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9.15
이명원(racan)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이자 문학평론가인 임규찬씨가 흥미로운 한 편의 글을 발표했다. 그 글의 제목은 <최근의 비평적 양상과 문제점들>이다. 이 평문에서 임규찬씨가 주장한 요점을 요약하면, 아마도 다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 우선 비판적 글쓰기에 대하여 : "그런데 문제는 그들(비판적 글쓰기론자-인용자)이 부분성에 갇힘으로써, 더불어 부분성의 전면적 가치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매우 착종된 형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2) 이른바 '문학주의'에 대하여 : "'비판적 글쓰기' 진영이 '부분성의 전면적 가치화'에 지나치게 붙들려 있다고 지적한 것도, 또 '문학주의' 경향이 대체로 '이분법 도식'에 지나치게 붙들려 있다고 지적한 것도, 최근 젊은 비평가들에게서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의 괴리'가 심각하다고 지적한 것도 다 그런 맥락이다."
이상의 임규찬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된다. "비판적 글쓰기=부분성의 전면적 가치화, '문학주의=이분법 도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양분법은 자기 모순적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임규찬씨의 다음과 같은 대단원의 결론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3) 그래서일까, 최근의 비평양상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어떤 이론적 명칭을 붙이든, 민족문학이나 리얼리즘이란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상관없이, 일차적으로 '진정한' 비평과 '엉터리' 비평을 구별하는 일부터가 새삼 중요한 사업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삼단논법을 간명하게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비판적 글쓰기'나 '문학주의'나 다 같은 '엉터리' 비평이라는 것. 그렇다면, 임규찬 자신은? 알쏭달쏭할 뿐이다.
<사회비평>이라는 매체가 있었다. 지금은 종간되었지만 이 매체에서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와 계간지 <창작과비평>(이하 '창비'로 명명함)의 문제성에 대한 특집이 있었다.
이 특집에 필자 역시 문학비평가 권성우씨와 함께 필진의 일부로 참여한 바 있다. 필자가 이 매체에서 지적했던 것은 소위 '창비상업주의'와 '창비권위주의'의 기이한 '복합체'였다.
최근 인터넷 저널 <대자보>에서는 황석영의 <삼국지>를 <조선일보>에 광고하고 있는 창비의 문제성에 대한 비판이 올랐지만, 그 비판은 창비의 기회주의적인 '상업주의'와 '권력중독증'에 대한 반성적 능력에 대한 과잉된 애정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창비에 기대를 걸지 말라. 정치권에서 떠드는 용어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과거'가 아닌 '현재'의 창비는 문화권력 지형에서 볼 때, '구주류'에 속한다는 정도의 말을 꼭 꺼내야 될까.
이제 임규찬씨의 견해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밝히기로 하겠다. 그 전에, 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 사람의 개성적 인물을 언급하고 싶다. 그는 '모세'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우리가 '출애굽기', 현대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유태인들의 '이집트 탈출기'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사람의 가장 큰 공적은, 그가 '강'도 아닌 '바다', 즉 '홍해'를 두 갈래로 갈랐다는 것이다. 이것을 세인들은 '홍해의 기적'이라고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임규찬씨의 비평적 태도가 내게는 모세의 그러한 기적을 연상시켰다.
그는 '문학주의'의 이분법을 문제삼으면서도, 비평계의 풍경을 이분화 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다시 그는, '비판적 글쓰기'의 '부분의 전면적 가치화'를 문제삼으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비판했던 태도를 자신의 평문 속에서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그가 '비판적 글쓰기'의 대표선수로 호출한 권성우, 고명철, 하상일에 대한 비판의 태도를 보면, 이것은 문학평론가 최익현씨가 말했던 이른바 '인용의 정치학'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나는 임규찬씨의 이러한 견해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때문에 오늘부터 <오마이뉴스> 지면을 통해서, 그가 소속되어 있는 <창작과비평>과 임규찬씨의 '권위의 수사학'이 갖고 있는 맹점에 대해 유연하게 토론하고자 한다.
인터넷상의 논쟁에 대해 지식인들은 소극적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소위 '지식인' 입네 하는 허위의식을 버리고, 제대로 된 상호간의 뜨거운 논쟁을 펼쳐보았으면 한다.
그 첫 번째 실천으로, 나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임규찬씨와 <창작과비평>의 '권위의 수사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명할 것이다. 이와 함께, 나는 이 논쟁에 임규찬씨 뿐만 아니라, 비평과 현실에 애정을 버리지 않는 모든 분들이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 글은 계속 이어집니다.
==
<창작과비평>과 임규찬 왜 이러나 <2><최근 비평적 양상과 문제점들>에 대한 반론 ②
03.09.19
이명원(racan)
임규찬씨는 <창작과비평> 최근호에 실린 <최근의 비평적 양상과 문제점들>이란 자신의 글에서 '비판적 글쓰기'의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반성적 진술을 제출하고 있다.
나 자신의 경우를 말한다면 이들의 비판은 앞서 이야기한 타성을 환기시켜 주는 한 계기가 되었다. 제도적,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현실적 분석과 비판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가져야 할 자세로서 지적한 도덕성, 윤리성에서 결코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그리하여 그들이 지적한 인정주의나 패거리주의 등에 무관치 않고 그런 흔적이 실제비평에서도 반영되기도 했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한다.
나는 임규찬씨의 '자기반성'의 선의를 존중하고 싶다. 그러나 그 반성이 진정성에 값하기 위해서는, 임규찬씨에게 가해진 비판의 '논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시하면서 논의를 펼치는 것이 더욱 소중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떠오르는 글은 문학평론가 고명철씨가 <비평과전망> 제6호에 발표했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죽음이냐, 갱신이냐>라는 평문이다. 이 평문에서 고명철씨는 9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을 윤대녕씨와 신경숙씨의 문학에 대한 임규찬씨의 '상이한 평가'와 '과잉된 해석'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던진 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신경숙 문학에 대한 임규찬의 해석을 살펴보건대, 앞서 살펴보았듯이 민족문학론을 부정하며 전략적으로 해체하려는 황종연의 비평과 대동소이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로 이 점이 내가 임규찬의 신경숙 해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다. 윤대녕에 대해서는 그렇게 매몰차게 배제시키면서 신경숙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비평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임규찬의 비평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내게 임규찬의 민족문학의 갱신은 '선언'의 차원에서는 공감되지만, 그 비평적 실천에서는 선뜻 동조할 수 없게끔 한다.
창비의 '신경숙 옹호(?)'와 관련한 논쟁을 다시 시작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반성에 철저하려면 일반론적인 수준의 진술이 아니라, 위에서 제기된 각론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투명하게 밝히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지 않고 두루뭉수리 하게 자신의 비평 태도의 문제점을 일반화하여 논의하는 것은, 이어질 자신의 비판에 대한 '안전장치'의 역할만을 할뿐이다. 요컨대 그것은 비판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적 반성의 수사학'으로 명명할 수 있는 태도이다.
실제로 임규찬씨는 이와 같은 간략한 자기반성문을 제출한 이후, 곧바로 '비판적 글쓰기'에 대한 비판을 과감하게 전개시키고 있다. 그 요점은 앞에서도 말했듯 '비판적 글쓰기'가 '부분성의 전면적 가치화'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라는 이분법도 의아스럽지만, 그가 이러한 주장을 논증하면서 동원한 '제도권력'과 '담론권력'의 이분법도 납득하기 힘들다. 일단 임규찬씨의 주장을 경청해보기로 하자.
최근까지 지속된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은, 자체의 체계를 지닌 '권위적 담론'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잡지와 매체 등 제도적 권력을 선점하고 있는 집단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였다. 이런 '제도권력'에 대한 비판은 '담론권력'에 대한 부차적인 비판의 의미는 지닐 수 있지만, '담론'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체'를 통해서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있었다.
임규찬씨는 제도와 담론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제도와 담론 사이의 관계는 임규찬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히 이분되는 것이 아니다. 제도가 담론을 완전히 기계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반대로 제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담론이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역시 몽상에 가깝다.
가령 <창작과비평>이라는 매체에서 주로 발설하는 '민족문학론'이나 '분단체제론'과 같은 담론은 그 자체로서는 모순 없는 '자기완결적인 체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러한 담론에 설득력과 영향력을 실어주면서 권위를 보증하게 만드는 것은, 담론의 생산과 재생산에 관여하는 창비라고 하는 시스템과, 임규찬씨와 같은 편집위원을 포함한 행위자들의 '복합체'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비판적 글쓰기론자'들의 비판은, 임규찬씨의 가정과는 반대로, 불가피하게, 아니 필연적으로 '제도권력'과 '담론권력' 모두를 향할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그러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령 앞에서 언급한 임규찬씨의 비평에 대한 고명철씨의 비판이 그런 경우다. 고명철씨의 비판은 표면적으로 임규찬씨의 비평윤리를 문제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민족문학론의 갱신'을 다짐하는 창비와 임규찬씨의 선언적 진술의 허구성을 적발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임규찬씨의 진술도 문제적이다.
특정한 대상을 분석할 때 전체성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앞서 부분성을 전면화하는 전략은 구석구석을 쑤셔서 필요한 이것저것을 채집하여 그것으로 판을 엮는 방식이기에, 그들의 의도만큼 진정성 있는 비판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이러한 문제점은 80년대 민족문학진영의 일부에서 보인 악명높은 '속류사회학주의' '정치주의'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다.
지난 80년대에 그 자신 <노동해방문학>에 관여하면서, 급진적 소장파의 일부로 활동했던 임규찬씨가, 오히려 비판적 글쓰기론자들에게서 '속류사회학주의' '정치주의'의 요소를 연상하게 만든 이 기막힌 시대의 변화 앞에서 나는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리고 구석구석을 쑤신다느니, 이것저것을 채집한다느니 하는 어법에서 드러나는 그 제어되지 못한 '권위의 수사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체성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나 역시 이에 대해 임규찬씨에게 다음과 같은 고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임규찬씨는 이른바 '비판적 글쓰기론자'로 명명되는 비평가들의 비평적 작업에 대해 얼마나 성실하게 그 '전체성'을 검토해 보았느냐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가령 그는 평론가 하상일씨의 실제비평을 문제삼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성실한 분석은 전혀 진행시키지 않고, 단지 "이들 비평은 '비판적 글쓰기'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범박한 수준의 것이다"며 선언하는 데서 그치는가 하면(논증은 없고, 선언만 존재하는 꼴이다), 김정란씨의 비평에 대한 강준만과 권성우, 고명철씨의 견해차를 언급하면서도, 그 맥락에 대한 분석은 생략하고 자신의 주장에 도움이 될 만한 부분만을 편의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견해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바로 뒷장에서는 '문학주의'의 문제성을 비판하기 위해 호출된 평론가 김춘식의 주장을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인용하는가 하면, 비판적 글쓰기론자의 90년대 문학에 대한 시각을 근거 없이 비판한 평론가 류보선씨의 주장 역시 자신의 입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 인용이 적절한 것이었으려면, 류보선씨의 바로 그 주장을 장문의 평문을 통해 반박했던 권성우씨의 평문을 함께 거론하면서 논의를 펼쳤어야 했건만, 임규찬씨는 역시 이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
비판적 글쓰기에서 '정치공세'를 연상하고, 그 자신이 가담했던 '악명 높은' 80년대의 '속류사회학주의'와 '정치주의'를 연상해내는 과장된 우려 역시 이해하기 힘든 발상법이다(나는 80년대의 그 정신적 기후를 '악명 높은'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악명 높다니, 그것을 불가피하게 조성한 '시대의 책임'을 묻는 것이 더욱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가 '비평의 정치성' 또는 '정치적 비평'을 강조하고 있는 영국의 좌파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비평의 기능>이라는 책을 각주 9번에서 인용해 놓고, 그런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임규찬씨가 주장하는 '정치'의 함의는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
<창작과비평>과 임규찬 왜 이러나 <3>임규찬의 <최근 비평적 양상과 그 문제점들>에 대한 반론 ③
03.09.21
이명원(racan)
임규찬씨가 '비판적 글쓰기' 진영에서 궁극적으로 발견하고 싶어했던 것은 '도덕주의'라는 기묘한 유령인 듯하다. 가령 "사실 비판적 글쓰기 진영의 대다수가 크게 보아 도덕주의로부터 쉽사리 탈피하기 힘든 논리구조에 발이 묶여 있음은 글의 결론에서 자주 반복"된다면서, 엄정한 비평행위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고 있는 평론가 하상일씨의 진술을 거론하고 있는 것에서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판적 글쓰기'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논자들이 거론했던 인식의 공통분모에 대한 임규찬씨의 미숙한 이해 또는 오해만을 보여줄 뿐이다. 논의의 과정에서 비평행위에 대한 '자기윤리'의 문제가 거론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임규찬씨의 주장처럼 '도덕주의'로 환원될 성격의 것이 아니었음을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 <창작과비평>과 임규찬 왜 이러나
'비판적 글쓰기론자'들은 '한줌의 도덕'이 아니라, 비평적 담론을 실천하는 와중에 개입되는 권력행사의 '정당성'과 '합리성'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 '정당성'과 '합리성'이라는 소중한 문제의식을 임규찬씨는 '도덕주의'로 축소시킴으로써, '비판적 글쓰기'의 주요한 문제의식을 희석시키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임규찬씨의 이 평문에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평문에서 임규찬씨가 보여준 태도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그의 '진영주의'적 사고의 잔존물이다.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나아가 내부의 차이에 대한 최근의 인식은 이들이 어느 선, 정확히 말하면 특정목표 아래서만 함께 할 수 있는 경계에 이미 다가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조차 한다.
°특히 최근에 올수록 그 위세가 약화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진영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하여 급속히 손을 맞잡은 편의적 동맹이나 이해공동체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적과 동지'의 편의적인 이분법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를 보탤 필요가 없겠지만, 임규찬씨의 진영주의적 사고가 여전히 그가 거쳐왔던 80년대의 모순 가운데 하나인,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경직된 동일체 의식'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 대해 나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반문컨대, 임규찬씨가 속해 있는 <창작과비평>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는 평론가들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 자신이 보건대, 가령 백낙청씨의 '민족문학론+분단체제론'에 대한 관점과 최원식씨의 '동아시아 문학론'에 대한 시각은 매우 차별적이고, 또 임규찬씨의 비평적 시각과 윤지관씨의 그것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모순 없이 존재하고 있는 <창작과비평>의 입장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민족'문제의 중요성이라는 대의(大義)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에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반문을 던지는 것은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는 논자들의 입장 차이라는 것을 임규찬씨 식의 '편의적 동맹'이나 '이해공동체'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한 마디로 '자가당착'에 불과하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오히려 임규찬씨는 '비판적 글쓰기론자'를 탓하기 전에, 자신이 속해 있는 <창작과비평> 진영의 자기성찰을 촉구하는 편이 나았을 듯하다. 90년대의 문학공간에서 창비가 얼마나 소중한 문학적 기여를 했는지는 알 수 없거니와, 그것은 가령 창비에서 출간된 저작들의 백 리스트를 검토해 볼 때, 분명해진다.
90년대 들어, 창비에서 조명하거나 출간한 작가와 작품의 백 리스트는 임규찬씨가 '문학주의'로 거론했던 대표적인 출판사와 매체들, 예컨대 문학과지성사와 잡지 <문학과사회>, 또 출판사 문학동네와 잡지 <문학동네>의 그것과 도대체가 아무런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 출판사에서 대형신인이라고 언급하면, 저 출판사에서 맞장구를 치면서 작품집을 출간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역시 그 사람이 그 사람인 심사위원들이 모여서 창작지원금이니 문학상이니 하는 것을 해당 신인에게 수여하면서 '문학적 아우라'를 증폭시키는 것을, 해당 집단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독자들이 전혀 없다. 오히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비평행위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주장하면서, 특정한 사안을 중심으로 비평적 연대를 수행하는,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비평가들의 태도가 오히려 더 건강한 것이 아닐까.
이와 함께, 임규찬씨는 마치 '비판적 글쓰기'를 진행하는 논자들이, 그들이 비판하고 있는 대상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식의 연상법을 발동시키고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가령 나는 임규찬씨가 속해 있는 창비를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동지'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 창비는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세계관 및 전망과 일치하는 부분을 보여주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 기대를 정면으로 실망시키는 양상을 노정하기도 한다. 물론 대체적으로 보면, 나의 시선에 비친 90년대 이후의 창비는 '기대'에서 '실망' 쪽으로 급격히 경사하고 있는 와중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비가 쌓아온 빛나는 '전통' 자체를 부정할 생각이 내게는 전혀 없다. 그러나 '빛나는 전통'에의 안일한 자신감은, 고통스런 자기성찰이 정지되는 순간 언제든지 '빛 바랜 족보'의 우울한 추억으로 전락할 수 있다.
나는 임규찬씨가 최근의 평단을 '비판적 글쓰기' 진영과 '문학주의' 진영으로 이분하면서, 결론적으로 양비론적 비판을 펼친 것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내가 임규찬씨의 이러한 분류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가령 임규찬씨를 포함한 언필칭 민족문학 진영의 비평가들이 이 분류법에서 실종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비판과 성찰의 '무풍지대'를 형성하는 효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20여 권 이상의 소장 비평가들의 평론집을 읽고 최근의 비평에 대한 논의를 펼쳤다면, 응당 자신의 비평적 태도와 넓은 범위에서 동일한 계열체를 형성할 수 있는 비평적 흐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따라야 했음은 물론이다(가령 나는 임규찬씨가, 대체로 범민족문학 진영에 속해 있다고 판단되는 양진오씨와 같은 소장비평가에 대해 아무런 논의도 펼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된다).
내가 이처럼 임규찬씨의 분류체계를 문제삼는 것은, 담론의 지형에서 특정한 분류체계를 설정하고 이것을 일반화하는 원리라는 것이, 실제로는 담론을 통한 '위계화' 작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특히 그 객관화의 형태를 가장한 분류체계를 통해서 각각의 분류항에 대한 자의적인 가치평가의 고정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임규찬씨는 '비판적 글쓰기론자'들과 '문학주의자'들의 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슬쩍 다음과 같은 문장을 심어놓고 있다.
실제로 그들(비판적 글쓰기론자)이 공격했던 평론가들(남진우, 류보선, 권오룡, 홍정선 등)로부터 역공받는 과정을 보면, 역공하는 측이 이른바 문학성에 기반하여 아마추어리즘과 전문주의의 대립차원에서 상대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도대체 뭘 눈여겨보라는 것인가. 정작 우리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임규찬씨 자신이 활용하고 있는 수사학의 문제점이다. 임규찬씨는 위의 짧은 인용문에서 '공격'이니 '역공'이니 하는 수사를 활용하면서, 논쟁의 맥락을 희석시키고, 그 대신에 논쟁 자체를 촌스런 동네 어깨들의 싸움판 정도로 연상하게 만들고 있다.
논쟁의 속성이 '담론의 투기장'과도 같은 형국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공격'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창조적 협동'을 바라는 비평가의 정당한 태도인가. 게다가 임규찬씨는 위의 수사학적 진술을 통해서 '비판적 글쓰기론자=아마추어, 문학주의자=전문가'라는 식의 기묘한 이분화된 뉘앙스를 부추기고 있는데, 이 또한 정당한 비평적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임규찬씨에게 던진 반론이 당사자에게는 어리둥절한 반론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임규찬씨는 해당 평문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논의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임규찬씨에게 이런 반론을 펼친 것일까?
임규찬씨가 해당 평문에서 펼쳐 보인 견해들의, 정제되지 못한 단순화가 독자들에게 '일반화된 진실'로 받아들여질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또 임규찬씨 자신이 '창조적 협동'을 원한다고 진술한 것을 비평가의 한사람으로서 일단 신뢰했기 때문이다.
임규찬씨가 말한 '창조적 협동'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또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덕담'만을 건네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임규찬씨의 건필을 기원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