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한·일 역사 연구보다 문화개방이 급했을까 / 정경모
등록 :2009-11-19
1998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한일 역사연구 촉진에 관한 공동위원회’ 한국위원장으로 임명된 지명관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의 ‘2000년 국제교류기금상’ 수상 소식을 소개한 일본국제교류기금 홈페이지.
===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9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9
1997년 7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전 두 나라 정부의 합의로 ‘한일 역사연구 촉진에 관한 공동위원회’가 설치됐는데, 이후 역사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김 대통령이 임명한 인물은 지명관 한림대 교수였소이다.
그런데 ‘통석지념’이 무슨 뜻인가고 묻는 <동아일보>의 질문에 대한 지 교수의 답이 ‘사전에도 없는 말이고 일본의 작가 아무개가 만들어낸 조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니었소이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되 일본 사람들과 맞붙어 논쟁을 해야 될 위치에 있는 지 교수의 해답이라면 이건 문젯거리이기도 하려니와, <동아일보> 자체의 권위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조심스러운 말로 오류를 지적하고 정정기사를 내도록 투서 형식으로 그 신문에 편지를 냈소이다. 얼마 안 가서 그 기사의 담당인 김아무개 기자로부터 “어떻게 처리할지 사내 결정이 내리는 길로 통지하겠다”는 전화연락이 있었는데, 그 후 1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사내 결정’에 대해 회답은 없었소이다.
한-일 간에 역사인식을 공통된 것으로 하자는 위원회에서 어떠한 문제가 제기되고 어떠한 토론이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발표된 적이 없었는데,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한다는 문제는 여러 신문에 요란스러운 보도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여기에 발벗고 나서서 활약한 사람이 다름아닌 지 교수였소이다.
우선순위로 보아 역사인식의 공통화가 대중문화의 개방보다는 더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느끼면서도 이것은 또 이것대로 뜻이 없는 일은 아니라 여기고 그저 먼발치로 넘겨다보고 있던 중, 대중문화를 개방하고 한-일 우호관계 증진에 공헌한 바가 크다는 점을 들어 일본 외무성 외곽단체인 ‘일본재단’(재팬 파운데이션)이 500만엔이 붙은 공로상을 지 교수에게 주었다는 보도가 눈에 띄더이다.
이 수상에 대해 <동아일보>도 무슨 경사라도 났다는 듯이 기사를 실었는데(2000년 10월 6일치), 그게 내 생각에는 마땅치가 않았소이다.
지 교수는 ‘역사연구공동위’ 한국 쪽 위원장이고, 일본 쪽 상대는 주한 일본대사를 지낸 스노베 료조 교수인데, 한-일 간의 뒤틀린 역사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명관 대 스노베’의 관계는 항상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될 그런 관계가 아니오이까. 아무리 외곽단체라고는 하나 지 교수가 스노베 교수의 출신 모체인 외무성으로부터 상금이 딸린 공훈상을 받았다면 이건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가 아니오이까. <동아일보>가 여기에 대해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스러운 노릇이구요.
얘기 끝에 하나만 더 첨가해야 될 것이 있는데 망설여지면서도, 알아두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쓰기로 하겠소이다.
대중문화 개방의 바람을 타고 지 교수는 특히 일본의 국영방송인 <엔에이치케이>(NHK)에 자주 얼굴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옛날 장준하 선생 밑에서 편집을 도왔다는 <사상계> 잡지를 소도구로 마이크 옆에 놓고서, 시청자에게 ‘시위’를 하더군요. 일본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낯이 간지러워지더군요. 장준하 선생과 동질의 인물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을까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문익환 목사가 평양 도착 성명에서 ‘모든 통일은 선’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대변인(이회성)을 통해 ‘문 목사는 거짓 선지자’라고 매도했다면, 그에 앞서 우리 민족의 고통의 근원이 분단에 있음을 갈파하고 ‘모든 통일은 선인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고 부르짖은 장준하 선생(43회)도 역시 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소이까.
장준하 선생이 약사봉에서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는 사이에 목숨을 잃었을 때, ‘반독재 투쟁’을 위해 일본으로 ‘망명’해왔다는 그는 꿀 먹은 벙어리, 일언반구 이에 대해서 발언한 일이 없었소이다. ‘장준하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나’를 집필하여 돌아가시던 해 <세카이>(1975년 12월호)에 발표한 사람은 나, 정경모였지 지명관은 아니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8671.html#csidx8e5d2e08ac18b7d89b4f77960c43e1d
===
[길을찾아서] 일왕이 말한 ‘통석’엔 사죄 뜻은커녕… / 정경모
등록 :2009-11-18
1998년 10월9일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관련 <동아일보>의 ‘일 사죄표현 용어풀이’ 기사에 지명관 당시 한림대 교수의 ‘통석지념은 일 작가가 만들어낸 말’이란 인용문이 실려 있다.
[길을찾아서] 일왕이 말한 ‘통석’엔 사죄 뜻은커녕… / 정경모
등록 :2009-11-18
1998년 10월9일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관련 <동아일보>의 ‘일 사죄표현 용어풀이’ 기사에 지명관 당시 한림대 교수의 ‘통석지념은 일 작가가 만들어낸 말’이란 인용문이 실려 있다.
===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8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8
노태우 대통령이 국빈으로 초청을 받아 일본 방문의 길에 오른 것이 1990년 5월 24일이었는데, 바로 그 사흘 전(5월 21일), 세지마 류조가 당시 총리 가이후 도시키의 특명을 받고 출발을 앞둔 노 대통령을 급거 찾아왔소이다. 세지마가 찾아온 목적은 노 대통령이 요구한 천황의 사죄의 말에 관해서, 이거면 되겠느냐 사전 승낙을 받아두는 것이었소이다.
84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때도 마찬가지였으나 노씨 역시 자격지심 같은 것을 약간이라도 희석시키려는 방도로 일본 천황의 ‘사죄의 말’을 요구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한편 일본 사람 처지에서 본다면 대통령이 올 때마다 천황의 ‘사죄의 말’을 요구하니 이거야 견딜 수가 있나, 한방 되받아 넘겨씌울 방도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왜 없었겠소이까.
아무튼 청와대로 온 세지마가 이만하면 천황의 ‘사죄의 말’로 족하겠는가고 내놓은 말이 ‘통석지념’(痛惜之念)이었던 것이외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아신왕이 좌장인 진무에게 한 말이 ‘통석지념’이 아니오이까.
세지마를 맞이한 자리에는 한일의원연맹 위원장 박태준씨도 배석하고 있었다는데, 노씨나 박씨나 <삼국사기>에 대해 잘 알 리도 없고 또 알 만한 사람에게 그 말의 뜻을 검토시킨다는 수속도 없이 그 자리에서 “그만하면 족하겠다”고 흔쾌히 승낙을 했겠지요.
5월 24일 밤 노 대통령은 샹들리에가 빛나는 일왕의 궁성 안 풍명전(豊明殿)에서 열린 환영 만찬회에 임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아키히토는 미리 합의했던 대로 다음과 같은 말로 ‘사죄’의 뜻을 표명한 것이외다.
“그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을 생각하면 통석지념을 금할 수가 없다.”
앞 글(120회)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통석’이라는 말은 자기가 지배하고 있던 땅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 타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애처롭고 통탄스럽다는 뜻일 뿐, 거기에는 스스로의 과오를 뉘우친다는 뜻은 없는 것이외다. 언중유골이라고 할까, 세지마가 한국 대통령 노씨에게 들으라고 일왕 아키히토로 하여금 토하게 한 ‘통석지념’은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그냥 흘려 넘길 수 없는 다른 뜻을 지닐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다고 나는 통감하는 바이외다.
세지마가 누구입니까. 그는 ‘만주국’ 관동군 참모부에 있던 일본 육대 출신의 군인이 아닙니까. 일본 육군에 참모부가 설치된 것은 이미 1878년(메이지 11년)의 옛날이었고, 그 참모부는 장래에 있을 침공에 대비하여 수십명의 탐정을 만주 일대에 파견해 옛날 고구려의 강토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실시하였던 것이외다. 일본군 사카니 중위가 현재의 지안(집안)현까지 침투하여 호태왕비의 탁본을 떠 온 것이 1883년(메이지 16년)이었으니, 이 시점에서 아마 고구려의 고토 만주 땅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우리나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외다. 일본인들은 지리적인 탐사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와 호태왕비에 대해 오랜 시일을 두고 철저한 연구를 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원래가 일본 육군의 참모였던 세지마는 일왕의 ‘사죄의 말’로 노 대통령에게 제시한 ‘통석지념’이 어디서 온 말이고 그 뜻이 무엇이라는 것쯤 훤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나는 확신하는 바이외다.
일왕을 아신왕으로, 그리고 노태우를 좌장 진무로 대비한다면, 아신왕이 진무에게 실지(失地)의 회복을 명령했을 때 토로한 ‘통석지념’이라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짐작이 가지 않겠소이까. 세지마의 견지로는 아신왕 때의 관미성은 38선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땅일 수도 있으며, 그가 관동군 참모로 있을 때 ‘우리 땅’이라고 여기고 있던 고구려의 고토일 수도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억측이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아무튼 노태우 방일 당시 한국 쪽 미디어는 일왕이 말한 통석지념은 “과거의 잘못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사죄의 뜻을 표명한 것”이라고 보도하였소이다.
그런데요, 유독 <동아일보>는 약간 의심스럽고 납득이 안 가는 점이 있었던지, 그 통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고,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의 대가로 알려진 지명관 교수에게 물어봤던 모양이지요. 이에 대한 지명관 교수의 해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소이다.
“통석이란 말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고 일본의 유명한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멋대로 만든 조어에 불과하다.”(<동아일보> 1998년 10월9일치)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
그런데요, 유독 <동아일보>는 약간 의심스럽고 납득이 안 가는 점이 있었던지, 그 통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고,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의 대가로 알려진 지명관 교수에게 물어봤던 모양이지요. 이에 대한 지명관 교수의 해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소이다.
“통석이란 말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고 일본의 유명한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멋대로 만든 조어에 불과하다.”(<동아일보> 1998년 10월9일치)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