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이념성향 톺아보기⑦-3/4]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접합되다
프랑스대혁명 시기 콩도르세 및 앙토넬 등이 데모크라티아의 성격을 바꿔
미국시민혁명 기간에도 데모크라티아가 확장돼
19세기 차티스트운동으로 재산없는 4신분 프롤레타리아 남자들 서프라지 얻어
20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 여자들 서프라지 얻어내
4신분이 루쏘 직접민주주의 포기하고, 3신분이 서프라지를 내오주면서
리버럴리즘+ 데모크라티아의 접합이 마침내 이루어져 수군작 서사제도연구자
입력 202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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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치이념성향 톺아보기⑦]은 글이 길다. 그래서 4개로 나누어서 연재한다. 연재순서는 아래와 같다. (순서 및 내용은 변경가능함) 오늘은 그 3번째이다.
<1/4>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피플의 분화 및 3종류의 피플주의
1. 피플이란 무엇인가? 그 역사적인 분화를 추적해보자
2. 학술용어·개념들은 반드시 지성사적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3. 피플주의의 3종류: 자유주의 vs 공산주의(또는 전체주의) vs 자유민주주의
<2/4>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데모크라티아에대한 악평들 vs 호평들의 지성사
4. 2천5백 여년간의 데모크라티아에대한 악평들
5. 몇몇 데모크라티아에대한 호평들
6. 루쏘 너 마저!
<3/4>
7.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합쳐지다
<4/4>
8. 김민철의 아카데미즘·스콜라쉽의 어느 훌륭함
9. 중화문명의 <안민·양민·귀민·애민·휼민·구민·중민·위민·보민> 서사들은 과연 데모크라티아일까?
7.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합쳐지다
<데모크라티아·데모크라시·민주주의·민주정·민주제·민치정>를 논의할 때, 가장 골치아픈 지점이 "통제불가능한 피플주의, 다수의 티란니, 인민재판·공포정치·떼거리지배·몹룰, 중우정치·오클로크라시"라는 악평의 이미지이다. 이때문에, 역사적으로 안티-데모크라티아 곧 반민주주의 서사가 득세했다.
※ 서양의 계급분화의 역사: 12세기 고딕중세에 서유럽(특히 이탈리아 코뮤네)에서 최초로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 및 기사계급, 그리고 도시노동자들을 비롯한 4신분 프롤레타리아의 원형이 태어난다.
※ 13세기 이탈리아 코뮤네에서 최초로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의 피플주의인 자유주의·개인주의가 발현됐다
※ 11~ 15세기까지 이탈리아 코뮤네들에서 3신분 포폴로 그라쏘 곧 그랜드 부르조아 자유주의의 변천 또는 변질과정
데모크라티아가 자유주의와 결합하려면, <무식하고,광신적이고, 선동적이고, 공포스럽고, 위험하고, 무지몽매하고, 무질서하고, 무정부적인 폭도들의 폭정>이라는 그 캐릭터를 벗어던져야 했다.
데모크라티아를 이렇게 악평-혐오-공포-저주하는 쪽 곧 콘트라-데모크라티아 곧 대항-민주주의가 볼 때, 데모크라티아라는 것은 <피플주의 곧 공산전체주의>와 동의어이다. 이들 콘트라들이 주로 <모나키+아리스토크라시+자유주의 공화파들>이다.
데모크라티아에대한 평균일반적인 이런 악평들에맞서, <데모크라티아는 좋은 것이여~>라고 호평한 쪽 곧 프로-데모크라티아 곧 찬성-민주주의는 서양지성사 상에서 몇차례 없었다. 이들 프로스들은 다시 두종류로 나뉜다.
100% 4신분 피플주의로써, 공산전체주의
대의제데모크라티아 곧 리버럴테모크라티아
하나는, 100% 4신분 프롤레타리아 피플주의로써, 공산전체주의이다. 이들은 모나키-아리스토크라시-자유주의를 죄다 부정하고 타도척결폐절시키고, <100%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데모크라티아만 옳다>고 보는 집단주의R진보 답정너들이다.
다른 하나는, <대의제데모크라티아 곧 리버럴테모크라티아>로써 모나키-아리스토크라시-자유주의와 공산전체주의·4신분 피플주의 사이의 중도노선·미드웨이midway·좁은회랑을 걷는 쪽이다.
이 둘 가운데 뒤엣쪽의, 특히, 리버럴데모크라티아의 지성사를 설명하는 것이 이번 글의 목표이다. 먼저, 간단히 결론부터 말해보자. 먼저글에서 살펴봤던 프랑스대혁명 써앞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마키아벨리 말고는,
(1) 1794~ 1797년 프랑스대혁명의 콘술라트/통령정부 시기의 데모크라트들(콩도르세의 후예들)
(2) 미국시민혁명 기간 데모크라티아의 진전: 필라델피아 헌정컨벤션 및 대통령 앤드류 잭슨(1767~ 1845)
(3) 무엇보다 남자들의 차티스트운동+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서프러제트운동
이 3개를 나는 손꼽는다. 1과 3은 그런데로 언급되지만, 1에 대해서는 한국학술장은 무지무식등한시해왔다. 이것을 논증한 학자가 김민철이고,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 하다.
프랑스대혁명부터 오늘날까지의 이들 3개의 호평들 가운데, 한편으로 콩도르세 및 앙토넬같은 콘술라트/통령정부 데모크라트들에의해 <자유주의 대의제와 4신분 평등주의의 절충·합금·융합>의 아이디어가 발명됐다. 다른한편 미국시민혁명 속에서도 자유주의 또는 공화주의는 점진적으로 모든 피플의 정치적인 법권리를 포용하는 데모크라티아와 결합해 나간다.
그러나 리버럴데모크라티아를 만들어낸 결정타는, 무엇보다 영국의 차티스트운동+ 페미니즘 서프러제트운동이다. 1867년 프로퍼티레쓰·프롤레타리아·플레브스 남자들이 차티스트운동으로 서프러지suffarage·투표권·선거권·참정권 곧 정치적인 법권리·폴리티컬 라이트를 얻어냈고, 1928년에는 여자들 곧 서프러제트들이 마침내 스스로의 정치법권리를 싸워 얻었다.
이 과정에서, 서프러지를 4신분 프롤레타리아에게 부르조아가 내주고, 3신분 부르조아의 레프리젠타티브 정부통치의 시스템에 프롤레타리아가 동의함으로써, 자유주의와 데모크라시의 아말감·합금, 퓨전·융합, 하이브리드·혼종, 인코퍼레이션·합체인, 리버럴테모크라시가 탄생했다, 1928년이다. 자, 이제 (1) (2) (3)을 차례차례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대중을 미심쩍게 여기고, 정치적 평등이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위협할 것을 우려하고, 서프라지·선거권을 부르조아에게만 한정했던 자유주의 의회정치는 이제 데모크라티아화되어야만 했다. 1920년대까지 보통선거권은 자유주의-의회제 사회에서 규범이 되었다. 리버럴 데모크라시가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시기에 등장한 전체주의 체계들 못지않게 새로운 혼합 체계였다. - 아자 가트 [문명과 전쟁] 15장

7-1. 콩도르세
콩도르세(1743~ 1794)
콩도르세의 지성사적인 아이디어가 데모크라티아의 의미를 근대적으로 바꿨다. "이 전환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인물은 콩도르세M.-J.-A.-N. de Caritat, marquis de Condorcet였다. 그는 혁명이전에 유럽의 천재 수학자로 명성을 얻었고, 계몽의 상징이라 불리는 『백과전서』Encyclopédie를 편찬한 수학자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의 소개로 살롱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콩도르세는 볼테르를 스피릿적인 스승으로 삼았고 그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훗날 『볼테르의 라이프』Vie de Voltaire이라는 책을 써서 계몽철학의 가치들을 천명하기도 했다."
"콩도르세는 자신의 발언을 통해 상당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전 유럽에서 존경받는 수학자이자 해박한 계몽철학자였고, 전통적인 세계관의 언어를 구사했다. 그는 전통적인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어떤 문제를 건드려야 하는지, 어떤 전략으로 논리를 구성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앞에서 언급한 극소수 급진파 정치인들과 달리 콩도르세는 스스로도 주류의 문제의식을 공유했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그 결과, 그는 주류 정치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 이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의 뽑아추린 글토막들은 김민철, 포셋, 노명식, 크릭의 책들 및 나의 《서양정치윤리철학사》 강의록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콩도르세는 평등을 향한 인류의 진보가 자동적이고 필연적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누진세 제안을 보면, 그가 평등을 향한 인류의 진보가 당연하고 네이처스럽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현존하는 극심한 불평등이 즉각적으로 공화국의 쇠퇴를 초래할 것이라고 염려했으며, 그렇기에 국가가 포지티브적인 정책으로 사회에 개입해서 극심한 불평등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790년에 콩도르세는, 보통선거권의 선구자적인 지지자인 콩도르세는 향후 150년 동안 자유주의자들을 크게 괴롭힐 난제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교육받지 못했음을 이유로 노동자와 여자들을 정치에서 배척한다면, 머잖아 허가받은 사람이라고는 공법 학위 소지자들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이런 빈정거림의 핵심은 시민권이 시민의 “역량”, 곧 교육이나 재산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함축적인 의미는, 모든 사람이 투표할 수 있어야 하고 공직에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콩도르세는 프랑스의 1793년 헌정을 위한 자신의 거부된 초안에서 그 조치를 제안한 바 있다. 1793년의 제헌 논쟁에서, 시에예스와 콩도르세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평등한 시민적인 지위를 가질 것을 요구함으로써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여자의 투표권에 대해서는 물러섰지만, 그들의 제안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으로 데모크라티아적인 것이었다.
1793년, 네이션카운슬 의원이 된 콩도르세는 2월에 컨스티투션 초안을 제출했다. 컨스티투션 초안을 발표하면서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첫째, 프랑스에서는 더이상 세습모나키를 보존할 필요가 없다. 둘째, 프랑스는 연방제 공화국이 될 필요가 없다. 셋째, 그러나 프랑스는 대국이므로 대의제 컨스티투션을 필요로 한다. 넷째, 프랑스는 의회가 피플의 주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컨스티투션에 피플의 검열권censure du peuple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이 검열권은 프랑스전역에서 상향식으로 행사되는 것으로서, 각 지역의 1차 선거회가 국회의 법률을 거부하고 재심의를 요구하며 최종적으로는 법률을 폐지할 수도 있는 권위를 갖게 된다.
콩도르세는 교육을 받지 못한 대중은 권리를 알지 못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는 진정한 자유와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려면 국가의 교육체계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계몽이 실현된 미래로 가기 위한 이행기제의 핵심은 교육이었다. 콩도르세는 피플이 장기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며, 필요하다면 좀더 속성으로 교육받아 국가의 대사에 참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1789년 이후 수많은 교육 사업을 설계했는데, 그것들의 핵심은 폭넓은 시민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초등교육에서 읽기, 쓰기, 산수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과 학생들의 스피릿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통치가 고등교육의 내용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그는 보편적인 초등교육과 차원을 높인 고등교육을 하나의 전망 속에 결합시켰다.
콩도르세는 정치참가와 자유로운 언론 활동을 통해 계몽된 피플이라면 더이상 선동정치와 폭정에 희생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교육을 통해 대다수 시민의 독립적이고 주스한/저스티스한/정의로운 판단력을 높이면, 피플이 정치적으로 주스한 판단을 내리는 데모크라티아가 다수의 폭정이 아니라 안정적인 법률의 지배국가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수학적인 가능성이 열렸다. 이제 데모크라티아를 고대의 낡은 정부통치형식이라며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근대데모크라티아의 싹이 튼 것이다.
그러나 피플의 완전한 계몽이 이루어질 미래의 그날이 오기 전까지, 당장에는 “질서를 다시정립하고 무정부통치상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대의제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다. 콩도르세는 한편으로 피플이 격한 감정에 치우칠 가능성이 있는 자신들의 의지가 무조건 법률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된 견해”를 버리고, 결국 스스로 뽑은 “대표를 통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피플에게 무조건 대표들을 신뢰하라고 강요하기 전에 대표들이 정당하게 피플의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도 말했다.
피플은 원래 흉포한 것이 아니라 흉포해질 만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고, 그들을 그 상황으로부터 끄집어내면 더이상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콩도르세는 피플이 모인다고 해서 무조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모임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평화롭게 이루어진다면 자유를 드높일 수 있으므로 자유와 평화의 조화를 추구하는 방편으로 간주하자고 말한 것이다.
사실 경제적인 토대가 없는 정치적·헌정적인 설계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당시 파이낸스, 상업에 대한 연구를 포괄하는 정치경제학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던 콩도르세는 자신의 정치적인 구상이 모래성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탄탄한 경제적인 주춧돌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누진세 도입을 주장했다. 그 이유인즉슨 “웰쓰의 심각한 불평등”이 자유국가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도한 세금역시 재산을 보유한 계급의 경제활동 유인을 저하시켜 상업, 제조업, 농업의 성장을 막을 수 있다는 염려가 뒤따랐다. 따라서 콩도르세는 온건한 누진세를 시행하자고 제안했으며, 그러한 제도가 자유를 유명무실하지 않고 실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준의 경제적인 평등을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쳤다. 약간의 누진세와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평등이 없다면 “심지어 법권리의 평등도 완전하고 실재적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부자가 돈으로 법률을 넘어서는 경우를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계속 목격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계에서는 법률적인 법권리의 평등이 허망한 말에 불과하다는 점을 콩도르세는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콩도르세는 정부통치가 피플의 정치적인 자유와 경제적인 자유를 동시에 보장하면 빈곤과 무지가 완화될 수 있고, 이를 통해 피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역사의 순환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극단적인 데스포트주의·폭정의 상황에서는 피플의 봉기·반란조차 자유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피플이 봉기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통치자들이 어쩔 수 없이 자제력을 발휘해서 권력을 극단적으로 남용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콩도르세는 이 논리에 입각해서 피플의 법권리와 봉기의 가능성을 담은 각종 법권리선언문들이 독재자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하고 컨스티투션의 자유를 지키는 스피릿적인 보루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내놓은 콩도르세 자신도 준동하는 피플의 폭력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때는 여전히 1789년이었다. 그는 일정한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것이 “사물의 네이처를 따르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국가는 그들의 재산위에 세워지고 국가의 운영은 재산소유자들의 동의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784년에 콩도르세가 만인에게 참정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789년이 되어서도 (다른 대부분의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당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 결정권을 갖도록 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유다이모니아에 기여하리라고 믿었다.
사실 여러 측면에서 콩도르세는 시대를 외로이 앞서간 급진주의자였다 ... 그는 동시대 프랑스의 어느 누구보다도 여자의 법권리, 흑인의 법권리, 유대인의 법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했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지각을 가진 존재이므로 성별·혈통·피부색에 상관없이 평등한 법률적·정치적인 법권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런 콩도르세조차 파리의 피플이 여러차례 보여준 정치적인 과단성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1793년에 이 모든 것을 주장한 콩도르세는 관련된 연설문이나 책자에서 데모크라티아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콩도르세는 데모크라티아를 이론화할 수학적인 토대를 놓았으나 여전히 피플을 두려워했다.
이에 비해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데모크라티아와 관련해 완전히 느림보였다. 19세기까지도 자유주의자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열등한 동료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가질 “역량”이 부족한지 그 이유들을 교묘하게 늘어놓았다. 자유주의는 마지못해 시민권을 하나의 자격으로 취급하게 된 것뿐이었다.
피플은 원래 흉포한 것이 아니라
흉포해질 만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고,
그들을 그 상황으로부터 끄집어내면
더이상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7-2. 콘술라트 시기의 데모크라트들: 앙토넬
1794~ 1795에 새로운 데모크라티아 담론서사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악평의 저주받은 이데올로기는, 프랑스대혁명 통령정부(1799~ 1804) 시기에 데모크라트들에의해 <통제가능한 대의제 데모크라티아>로 탈바꿈했다: "살펴본 것처럼 데모크라티아라는 낱말은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이래 5년 사이에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었다 ... 1794년에 이르면 데모크라티아 개념은 조금 더, 그러나 아주 조금만 더 포지티브적이고 포지티브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 이 시기에 나타난 데모크라티아 개념의 변화는 1795년에 출범하는 통령정부시기로 이어졌다. 이 전승의 주역은 탄압을 견디며 정부통치에 침투하고 사회적인 활동을 이어간 데모크라티아파 인사들이었다. 데모크라티아파는 피플과 가까웠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데모크라트라 불러서 당대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렇게 김민철은 논증한다.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거다! 이로써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의 피플주의였다가, 이탈리아 코뮤네들의 경우, 점진적으로 아리스토크라시-올리가르키가 된 자유주의가, 드디어 4신분에대한 공포를 벗어나게 된, <통제가능해지고 고상해진 데모크라티아>와 비로소 궁합을 맞출수 있게 됐다.
그 결과 마침내 덧씌워졌던 <폭도>라는 캐릭터가 벗겨지고, 4신분 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한 모든 데모스·피플들이 건강하고 버츄있는 시민들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런 자기변신의 바탕 위에, 20세기 초 서프라지·참정권·선거권·투표권 운동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 곧 리버럴 데모크라시>가 가능해지고, 드디어 근대적인 공화주의 역시 성숙해진 것이다. 공화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데모크라티아가 온건해지고 성숙해졌으니까.
마찬가지로 아래도 마찬가지로 김민철, 포셋, 노명식, 크릭의 책 속 글내용물들이다:
앙토넬(1747~ 1817)
자코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집단에는 브리소J. P. Brissot와 콩도르세로 대표되는 지롱드파,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와 당통G. Danton으로 대표되는 산악파 곧 자코뱅파, 그밖에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주창한 몇몇 분파들이 있었다. 특히 자코뱅 인사들은 피플이 버츄를 타고났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재산이나 혈통 같은) 환경을 갖춘 소수만이 버츄를 배양할 수 있다는 기존 생각방식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은 것이었다.
데모크라티아파는 콩도르세의 진보관을 받아들이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데모크라티아야말로 평화와 번영 속에서 피플의 자유와 법권리를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대귀족이나 지식인보다 오히려 피플이 더 순수한 마음, 더 현명한 거시적인 판단력, 더 용맹한 버츄를 지녔다고 믿었다. 이처럼 피플에 공감하는 자코뱅파의 스피릿은 지롱드파의 으뜸가는 이론가 콩도르세의 사회수학을 만나서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데모크라티아를 정당화하는 이론적인 토대를 닦은 것이다.
자코뱅 정파들이 몰락한 뒤 수립된 통령정부치하에서 데모크라티아파의 일부 정치인들은 사회최하층 피플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심지어 동물에까지 확장했다. 그들은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감각적인 고통과 공포를 느낄 수 있으므로 동물을 대량으로 사육하고 학살하는 체제를 철폐하고 채식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야만 네이처적인 평등에 걸맞은 대의데모크라티아 체제아래에서 인류가 진정한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령정부) 데모크라티아파가 내놓은 이 정치적인 구상의 밑바탕에는 '피플이 버츄를 갖추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는 고대부터 계몽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적인 관념, 곧 '피플은 무지몽매하여 정념에 휘둘리는 반쯤 짐승 같은 존재라는 관념, 그리고 특별한 속성반 교육을 받을 시간과 재력이 없는 보통사람들이 통치에 참가하는 데 필요한 버츄를 갖추기란 불가능하다'는 관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모든 메커니즘을 떠받치는 토대는 피플의 버츄고, 이 버츄를 키우고 유지하는 역할을 계몽이 맡아야 하며, 이러한 계몽을 풀뿌리에서부터 탄탄하게 형성하기 위해서 보편 교육을 보장하고, 언론의 자유, 정치어쏘시에이션에서 어쏘시에이션할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 바로 데모크라티아파의 정치철학이다.
프랑스혁명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새로이 데모크라티아적인 시도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혁명가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생각방식과 개혁프로그램이 공존하는 계몽의 시대를 이어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전과 달리 새로운 내용의 경제정책을 새로운 방식으로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라티아파가 주류 공화파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당시 기준으로 전망 있어 보이는 경제프로그램을 제시해야만 했고, 그들은 실재로 그런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많은 정치철학사 연구가 이 점을 간과했지만, 우리는 근대최초의 데모크라티아 이론가들이 내놓은 경제철학을 비교적인 상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데모크라티아파는 피플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뒤, 이른바 데모크라티아의 “어리석음”과 “무질서”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가져올 자유와 평등을, 그것이 만들어줄 강력하고 안정적인 국가를 그려보자고 제안했다. 콩도르세는 이런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선각자로 대접받았고, 데모크라티아파는 그가 “데모크라티아 스피릿을 드높였다”고 추켜세우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데모크라티아파의 지도적인 인물인 앙토넬은 데모크라티아를 비난하는 역사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했다.
데모크라티아파는 콩도르세를 따라 누진세를 지지했다 ... 다른 한편으로 데모크라티아파는 콩도르세와 마찬가지로 부자들이 경제활동·이윤추구 의욕을 잃을 정도로 누진세율이 높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데모크라티아파가 제시한 누진세의 세율은 최상위 고소득자에 대해서도 20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피플을 이루는 보통사람들 개개인이 라이프에서 익힌 지성이 개별적으로는 하잘것없어 보여도, 그것이 쌓이고 모이면 엘리트의 전문적인 판단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이 콩도르세의 수식이 증명하고자 했던 바이고, 로베스피에르가 “피플의 명령은 벼락과도 같다”는 말로써 전하고자 했던 바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옛말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제 데모크라티아파의 등장으로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데모크라티아는 더이상 피플주권론과 결합 가능한 여러 정부통치형식 중 하나가 아니라, “법률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피플의 주권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정부통치형식으로서 제시되었다.
콩도르세는 자코뱅-로베스피에르-생 쥐스트류의 공포정치에는 반대한 어느 지롱드였다. 그는, 3신분 부르조아 자유주의를 넘어서 코먼피플 모두의 데모크라티아를 개념설계한 프론티어였다. 데모크라티아에 <계몽교육 곧 코먼피플의 버츄>라는 전제조건을 붙이는 데 그는 성공했다.
이것은 고대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증간계급·시민의 버츄>에 가닿는 컨셉인 바, <코먼피플·코먼맨·프롤레타리아·플레브스>한테까지 버츄를 확장적용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이런 콩도르세의 관점을 앙토넬 등의 통령정부 데모크라트들이 이어 받았다. '코먼피플/코먼맨/보통사람이 공화국시민이 될 P버츄를 갖고 있다'라는 담론서사가 드디어 더넓게 먹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루쏘의 <일반의지-집단양심> 컨셉과 결이 다른 컨셉이다.
심지어 이들 통령정부 데크라티아파들은 존엄평등자유를 동물에게까지 확대적용했었네.

7-3. 미국시민혁명에서 데모크라티아의 진전: 헌정컨벤션 및 대통령 잭슨
※ 필라델피아 헌정컨벤션(1787.5.25~ 1787.9.17): 1776년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던 독립기념관에서 1787년 5월 25일부터 9월 17일까지 이루어졌다. 애초의 목표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룬 미국의 지배를 위해 각 주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통일된 헌정을 만들려던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미국 역사에 중대한 획을 긋는 연방헌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시민혁명은 영국시민혁명 보다 훨씬 나은 지정학적인 여건들에서 가능했다. 크릭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영국이 여전히 소수의 이례적인 선거구만을 인정한 데 반해, 미국의 거의 모든 주의회에서는 이미 폭넓은 선거권이 적용되고 있었는데, 이는 데모크라티아적인 정서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보다 널리 이용 가능했던 공유지 덕분이었다. 1년에 40실링의 세금을 내고 투표권을 얻는 자유보유권자들이 흔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부통치의 데모크라티아적인 어레인지먼트인 투표, 청원, 공공토론에 능숙해졌고, 무시당했을 때 시위와 폭동을 일으키는 데에도 점점 더 익숙해졌다. 한 왕실 관리는 고향으로 부친 편지에 이렇게 썼다. “군중이 ‘자유와 재산’을 외치고 있다. 이건 창고를 불태우겠다는 신호다.”
"나는 자유보유권자(freeholder)고 내 땅을 가지고 있죠~"
군중이 ‘자유와 재산’을 외치고 있다.
이건 창고를 불태우겠다는 신호다
여건이 이러했으므로, 미국건국의 아버지들 또한 "능동적인 시민을 원했는데, 이때의 시민이란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책임감을 지녔으며, 얼마간의 토지지분을 보유한 자로서, 재산에 따른 최소한의 투표권을 가지는 것이었다. 바로 이들이 ‘피플’이었고, 이 점에선 급진적인 제퍼슨주의자들이건, 그보다는 좀더 보수적이었던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의 추종자들이건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데모크라티아적인 정서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보다 널리 이용 가능했던 공유지 덕분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 스피릿의 주류 성향은 ‘독립’, 곧 상인공동체와 소농 모두를 엮어주는 능동적인 개인주의다. 애팔래치아 민요 속에서 “나는 자유보유권자(freeholder)고 내 땅을 가지고 있죠”라며 연인에게 구애하는 젊은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미국시민혁명의 주류는 자유주의자들이었고 공화주의자들이었다. 능동적인 시민의 테두리 바깥에 놓인, 재산없는 "코먼피플·코먼멘·프폴레타리아"들에의해 미국에 "진짜 데모크라티아가 부상할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보다 유리한 여건은, 필라델피아 제헌의회의 제퍼슨주의자들을 통해, 프랑스와는 또다른,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어느 진일보를 하고 있었다: "‘데모크라티아’를 환기시킨 것은 새로운 연방헌정이 만들어진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103)에서의 놀라운 토론을 통해서였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혁명도 데모크라티아를 위한 싸움도 아니었지만, 혁명적이고 데모크라티아적인 결과를 초래하리라 예견되고 있었다.
‘데모크라티아’를 환기시킨 것은 새로운 연방헌정이 만들어진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의 놀라운 토론을 통해서였다.
필라델피아 제헌회의는 중앙정부통치와 지방정부통치사이에 글자헌정을 통해 합의되고, 법률로 규제되며, 법률적인 구속력을 발휘하는 권력분배로서의 연방주의(federalism) 철학을 실재적으로 창안해냈다.
펜실베이니아 대표 제임스 윌슨이 근대정치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력으로, 이 두 논쟁, 곧 연방권력 대 주권력, 데모크라티아 대 선거권제한논쟁을 하나로 통합시켜버린다. 그는 “입법기관의 가장 많은 분야가 피플의 직접투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연방주의 피라미드의 높이를 상당한 고도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찬성했고, 따라서 이를 위해 가능한 한 넓은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제껏 어떠한 정부통치도 피플의 신뢰 없이는 존속하지 못했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뛰어난 법률이론가였던 제임스 윌슨(James Wilson, 1742~1798년)을 가리킨다. 그는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펜실베이니아주 대의원으로 참가, 헌정을 입안했는데, 이때 미국 하원과 선거인단 대표에 노예또한 (5분의 3) 비례로 포함시켜 (연방주의 피라미드의 기반을 최대한 넓히고) 이것의 비준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미국 최초의 대법관이 되었다.
수년이 흐른 뒤 ... 스스로 휘그라 칭했던 제퍼슨의 정당은 이제 데모크라티아공화당, 또는 주로 ‘데모크라티아’라 자칭하게 되었으며, 진정한 피플과 코먼멘의 정당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신조와 웅변 속에는 개인의 법권리가 다수의 법권리(와 권력)만큼이나 자주 등장했다. 자유와 법권리가 데모크라티아의 일반적인 의미에 포함될 정도로 개념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는(제퍼슨도 물론이고) 또다른 경우에 이 두 요소가 지향하는 방향이 각기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 미국의 군인이자 7대 대통령으로 ‘잭슨데모크라티아(Jacksonian Democracy)’를 정립하였다. 서프라지트확대(소유재산과 관계없이 모든 백인 어른 남자의 선거권을 인정), 대통령을 배출한 당의 지지자들로 각료를 구성하는 엽관제를 통해 대통령 권한 확대, 자유방임경제(법률적인 권한의 극대화에 대한 완충어레인지먼트로 정부통치의 경제개입을 지양함) 등을 골자로 한다.
트루쓰한 데모크라티아와 선거권의 확대는 새롭게 주의 지위를 얻은 변방인 테네시주 출신으로 피폴적인 영웅이었던 앤드루 잭슨 장군이 1829년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정적들은 “그야말로 연마하지 않은 다이아몬드이자 선동가”라며 그를 두려워했다. 이른바 ‘잭슨 데모크라티아’ 시대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대다수 사람들, 곧 ‘코먼맨’이 이미 선거권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그리고 그 까닭은 데모크라티아적인 개혁때문이 아니라, 토지(대부분은 식민지 시대부터 꾸준히 보유하고 있었던) 가치의 점진적인 인플레이션 덕분에 저 옛날의 ‘40실링 자유보유권’을 손쉽게 소유할 수 있었던 때문이다—잭슨은 애초에 당선되지도못했을 거라고 지적한다.
미국시민혁명의 아버지들이 미적미적 거린 것과 달리, 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은 당시 기득권화되어가던 미국 정치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코먼피플·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슬로건답게 꽤 많은 사회 중하류층의 지지를 받았고, 이들의 인터레스트·이익을 대변하면서, 이른바 "잭슨 데모크라티아'를 이끌었다.
잭슨 데모크라티아는 노동자 및 농민을 포함한 모든 '백인'남자들에게 투표권을 제공해야 하고, 가성비주의·효용주의·공리주의·유틸리타리아니즘을 주장하고, 파이낸스·금융·재정 기득권의 타파를 주장하는 등 급진적인 주장들을 펼쳤다.
그러나 이런 잭슨의 피플주의는 리버럴 데모크라티아가 아닌 히틀러의 나치즘과 흡사한 면이 있다고 평가 된다. 이는 잭슨의 데모스라는 것이 당시 미국 상당수 백인들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아메리카 원주민과 노예 문제에서 그는 철저한 인종주의자였고, 흑인이나 원주민들을 열등인간으로 봤다.
7-4. 차티스트운동과 서프러제트-페미니즘운동

하지만 프랑스대혁명의 콩도르세 및 앙토넬이나 미국헌정의 앤드류 잭슨 등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리버럴 데모크라티아>의 시대는 실현되지 못했다. 여전히 개인주의C보수자유주의는 능력주의인 탓에, 사유재산이 없으면, <정치적인 서프라지·참정권·선거권·투표권이 없다>라는 주장을 밀고 나갔다.
이걸 깨부순게 20세기 초 차티스트들 및 페미니스트들의 데모크라티아-서프라지무브먼트 곧 민주참정권운동이었고, 이를 계기로 마침내 3신분 자유주의와 4신분 데모크라티아가 결합한, 리버럴 데모크라시가 형성된다.
1838년부터 영국의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차티스트 운동을 주도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노동당과 페이비언 협회 그리고 사회자유주의의 시원들이 된다. 가성비주의 철학의 제러미 벤담이나 제임스 밀 및 그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웬 등이 대표적인 영국식 급진주의자들이었다.
빅토리아 대영제국 기득권의 개인주의C보수자유주의에 도전한 이들 18~19세기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운동과 철학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 오늘날의 거의 많은 것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근대영미사회에 이들의 급진주의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봐도 될만한 것이, 바로 차티스트 운동 및 서프러제트 운동이다. 이들이 피흘리면서 갈망했던 <보통선거 원칙>이라는 것은, 오늘날에는 당연한 디폴트값이지만, 그당시의 잣대로 볼 때, '급진적인' 선거개혁운동이었다.
출처: 문역뜰 https://www.youtube.com/watch?v=Z8nm3k6QuVE
차티즘, 차티스트라는 명칭은 노동자들이 제기한 《인민 헌장 곧 피플스 차터People's Charter》에서 유래했다. 차티스트운동이라는 것은, 1838년부터 1850년대 후반까지 보통선거를 바탕으로 한 팔리멘트리 데모크라티아·의회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영국에서 벌어졌던 최초의 4신분 프롤레타리아운동으로써, 1850년대 전반까지 영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뒤에 이뤄질 리버럴데모크라티아의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인민 헌장 곧 피플스 차터People's Charter》의 보통선거와 비밀선거, 선거구 평등화, 의회 매년 소집, 하원의원 유급제, 재산에 따른 피선거권 자격제한 폐지와 같은 조항들은, 지금 보면 지극히 당연한 내용들이지만 당시 주요 지배층에게는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급진적인 내용들이다.
운동 자체는 1858년 전국헌장협회가 해체되면서 결국 끝났지만, 마침내 1867년과 1884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영국에서 보통선거가 정착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남자들'에게 한정된 보통선거였다.
자 또 정리하자, 1920년대가 리버럴 데모크라티아 탄생한 때이다. 1920년 써앞까지는 서양에 리버럴 데모크라티아가 행동현실화되지 못했다. 리버럴데모크라티아가 실현되려면, 부르조아는 4신분 프롤레타리아에게 폴리티컬 라이트를 내어주고, 동시에 4신분 프롤레타리라는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또는 가즌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부르조아자유주의의 대표대의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렇게 서로 타협이 이뤄지는 과정이 바로 차티스트운동 및 서프라제트운동이다.
여성에게도 서프라지가 주어진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18년이었는데 남성 21세 이상, 여성 30세 이상으로 여전히 차별이 있었지만, 1928년에 21세로 통일되었고 1969년 18세로 하향되어 지금에 이른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서프라지운동을 벌인 여성들을 지칭하는 영어낱말인 서프라제트suffragette는 투표권·선거권·참정권을 뜻하는 서프라지에 여성형 접미사 -tte가 붙어서 만들어 졌다.
우리들 페미니스트 서프라제트들은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임무일 것이다. 그 임무란, 바로 인류의 절반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방을 통해서 인류의 나머지 절반을 구하는 것이다. - 에멀린 팽크허스트
빅토리아 대영제국의 데모크라티아는 일정한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낼 수 있는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차티스트운동으로 보수당과 자유당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몇 차례 법 개정을 통해 서프라지를 확장했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언제나 여자는 빠졌다.
1860년대부터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급진주의자들이 여자의 서프라지를 꾸준히 의회에 상정하였지만 매번 부결되었다. 서프라제트들은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음을 알고 참지 못했다. 정부의 합법이란 것은 여자의 정치적인 법권리를 박탈하기 때문이었다.
1903년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자신의 세 딸과 함께 《여자들의 사회적 정치적인 통일》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를 조직했고, 서프러제트라는 이름이 이때 붙여졌다. 초기에는 평화시위를 했지만 1908년부터는 과격 시위를 선택했고 이후 많은 여성들은 수시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하면서 시위를 이어나갔다.

1913년 《여자들의 사회적 정치적인 통일》 소속의 에밀리 데이비슨이 조지 5세의 경마장에 뛰어들어 1인시위를 벌이다가 말에 치어 죽었다. 이로 인해 여자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에밀리 데이비슨의 장례식은 거대한 시위행렬로 변했고, 리버럴 페미니스트 서프라제트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시위는 극단화되었고 곳곳에서 남자들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던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타기 시작했다. 영국의 경찰서는 서프라제트들로 넘쳐났다.

1914년 점차 영국 정부와 합의안을 만들어 가면서 시위는 사그라들었지만 4신분 여자프롤레타리아의 서프라지를 배척한 합의안이었다. 그때 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서프라제트들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논의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아내고, 서프라지운동을 일시적으로 접었다.
1918년 2월 전쟁이 끝난 뒤, 전쟁 기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한 여자들의 메리트·능력·실력·공적·실적·업적 및 커진 여자 유권자들의 영향력 때문에, 영국정부는 《피플의 대표자에대한 액트》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로 여자들의 서프라지를 입법했다. 그러나 이 법률에서도 여전히 30세가 안된 여자들은 배척됐다.
1928년 개정된 《피플의 대표자에대한 액트》에서 영국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은 완전하게 평등한 서프라지를 획득하게 됐다. 안타깝게도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인민대표법 제정 한 달 전에 사망하며 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처럼 리버럴리즘·자유주의와 데모크라티아의 접합들의 여러 계기들 가운데 중요한 어느 하나가 영국의 <서프러제트운동·참정권운동·선거권운동·투표권운동>의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즘이 전체주의·공산주의·파시즘으로 타락할 뻔한 4신분 피플주의·공산주의·포퓰라 데모크라티아·피플스 데모크라티아·인민민주주의·민중민주주의를 구제했다. 페미니즘 덕분에,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단 사이의 중도·미드웨이인 리버럴데모크라시를 인류는 찾아낼 수 있었다.
'차티스트 운동' 보통선거권이 가진 진짜 의미
1차 세계대전 여권신장 계기되다
국왕 말에 뛰어들던 英 여성참정권 운동 '서프러제트' 100주년
여성과 정치 1부 : 여성참정권,100년의 투쟁
물론 차티스트운동 및 서프러제트운동으로 리버럴데모크라티아의 행진이 끝난 것은 아니다. 1060년대 미국의 흑인시민권운동 등을 비롯, 그리고 얼마전 한국의 촛불항쟁도 그렇고, 홍콩에서 미얀마에서 태국에서, 그리고 서아시아에서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여전히 3신분의 피플주의인 자유주의와 4신분 피플주의인 데모크라티아의 결합을향한 가즌 시도/트라이·노력/에퍼트·노고/엔데버·분투/스트라이빙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유주의의 주체인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가 웰쓰하고 교양있어야 하고, 그 민주주의의 주체인 4신분 프롤레타리아 또한 교육교양을 통한 버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 다 동시에 교양교육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쉽지 않은 것이다.
후진나라들일 수록, 3신분 부르조아가 부실하고 교육교양수준이 낮고, 4신분 프롤레타리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진나라일수록, 리버럴데모크라티아가 아니라, 오토크라시거나 아리스토크라시거나 올리가르키거나, 심지어 공산주의-파시즘-권위주의-전체주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어느 나라의 정치 수준이라는 것은 그 나라 피플의 공동체의식의 수준, 이른바 "민도"에 좌우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오늘 글은 마치겠다. 다음 글은 데모크라티아의 지성사적인 전환을 해명한 김민철에 대해서, 및 중국지성사의 <안민·양민·귀민·애민·휼민·구민·중민·위민·보민> 서사들은 과연 데모크라티아인가를 살펴보면서, 4차례 걸친 긴 글을 끝내도록 하자.
나이테202회차 김민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 하는가] 발제(요약본 7분)
※ 윗동영상은 발제 앞부분의 자세한 설명들 다 걷어내 버리고, 딱 7분짜리 초압축요약본임. 이거 듣고 디테일들이 궁금하면, 아래 발제 풀영상을 봐도 좋겠다.
나이테202회차 김민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 하는가] 발제
서사제도진화이론가, 철학자, 서예가, 디지털 아티스트, SVA 미술석사, 실험영화작가, 불어불문학 학사. 인류문명사·철학사·지성사·개념사 곧 '지식의 지식'에관한 메타철학이자 인공지능을위한 메타윤리학인 서사제도진화이론을 연구중임. https://www.facebook.com/sugunzag/
이번 [정치이념성향 톺아보기⑦]은 글이 길다. 그래서 4개로 나누어서 연재한다. 연재순서는 아래와 같다. (순서 및 내용은 변경가능함) 오늘은 그 3번째이다.
<1/4>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피플의 분화 및 3종류의 피플주의
1. 피플이란 무엇인가? 그 역사적인 분화를 추적해보자
2. 학술용어·개념들은 반드시 지성사적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3. 피플주의의 3종류: 자유주의 vs 공산주의(또는 전체주의) vs 자유민주주의
<2/4>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탄생했나: 데모크라티아에대한 악평들 vs 호평들의 지성사
4. 2천5백 여년간의 데모크라티아에대한 악평들
5. 몇몇 데모크라티아에대한 호평들
6. 루쏘 너 마저!
<3/4>
7.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합쳐지다
<4/4>
8. 김민철의 아카데미즘·스콜라쉽의 어느 훌륭함
9. 중화문명의 <안민·양민·귀민·애민·휼민·구민·중민·위민·보민> 서사들은 과연 데모크라티아일까?
7.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합쳐지다
<데모크라티아·데모크라시·민주주의·민주정·민주제·민치정>를 논의할 때, 가장 골치아픈 지점이 "통제불가능한 피플주의, 다수의 티란니, 인민재판·공포정치·떼거리지배·몹룰, 중우정치·오클로크라시"라는 악평의 이미지이다. 이때문에, 역사적으로 안티-데모크라티아 곧 반민주주의 서사가 득세했다.
※ 서양의 계급분화의 역사: 12세기 고딕중세에 서유럽(특히 이탈리아 코뮤네)에서 최초로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 및 기사계급, 그리고 도시노동자들을 비롯한 4신분 프롤레타리아의 원형이 태어난다.
※ 13세기 이탈리아 코뮤네에서 최초로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의 피플주의인 자유주의·개인주의가 발현됐다
※ 11~ 15세기까지 이탈리아 코뮤네들에서 3신분 포폴로 그라쏘 곧 그랜드 부르조아 자유주의의 변천 또는 변질과정데모크라티아가 자유주의와 결합하려면, <무식하고,광신적이고, 선동적이고, 공포스럽고, 위험하고, 무지몽매하고, 무질서하고, 무정부적인 폭도들의 폭정>이라는 그 캐릭터를 벗어던져야 했다.
데모크라티아를 이렇게 악평-혐오-공포-저주하는 쪽 곧 콘트라-데모크라티아 곧 대항-민주주의가 볼 때, 데모크라티아라는 것은 <피플주의 곧 공산전체주의>와 동의어이다. 이들 콘트라들이 주로 <모나키+아리스토크라시+자유주의 공화파들>이다.
데모크라티아에대한 평균일반적인 이런 악평들에맞서, <데모크라티아는 좋은 것이여~>라고 호평한 쪽 곧 프로-데모크라티아 곧 찬성-민주주의는 서양지성사 상에서 몇차례 없었다. 이들 프로스들은 다시 두종류로 나뉜다.
100% 4신분 피플주의로써, 공산전체주의
대의제데모크라티아 곧 리버럴테모크라티아
하나는, 100% 4신분 프롤레타리아 피플주의로써, 공산전체주의이다. 이들은 모나키-아리스토크라시-자유주의를 죄다 부정하고 타도척결폐절시키고, <100%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데모크라티아만 옳다>고 보는 집단주의R진보 답정너들이다.
다른 하나는, <대의제데모크라티아 곧 리버럴테모크라티아>로써 모나키-아리스토크라시-자유주의와 공산전체주의·4신분 피플주의 사이의 중도노선·미드웨이midway·좁은회랑을 걷는 쪽이다.
이 둘 가운데 뒤엣쪽의, 특히, 리버럴데모크라티아의 지성사를 설명하는 것이 이번 글의 목표이다. 먼저, 간단히 결론부터 말해보자. 먼저글에서 살펴봤던 프랑스대혁명 써앞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마키아벨리 말고는,
(1) 1794~ 1797년 프랑스대혁명의 콘술라트/통령정부 시기의 데모크라트들(콩도르세의 후예들)
(2) 미국시민혁명 기간 데모크라티아의 진전: 필라델피아 헌정컨벤션 및 대통령 앤드류 잭슨(1767~ 1845)
(3) 무엇보다 남자들의 차티스트운동+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서프러제트운동
이 3개를 나는 손꼽는다. 1과 3은 그런데로 언급되지만, 1에 대해서는 한국학술장은 무지무식등한시해왔다. 이것을 논증한 학자가 김민철이고,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 하다.
프랑스대혁명부터 오늘날까지의 이들 3개의 호평들 가운데, 한편으로 콩도르세 및 앙토넬같은 콘술라트/통령정부 데모크라트들에의해 <자유주의 대의제와 4신분 평등주의의 절충·합금·융합>의 아이디어가 발명됐다. 다른한편 미국시민혁명 속에서도 자유주의 또는 공화주의는 점진적으로 모든 피플의 정치적인 법권리를 포용하는 데모크라티아와 결합해 나간다.
그러나 리버럴데모크라티아를 만들어낸 결정타는, 무엇보다 영국의 차티스트운동+ 페미니즘 서프러제트운동이다. 1867년 프로퍼티레쓰·프롤레타리아·플레브스 남자들이 차티스트운동으로 서프러지suffarage·투표권·선거권·참정권 곧 정치적인 법권리·폴리티컬 라이트를 얻어냈고, 1928년에는 여자들 곧 서프러제트들이 마침내 스스로의 정치법권리를 싸워 얻었다.
이 과정에서, 서프러지를 4신분 프롤레타리아에게 부르조아가 내주고, 3신분 부르조아의 레프리젠타티브 정부통치의 시스템에 프롤레타리아가 동의함으로써, 자유주의와 데모크라시의 아말감·합금, 퓨전·융합, 하이브리드·혼종, 인코퍼레이션·합체인, 리버럴테모크라시가 탄생했다, 1928년이다. 자, 이제 (1) (2) (3)을 차례차례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대중을 미심쩍게 여기고, 정치적 평등이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위협할 것을 우려하고, 서프라지·선거권을 부르조아에게만 한정했던 자유주의 의회정치는 이제 데모크라티아화되어야만 했다. 1920년대까지 보통선거권은 자유주의-의회제 사회에서 규범이 되었다. 리버럴 데모크라시가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시기에 등장한 전체주의 체계들 못지않게 새로운 혼합 체계였다. - 아자 가트 [문명과 전쟁] 15장

7-1. 콩도르세
콩도르세(1743~ 1794)콩도르세의 지성사적인 아이디어가 데모크라티아의 의미를 근대적으로 바꿨다. "이 전환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인물은 콩도르세M.-J.-A.-N. de Caritat, marquis de Condorcet였다. 그는 혁명이전에 유럽의 천재 수학자로 명성을 얻었고, 계몽의 상징이라 불리는 『백과전서』Encyclopédie를 편찬한 수학자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의 소개로 살롱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콩도르세는 볼테르를 스피릿적인 스승으로 삼았고 그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훗날 『볼테르의 라이프』Vie de Voltaire이라는 책을 써서 계몽철학의 가치들을 천명하기도 했다."
"콩도르세는 자신의 발언을 통해 상당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전 유럽에서 존경받는 수학자이자 해박한 계몽철학자였고, 전통적인 세계관의 언어를 구사했다. 그는 전통적인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어떤 문제를 건드려야 하는지, 어떤 전략으로 논리를 구성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앞에서 언급한 극소수 급진파 정치인들과 달리 콩도르세는 스스로도 주류의 문제의식을 공유했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그 결과, 그는 주류 정치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 이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의 뽑아추린 글토막들은 김민철, 포셋, 노명식, 크릭의 책들 및 나의 《서양정치윤리철학사》 강의록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콩도르세는 평등을 향한 인류의 진보가 자동적이고 필연적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누진세 제안을 보면, 그가 평등을 향한 인류의 진보가 당연하고 네이처스럽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현존하는 극심한 불평등이 즉각적으로 공화국의 쇠퇴를 초래할 것이라고 염려했으며, 그렇기에 국가가 포지티브적인 정책으로 사회에 개입해서 극심한 불평등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790년에 콩도르세는, 보통선거권의 선구자적인 지지자인 콩도르세는 향후 150년 동안 자유주의자들을 크게 괴롭힐 난제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교육받지 못했음을 이유로 노동자와 여자들을 정치에서 배척한다면, 머잖아 허가받은 사람이라고는 공법 학위 소지자들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이런 빈정거림의 핵심은 시민권이 시민의 “역량”, 곧 교육이나 재산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함축적인 의미는, 모든 사람이 투표할 수 있어야 하고 공직에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콩도르세는 프랑스의 1793년 헌정을 위한 자신의 거부된 초안에서 그 조치를 제안한 바 있다. 1793년의 제헌 논쟁에서, 시에예스와 콩도르세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평등한 시민적인 지위를 가질 것을 요구함으로써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여자의 투표권에 대해서는 물러섰지만, 그들의 제안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으로 데모크라티아적인 것이었다.
1793년, 네이션카운슬 의원이 된 콩도르세는 2월에 컨스티투션 초안을 제출했다. 컨스티투션 초안을 발표하면서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첫째, 프랑스에서는 더이상 세습모나키를 보존할 필요가 없다. 둘째, 프랑스는 연방제 공화국이 될 필요가 없다. 셋째, 그러나 프랑스는 대국이므로 대의제 컨스티투션을 필요로 한다. 넷째, 프랑스는 의회가 피플의 주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컨스티투션에 피플의 검열권censure du peuple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이 검열권은 프랑스전역에서 상향식으로 행사되는 것으로서, 각 지역의 1차 선거회가 국회의 법률을 거부하고 재심의를 요구하며 최종적으로는 법률을 폐지할 수도 있는 권위를 갖게 된다.
콩도르세는 교육을 받지 못한 대중은 권리를 알지 못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는 진정한 자유와 정치적 평등을 실현하려면 국가의 교육체계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계몽이 실현된 미래로 가기 위한 이행기제의 핵심은 교육이었다. 콩도르세는 피플이 장기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며, 필요하다면 좀더 속성으로 교육받아 국가의 대사에 참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1789년 이후 수많은 교육 사업을 설계했는데, 그것들의 핵심은 폭넓은 시민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초등교육에서 읽기, 쓰기, 산수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과 학생들의 스피릿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통치가 고등교육의 내용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그는 보편적인 초등교육과 차원을 높인 고등교육을 하나의 전망 속에 결합시켰다.
콩도르세는 정치참가와 자유로운 언론 활동을 통해 계몽된 피플이라면 더이상 선동정치와 폭정에 희생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교육을 통해 대다수 시민의 독립적이고 주스한/저스티스한/정의로운 판단력을 높이면, 피플이 정치적으로 주스한 판단을 내리는 데모크라티아가 다수의 폭정이 아니라 안정적인 법률의 지배국가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수학적인 가능성이 열렸다. 이제 데모크라티아를 고대의 낡은 정부통치형식이라며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근대데모크라티아의 싹이 튼 것이다.
그러나 피플의 완전한 계몽이 이루어질 미래의 그날이 오기 전까지, 당장에는 “질서를 다시정립하고 무정부통치상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대의제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다. 콩도르세는 한편으로 피플이 격한 감정에 치우칠 가능성이 있는 자신들의 의지가 무조건 법률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된 견해”를 버리고, 결국 스스로 뽑은 “대표를 통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피플에게 무조건 대표들을 신뢰하라고 강요하기 전에 대표들이 정당하게 피플의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도 말했다.
피플은 원래 흉포한 것이 아니라 흉포해질 만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고, 그들을 그 상황으로부터 끄집어내면 더이상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콩도르세는 피플이 모인다고 해서 무조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모임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평화롭게 이루어진다면 자유를 드높일 수 있으므로 자유와 평화의 조화를 추구하는 방편으로 간주하자고 말한 것이다.
사실 경제적인 토대가 없는 정치적·헌정적인 설계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당시 파이낸스, 상업에 대한 연구를 포괄하는 정치경제학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던 콩도르세는 자신의 정치적인 구상이 모래성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탄탄한 경제적인 주춧돌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누진세 도입을 주장했다. 그 이유인즉슨 “웰쓰의 심각한 불평등”이 자유국가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도한 세금역시 재산을 보유한 계급의 경제활동 유인을 저하시켜 상업, 제조업, 농업의 성장을 막을 수 있다는 염려가 뒤따랐다. 따라서 콩도르세는 온건한 누진세를 시행하자고 제안했으며, 그러한 제도가 자유를 유명무실하지 않고 실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준의 경제적인 평등을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쳤다. 약간의 누진세와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평등이 없다면 “심지어 법권리의 평등도 완전하고 실재적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부자가 돈으로 법률을 넘어서는 경우를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계속 목격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계에서는 법률적인 법권리의 평등이 허망한 말에 불과하다는 점을 콩도르세는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콩도르세는 정부통치가 피플의 정치적인 자유와 경제적인 자유를 동시에 보장하면 빈곤과 무지가 완화될 수 있고, 이를 통해 피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역사의 순환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극단적인 데스포트주의·폭정의 상황에서는 피플의 봉기·반란조차 자유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피플이 봉기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통치자들이 어쩔 수 없이 자제력을 발휘해서 권력을 극단적으로 남용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콩도르세는 이 논리에 입각해서 피플의 법권리와 봉기의 가능성을 담은 각종 법권리선언문들이 독재자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하고 컨스티투션의 자유를 지키는 스피릿적인 보루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내놓은 콩도르세 자신도 준동하는 피플의 폭력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때는 여전히 1789년이었다. 그는 일정한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것이 “사물의 네이처를 따르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국가는 그들의 재산위에 세워지고 국가의 운영은 재산소유자들의 동의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784년에 콩도르세가 만인에게 참정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789년이 되어서도 (다른 대부분의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당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 결정권을 갖도록 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유다이모니아에 기여하리라고 믿었다.
사실 여러 측면에서 콩도르세는 시대를 외로이 앞서간 급진주의자였다 ... 그는 동시대 프랑스의 어느 누구보다도 여자의 법권리, 흑인의 법권리, 유대인의 법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했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지각을 가진 존재이므로 성별·혈통·피부색에 상관없이 평등한 법률적·정치적인 법권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런 콩도르세조차 파리의 피플이 여러차례 보여준 정치적인 과단성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1793년에 이 모든 것을 주장한 콩도르세는 관련된 연설문이나 책자에서 데모크라티아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콩도르세는 데모크라티아를 이론화할 수학적인 토대를 놓았으나 여전히 피플을 두려워했다.
이에 비해 초기 자유주의자들은 데모크라티아와 관련해 완전히 느림보였다. 19세기까지도 자유주의자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열등한 동료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가질 “역량”이 부족한지 그 이유들을 교묘하게 늘어놓았다. 자유주의는 마지못해 시민권을 하나의 자격으로 취급하게 된 것뿐이었다.
피플은 원래 흉포한 것이 아니라
흉포해질 만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고,
그들을 그 상황으로부터 끄집어내면
더이상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7-2. 콘술라트 시기의 데모크라트들: 앙토넬
1794~ 1795에 새로운 데모크라티아 담론서사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악평의 저주받은 이데올로기는, 프랑스대혁명 통령정부(1799~ 1804) 시기에 데모크라트들에의해 <통제가능한 대의제 데모크라티아>로 탈바꿈했다: "살펴본 것처럼 데모크라티아라는 낱말은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이래 5년 사이에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었다 ... 1794년에 이르면 데모크라티아 개념은 조금 더, 그러나 아주 조금만 더 포지티브적이고 포지티브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 이 시기에 나타난 데모크라티아 개념의 변화는 1795년에 출범하는 통령정부시기로 이어졌다. 이 전승의 주역은 탄압을 견디며 정부통치에 침투하고 사회적인 활동을 이어간 데모크라티아파 인사들이었다. 데모크라티아파는 피플과 가까웠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데모크라트라 불러서 당대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렇게 김민철은 논증한다.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거다! 이로써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의 피플주의였다가, 이탈리아 코뮤네들의 경우, 점진적으로 아리스토크라시-올리가르키가 된 자유주의가, 드디어 4신분에대한 공포를 벗어나게 된, <통제가능해지고 고상해진 데모크라티아>와 비로소 궁합을 맞출수 있게 됐다.
그 결과 마침내 덧씌워졌던 <폭도>라는 캐릭터가 벗겨지고, 4신분 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한 모든 데모스·피플들이 건강하고 버츄있는 시민들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런 자기변신의 바탕 위에, 20세기 초 서프라지·참정권·선거권·투표권 운동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 곧 리버럴 데모크라시>가 가능해지고, 드디어 근대적인 공화주의 역시 성숙해진 것이다. 공화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데모크라티아가 온건해지고 성숙해졌으니까.
마찬가지로 아래도 마찬가지로 김민철, 포셋, 노명식, 크릭의 책 속 글내용물들이다:
앙토넬(1747~ 1817)자코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집단에는 브리소J. P. Brissot와 콩도르세로 대표되는 지롱드파,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와 당통G. Danton으로 대표되는 산악파 곧 자코뱅파, 그밖에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주창한 몇몇 분파들이 있었다. 특히 자코뱅 인사들은 피플이 버츄를 타고났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재산이나 혈통 같은) 환경을 갖춘 소수만이 버츄를 배양할 수 있다는 기존 생각방식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은 것이었다.
데모크라티아파는 콩도르세의 진보관을 받아들이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데모크라티아야말로 평화와 번영 속에서 피플의 자유와 법권리를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대귀족이나 지식인보다 오히려 피플이 더 순수한 마음, 더 현명한 거시적인 판단력, 더 용맹한 버츄를 지녔다고 믿었다. 이처럼 피플에 공감하는 자코뱅파의 스피릿은 지롱드파의 으뜸가는 이론가 콩도르세의 사회수학을 만나서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데모크라티아를 정당화하는 이론적인 토대를 닦은 것이다.
자코뱅 정파들이 몰락한 뒤 수립된 통령정부치하에서 데모크라티아파의 일부 정치인들은 사회최하층 피플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심지어 동물에까지 확장했다. 그들은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감각적인 고통과 공포를 느낄 수 있으므로 동물을 대량으로 사육하고 학살하는 체제를 철폐하고 채식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야만 네이처적인 평등에 걸맞은 대의데모크라티아 체제아래에서 인류가 진정한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령정부) 데모크라티아파가 내놓은 이 정치적인 구상의 밑바탕에는 '피플이 버츄를 갖추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는 고대부터 계몽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적인 관념, 곧 '피플은 무지몽매하여 정념에 휘둘리는 반쯤 짐승 같은 존재라는 관념, 그리고 특별한 속성반 교육을 받을 시간과 재력이 없는 보통사람들이 통치에 참가하는 데 필요한 버츄를 갖추기란 불가능하다'는 관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모든 메커니즘을 떠받치는 토대는 피플의 버츄고, 이 버츄를 키우고 유지하는 역할을 계몽이 맡아야 하며, 이러한 계몽을 풀뿌리에서부터 탄탄하게 형성하기 위해서 보편 교육을 보장하고, 언론의 자유, 정치어쏘시에이션에서 어쏘시에이션할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 바로 데모크라티아파의 정치철학이다.
프랑스혁명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새로이 데모크라티아적인 시도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혁명가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생각방식과 개혁프로그램이 공존하는 계몽의 시대를 이어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전과 달리 새로운 내용의 경제정책을 새로운 방식으로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라티아파가 주류 공화파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당시 기준으로 전망 있어 보이는 경제프로그램을 제시해야만 했고, 그들은 실재로 그런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많은 정치철학사 연구가 이 점을 간과했지만, 우리는 근대최초의 데모크라티아 이론가들이 내놓은 경제철학을 비교적인 상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데모크라티아파는 피플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뒤, 이른바 데모크라티아의 “어리석음”과 “무질서”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가져올 자유와 평등을, 그것이 만들어줄 강력하고 안정적인 국가를 그려보자고 제안했다. 콩도르세는 이런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선각자로 대접받았고, 데모크라티아파는 그가 “데모크라티아 스피릿을 드높였다”고 추켜세우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데모크라티아파의 지도적인 인물인 앙토넬은 데모크라티아를 비난하는 역사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했다.
데모크라티아파는 콩도르세를 따라 누진세를 지지했다 ... 다른 한편으로 데모크라티아파는 콩도르세와 마찬가지로 부자들이 경제활동·이윤추구 의욕을 잃을 정도로 누진세율이 높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데모크라티아파가 제시한 누진세의 세율은 최상위 고소득자에 대해서도 20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피플을 이루는 보통사람들 개개인이 라이프에서 익힌 지성이 개별적으로는 하잘것없어 보여도, 그것이 쌓이고 모이면 엘리트의 전문적인 판단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이 콩도르세의 수식이 증명하고자 했던 바이고, 로베스피에르가 “피플의 명령은 벼락과도 같다”는 말로써 전하고자 했던 바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옛말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제 데모크라티아파의 등장으로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데모크라티아는 더이상 피플주권론과 결합 가능한 여러 정부통치형식 중 하나가 아니라, “법률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피플의 주권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정부통치형식으로서 제시되었다.
콩도르세는 자코뱅-로베스피에르-생 쥐스트류의 공포정치에는 반대한 어느 지롱드였다. 그는, 3신분 부르조아 자유주의를 넘어서 코먼피플 모두의 데모크라티아를 개념설계한 프론티어였다. 데모크라티아에 <계몽교육 곧 코먼피플의 버츄>라는 전제조건을 붙이는 데 그는 성공했다.
이것은 고대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증간계급·시민의 버츄>에 가닿는 컨셉인 바, <코먼피플·코먼맨·프롤레타리아·플레브스>한테까지 버츄를 확장적용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이런 콩도르세의 관점을 앙토넬 등의 통령정부 데모크라트들이 이어 받았다. '코먼피플/코먼맨/보통사람이 공화국시민이 될 P버츄를 갖고 있다'라는 담론서사가 드디어 더넓게 먹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루쏘의 <일반의지-집단양심> 컨셉과 결이 다른 컨셉이다.
심지어 이들 통령정부 데크라티아파들은 존엄평등자유를 동물에게까지 확대적용했었네.

7-3. 미국시민혁명에서 데모크라티아의 진전: 헌정컨벤션 및 대통령 잭슨
※ 필라델피아 헌정컨벤션(1787.5.25~ 1787.9.17): 1776년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던 독립기념관에서 1787년 5월 25일부터 9월 17일까지 이루어졌다. 애초의 목표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룬 미국의 지배를 위해 각 주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통일된 헌정을 만들려던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미국 역사에 중대한 획을 긋는 연방헌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미국시민혁명은 영국시민혁명 보다 훨씬 나은 지정학적인 여건들에서 가능했다. 크릭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영국이 여전히 소수의 이례적인 선거구만을 인정한 데 반해, 미국의 거의 모든 주의회에서는 이미 폭넓은 선거권이 적용되고 있었는데, 이는 데모크라티아적인 정서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보다 널리 이용 가능했던 공유지 덕분이었다. 1년에 40실링의 세금을 내고 투표권을 얻는 자유보유권자들이 흔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부통치의 데모크라티아적인 어레인지먼트인 투표, 청원, 공공토론에 능숙해졌고, 무시당했을 때 시위와 폭동을 일으키는 데에도 점점 더 익숙해졌다. 한 왕실 관리는 고향으로 부친 편지에 이렇게 썼다. “군중이 ‘자유와 재산’을 외치고 있다. 이건 창고를 불태우겠다는 신호다.”
"나는 자유보유권자(freeholder)고 내 땅을 가지고 있죠~"
군중이 ‘자유와 재산’을 외치고 있다.
이건 창고를 불태우겠다는 신호다
여건이 이러했으므로, 미국건국의 아버지들 또한 "능동적인 시민을 원했는데, 이때의 시민이란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책임감을 지녔으며, 얼마간의 토지지분을 보유한 자로서, 재산에 따른 최소한의 투표권을 가지는 것이었다. 바로 이들이 ‘피플’이었고, 이 점에선 급진적인 제퍼슨주의자들이건, 그보다는 좀더 보수적이었던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의 추종자들이건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데모크라티아적인 정서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보다 널리 이용 가능했던 공유지 덕분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 스피릿의 주류 성향은 ‘독립’, 곧 상인공동체와 소농 모두를 엮어주는 능동적인 개인주의다. 애팔래치아 민요 속에서 “나는 자유보유권자(freeholder)고 내 땅을 가지고 있죠”라며 연인에게 구애하는 젊은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미국시민혁명의 주류는 자유주의자들이었고 공화주의자들이었다. 능동적인 시민의 테두리 바깥에 놓인, 재산없는 "코먼피플·코먼멘·프폴레타리아"들에의해 미국에 "진짜 데모크라티아가 부상할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보다 유리한 여건은, 필라델피아 제헌의회의 제퍼슨주의자들을 통해, 프랑스와는 또다른,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어느 진일보를 하고 있었다: "‘데모크라티아’를 환기시킨 것은 새로운 연방헌정이 만들어진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103)에서의 놀라운 토론을 통해서였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혁명도 데모크라티아를 위한 싸움도 아니었지만, 혁명적이고 데모크라티아적인 결과를 초래하리라 예견되고 있었다.
‘데모크라티아’를 환기시킨 것은 새로운 연방헌정이 만들어진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의 놀라운 토론을 통해서였다.
필라델피아 제헌회의는 중앙정부통치와 지방정부통치사이에 글자헌정을 통해 합의되고, 법률로 규제되며, 법률적인 구속력을 발휘하는 권력분배로서의 연방주의(federalism) 철학을 실재적으로 창안해냈다.
펜실베이니아 대표 제임스 윌슨이 근대정치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력으로, 이 두 논쟁, 곧 연방권력 대 주권력, 데모크라티아 대 선거권제한논쟁을 하나로 통합시켜버린다. 그는 “입법기관의 가장 많은 분야가 피플의 직접투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연방주의 피라미드의 높이를 상당한 고도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찬성했고, 따라서 이를 위해 가능한 한 넓은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제껏 어떠한 정부통치도 피플의 신뢰 없이는 존속하지 못했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뛰어난 법률이론가였던 제임스 윌슨(James Wilson, 1742~1798년)을 가리킨다. 그는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펜실베이니아주 대의원으로 참가, 헌정을 입안했는데, 이때 미국 하원과 선거인단 대표에 노예또한 (5분의 3) 비례로 포함시켜 (연방주의 피라미드의 기반을 최대한 넓히고) 이것의 비준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미국 최초의 대법관이 되었다.
수년이 흐른 뒤 ... 스스로 휘그라 칭했던 제퍼슨의 정당은 이제 데모크라티아공화당, 또는 주로 ‘데모크라티아’라 자칭하게 되었으며, 진정한 피플과 코먼멘의 정당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신조와 웅변 속에는 개인의 법권리가 다수의 법권리(와 권력)만큼이나 자주 등장했다. 자유와 법권리가 데모크라티아의 일반적인 의미에 포함될 정도로 개념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는(제퍼슨도 물론이고) 또다른 경우에 이 두 요소가 지향하는 방향이 각기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 미국의 군인이자 7대 대통령으로 ‘잭슨데모크라티아(Jacksonian Democracy)’를 정립하였다. 서프라지트확대(소유재산과 관계없이 모든 백인 어른 남자의 선거권을 인정), 대통령을 배출한 당의 지지자들로 각료를 구성하는 엽관제를 통해 대통령 권한 확대, 자유방임경제(법률적인 권한의 극대화에 대한 완충어레인지먼트로 정부통치의 경제개입을 지양함) 등을 골자로 한다.트루쓰한 데모크라티아와 선거권의 확대는 새롭게 주의 지위를 얻은 변방인 테네시주 출신으로 피폴적인 영웅이었던 앤드루 잭슨 장군이 1829년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정적들은 “그야말로 연마하지 않은 다이아몬드이자 선동가”라며 그를 두려워했다. 이른바 ‘잭슨 데모크라티아’ 시대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대다수 사람들, 곧 ‘코먼맨’이 이미 선거권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그리고 그 까닭은 데모크라티아적인 개혁때문이 아니라, 토지(대부분은 식민지 시대부터 꾸준히 보유하고 있었던) 가치의 점진적인 인플레이션 덕분에 저 옛날의 ‘40실링 자유보유권’을 손쉽게 소유할 수 있었던 때문이다—잭슨은 애초에 당선되지도못했을 거라고 지적한다.
미국시민혁명의 아버지들이 미적미적 거린 것과 달리, 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은 당시 기득권화되어가던 미국 정치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코먼피플·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슬로건답게 꽤 많은 사회 중하류층의 지지를 받았고, 이들의 인터레스트·이익을 대변하면서, 이른바 "잭슨 데모크라티아'를 이끌었다.
잭슨 데모크라티아는 노동자 및 농민을 포함한 모든 '백인'남자들에게 투표권을 제공해야 하고, 가성비주의·효용주의·공리주의·유틸리타리아니즘을 주장하고, 파이낸스·금융·재정 기득권의 타파를 주장하는 등 급진적인 주장들을 펼쳤다.
그러나 이런 잭슨의 피플주의는 리버럴 데모크라티아가 아닌 히틀러의 나치즘과 흡사한 면이 있다고 평가 된다. 이는 잭슨의 데모스라는 것이 당시 미국 상당수 백인들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아메리카 원주민과 노예 문제에서 그는 철저한 인종주의자였고, 흑인이나 원주민들을 열등인간으로 봤다.
7-4. 차티스트운동과 서프러제트-페미니즘운동

하지만 프랑스대혁명의 콩도르세 및 앙토넬이나 미국헌정의 앤드류 잭슨 등이 있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리버럴 데모크라티아>의 시대는 실현되지 못했다. 여전히 개인주의C보수자유주의는 능력주의인 탓에, 사유재산이 없으면, <정치적인 서프라지·참정권·선거권·투표권이 없다>라는 주장을 밀고 나갔다.
이걸 깨부순게 20세기 초 차티스트들 및 페미니스트들의 데모크라티아-서프라지무브먼트 곧 민주참정권운동이었고, 이를 계기로 마침내 3신분 자유주의와 4신분 데모크라티아가 결합한, 리버럴 데모크라시가 형성된다.
1838년부터 영국의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차티스트 운동을 주도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노동당과 페이비언 협회 그리고 사회자유주의의 시원들이 된다. 가성비주의 철학의 제러미 벤담이나 제임스 밀 및 그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웬 등이 대표적인 영국식 급진주의자들이었다.
빅토리아 대영제국 기득권의 개인주의C보수자유주의에 도전한 이들 18~19세기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운동과 철학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 오늘날의 거의 많은 것을 만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근대영미사회에 이들의 급진주의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봐도 될만한 것이, 바로 차티스트 운동 및 서프러제트 운동이다. 이들이 피흘리면서 갈망했던 <보통선거 원칙>이라는 것은, 오늘날에는 당연한 디폴트값이지만, 그당시의 잣대로 볼 때, '급진적인' 선거개혁운동이었다.
출처: 문역뜰 https://www.youtube.com/watch?v=Z8nm3k6QuVE차티즘, 차티스트라는 명칭은 노동자들이 제기한 《인민 헌장 곧 피플스 차터People's Charter》에서 유래했다. 차티스트운동이라는 것은, 1838년부터 1850년대 후반까지 보통선거를 바탕으로 한 팔리멘트리 데모크라티아·의회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영국에서 벌어졌던 최초의 4신분 프롤레타리아운동으로써, 1850년대 전반까지 영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뒤에 이뤄질 리버럴데모크라티아의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인민 헌장 곧 피플스 차터People's Charter》의 보통선거와 비밀선거, 선거구 평등화, 의회 매년 소집, 하원의원 유급제, 재산에 따른 피선거권 자격제한 폐지와 같은 조항들은, 지금 보면 지극히 당연한 내용들이지만 당시 주요 지배층에게는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급진적인 내용들이다.
운동 자체는 1858년 전국헌장협회가 해체되면서 결국 끝났지만, 마침내 1867년과 1884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영국에서 보통선거가 정착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남자들'에게 한정된 보통선거였다.
자 또 정리하자, 1920년대가 리버럴 데모크라티아 탄생한 때이다. 1920년 써앞까지는 서양에 리버럴 데모크라티아가 행동현실화되지 못했다. 리버럴데모크라티아가 실현되려면, 부르조아는 4신분 프롤레타리아에게 폴리티컬 라이트를 내어주고, 동시에 4신분 프롤레타리라는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또는 가즌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부르조아자유주의의 대표대의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렇게 서로 타협이 이뤄지는 과정이 바로 차티스트운동 및 서프라제트운동이다.
여성에게도 서프라지가 주어진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18년이었는데 남성 21세 이상, 여성 30세 이상으로 여전히 차별이 있었지만, 1928년에 21세로 통일되었고 1969년 18세로 하향되어 지금에 이른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서프라지운동을 벌인 여성들을 지칭하는 영어낱말인 서프라제트suffragette는 투표권·선거권·참정권을 뜻하는 서프라지에 여성형 접미사 -tte가 붙어서 만들어 졌다.
우리들 페미니스트 서프라제트들은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임무일 것이다. 그 임무란, 바로 인류의 절반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방을 통해서 인류의 나머지 절반을 구하는 것이다. - 에멀린 팽크허스트
빅토리아 대영제국의 데모크라티아는 일정한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낼 수 있는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차티스트운동으로 보수당과 자유당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몇 차례 법 개정을 통해 서프라지를 확장했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언제나 여자는 빠졌다.
1860년대부터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급진주의자들이 여자의 서프라지를 꾸준히 의회에 상정하였지만 매번 부결되었다. 서프라제트들은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음을 알고 참지 못했다. 정부의 합법이란 것은 여자의 정치적인 법권리를 박탈하기 때문이었다.
1903년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자신의 세 딸과 함께 《여자들의 사회적 정치적인 통일》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를 조직했고, 서프러제트라는 이름이 이때 붙여졌다. 초기에는 평화시위를 했지만 1908년부터는 과격 시위를 선택했고 이후 많은 여성들은 수시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하면서 시위를 이어나갔다.

1913년 《여자들의 사회적 정치적인 통일》 소속의 에밀리 데이비슨이 조지 5세의 경마장에 뛰어들어 1인시위를 벌이다가 말에 치어 죽었다. 이로 인해 여자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에밀리 데이비슨의 장례식은 거대한 시위행렬로 변했고, 리버럴 페미니스트 서프라제트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시위는 극단화되었고 곳곳에서 남자들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던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타기 시작했다. 영국의 경찰서는 서프라제트들로 넘쳐났다.

1914년 점차 영국 정부와 합의안을 만들어 가면서 시위는 사그라들었지만 4신분 여자프롤레타리아의 서프라지를 배척한 합의안이었다. 그때 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서프라제트들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논의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아내고, 서프라지운동을 일시적으로 접었다.
1918년 2월 전쟁이 끝난 뒤, 전쟁 기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한 여자들의 메리트·능력·실력·공적·실적·업적 및 커진 여자 유권자들의 영향력 때문에, 영국정부는 《피플의 대표자에대한 액트》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로 여자들의 서프라지를 입법했다. 그러나 이 법률에서도 여전히 30세가 안된 여자들은 배척됐다.
1928년 개정된 《피플의 대표자에대한 액트》에서 영국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은 완전하게 평등한 서프라지를 획득하게 됐다. 안타깝게도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인민대표법 제정 한 달 전에 사망하며 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처럼 리버럴리즘·자유주의와 데모크라티아의 접합들의 여러 계기들 가운데 중요한 어느 하나가 영국의 <서프러제트운동·참정권운동·선거권운동·투표권운동>의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즘이 전체주의·공산주의·파시즘으로 타락할 뻔한 4신분 피플주의·공산주의·포퓰라 데모크라티아·피플스 데모크라티아·인민민주주의·민중민주주의를 구제했다. 페미니즘 덕분에,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단 사이의 중도·미드웨이인 리버럴데모크라시를 인류는 찾아낼 수 있었다.
'차티스트 운동' 보통선거권이 가진 진짜 의미
1차 세계대전 여권신장 계기되다
국왕 말에 뛰어들던 英 여성참정권 운동 '서프러제트' 100주년
여성과 정치 1부 : 여성참정권,100년의 투쟁
물론 차티스트운동 및 서프러제트운동으로 리버럴데모크라티아의 행진이 끝난 것은 아니다. 1060년대 미국의 흑인시민권운동 등을 비롯, 그리고 얼마전 한국의 촛불항쟁도 그렇고, 홍콩에서 미얀마에서 태국에서, 그리고 서아시아에서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여전히 3신분의 피플주의인 자유주의와 4신분 피플주의인 데모크라티아의 결합을향한 가즌 시도/트라이·노력/에퍼트·노고/엔데버·분투/스트라이빙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유주의의 주체인 3신분 포폴로 부르조아가 웰쓰하고 교양있어야 하고, 그 민주주의의 주체인 4신분 프롤레타리아 또한 교육교양을 통한 버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 다 동시에 교양교육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쉽지 않은 것이다.
후진나라들일 수록, 3신분 부르조아가 부실하고 교육교양수준이 낮고, 4신분 프롤레타리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진나라일수록, 리버럴데모크라티아가 아니라, 오토크라시거나 아리스토크라시거나 올리가르키거나, 심지어 공산주의-파시즘-권위주의-전체주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어느 나라의 정치 수준이라는 것은 그 나라 피플의 공동체의식의 수준, 이른바 "민도"에 좌우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오늘 글은 마치겠다. 다음 글은 데모크라티아의 지성사적인 전환을 해명한 김민철에 대해서, 및 중국지성사의 <안민·양민·귀민·애민·휼민·구민·중민·위민·보민> 서사들은 과연 데모크라티아인가를 살펴보면서, 4차례 걸친 긴 글을 끝내도록 하자.
나이테202회차 김민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 하는가] 발제(요약본 7분)
※ 윗동영상은 발제 앞부분의 자세한 설명들 다 걷어내 버리고, 딱 7분짜리 초압축요약본임. 이거 듣고 디테일들이 궁금하면, 아래 발제 풀영상을 봐도 좋겠다.
나이테202회차 김민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 하는가] 발제
서사제도진화이론가, 철학자, 서예가, 디지털 아티스트, SVA 미술석사, 실험영화작가, 불어불문학 학사. 인류문명사·철학사·지성사·개념사 곧 '지식의 지식'에관한 메타철학이자 인공지능을위한 메타윤리학인 서사제도진화이론을 연구중임. https://www.facebook.com/sugunz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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