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6

일제의 토지, 쌀 수탈 : 네이버 블로그

일제의 토지, 쌀 수탈 : 네이버 블로그

일제의 토지, 쌀 수탈

프로필

2007. 11. 13. 10:11

 이웃추가

일제치하에서 토지를 잃고 간도로 이주하는 조선 농민들.

 

일제는 합방 직후 토지 조사 사업을 벌였다. 공공 토지를 빼앗는가 하면, 지주들의 권리를 키워주고 소작인들은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또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일본에 대한 쌀 수출을 늘리고, 지주를 친일 세력으로 만들려했다. 그 결과는 조선 민중의 처절한 가난이었다.


  가난은 일제가 가져다 준 유일한 선물


굶주림을 면키 어려울 정도의 가난은 일제가 가져다 준 유일한 선물이었다. 그 가난이 바로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한다고 떠들어대면서 실시한 이른바 토지 조사사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1911년부터 실시한 이 사업으로 일제는 우리 농민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놓은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다. 그리고 그 땅을 일본인들에게 헐값으로 되팔았다. 아울러 대대로 누려왔던 농민들의 경작권을 무조건 부정하고, 지주들의 권리를 무한대로 보장함으로써 땅 없는 농민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 경작하자!”며 분연히 일어섰던 갑오년 농민들의 함성은 일제의 식민 통치로 최종적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지주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의 권리는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지주가 원하는 대로 소작료를 지불해야만 했고, 지주가 원하는 대로 세금을 부담해야만 했다. 행여 항의라도 할라치면, 이듬해 농사짓기는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이 모두 토지 조사 사업 때문이었고, 이를 통해 일본으로 쌀을 가져가려던 일본 때문이었다.


  지주들의 태평천하


지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농민들은 저항했다. “경작권을 인정하라”고, “소작료를 내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일제는 지주를 대신하여 막아주었다.

일제는 지주들을 도왔다. 토지의 매매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으며, 지주들이 더 넓은 토지를 사들일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었다. 일제에겐 조선의 모든 농지가 다 지주의 손에 들어가고, 그래서 모든 농민이 소작인이 되는 그런 세상이 가장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쌀의 상품화가 가장 쉽게 이루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막대한 양의 쌀이 일본으로 팔려갔고, 그 쌀은 대부분 지주가 소작인들로부터 받은 소작료였다. 쌀값은 당연히 치솟았고, 지주들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거부들이 여러 곳에서 형성되었다. 

쌀값이 오르면 농민들이 좋아해야 하련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대다수의 농민들은 빚에 허덕였고, 그래서 추수가 끝나면 곧바로 식량 걱정에 들어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니 쌀값의 인상은 빚으로 이어졌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빚을 내고, 빚내서 빚을 막다가, 마침내는 손바닥만한 땅을 팔아 넘기고 소작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나마 없는 사람에겐 자식이라도 팔아야 할 형편이었다.


‘내 땅을 가졌으면’, ‘쌀밥에 고깃국 한번 먹어봤으면’

그것은 일제하 농민들 대다수의 소망이었다.



  간추린 얘기


  1) 토지 조사 사업

① 배경 :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한다는 구실로 시행

② 과정 : 신고 절차 복잡, 반일 감정 등으로 신고 부진

③ 결과 : 신고되지 않은 많은 토지가 총독부의 소유로 옮겨짐

          → 지주의 권리 보장, 농민의 생활 파탄

 

  2) 산미 증식 계획

① 내용 : 쌀 생산량을 증가시켜 주겠다며 실시한 계획

② 결과 : 쌀 생산량보다 일본에 가져간 쌀이 더 많음

          → 농민의 생활 파탄

  

그게 뭐꼬?


1) 소작인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사람. 대개 가난한 농민이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소작인에게 별 문제가 없으면 빌린 땅에 계속 농사지을 수 있는 경작권이 있었으나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일제가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하여 불리한 조건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2) 산미 증식 계획

쌀 생산을 늘리는 계획. 일제는 일본의 공장 노동자에게 싼값에 쌀을 대주기 위해 조선의 쌀 생산을 늘리고자 하였다. 쌀 한 작물만 심게 하여 흉년을 맞을 때가 많았고, 생산량은 1.3배 늘었는데 수출량은 4.3배가 늘어 조선에서는 쌀값이 크게 올랐다.

< 쌀 소비량의 연평균 감소 추세 >

연도       구분

조선 내 소비량

1인당 연 소비량

% 환산

1914~1919

  11,777,210석

0.7071석

100

1920~1924

  11,185,987석

0.6249석

90

1925~1929

   9,726,557석

0.5124석

72

1930~1933

   9,072,556석

0.4486석

63


☞ 산미 증식 계획 기간 동안 생산량은 약 1.3배 늘어난 데 비해, 수출량은 최고 4.23배까지 늘었다.     이 엄청난 불균형으로 결국 생산자인 조선인은 쌀 소비량을 크게 줄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기 일본인은 조선인의 2배를 소비했다.

 

당시 인천항의 곡물장 모습

당시에는 이렇게 살았다는데...


 (전략) 궁민이 현재 16만여 호, 화전민이 8만여 호에 이른 것을 보면, 얼마나 조선 농민이 피폐한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우리들이 보았던 궁민의 식량을 참고로 봐도 잡곡 한 홉 정도에 풀뿌리나 나무 껍질을 섞어 끓여서 먹는다. 봄에는 풀의 새싹을, 겨울에는 뿌리를 채굴한다. 나무 껍질은 소나무 속껍질, 아카시아, 기타 모든 나무의 껍질을 잘게 하거나 도토리 열매로 가루를 낸 후 물을 넣어 단자를 만들고 소금을 쳐서 먹는다. 어떤 지방에서는 고령토를 먹는 예도 있다. 그 상태는 당시 일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비참하고 진기한 현상이다.


토지조사사업은 


① 자본주의적 토지제도 확립으로 식민통치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행정구역 ·도로 ·헌병주재지의 설정을 하며, ② 일본인의 정착에 필요한 토지확보의 수단으로 필요하였고, ③ 무지주(無地主) ·무신고 토지의 국유화로 통치기구의 재정을 굳건히 하고 조세의 원천을 확실히 하며, ④ 전통적인 양반계층의 지주권을 일제법상의 식민지적 지주계층으로 개편하여 식민사회 기반을 구축하고, ⑤ 거주를 토지와 결부시켜 한국인의 동정을 살핌으로써 영구적인 식민통치 기반을 구축하며, ⑥ 모든 자원과 세금파악을 확실히 하는 수탈경제(收奪經濟)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사업의 결과 이제까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해왔던 수백만의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소작인(零細小作人) 또는 화전민 ·자유노동자로 전락하였고 1920년대의 유랑농민의 격증, 일본·만주로의 이민의 증가라는 사회적 현상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 조선총독부는 전국토의 40 %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었다. 총독부는 이들 토지를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비롯한 후지흥업[不二興業] ·가다쿠라[片倉] ·히가시야마[東山] ·후지이[藤井] 등의 일본 토지회사와 일본의 이민(移民)들에게 무상 또는 싼값으로 불하하여 일본인 대지주가 출현하게 되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