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5

김대중의 길, 자유와 평등의 공진화, 그 역사성 < 스탠다드

김대중의 길, 자유와 평등의 공진화, 그 역사성 < 김대중 < 기사본문 - 스탠다드



김대중의 길, 자유와 평등의 공진화, 그 역사성
주대환의 강연 《조봉암과 대한민국의 영미 진보 유전자》
한국진보의 지성사 및 국제적인 배경을 밝혀
'좌파=진보, 보수=우파'라는 납작한 2분법의 고질병을 벗어나야
집단주의, 국가주의에는 미래가 없어
조봉암-김대중의 '자유평등시장주의'가 우리의 미래 수군작 서사제도연구자
입력 2023.05.24 


1. 주대환 발언의 중요함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의 주대환 부회장이 지난 13일 경북대 아시아연구소 학술대회에서 《조봉암과 대한민국의 영미 진보 유전자》라는 제목으로 기조강연을 했다. 이번 강연에서 한국진보의 인류지성사적인 맥락 또는 국제적인 배경을 밝히는 중요한 그의 발언들을 뽑아추려보자면 아래와 같다.


세계적으로는 사회주의는 중도좌파(left of center)를 의미하고, 조지 오웰이 상징하듯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데 가장 날카롭고 반공(反共)전선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른 한국은 사회주의를 사회주의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영미의 보수주의가 아닌 진보주의의 유전자가 깊이 심어졌으며, 그 유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조봉암이었다.

1946년 6월 조봉암의 전향은 친소 공산주의로부터 영미 진보, 사회주의로의 전향이었다.

전후(戰後) 조봉암은 ‘진보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으며 당 기관지의 제호(題號)로 중앙정치(中央政治)라고 하고 자신의 노선이 ‘center of center’임을 강조하였습니다.

한국 전쟁 직후, 1954년에 죽산이 쓴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영국 노동당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미(英美)식 의회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조봉암이 죽었다고 영미 진보의 유전자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서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만들고, 문화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유와 인권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친중 친북 주사파가 우리나라 진보를 오염시키고 있는 이 때, 건국 당시에 조봉암이 대표하였던 중도좌파 영미 진보의 역사가 재발견되어야 할 시급한 현실적 필요가 있습니다.

영미 진보의 유전자를 되살린 대한민국 중심주의 중도좌파가 서야 나라가 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공존하고 외교 안보 문제에서는 협력하는 그런 성숙한 선진국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습니다.

주대환의 이러한 조봉암이해 또는 정치(이념)성향 분류는 이제까지의 한국사회 대다수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 역사적인 배경 또는 뿌리를 알지 못한 채, <진보= 좌파= 빨갱이= 조국기부대= 좌좀> vs <보수= 우파= 태극기부대= 수구꼴통>이라고 대부분은 편갈라서 생각들 했다. 그렇게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타자화하고 비사람화해 온 것이 평균일반이었다. 주대환의 조봉암강연은 이런 납작한 흑백2분법 프레임의 무지성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편집자주: 이 글 속 "=" 철자표기는 동일시라기 보다는 근사값을 의미함.
출처: 우리가 몰랐던 국회사







2. 주대환의 지론인 <영미진보= 안티코뮤니티스트 레프트/반공좌파= 민주적인 사회주의>의 역사성

주대환의 이런 정치성향분류는 오래된 그의 지론이다. 2019.10.23 주간조선의 기사 《뉴라이트와 뉴레프트의 대화, 한국의 진보와 386을 말하다》에서 주대환은 아래처럼 말한다:


진보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영미 쪽에 근원을 둔 ‘영미진보’와 러시아, 중국을 발원지로 하는 ‘중러좌파’는 다르다. 굉장히 다르다. 죽산 조봉암의 전향은 바로 중러좌파로부터 영미진보로의 전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도 영미진보가 되려 했다. 현 정권을 주도하는 386세대는 다르다. 그들은 중러좌파다. 거기에 뿌리를 둔 세력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군대를 파견해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자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준 국가와 당시 그 국가들의 집권당을 보자. 영국은 노동당 정권이었다. 다른 영연방 국가들도 노동당 정부였던 나라가 많았다. 미국은 미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부라고 하는 트루먼 정부였다. 당시 영미 둘 다 진보 정권이었단 얘기다. 공산주의자와 영미진보의 차이가 이렇다. 유럽에서 ‘나는 사회주의자(socialist)’라고 소개하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엄격히 진영이 다르단 얘기다. 한국에선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생각한다.

‘동물농장’을 쓴 조지 오웰의 글을 읽어봐라.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다. 그런데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파시즘으로 봤다. 개인의 자유, 인권, 평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고 제도적으론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언론의 자유를 기본 전제로 한다. 이 바탕 위에서 좌니 우니 지향하는 자들과, 그런 문명의 기초를 배제하는 자들은 크게 다르다고 봤다.

서구 기준에선 영미진보와 중러좌파는 이질적·적대적 관계다. 왜 한국에선 섞여버렸을까. 조봉암 같은 영미식 진보주의자를 이승만 대통령이 빨갱이로 몰아서 처형한 건 분명 오점이었다. 사실 중러좌파는 ‘386’그룹의 모습으로 한국 정치에 무시할 수 없는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386의 비중과 색깔이 가장 강한 정권이 바로 문재인 정권이다.

2차세계대전 막바지 1945년 7월 영국총선거에서 애틀리가 이끌었던 노동당이 압승한다. 당시 노동당 안에는 일군의 <민주사회주의자-안티코뮤니티스 레프트>들이 있었다. 또한 그당시 루즈벨트가 죽은 뒤 미국정부를 떠맡은 트루먼의 민주당 안에도 <리버럴-프로그레씨비스트>들이 있었다. 이들 영미의 두 진보세력은 <<대서양을 넘어서서 융합/콘버전스>했다. 이러한 영미진보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융합을 "냉전 속의 "제3세력/써드 포스"이라고 학술장에서는 부른다.

(※ 그 근거로는 아래 첨부한 「2021 김일년_대서양 좌측통행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민주당 진보파와 영국 노동당 좌파는 어디서 만났는가.pdf」 파일을 참조바람)
첨부파일 : 2021 김일년_대서양 좌측통행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민주당 진보파와 영국 노동당 좌파는 어디서 만났는가.pdf

2차대전 뒤라면 대영제국은 이미 한물 간 상태였다. 반면 미국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때였다. 그럼에도 대서양 양쪽에서는 버나드 쇼 와 시드니 웹 부부 등의 페이비언사회주의, 케인지언 등과같은 영국 지성들이 여전히 그 지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국방식도 소련방식도 아닌 영국방식으로 인류(미래)문명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영국식 복지국가" "제3세력" "수정자본주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등등은 문명서사전쟁에서 어쩌면 영국리더쉽의 마지막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이처럼 대서양을 넘나든 영미정치리더들의 일부는 뜻을 같이함께 했었고, 특히 영국 케인즈 그리고 미국 루즈벨트의 뉴딜 및 그 부인 엘레노어 루즈벨트의 유엔인권선언 초안작성 등은 그러한 <제3새력 또는 사회주의적인 유럽>의 든든한 물적이자 권력적인 빽이었다.
출처: 차이나는 클라쓰

그러나 미소냉전의 거대한 체스판이 발동하기 시작하자, "미국식 자본주의도 아니고, 소련식 공산주의도 아닌, 유럽식 사회주의가 정답이다"라는 이러한 영미진보들의 <제3세력 또는 (민주)사회주의적인 유럽> 서사는 다들 알다시피 별힘을 못쓰고 끝났다.







3. 해방공간의 좌우대립: 냉전cold war이라는 무서운 결정력

20세기 발칸, 카프카즈를 비롯한 동유럽,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를 비롯 전지구의 후진국들의 <네이션스테이트빌딩 곧 국민국가건설>은 늦게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외없이 그 처지는 냉전의 체스판 위 말들이었다.


이들 장기말 앞에 놓인 <네이션스테이트빌딩경로들>은, 소련공산주의경로 아니면 영미자본주의경로, 이 둘이었다. ("민주적인 사회주의= 안티코뮤니티스 레프트= 프로그레씨비즘= 제3세력"의 경로라는 것은 선진국인 영미진보 또는 북유럽 나라들에서나 가능했다) 특히 공산주의의 인기는 당시 엄청났다. 짧은 시간에 수퍼파워가 된 소련공산주의는 대부분의 후진국가의 리더지식인들에겐 유토피아를향한 비전을 제공했다. 전후 지구 상 곳곳 그많은 나라들에서 <공산주의+ 민족주의>가 만발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출처: 차이나는 클라스

한국에서도 이런 냉전의 무서운 결정력은 고스란히 나타났다. 영미자본주의경로를 추구한 이승만, 소련공산주의경로를 추구한 김일성-박헌영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공산적화共産赤化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김일성-박헌영의 비전은 "찬탁반탁투쟁"으로 이어졌고, 이윽고 자존망대 소영웅주의에 빠져서, 6.25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지옥문을 이들이 열어 제꼈다.

이런 냉전의 적대적인 2분법 속에서지만, <영미진보= 민주사회주의= 안티코뮤니스트 레프트= 프로그레씨비즘= 사회주의적인 유럽= 제3세력의 경로>를 해방공간 당시 여운형을 비롯 적지않은 리더지식인들은 추구했다. 이들 가운데 (여운형이 죽은 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봉암이었다>는 것이 주대환의 주장이다. 그러나 냉전의 무서운 적대 속에서, 특히 좌우대립-찬탁반탁투쟁-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그 대부분이 "빨갱이들Reds"로 도매끔당했거나 암살당하는 등 이들은 불행하게도 차례로 제거되었다.


이처럼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의 경로>라는 것을 고민하고 서사화하고 추진하고 실천·실현하려했던 눈밝은 정치리더들의 계통은 비록 역사적인 빽이 약했고 불행했으나 결코 근대한국사에서 그 맥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여운형 뒤의 조봉암, 그리고 조봉암 뒤에는 김대중이 그러했다.

이들 리더를 <자유와 평등의 공진화>를 주장하는 포스트자유주의의 선조들로 복원하고, 그들의 이론·이데올로기·철학을 학술적으로 확립하는 것은 중차대하다. 주대환의 메리트 곧 업적/능력은 이 점에 있다.

(※ 참조로, 저들 1940년대 후반~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닥치던) 1950년대 전반, 영국(나아가 미국) <민주사회주의= 안티코뮤니티스트 레프트= 프로그레씨비즘- 데모크라틱 레프트= 프로그레시브 써드 포스 등등>의 뿌리가 19세기 벤담-밀-다이시 등의 철학적인 급진주의philosophical radicalism이며, 따라서 <사회주의적인 유럽 곧 제3세력> 서사를 이해하려면, 영국 유틸리티주의 철학에대한 이해가 바탕에 깔려야 한다)







4. 국가진보= 평등좌파= 반자유 평등주의의 분화: 엔엘계 공산주의 vs 피디계 공산주의


찬탁반탁투쟁-6.25전쟁을 겪으면서, 모든 평등주의진보들이 도매끔으로 "빨갱이들"로 고정단일화된 사정은 앞에서 얘기했다. 그 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져온 국가보수정부에 맞선 반체제·반정부투쟁 과정에서 이른바 "운동권386" 또는 "중러좌파"라고 불리는 <국가진보= 평등(주의)좌파>가 태어났다. 이들의 자세한 분파형성의 역사는 학생운동사로 다루어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통상적으로 하듯이 그냥 크게 두가지 계열로 나누겠다.

하나는 최대분파인 민족해방계열National Liberation로써 "엔엘" 곧 "종북주사파"인데, 이들의 공산주의철학은 김일성주의이다. 다른 하나는 민중민주주의계열People's Democracy로써 이들의 공산주의철학은 맑스(레닌)주의이다. 이들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 곧 엔엘피디알NLPDR이 이른바 주대환이 말하는 "중러좌파"인 셈이다.

김일성주의이든 맑스(레닌)주의이든, 이들 중러좌파의 정치철학은 <국가(주의)보수들의 권위주의+ 국가(주의)진보들의 공산주의의 한돌덩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 "영미진보= 조봉암= 김대중"이라는 손가락은 <자유평등시장주의= 시장(주의)진보= 시장지향적인 평등주의= 시장지향적인 진보= 자유주의적인 평등주의= 개인주의적인 평등주의= 진보우파= 포스트자유주의>라는 달을 가리키는 것이다.







5. 자유평등시장주의= 진보우파= 개인평등주의= 시장진보= 자유+평등의 공진화= 포스트자유주의를 항하여


앞서 말한 운동권386 피디계열 가운데 일부가 <사회민주주의= 민주적 사회주의= 안티코뮤니스트 레프트= 프로그레씨비즘>을 내걸었는데, 이들이 주대환이 말하는 "영미진보"에 가까운 그룹인 셈이다.

그러나 주대환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은 여전히 "좌파"라는 자기서사/자기정체성을 버리는 걸 주저주저하고 있는 듯 하다. 왜 이들이 이렇게 똥누고 똥꾸녕 못닦은 강아지처럼 낑낑대냐면, 머리 속에 <진보=좌파 vs 보수=우파>라는 납작한 단순2분법을 못벗어나기 때문이다. 까닭은 아마도 자유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이들의 학습된 심리적인 거부감 또는 '역사적인 개인되기'에 대한 등한시 때문이지 싶다.

그냥 <진보우파>로 컨버전하면 간단하게 풀리는 걸, 그러지 못한채, "000 좌파"니 "000진보"니 어쩌니 하면서, <국가주의= 집단주의= 좌파>와 <평등주의= 진보>를 헤깔려하고, <시장주의= 개인주의=자유주의= 우파>와 <능력주의= 보수>를 헤깔려하는 것이다. 이들은 아마 나에게 이렇게 반문하겠지 싶다: '?? 좌파= 진보아냐? ??? 진보랑 좌파랑 뭐가 달라서 그러는 거냐?' '우파= 보수아냐? 보수랑 우파랑 뭐가 다른데?!'

거듭 말하지만, 한국진보지식인들의 대다수의 납작한 단세포적인 이런 2분법 프레임, 이거 고질병이다 싶다.

'진보에도 좌/우파가 있고, 보수에도 좌/우파가 있으며, 좌파에도 진보/보수가 있고, 우파에도 진보/보수가 있다'는 다원주의, 이것부터 받아들여져야지 싶다. 그것이, 아이디알랩스IDR Labs 및 블런델-고스쵸크모델의 정치성향분류가 갖는 의의인데, 한국지식인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납작한 선악흑백2분법을 못벗어나고 있다.

"보수좌파"도 가능하고, "진보우파"도 가능하다는 다원주의, 이게 도무지 상상이 안되고, 시뮬레이션이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거다. 그냥 <진보좌파 아니면 보수우파>라는 이 단세포적인 2분법의 프레이밍을 이들이 버릴 때, "영미진보"라는 이름 또한 <자유평등시장주의 곧 시장진보 또는 진보우파>라는 좀더 깨끗하고 또렷한 정치성향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주대환의 강연전문


조봉암과 대한민국의 영미 진보 유전자

-경북대 아시아연구소 학술대회 기조강연-

주대환(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2023.5.13

진짜 프로 역사학자들 앞에서 아마추어 역사학도가 어려운 주제로 말씀을 드리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이런 귀한 기회를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오랜 노력에 감사를 드리고, 오늘 학술대회의 풍성한 결실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번에 매우 중요한 사료(史料)를 발굴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조봉암과 진보당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결코 잊어버려도 좋은 끄트머리 비주류이거나 대한민국 외부로부터 유래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영미(英美)와 UN이 새롭게 태어나는 이 나라에 꼭꼭 씨앗을 심어서 유전자의 일부가 된 진보적 가치들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힐 수 없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되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작년에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세계인권선언을 대조해 읽어보면서 새삼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둘은 같은 시대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 같았습니다. 1948년 12월 10일 제3차 UN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고, 바로 이틀 후, 12월 12일 UN 총회가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바로 그런 시대, 그런 때에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사주팔자가 좋은 것이고, 좋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제헌헌법은 제8조에서부터 제28조까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권리장전(權利章典)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세계인권선언이 인류 보편의(universal) 권리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먼저 인권의 평등함(제8조)을 말하고, 신체의 자유(제9조), 거주와 이전의 자유(제10조), 통신의 비밀 보장(제11조), 신앙과 양심의 자유(제12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제13조), 학문과 예술의 자유(제14조), 재산권(제15조) 등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17조부터 제19조까지는 노동의 권리, 사회보장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자유권뿐만 아니라 사회권을 보장하고 있는데, 세계인권선언 역시 노동, 교육, 사회보장 등 사회권을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제헌헌법 제17조부터 제19조까지는 세계인권선언의 제22조부터 제25조에 해당됩니다.

나아가서 제16조에서는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특히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헌법 정신에 따라 우리나라는 건국하면서 바로 초등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해방 당시 78%에 달하던 문맹률이 1950년대 말에 이미 22%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 제26조 1항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최소한 초등 및 기초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 및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접근이 가능하여야 하며, 고등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실력에 근거하여 동등하게 접근 가능하여야 한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한 사람은, 아시다시피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입니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死別)한 후에 UN 인권위원회 의장을 맡아서 세계인권선언의 초안을 썼습니다. 참혹한 전쟁이 끝난 후, 새로운 세상을 설계한 것입니다.

그런데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제9조 신체의 자유 조항에서 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면서도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수사기관이 사후에 영장을 청구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두는 문제로 조봉암과 김준연이 큰소리로 논쟁하였습니다.

인권 보장의 원칙론을 펼쳤던 조봉암 의원은 무소속 소수파에 불과했지만 그의 뒤에는 시대적 배경과 국제적 배후가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남로당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는 여러 세력들을 다스려야 할 현실적인 필요를 말하는 한민당의 김준연, 동경제대와 베를린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김준연 의원과 당당하게 논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봉암과 김준연의 격렬한 논쟁은 바로 대한민국 국회 내에서 벌어진 최초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고, 당시 대한민국의 건국을 도운 국제 세력, 미국 민주당 트루먼 정부와 영국 노동당 애틀리 정부, 그리고 그 지도하에 있는 영연방 나라들, 또 그들이 주도하는 UN은 진보의 편, 조봉암의 편에 가까웠습니다.

헌법 초안이 제헌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을 때 가장 먼저 대체토론을 신청한 사람은 조봉암 의원이었습니다. 그가 헌법기초위원이었기 때문에 결국 서면으로 제출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토론은 가장 탁월한 토론으로,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으로 남았습니다. “이 분이 언제 헌법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던가?” 오랜 의문 끝에 저는 이 분 뒤에 어떤 국제적 배후를 느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1953년 8월 15일, 신익희 의장이 해외 출장 중이라 조봉암 부의장이 국회를 대표하여 라디오 방송으로 행한 광복절 기념사를 읽어보면 다시 한 번 온몸에 전율이 옵니다. 그 분은 우리가 목숨 바쳐 지켜야 할 가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국제적 수준의 뚜렷한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서 농지개혁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제헌헌법 제86조의 정신을 실천에 옮긴 사람으로 주로 알려졌지만, 헌법의 다른 조문에 규정된 진보적 가치와 정신들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분명하게 대변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저는 요즘 새삼 대한민국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탄생한 나라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의 해방과 독립은 카이로 선언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 거대하고 참혹한 인류사 최대 전쟁의 대의(大義)와 목표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하였다면, 동서양 문명이 융합되어 꽃피는 현대 한국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참혹한 전쟁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수 천 만 청년들을 전장(戰場)으로 이끈 숭고한 정신과 가치는 무엇이었던가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믿음, 인종차별을 끝내고, 식민 지배 아래 노예 상태에 놓여있는 약소민족들을 해방시키자는 비전, 모든 인간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게 하자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최대의 성전(聖戰)이었고, 그 전쟁을 이끈 최고의 지도자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 해리 홉킨스, 그리고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였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꾼 이상주의자들이었고, 한국의 해방과 건국은 바로 그들의 이상이 실현된 것입니다.

물론 영국은 보수당의 처칠이 이끌었지만, 노동당과 거국내각을 구성하였고, 함께 복지국가를 만들었으며, 전쟁이 끝나자마자 노동당 애틀리 수상이 단독 집권하였습니다. 요컨대 영미의 진보가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하였고, UN을 만들었으며, 마침내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북한이 남침하였을 때는 영미가 주도하는 UN이 군대를 보내서 나라를 구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지도자는 민주당의 트루먼이었으며, 영국의 지도자는 노동당의 애틀리 수상이었습니다. 이 위태로운 신생국(新生國)을 구해준 건 영미의 보수가 아니라 진보였습니다. 만약 당시에 고립주의 전통의 공화당이 미국 정부를 맡고 있었다면 과연 전쟁 발발 3일 만에 파병을 결정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당연하게 대한민국에는 영미의 보수주의가 아닌 진보주의의 유전자가 깊이 심어졌으며, 그 유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조봉암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조봉암을 죽임으로써 선을 넘은 이승만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내는 한계에 도달하고 마침내 몇 달 후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이승만을 권좌로부터 축출할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물론 하지만 대한민국이 국제 사회가 원래 설계한 만큼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나라로 발전하는 데는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대법원 재심으로 조봉암 선생이 무죄 판결을 받은 해가 2011년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그때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국제 기준에 도달한 시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1946년 6월 조봉암의 전향은 친소 공산주의로부터 영미 진보, 사회주의로의 전향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는가요? 한국전쟁을 치른 후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반지성(反知性)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사회주의는 중도좌파(left of center)를 의미하고, 조지 오웰이 상징하듯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데 가장 날카롭고 반공(反共)전선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른 한국은 사회주의를 사회주의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 전인 1948년 12월에 한독당을 탈당한 조소앙은 ‘사회당’을 창당하고, 또 이승만 대통령이 축사까지 하여 격려를 하였지만, 전후(戰後) 조봉암은 ‘진보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으며 당 기관지의 제호(題號)로 중앙정치(中央政治)라고 하고 자신의 노선이 ‘center of center’임을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끝없는 정적들의 의도된 무지와 색맹(色盲)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조봉암의 전향은 분명하고, 또 큰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1946년 8월 한독당을 탈당한 신익희의 노선 전환과 함께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조봉암의 경우는 그가 아니었으면 이른바 ‘3•1운동의 아이들’, 대정 데모크라시의 청년들, 해방 당시 생존한 독립운동 경력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 세대가 대한민국 건국에 몽땅 다 참여하지 않을 뻔했습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군정을 펼치고 있던 미국 민주당 정부, 이를 돕고 있던 영연방 여러 나라 정부들, 이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전향을 한 조봉암이 어디로 갈 수 있었겠습니까? 한국 전쟁 직후, 1954년에 죽산이 쓴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영국 노동당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미(英美)식 의회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평화통일론도 사실 별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사실 국제사회에서 바라볼 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일 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반도 사람들의 언어 습관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지금도 남북한이 서로에게 쏟아 붙는 말 폭탄을 듣고 있으면 내일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겨우겨우 휴전을 시켜놓았더니 또 금방 전쟁이 터질까 걱정스런 눈빛으로 한반도를 바라보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견제할 세력이 등장하기를 바라고, 조봉암에게 그런 역할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북한의 요구로 내걸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요구로 내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단일 야당 운동에서 조봉암을 배제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촌 김성수는 “죽산을 배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함께 진보당을 창당했던 서상일은 누구입니까?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죽산 구명운동을 한 장택상과 윤치영은 또 누구입니까? 이 분들은 모두 대한민국 탄생의 주역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봉암이 죽었다고 영미 진보의 유전자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나서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만들고, 문화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유와 인권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친중 친북 주사파가 우리나라 진보를 오염시키고 있는 이 때, 건국 당시에 조봉암이 대표하였던 중도좌파 영미 진보의 역사가 재발견되어야 할 시급한 현실적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조봉암을 친중 친북 NL좌파가 아전인수(我田引水)하여 반이승만 나아가 반(反)대한민국 정서를 확산시키는 재료로 삼았습니다.

영미 진보의 유전자를 되살린 대한민국 중심주의 중도좌파가 서야 나라가 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공존하고 외교 안보 문제에서는 협력하는 그런 성숙한 선진국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조봉암의 전향이 정치적 타산에 의한 변신이거나 심지어 위장전향이라고 믿는 분들이 여전히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과 시대에 대해 피상적인 인식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꼬뮤니스트가 극우 파시시트가 되는 것보다 꼬뮤니스트가 중도좌파, 사회주의자나 중도우파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 하면 이들 중도의 철학적 베이스가, 전혀 다른 경험주의이기 때문입니다. 후진국 사람이 선진국 사람이 되고, 전근대인이 근대인이 되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조봉암이 33세에 되던 1932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면서 그의 코민테른 활동은 끝나고 해방이 되어 활동을 재개할 때는 46세의 장년이었습니다. 그 13년은 하루하루가 절벽 낭떠러지에 선 것 같은 긴장과 변화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추운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이란 장기간 감옥살이하면서 감기를 한 번도 앓지 않고, 간수들과 한 번도 다툰 적이 없고, 입소할 때와 출옥하실 때 몸무게가 같았다는 말씀에 숙연해집니다. 저도 젊은 시절 감옥살이를 여러 번 해보았지만 칼날이 시퍼렇게 선 그 분의 7년 감옥 생활은 어떤 고승(高僧)의 고행이나 참선보다 더 지독한 ‘도 닦기’입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사색과 성찰의 깊이는 헤아리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또 출옥 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시기에 인천에서 서민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대중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분명 1946년 6월의 전향은 청년 혁명가 조봉암이 원숙한 중년의 대중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쓰리쿼터’라는 트럭이 있었습니다. 아마 해방 후에 미군들이 갖고 들어온 소형 트럭이라 미국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다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불렀나 봅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 트럭이 생각나고, 아마 적재 중량이 ‘4분의 3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요즘 대한민국이 한 세기(century), 1백년의 4분의 3, 즉 쓰리쿼터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자꾸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쿼터가 남았습니다.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를 4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라고 한다면 1948년부터 1972년까지 제 1악장, 1973년부터 1997년까지 제 2악장, 1998년부터 2022년까지 제 3악장이 끝났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기적의 100년, 제 4악장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새삼스런 관심입니다. 사실 저희가 젊었을 때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동아시아의 동쪽 끝에 옹색하게 매달려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렇게 발전하여 세계적인 나라가 될 줄도 몰랐습니다. 당시에 유행한 ‘분단체제’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불안정하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오래갈 수 없는 체제라는 말이 아닙니까?

나라가 만들어진지 30년이 지나도 안정된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는데, 처음 건국되었을 때는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던 시기, 1948년이나 49년이 어떤 때입니까?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이 장개석의 국민당을 압도하기 시작하던 때, 즉 세계 최대의 나라 중국이 통째로 공산화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던 때입니다.

갓 태어난 대한민국은 미군만 철수하고 나면 유아사망(幼兒死亡)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인 판단은 한 두 사람만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한민국이란 신생아의 유전자에 무엇이 들어있고,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 병약한 아이가 얼마까지 살아남을 것인가?”만이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75년이 지난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과연 어떤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한 나라 중에 유일하게 선진국이 되었는가? 이 나라는 어떤 가치, 어떤 이상에 따라 만들어진 나라인가? 어떤 사람들이 이 나라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고, 그 많은 신생국들 가운데 유독 대한민국만이 이렇게 발전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조만식, 김성수, 신익희, 조봉암을 비롯한 건국 시기에 활약한 지도자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대한민국의 헌법을 비롯한 법률과 제도가 하나하나 만들어진 제헌국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헌국회 속기록을 읽는 지식인 그룹들이 나타나고, 이들이 쓴 책들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이영일 전 의원이 쓴 <건국사 재인식>이라는 책과 권기돈 박사가 쓴 <오늘이 온다>라는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그 책들을 읽으면서, 급히 피난길에 오른 조봉암 국회부의장이 피난을 떠나면서 차에 실었던, 그 짐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했던, 주요 국회 문서 중에는 바로 제헌국회의 속기록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사제도진화이론가, 철학자, 서예가, 디지털 아티스트, SVA 미술석사, 실험영화작가, 불어불문학 학사. 인류문명사·철학사·지성사·개념사 곧 '지식의 지식'에관한 메타철학이자 인공지능을위한 메타윤리학인 서사제도진화이론을 연구중임. https://www.facebook.com/sugunz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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