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한겨레> 칼럼입니다. 지난 주에 제기한 헌법소원을 아주 쉽게 설명한 글이라고 할까요? 칼럼을 읽다가 놀라실 수도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의미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연구를 안 하잖아요.”
한국에 올 때마다 법학자들에게 매번 듣는 말이다. 나의 주요 연구 주제 중 하나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사법폭력이다. 다만, 나는 몇건의 판결을 중심으로 한 사례 연구보다는 특정 시기, 특정 사안에 대한 판결 전체를 분석함으로써 그 경향을 이론화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지난 수십년 동안의 판결문을 전수조사 중이라고 얘기하면, 항상 똑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경악스러움’과 ‘안쓰러움’. 판결문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데 전수조사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굳이 그 고생을 사서 하는 내가 안쓰럽다고 한다.
솔직히 힘든 것은 사실이다. ‘AI 3대 강국’을 목표로 한다는 이 시대에, 판결문을 읽기 위해 나는 미국에서 한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야 한다. 최근 10여년간의 판례를 넘어서 통시적 연구를 하려면 경기도 일산에 있는 법원도서관에 직접 방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 숙소를 잡아두고 일산까지 오가는 시간도 아깝기는 매한가지다. 그렇게 도착한 법원도서관 특별열람실에서는 주어진 80분 동안 사건번호만 겨우 적어 나올 수 있다. 필요한 내용을 메모라도 했다가는 출입금지를 당하기 때문이다. 확보한 사건번호를 바탕으로 각 법원에 ‘판결서 사본 신청’을 하고 한건당 천원씩 수수료를 입금하면 그제야 판결서를 꼼꼼히 읽어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구 진행이 더디다. 내가 하는 짓이 조금 우습기도 하다. 판결문을 분석하고 논문을 집필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그저 판결문을 모으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로서는 매우 곤혹스럽고 불리한 일이어서, 실적을 위해서는 당연히 다른 연구를 택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그래서 그런 연구 안 한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 것이다. 하지만 서구중심적 법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대안적이고 반식민적인 이론을 쓰기 위해서는 한국의 판례들을 마음껏 읽고 비교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법철학, 법사회학 등 기초법학이 한국에서 고사하고 있는 현실도 이런 불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판결문 열람 시스템을 보고 있으면 이런 비판조차도 배부른 소리인가 싶어서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교수’이기 때문에 특별열람실에 입장할 수 있는 것이고 ‘강사’는 접근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별열람실 예약 신청을 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가 난다. 한번은 교수 신분증을 첨부하지 않고 무작정 신청해본 적도 있다. 물론 거부당했지만. 대한민국 법원이 열람실 접근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만든 이유는 판결문에 드러난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교수들은 개인정보 유출을 하지 않는데, 일반 시민들은 개인정보를 유출한다는 이야기인가? 설명하면 할수록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특별열람실이 모두에게 개방되거나, 어디서든 수수료 없이 판결문을 자유롭게 내려받을 수 있게 되더라도, 끝까지 판결문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시각장애인이다. 황당하게도 “이미지 파일”로 판결문을 제공하도록 행정예규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자 인식조차 되지 않는 이미지로 만들어진 PDF 파일은 시각장애인용 리더기가 읽지 못한다. 그저 “파일 접근 권한이 없다”는 경고창만 뜰 뿐이다. 이 시대착오적인 예규는 최근 개정되었지만, 2021년 7월 이전의 판결문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은 심지어 본인의 재판에 필요하더라도 기존 판례를 읽을 수 없다. 판결은 국민에게 공개한다고 헌법 제109조에 명시되어 있는데, 시각장애인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
문제 제기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말한다. 대한민국이 이 정도인 줄 몰랐다고. 판결문 검색·열람 시스템의 개선은 시급한 문제일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쉽게 해결 가능한 문제다. 오직 법원의 의지가 없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헌법재판소에 관련 규정이 위헌임을 판단해달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강성국 활동가, 오픈데이터포럼 박지환 변호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송민섭 활동가도 청구인단으로 동참했다. 취지는 간단하다. 모든 국민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판결문을 무료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All reactions:
187Yuik Kim, Hojai Jung and 185 others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