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민주주의 - 나무위키:
인민민주주의
최근 수정 시각: 2021-11-22 13:06:27
분류
사회주의
민주주의
독재
공산주의
人民民主主義 / People's Democracy
1. 개요2. 설명
2.1. 이론의 태동2.2. 이론적 근거2.3. 역사적 맥락3. 현존 국가4. 여담5.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현체 중 하나로, '인민민주독재' 라고도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동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시된 정치체제이다.
인민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엘리트 전위정당인 공산당의 지배적 우위하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반대하는 반동세력은 폭력 및 각종 수단을 이용해 말살하고, 순응하며 동조하는 세력들에는 다당제를 시행하여 형식상 정치참여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주체와 수뇌부는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가능하므로, 프롤레타리아들의 엘리트 전위정당인 공산당 이외의 세력은 집권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의회주의와 보통선거, 보편적 참정권이 프롤레타리아를 체제에 순응시키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적인 기만으로 보았다. 인민민주주의 혁명은 선거가 아닌 폭력혁명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집권한 후에, 자신들과 통일전선을 이루어 협력한 동조자들에게 정치적 혜택을 주는 개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해 집권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선거 사회주의'와는 다르며, 선거 사회주의는 개량주의나 수정주의라고 비난한다.
인민민주주의는 권력분립과 선거를 통한 권력 창출을 부르주아들의 기만적 압제의 도구라며 부정하고, 법률보다 인민의 일반의지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법률이라는 부르주아의 위선적 기만에 왜곡되지 않은, 인민대중이 직접 참여하여 심판하는 인민재판이 실행되었다. 또한, 공산당이 진정한 인민의 대표이므로, 공산당이 법보다 우위에 있다.[1]
2. 설명[편집]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만의 정치참여를 추구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발전론의 5단계로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아직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반봉건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하여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통하여 부르주아계급과 반동분자를 제거한 후 프롤레타리아 이외의 계급에 정치참여를 겉으로나마 일부 허용하는 연합 독재체제인 '인민민주주의'를 과도기적 중간 단계로 실행하여, 공산당이 안정적으로 세력을 확보한 후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는 이론이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의 일당독재가 아닌, 농민, 쁘띠 부르주아(소 부르주아/중산층/소상공인/소시민), 지식인 계급과 같이, 노동자 외에 다른 계급에 속하는 인민들도 형식상으로는 정당을 만들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민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론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다르지만, 형식적인 위성정당들만이 다당제 구색 맞추기로 존재했고 공산당의 절대적 우위가 지배했기에,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어차피 다음 단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기도 하고.
이 개념을 주도적으로 밀어 붙인건 스탈린으로, 소련 성립과정에서 볼셰비키식 혁명에 대한 반발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스탈린은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인민민주주의'라는 본색을 감춘 기만적 개념을 제시한것이다. 2차세계대전 종전후 동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실시된 초기에 다당제를 허용해줘서 반대파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공산당이 권력을 안정적으로 장악한 다음에, 반대파를 점진적으로 제거하였다. 유명한 사례가 헝가리 공산당의 독재자인 라코시 인데, 이를 살라미 전술이라고 불렀으며, 처음에는 우파를 파시스트로 몰아 제거하고, 그 다음은 중도파를 제거하고, 마지막에는 공산당 내부를 숙청하였다.
이처럼 인민민주주의에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들어가고 형식상으로는 다당제를 인정하지만, 인민민주주의는 의회주의와 보통선거, 보편적 참정권이 프롤레타리아를 체제에 순응시키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적인 기만으로 보았으며,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지칭하며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민민주주의는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한 집권을 추구하지 않으며, 계급갈등과 폭력혁명을 통한 집권을 주장하고, 반동적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적색테러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혁명의 반동세력에 대해서만 기본권을 억압할 뿐,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동조하여 통일전선을 이루어 협력한 자들에게는 다당제로 정치 참여를 허용하였으니까 진정한 인민들의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진영에서는 반대자에 대한 기본권 억압을 전제로 하는 체제는 진정한 민주주의일 수 없으며 독재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운동권에서는 스탈린의 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부르고 받아들여[2], 스탈린의 인민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으로 PD(정파)가 있다[3]. People's Democracy의 영어 약자에서 따와서 PD라고 한다. 인민민주주의라는 말 대신에 민중민주주의라고 부른다.
2.1. 이론의 태동[편집]
본래 인민민주주의와 유사한 이론적 개념은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에서 발표한 ‘12월 테제’에서 등장하나, ‘인민민주주의’라는 용어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패하고 수많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공산화되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유럽 지역의 혁명을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스탈린은 한반도 이북 지역도 인민민주주의 단계로 규정하여, 광범위한 통일전선에 따른 정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노동자와 분석한 후 이들의 혁명 흐름을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정의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 뿐만이 아닌, 민족자본가와 양심적 지식인, 그리고 중산 프티 브르주아의 연합 정권의 형태를 보였으며, 원칙적으로는 사회주의국가가 아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정체였다. 한편 마오쩌둥은 1940년에 펴낸 저서 『신민주주의론』에서 중국 혁명의 성격을 '신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러한 이론은 인민민주주의 노선과 맞닿아있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수많은 공산국가가 국호에 '사회주의'를 넣지 않고, '민주주의인민', '인민', '인민민주주의' 등을 넣은 것도 위와 같은 단계론에 기반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하급인민위원회에 따른 지역 관리, 토지개혁 등을 수행하여 자본주의 잔재를 잠식하고 '인민의 적'으로 분류된 집단에 의한 반혁명기도를 분쇄할 수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마련하는 목적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인민민주주의' 또는 '민중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완전히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없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기 위한 명확한 목적성을 갖고 있으며, 산업노동자·빈농이 지도하는 혁명적 당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차별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성립되는 사회구성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반봉건사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반봉건사회는 완전한 봉건사회도,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도 아닌 중간 상태를 의미하며, 제국주의 침탈을 위한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가 협소적으로 진행된 상태의 구(舊)식민지 또는 신(新)식민지 상태와 겹친다고 한다.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르면 제국주의 시대에서 약소국은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 재분할 감행에 의해 온전하게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할 수 없으며, 자본가가 혁명을 주도할 수도 없다. 이 시기 혁명은 노동자·농민·소상공인·민족자본가·지식인의 연합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으며, 혁명은 반봉건적 사회구성체를 파괴하여 참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성격을 갖추게 된다.
2.2. 이론적 근거[편집]
스탈린은 인민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레닌을 지목한다.
레닌은 부르주아의 계급 아래에서 시민에 의거하는 통치를 주창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이것은 흔히 '인민민주주의' 측에서 ‘자유민주주의’라고 불린다)는 그 정치의 정체성이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의 군중(群衆, Массы)에 몰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군중이란 계급 의식이 없거나 희미한 개체를 뜻하는 말로, 인민(人民, Народ)과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 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낡은 생산 관계를 유지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은 인간 개체가 유적 존재(독일어: Gattungswesen)로서 사람인, ‘인민’이 되는 것을 막고 오로지 군중으로서, ‘군중에 의거한 통치’를 형식적인 표어로 삼고 있다. 군중은 계급 의식이 없거나 희박하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인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을 제대로 인식해내지 못하기에, 그들 스스로가 유적 존재가 되지 않는 한 전근대와 차별화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통치 원리로서 구현할 수 없다고 한다. 한편 레닌은 이에 따라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적 소유 구조에서 스스로의 경제적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치적, 법적 장치를 ‘법치’와 ‘인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씩 도입하는데, 군중은 부르주아의 이러한 정치적 행동에 때때로는 찬동하며, 동시에 반대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 이들은 스스로의 진정한 권리를 찾는 거시적인 방법을 모르며, 특정 정치인, 특정 담론에 얽매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주장한다. 레닌은 ‘부르주아적 자유’는 이러한 상태를 부추길 뿐, 그 어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레닌은 부르주아적 자유가 인민과 프롤레타리아에게 전혀 필요없는 것이며, 인민의 이해와 대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레닌은 결과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근대적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자연법 사상과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변증법적 함의’ 둘 사이를 연결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진보하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고,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갖는 외형적 형식을 갖추기 위하여 ‘실증성에 기초한 법치로서 법치주의’를 주창하는데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스스로가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수사(국민 주권, 사회계약에 기초한 헌법 원리 등)를 부여하면서도 놓지 않는 것이며, 모순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험 단계의 지각적 지반을 통해서는 민주주의의 성격과 그 정당성을 정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닌은 군중 집단은 계급의식이 없는 것과 무관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내포한 모순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비본질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군중 집단의 저항이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저항은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부르주아가 모든 생산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중이 직접적인 행동에 기반한 정치 캠페인을 통해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일종의 망상이라고 레닌은 비판한다. 또 이러한 운동은 참여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운동으로 표현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부르주아가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도입하며 이러한 장치를 고수하기 위한 다층적 폭력을 실시하는 데에 있다고 분석했다. 더 나아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든 모순, 사회적 문제, 빈곤의 문제는 이러한 것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구조는 상당히 입체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외된 군중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할 수 없으며, 계속하여 특정한 담론과 미시적인 정책, 더 나아가서는 정치적으로 선전이 잘 된 인물에 대한 광신적인 숭배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문제점을 영영 해결할 수 없는 길로 가게 된다고 비판한다.
한편 안토니오 그람시는 군중이 부르주아를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부르주아의 정치적 패턴을 분석하는 데 실패했지만, 부르주아는 군중의 정치적 패턴을 대부분 이해하였다고 분석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군중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반동성을 되려 유지하는 행동 방식을 문화적 차원에서 강화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문화 패권’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 그람시는 이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특징을, ‘인간의 정치적 본성과 괴리된 법률에 대한 숭배’(부르주아 법치주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동하는 군중의 정치적 권리’(부르주아 인권), ‘사물에 대한 수동적이고도 기계적인 반응과 그 과정을 자유로 착각할 자유’(부르주아 자유)라는 세 가지 특징으로 정리하였다.
다시 돌아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에서 레닌은 러시아 제국이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이기 때문에 과거 서유럽의 전통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경로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레닌은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은 노동계급과 농촌 소부르주아 계급의 연합으로서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닌은 위 두 세력이 이중 권력 체계로 이끄는 민주주의를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고 칭하였다. 이 개념은 인민민주주의와 유사하나,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그리고 이것이 스탈린은 인민민주주의론의 이론적 근거라고 주장한다.
2.3. 역사적 맥락[편집]
본래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발전된 체제이며 자본주의가 혁명 등의 과정을 통해 공산주의로 이행된다고 보았지만, 그 과도기에는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자본가가 타도된 이후에는 계급 대립이 없는 노동자들이 '독재'를 함으로써 공산주의 사회로 다가간다고 보았다.[4]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이 주장에 근거하여 일당제를 채택했다.[5]
그러나 막상 첫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수립되고 나니 사회주의 국가는 한동안 소련과 그 위성국들인 몽골과 투바밖에 없었다. 트로츠키가 기대했던 국제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강대국들은 합심해 소련을 견제해대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가 극렬히도 싫어하는 제국주의는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도 사회주의를 절멸하겠답시고 나타나고 있었다.[6]
이 상황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자신들을 도와줄 세력을 찾기 시작했다.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파시즘과 나치즘같은 악마들도 나타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및 약소국 민족주의도 나타나고 있었고, 마르크스가 프티부르주아로 보았던 농민들도 알고 보면 자본가나 다름없는 지주에게서 착취받는 소작농이 많았다. 그래서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노동자들만을 혁명의 주체로 인정했던 것과 달리 농민들도 혁명의 주체로 인정하고, 더불어 반제국주의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약소국 민족주의자들과도 연대하고자 했다. 인민민주주의는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한 사상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달리 노동자가 아닌 세력이 독립적으로(즉 노동계급과의 동맹 없이도) 사회주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3. 현존 국가[편집]
현존하는 대표적인 인민민주주의 국가로는 중국과 북한이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여당인 중국 공산당 이외의 위성정당들인 민주당파가 존재하며,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노동당 이외에 위성정당으로 조선사회민주당, 천도교청우당,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존재한다.
4. 여담[편집]
북한에서는 사람중심민주주의(People's democracy)란 용어가 쓰인다. 북한의 주체사상 체제 확립에 큰 공을 세운 황장엽 비서가 People's democracy를 인민민주주의와 사람중심 민주주의로 번역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특히 김일성이 People's democracy를 사람중심으로 번역한 용어에 대해 매우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북한 헌법에도 ‘사람 중심’이 들어 있다. 북한 헌법 제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물론 여기서 '사람'이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만을 가리킨다는 게 함정...
문재인 정부에서는 헌법과 교과서 등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 바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인민민주주의로 헌법상 민주주의의 정의를 수정하려는 사전작업이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 제 10호 헌법(1987년 헌법)의 "자유민주적"이란 표현은 "자유롭고 민주적인"(free and democratic) 질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수층에서는 인민민주주의와 구분해야 한다며 <자유> 삭제에 반대하였다. #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저격해온 진중권은 "더불어민주당이 수뇌부터 당원, 지지자까지 자유주의 성향을 상실하였고 이런 상태를 탈피하기에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 주장하면서, 민주당이 인민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체주의 정당으로 전락할 것이라 표현했다.# 한편 진보 진영에서는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의미가 반공주의와 신자유주의만 의미하는 단어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더 넓은 개념인 민주주의로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5. 같이 보기[편집]
사회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PD(정파) 한국의 PD 운동권도 이개념에서 이름을 차용한 것.
NL(정파)
자유민주주의
민주주의
전체주의
독재
민주집중제
[1] 인민민주주의는 권력분립을 부정하기에, 입법부와 행정부가 분리되지 않고,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같은 인민대표들의 회의체에서 입법권과 행정권력을 동시에 소유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2] 한국 운동권은 자신들을 다른 형용사 없이 그냥 "레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화 이후 그리고 인터넷의 대중화로 여러 정보가 흘러 들어오는 가운데 민주화 이론으로 스탈린주의를 추종했다는 사실을 정당화 하는게 도저히 불가능 했기때문에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 흔적은 한국 운동권에 여전히 남아있는데 대표적으로 국제정치의 문제에서 반미국가를 옹호하는 것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스펙트럼의 이념으로 여기기 때문에 중국, 북한 등의 사회주의 국가가 아무리 패악질을 한들 이들이 패권 다툼에서 서방보다 불리한 위치를 차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한국 운동권에선 NL을 고기 방패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NL이나 PD나 기반으로 하는 철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것에 있어서 동일하다. 한편으로 PD 계열의 단체인 알바노조 같은 경우 내부조직이 낙태를 반대하고 혼전 성관계를 반대하며 레닌의 책을 읽으라는 등의 주장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3] 운동권의 또다른 주요 계파로는 NL이 있다.[4] 다수인 노동자가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독재를 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보거나, 이를 일당/일인 독재로 바로 직결시키는 오해를 가지기가 쉽다. 여기서의 독재는 1인 통치라는 의미보다는 외부의 견제 세력이 없다는 의미의 절대권력이나 계엄에 가깝다.[5] 러시아 혁명의 주도세력인 볼셰비키는 정작 러시아 혁명 이후 치러진 자유 총선에서 과반은 커녕 제2당에 머물렀고, 자신들 이외의 정당이 소비에트 공화국을 반대하자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했다. 공산당 이외의 정당을 금지한 건 적백내전 시기.[6] 영국, 프랑스같은 민주주의 국가들조차 독일과 이탈리아를 위시한 전체주의, 군국주의 세력이 동유럽에서 밀려오는 사회주의의 물결을 저지해줄것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묵인해주었을 정도. 하지만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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