ㆍ병원ㆍ일터 등의 일상기구를 통해 제국일본이 어떻게 대중을 통제해왔는지를 밝혔다. 또 지배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지식의 창출과 전통적 관념의 활용이나, 신체ㆍ정신ㆍ여가 등에 내포되어 있는 식민지 근대의 특질을 구명했다. 도시화의 진전에 따른 생활의 변화와 일하는 여성의 처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연구는 경제 영역에서 개발이냐 수탈이냐를 둘러싸고 전개된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논의를 모든 사회 영역으로 확대시키고, 전통과 근대, 식민지성과 근대성, 근대사와 현대사 등을 서로 관련시켜 파악함으로써 식민지시기 연구에 자극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식민지시기 연구는 아직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충분히 파악하고 미래의 도정(道程)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한 것 같다. 통일 민족국가 건설의 근대 프로젝트를 아직 달성하지 못한 한국에서 국가ㆍ민족ㆍ계급을 경시하는 역사연구가 근대를 극복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데 얼마나 기여할지 의심스럽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3. 한국사 속에서 식민지시기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한국의 근현대는 크게 보아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제국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와 미소(美蘇)의 대결에 추수(追隨)한 남북분단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물론 한국사의 전개와 맞물려 일어난 현상이기 때문에 내재적 특징과 외래적(外來的) 특징이 날줄과 씨줄처럼 얽힌 성격을 띠고 있다. 또 세계의 태반(太半)을 차지하고 있는 후진국은 대개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를 경험했으므로, 한국의 근현대사는 세계사에도 관통하는 특징을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식민지시기를 근현대사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이미 100년 가까운 논쟁의 기록이 있다. 좀 난폭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 ‘식민지자본주의사회론’ 등의 몇 가지 담론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제국일본 아래 한국사회는 제국주의자본, 예속자본, 민족자본, 반봉건제 등의 여러 경제범주가 서로 규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중첩되어 있다고 본다. 그 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 경제에 의해 지지‧보호‧이용되는 부문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반봉건제(半封建制)의 ‘반(半)’이란 세계자본주의에 의해 규정되면서 창출된 전자본주의적(前資本主義的) 토지소유관계를 가리키므로, 반봉건제란 일반적으로 전근대적 지주제를 의미한다. 식민지에서의 제국주의는 권력의 장악과 행사를 통해 경제관계 전반에 압도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식민지반봉건사회는 상부구조로서의 권력이 식민지적이고, 그 토대의 주축이 반봉건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토대 그 자체에서 식민지성과 반봉건성이 동시에 관철되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식민지반봉건적인 사회성격은 해방 이후 남북한에서 실시한 토지개혁과 농지개혁 등을 겪으면서 해소되었다.

반면에 식민지자본주의사회론은 일제하의 한국사회가 금융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이고, 반봉건적인 지주제의 확대ㆍ강화라는 농업변동조차도 일제 금융자본의 포괄적 지배에 규정되어 일어난 현상으로 본다. 한국사회는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을 통하여 본원적 축적과정을 경험하였으며, 1930년대에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막대한 농업인구가 국내외의 특정지역과 산업부문으로 단기간에 급속히 이동하는 사회적 구조변화가 일어났다. 중소공장의 대량 발생‧발전과 동시에 대규모 공장화의 경향이 진전되고, 경성을 비롯한 도시와 농촌에서 광범위한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분업이 성립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후반 이후 한국사회는 러일전쟁기의 일본과 비슷한 수준의 자본주의사회를 형성했다. 당시 한국경제는 도시기능이 소수 대도시로 극단적으로 집중하고, 영세공업이 박약한 반면 대공장이 압도적 우위에 서서 대칭을 이루고, 자본과 기술에서 일본에 강하게 의존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영역에서 한국인의 활동이 급격히 증대 하는 것과 같은 독자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특성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경제의 전제가 되었다.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역사학계와 사회과학계는 대개 한국자본주의가 미국과 일본의 중심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아무리 용을 써도 ‘저개발’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른바 종속이론에 의거한 세계체제론적 분석이 유행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한때 위세를 떨쳤다. 그런데 그 후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을 지속하고, 그것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배적 범주가 된 작금의 현실 속에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거의 생명력을 잃었다. 반면에 식민지시기의 성격에 관한 담론은 자본주의사회론으로 수렴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식민지자본주의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각광을 받고 있다.

식민지자본주의 논쟁에서는 민족경제론과 이중구조론이 대립하고 있다. 민족경제론은 식민지시기의 한국경제가 일본자본의 진출에 의해 형성된 제국주의 경제와 한국민족의 생활기반이 된 민족경제의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전자의 확대가 후자를 왜곡 또는 위축시키는 대항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편 이중구조론은 식민지 경제의 재래적 전통부문과 외래적 근대부문 사이에는 관련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즉 두 부문은 기술이나 자본 규모 또는 생산성에서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담당자들도 민족별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외부의 요구에 강요당해 비록 수출산업이 성장하더라도 그것은 식민지의 대다수 주민과는 관련이 없는 비지(飛地) 경제를 형성하는 데 그친다고 주장한다.

민족경제론이나 이중구조론은 민족에 따른 차별이 주요 모순인 식민지 경제구조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개념을 제공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경제통계 분석 등이 진척됨에 따라 이중구조론은 사실관계의 증명에서 설득력이 약화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권력이 일원적으로 관철되고 전국이 하나로 결합된 경제권이 형성된 마당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경제를 인위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경제사학계에서는 식민지시기를 자본주의로 변신하는 과도기로 파악하는 시각이 발언권을 강화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 근현대의 사회구성을 반식민지ㆍ국가적 농노제사회(1876~1910)→식민지ㆍ과도적사회(1910~1935)→식민지ㆍ자본주의사회(1935~1945)→종속자본주의사회(1945 이후)로 파악한다. 그들은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를 식민지자본주의사회로 규정하고, 그때 나타난 근대적 지주소유, 공업화정책, 노동자 형성 등의 변화가 해방 이후의 종속자본주의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미국 등 서구의 한국사학계는 위와 같은 여러 담론에 별로 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탈민족주의ㆍ탈식민주의ㆍ탈근대주의의 시각에서, 위의 담론들이 근대주의라는 일원론적ㆍ단선론적 발전논리로써 역사를 파악한다고 비판한다. 즉 ‘식민지 근대화론’ 등은 봉건제→자본주의 또는 저개발국→중진국→선진국이라는 발전논리를 전제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근대화를 역사의 진보ㆍ발전으로 파악하는 헤겔주의적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들은 식민주의ㆍ근대성ㆍ민족주의를 상호 보완적 개념으로 활용함으로써 식민지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에서의 근대성은 한국인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라 직접ㆍ간접으로 참여함으로써 구축된 것이다. 또 식민지 주민의 아이덴티티는 단순히 민족만이 아니라 계급ㆍ성ㆍ지역ㆍ신분 등 다양한 차원에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들은 식민지시기의 한국자본주의에서 내재적ㆍ전통적 요소를 부정하고 외래적ㆍ일본적 영향을 중시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의 한국자본주의를 언급할 때는 식민지시기부터 형성된 자본주의적 동력에서 그 연원을 찾는다. 탈근대주의적 역사인식에 기초한 그들의 식민지사회론은 최근 국내 학계에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역사의 전개에서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설명할 때 경로의존성(經路依存性)을 중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식민지 경제가 일본인이나 일본자본에 의해 주도되었다고는 하지만 전통시대 이래 한국경제의 상황이나 한국인의 대응에 크게 규정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식민지기에 일어난 한국경제의 변화가 해방 이후 한국경제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각 시기를 관통하는 역사의 연속적 측면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무역과 투자, 기술과 노동, 교육과 인력, 법률과 제도 등은 좋은 분석대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외래적인 충격과 내부적인 변화의 접점에서 한국인이 어떤 사고와 행동을 가지고 어떤 규범과 양식을 만들어갔는가를 좀 더 철저하게 구명할 필요가 있다.




4. 세계사 속에서 식민지시기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한국의 식민지 근대는 다른 나라의 사례에 비춰 어떤 유사점과 상이점을 갖고 있을까? 그것은 식민지 지배자로서의 제국일본과 피지배자로서의 한국의 특성에 좌우되게 마련이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서구 선진 제국주의 국가의 경험을 배우면서 그들과 동아시아에서 마지막 단계의 영토쟁탈경쟁을 벌여야만 하는 처지였다. 제국일본은 여기에서 승리하여 다른 제국주의와는 달리 지리적・인종적・문화적으로 근접한 지역을 식민지로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한국은 2천년 이상 독립국가로서 잘 정비된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통째로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또한 다른 식민지와 구별되는 특성이었다. 이런 연유에서 제국일본은 한국에서 직접통치를 통한 동화정책과 개발정책을 강권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와 경제성장 등의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도 다른 제국주의 및 식민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한국의 근대성을 규정한 일본 제국주의와 한국 식민지의 특질에 대해 약간 부연하겠다.

일본 제국주의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며 안전보장을 실현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군사적․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한국의 침략과 지배는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따라 이루어져 가혹하고 잔인했다. 높은 수준의 정치체제와 문화역량을 지녔던 한국인은 이에 대해 치열하게 저항하고, 제국일본은 이를 탄압하기 위해 더욱 난폭하게 억지력을 휘둘렀다. 영국의 인도 지배 등 다른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경제적 이익을 가장 중시한 것과는 대비되는 성격이었다. 제국일본도 물론 한국의 지배에서 경제적 이득을 함께 추구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군사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을 동시에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지배는 기본적으로 프랑스 제국주의와 같이 직접통치 방식을 취했다. 영국이 인도 등에서 취한 간접지배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제국일본은 한국에서 무력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실현하고, 식민지의회와 같은 자치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의 궁극적 목표는 과도하게 발달된 무소불위의 지배체제 유지와 이에 절대 복종하는 황국신민의 형성이었다.

일제는 한국통치의 기본방침으로서 한국인도 일본인과 똑 같이 천황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표방하고(一視同仁),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이 완전히 일본인이 될 것을 요구했다(內鮮一體). 그렇지만 제국일본이 제시한 이러한 동화 논리는 처음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인과 한국인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다. 제국일본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서구에 대한 열등감과 식민지에 대한 우월감이 교차하는 이중적 문화담론을 전파했다. 따라서 제국일본의 동화정책은 식민지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한국인과 일본인의 전략적 평등, 즉 권리의 평등을 수반하지 않고 의무의 평등만을 강요한 사탕발림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제국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일본의 회유와 분열 정책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 결과 해방이 되어 새 국가를 건설할 때 지도자의 빈곤과 정치력의 결여라는 문제에 부딪혔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역이 대체로 민주주의 사회를 형성한 것에 비해, 제국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국이 전체주의 사회를 경험한 것은 좋은 대비라고 할 수 있다.






5. 식민지시기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국제화ㆍ세계화의 물결이 지구를 감싸고 있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하나의 화두(話頭)에 불과했던 이 말이 이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규제할 정도로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이런 현상의 본질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교통통신과 국제교류의 발달로 인해 지구상의 정보ㆍ물자ㆍ자본ㆍ인간ㆍ문화 등이 실시간대로 유통되어 국가ㆍ민족ㆍ지역의 장벽이 그만큼 낮아진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사상 처음으로 지구촌의 출현을 눈앞에 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인간의 역사관ㆍ세계관에도 큰 변화를 촉구하는 요소이다.

한국의 식민지시기 연구는 중요하다. 이 시기의 연구를 통해, 한국은 왜 제국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식민지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으며, 해방 이후 어떤 사회로 바뀌었는가? 등의 물음에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한국사학계에서 식민지 근대성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성은 역사의 여러 요소가 구체적 관계 속에서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중층적․복합적 성격의 현상이지만, 근대성 그 자체는 일단 자기해방의 힘이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식민지에서 근대성은 거꾸로 통제와 억압의 힘으로도 작동하기 때문에 그것의 이중적 성격도 인정해야 한다.

한편 서양의 근대는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와 결합되어 있으므로, 식민지 근대성 속에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보편성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성과 탈근대성 또는 탈식민주의를 논하는 것은 한국과 서구의 연결고리를 구명하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식민지시기에 대한 연구는 한국사와 세계사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그 성격을 비교 검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식민지시기 연구가 한국과 세계의 근현대사상(近現代史像)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 역사교사 연수자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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