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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39년생 김동훈의 파란만장 해방일지
김동훈, 김형민 (지은이) ㅁ(미음) 202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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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포인트 1,255
352쪽
책소개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싶다!”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의 합작 자서전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1939년 토끼띠 김동훈은 대한민국 80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특히 흥남부두 탈출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방불케 하고,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 부흥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리즈 시절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넘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입체적이면서도 흡입력 있게 그려낸다. 개인의 역사와 한국사가 한 호흡으로 읽히는 이 책은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인 분들에게는 자서전 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올 뿐 아니라, 후속 세대에게는 부모님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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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펴내며: 어느 ‘복 많은 놈’의 이야기
39년생 김동훈의 ‘나의 살던 고향들’
1 평온했던 내 어린 시절: 만주벌과 두만강 이남
함경북도 남양에서 태어난 이유 | 아버지의 유학과 슈퍼우먼 어머니 | 옥자 누나의 죽음, 그리고 다시 만주로 | 달 속 십자가의 조짐 | 내가 마지막으로 본 만주
2 눈보라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부두
내세우자 인민의 대표 | 내가 교사를 평생 싫어한 이유 |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 내 생애 최고의 한 달 | 흥남부두의 통곡 | 구사일생, 흥남의 방주 | 흥남부두를 떠나며
3 남도의 끝섬들에서
남녘땅의 나그네 가족 | 회중시계와 동해남부선 | 거지들의 재회 | 두만강 소년 제주도 가다 | 열 살 기억 여든까지 간다 | 내 평생의 찰떡 | 오이의 비극 | 거제도의 졸업식
4 밀양과 대구의 악동, 부산의 대학생이 되다
밀양 친구 수봉이 | 대구에서의 봄날과 치욕 | 행운과 액운의 쌍곡선 | 날아간 파일럿의 꿈 | 수산대학생이 맞은 태풍 사라 | 큰형을 떠올리며 | 대한민국의 격변, 그러나 바빴던 대학생
5 가난한 날의 행복과 슬픔
당당함에 대하여 | 큰형 결혼 대작전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천재를 돕는다 | 노총각의 세 가지 원칙 | 처갓집 이야기 | 가난한 날의 행복과 슬픔 | 나쁜 이 이상한 이 좋은 이
6 거인의 어깨 위에서 놀던 시절
고려원양 판매과장이 되기까지 | 황태 덕장 앞에서 | 거인과의 만남 | 동원산업 부산 지사장이 되어 다시 부산으로 | 거인의 어깨 위에서 | 주먹과 개밥 | 안타까운 죽음들 |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일들 | 한국에서 참치 통조림을 처음 먹은 사람은 | 동원참치의 신화와 홀로서기의 꿈 | 나의 달란트
7 디아스포라 우리 가족
다섯 남매 이야기, 그리고 중국에서 온 편지 | 중국으로 가는 길 | 간도에서 만난 주현미
강 건너 고향 | 피는 물보다 진하고 돈은 피보다 진하다
글을 마치며: 화살 같은 여든네 살의 돌아보기
아들의 후기: 자서전 쓰기, 우파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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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나는 내가 태어난 곳을 남양으로 여태껏 읊고 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이다. 온성군은 한국 최북단의 지명이다. 한반도 지형을 토끼로 묘사하자면 길쭉한 귀의 끄트머리에 붙은 곳이고, 호랑이로 보자면 만주를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의 오른쪽 앞발톱에 해당한다. 여기서 부산 수영천보다도 폭이 좁은 곳이 지천인 두만강을 넘으면 오늘날의 옌볜(연변)자치구, 과거의 지명으로는 도문, 용정 등이 나온다. ― 〈아버지의 유학과 슈퍼우먼 어머니〉 중에서
그때의 만주는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와 비슷했다. 개척하고 개간하고 소출을 거두면 도적 같은 만주국 관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몰려왔고, 마적들이 서부 영화 속 인디언들처럼(인디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불시에 뻔질나게 총칼 휘두르며 쳐들어와 사람들의 목숨과 재산을 노렸다. 내가 이도구 살던 무렵에 그들에게 습격당한 적은 없었지만 성벽 넘어 먼발치에서 ‘행군’하는 그들을 본 적이 있다. 더럽고 남루한 옷을 입은 수십 명의 무리가 가족들까지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저것들이 마적들이야.” 그게 내가 봤던 유일한 마적이었다. ― 〈달 속 십자가의 조짐〉 중에서
청진 역시 추위는 만만치 않은 동네였다. 11월쯤 되면 무시로 영하로 떨어졌다. 그런데 영하 10도가 넘는 꼭두새벽에 학교에 나갈 일이 생겼다. ‘새벽송’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김일성도 기독교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김일성이 하는 짓은 기독교를 본뜬 게 많았던 것 같다. 이북에서 처음 실시하는 선거 날 새벽, 아이들로 하여금 가가호호를 돌아다니며 ‘새벽송’을 부르게 한 것이다. (중략) 크리스마스에 새벽송 부를 때는 하나도 추운 걸 몰랐는데 내키지 않는 걸음 때문인지 그날 추위는 유난히 혹독했다. 그때 내가 부른 선거 종용 새벽송 가사 일부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내세우자 인민의 대표〉 중에서
국군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나와 만세를 불렀다. 대체 이들은 태극기를 어디에 숨겨놓고 살았던 것일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인공기를 펄럭이던 사람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중략) 어린 나는 어른들이 그렇게 좋아하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국군을 볼 때 머리부터 보았다. 머리에 뿔이 나지는 않았는지 꼬리는 없는지 궁금했다. 교육의 힘이었다. 인민학교에서 마르고 닳도록 들은 얘기가 머리에 뿔 난 괴뢰 국방군이었으니까. 학교에서 “입이 세 개요 코가 둘이요 기형으로 생겨서 어린아이들을 보면 잡아먹는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 〈내 생애 최고의 한 달〉 중에서
몇 년 전 영화 〈국제시장〉이 설 연휴를 앞둔 겨울에 개봉되었다. 1950년 크리스마스에 며칠 못 미치던 그즈음 흥남부두에 열두 살 소년으로 서 있었던 나는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아내와 함께 극장을 찾았다. 주인공 덕수는 딱 내 나이였다. 막내 여동생을 안고 악착같이 배에 오르던 그 모습에서 나의 옛 모습이 오버랩됐다. 뜻하지 않게 덕수와 헤어지게 되는 덕수의 아버지 모습을 볼 때는 아버지와 떨어져 부둣가에서 대성통곡하느라 갈라지던 목소리가 몸을 감아왔고, 실감나게 재연된 흥남부두 풍경에서 그날의 추위가 다시 엄습해왔다. 며칠 뒤 아들과 사위 가족을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영화 국제시장 봤냐?” 아들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벌써 봤지요. 재미있게 봤어요.”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또 봐라. 내가 돈 내줄게.” (중략) 가족 모두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날 흥남부두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대구 사람 사위 외에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흥남부두는 우리 가족의 출발지 같은 곳이었다. ― 〈흥남부두를 떠나며〉 중에서
문익환 목사의 부친 문재린 목사는 만주에서부터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셨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 목사는 후일 둘째 형 동식과 잘 어울려 다녔다. 그 친척 가운데 환(煥)자 돌림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거제도에 함께 있었다. 그 집안에 문성근 같은 배우가 나왔으니 얘기지만, 그 사람의 끼도 매우 충만했다. 다들 배곯고 헐벗었던 어느 날 교회에서 소풍을 갔다. 그때 그 문씨 친구는 딱 깍지를 끼고 열렬하게 기도를 시작했다. “저에게 복을 주시려면 멋들어진 한‘복’ 하나 주시옵고, 저에게 벌을 주시려거든 양복 한 ‘벌’을 주시옵고….” 사람들이 뒤집어져서 웃는데 그는 연이어 찬송가 한 곡을 능청스럽게 불렀다. 원곡은 “내 평생에 소원, 내 평생에 소원, 대속해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였는데 이 노래 가사를 바꿔 불렀다. “내 평생에 찰떡, 내 평생에 찰떡, 찰떡에 기름을 발라서 한 조각 먹길 원하네.” 다들 처음엔 배를 쥐고 웃다가 잠시 뒤엔 모두 사무치게 같이 불렀다. 갑자기 배가 얼마나 고픈지 배들을 부여잡고서. 처음에는 깔깔대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울먹이며 불렀다. ― 〈내 평생의 찰떡〉 중에서
“야 동훈아, 이리 와서 앉아 봐라. 너 왜 공부 안 하냐.” “공부에 취미가 없어요. 제가 전학을 수십 번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공부하는 법을 잊어버렸어요.” “이 자식아. 그럼 네 형은 어디 붙박이로 있었냐. 핑계는. 그래 어디까지 배웠어. 이 문제 풀어봐.” 성락이 형이 내미는 문제를 보고 내가 한 대답은 지금 생각해도 걸작이다. “소수점 찍을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진도를 못 따라가요.” 고등학교 2학년이 소수점을 찍을 줄을 모른다? 입을 헤 벌린 채 뭐라 할 말을 잇지 못하던 성락이 형의 표정은 지금도 기억 속에 박제돼 있다. 그런데 이 형이 뜻밖의 결단을 내린다. “알았다. 너 오늘부터 나랑 공부 좀 하자.” (중략) 문리가 트인다는 말을 그때 약간이나마 경험한 듯싶다. 소수점도 못 찍던 아이가 유리수와 무리수를 구분하게 됐고, 루트와 근의 공식을 이해하게 됐다. 처음에는 도망가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나중에는 공부에 재미가 붙는 초유의 경험이었다. 공부가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 〈행운과 액운의 쌍곡선〉 중에서
나는 첫 데이트에서 나름의 온갖 화술과 유머를 발휘하여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믿었다. 다시 만나줄 것을 청하고 서울 처녀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중략) 2차 약속 역시 다방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동작동 국립묘지 공원으로 이동했다. 빈약한 공무원 월급으로 택시는 과했으나 당시로서야 달러 빚을 내서 캐딜락이라도 빌릴 기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작동 국립묘지 공원은 호젓하게 걷기 좋은 곳이 많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벤치에 앉게 됐다. 사실 두 번째 만난 남녀가 무에 할 말이 그리 많겠는가. 서로 어색해지려는 찰나, 나는 교회 성가대원이었던 아내에게 이렇게 제안을 해봤다. “노래 같이 해보시겠습니까?”― 〈노총각의 세 가지 원칙〉 중에서
나는 동원산업 김재철 사장을 찾았다. 항상 근엄한 모습에 올려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여러 구름 위에 있던 고려원양 이학수 회장과 달리, 친구 최 차장에게 보여주던 서릿발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김재철 사장은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매우 중대한 제안을 해오셨다. “지금은 동원산업이 다른 회사에 비해 별로 크지 않지만 언젠가는 우리나라 굴지의 회사로 키울 거야. 내 꼭 그렇게 할 거야. 김 과장 얘기는 내 최 차장을 통해서나 다른 사람 통해서 들었어요. 김 과장, 나랑 같이 일해봅시다.” 살아오면서 내가 교류하고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큰 인물이라면, 즉 거인이라면 나는 김재철 사장, 후일의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을 꼽겠다. 아직 그를 잘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첫 만남과 제안에서 나는 이 사람의 포부와 국량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제안의 내용도 파격적이었다. “부산 지사장을 맡아주시오. 부산 책임자로 가란 말이야.” ― 〈거인과의 만남〉 중에서
“당신 참치 통조림 한번 만들어볼 수 있겠소?” 이미 서구에서는 참치 통조림이 일반화돼 있었지만 당시 한국에서 참치는 통조림 ‘따위’로 만들기엔 너무 귀한 생선이었다. 어찌 참치를 고등어나 꽁치 정도로 만드는 통조림으로 만들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김재철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난감해 보이지? 하지만 이제 한국 국민소득도 높아지고 있고 외국처럼 참치 통조림이 일반화될 날이 올 거요. 어떻게 할 수 있겠소? 참다랑어는 안 되더라도 가다랑어는 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못하겠는데요”라고 대답하는 직장인은 지구가 끝날 때까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중략) 라벨링도 없고 포장도 없는, 노란 양철캔 통조림이 완성되자 나는 집으로 가져와서 아들에게 먹여보았다. 당시 중학생쯤 됐을 아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뭐 비린내는 덜 나네요.” 녀석은 몰랐지만 그것은 한국에서 참치 통조림이 소비자의 입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한국에서 참치 통조림을 처음 먹은 사람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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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김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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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나의 살던 고향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 총 1종 (모두보기)
1939년 여름, 식민지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에서 태어났다. 그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만 두 살 때 태평양전쟁(1941)이 터졌으며, 여섯 살 때 해방을 맞이했고, 열한 살 때 6·25 전란에 휘말리는 등 그야말로 격동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립수산대학 졸업 후 농림부 소속의 중앙수산검사소 공무원을 거쳐 고려원양 판매과장, 동원산업 부산 지사장을 지낸 다음 부산에 정착했으며, 멀미 나도록 변화하고 눈부시도록 발전한 대한민국 사회의 일원으로, 한 가족의 가장으로 치열하게 살았다.
피난민의 자식으로 먹고살기 위해 눈치를 익혔고, 텃세와 구박을 무찌를 깡도 있지만, 남을 짓밟으며 내 몫을 챙기겠다는 두꺼움은 모자랐으며, 누군가를 박정하게 대하면 오래도록 마음이 쓰이는 ‘새가슴’을 지녔다.
그의 가장 특출한 ‘달란트’는 일제강점기 만주와 해방이후 북한에서의 생활, 흥남부두 탈출기와 피난살이 등 평생의 파노라마를 유장하게 읊을 수 있는 기억력이다. 팔순의 어느 날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어 워드프로세서를 익히고 독수리 타법으로 2년 넘게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고향 없이 타향살이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온 곳 모두가 이미 자신의 고향임을 깨달았으며, 스스로 ‘복 많은 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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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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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나의 살던 고향들, 그 속에서 놀던 때가>,<세상을 뒤흔든 50가지 범죄사건>,<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 총 25종 (모두보기)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으나 대학 입학 후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다. 방송 PD인 본캐보다 필명 ‘산하’로 유명하다. 〈리얼코리아〉, 〈특명 아빠의 도전〉, 〈긴급출동 SOS 24〉등 시민의 삶과 풍경을 그리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한겨레21》에 ‘김형민의 노땡큐’, ‘응답하라 1990’을 연재했고, 《시사IN》에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는 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썼다. 저서로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역사를 만든 최고의 짝』, 『딸에게 들려주는 한국사 인물전』(1·2),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1·2), 『한국사를 지켜라』(1·2), 『양심을 지킨 사람들』, 『접속 1990』, 『그들이 살았던 오늘』, 『마음이 배부른 식당』, 『썸데이 서울』 등이 있다.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다듬으면서 아버지를 재발견하고, 나아가 식민지에서 태어나 전쟁과 분단을 경험한 후 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분투의 세대’ 일원과 만나면서 아버지 세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이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각자의 작은 역사를 기록해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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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누구나 한 편의 대하소설을 가슴에 품고 사는
대한민국 조부모 세대의
여느 역사소설보다 재미난 리즈 시절 이야기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싶다!”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의 합작 자서전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1939년 토끼띠 김동훈은 대한민국 80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특히 흥남부두 탈출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방불케 하고,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 부흥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리즈 시절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넘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입체적이면서도 흡입력 있게 그려낸다. 개인의 역사와 한국사가 한 호흡으로 읽히는 이 책은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인 분들에게는 자서전 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올 뿐 아니라, 후속 세대에게는 부모님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야기꾼 산하 김형민 PD가 다듬고 정리한 아버지의 자서전
이야기꾼 산하 김형민 PD가 아버지가 쓴 살아온 이야기를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50대 아들 김형민이 본 80대 아버지의 가장 큰 ‘달란트’는 예전 이야기를 파노라마처럼 유장하게 읊을 수 있는 기억력이다. 수십 년 전 만난 사람의 이름과 스친 사연을 생생하게 되살려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런 아버지가 팔순 잔치 즈음 말씀하셨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싶다!”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의 합작 자서전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한 사람의 삶을 넘어 시대가 보이는 개인 기록물의 탄생
아버지는 이후 워드프로세서를 새로 익히고 독수리 타법으로 천천히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고, 그 기간이 2년이 넘는다. 이 기록물을 무심히 흘려보냈다면 아버지의 기억은 방대한 세월의 창고 속에서 부스러져 먼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는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아들은 아버지 원고를 다듬고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에 돌입한다.
켜켜이 쌓인 아버지의 글들을 정리해 다듬던 아들은 아버지의 삶 속에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한다. 단순히 개인의 회고록이라 생각했던 글 속에는 한 사람의 삶을 넘어 시대의 역사가 보인다. 이 책 본문 곳곳에는 종종 ‘주’가 등장하는데, 이는 아버지 개인의 삶에서 역사적 맥락의 갈피를 잡아보는 재미에 빠진 아들이 아버지의 역사를 구체화하기 위한 ‘오지랖’의 결과물이다.
여느 역사소설보다 재미난 우리 조부모 세대의 한국 근현대사
이 책의 주인공 김동훈은 1939년 토끼띠로 대한민국 80대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한강의 기적’ 등 해방 전후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겪는다. 한반도 최북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만주와 북한을 오가며 살았던 그는 만 열한 살 때 6.25 전란을 겪으며 가까스로 남으로 내려와 이후 부산, 제주, 거제, 밀양, 대구, 포항, 서울 등 수많은 도시를 오가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냈다.
특히 그가 경험한 극적인 흥남부두 탈출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방불케 한다. 부산과 제주, 거제에서의 피난살이는 당시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듯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특히 배고픈 아이들이 찬송가 가사를 개사해 “내 평생의 찰떡”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울컥하는 감정을 함께 느끼게 한다. 피난 생활 중에도 학업을 이어 거제 장승포국민학교에서 마침내 졸업식을 치르는 모습에서는 교육열 가득한 대다수 한국인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부산과 밀양, 대구를 넘나들며 보낸 학창 시절 이야기에서는 악동의 성장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태풍 사라호를 직접 경험한 이야기,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수산대학을 나와 시작한 공무원 생활, 고려원양을 거쳐 동원산업 부산 지사장을 지내는 등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 부흥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거인의 어깨 위에서 놀던’ 리즈 시절 이야기는 개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넘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입체적이면서도 흡입력 있게 그려냄으로써, 여느 역사 소설 못지않은 흥미진진함을 선사한다.
글쓴이의 성찰과 더불어
우파 아버지 세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한 자서전 글쓰기의 힘
이 책의 주인공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기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돌이켜보니 부모님과 형제자매의 보살핌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는 것을, 전쟁의 비참함을 알기에 더 이상 그런 비극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비록 거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어깨 위에서 신나게 일하면서 그런 거인과 함께하는 행운을 누렸다는 것을, 자신은 고향 없는 ‘삼팔따라지’인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곳이 자신의 ‘고향들’이었으며, ‘복 많은 놈’이라는 것을.
80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정리한 50대 아들과 그 가족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아래 세대는 위 세대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부정하면서 성장한다. 이 책의 주인공과 그 아들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아버지 세대의 꽉 막힌 반공 이데올로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들은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듬으며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된다. 더불어 일제강점기와 분단, 한국전쟁을 거쳐 한강의 기적을 이룬 ‘분투의 세대’를 만난다. 아들은 아버지의 반공 이데올로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아버지와 그 세대가 왜 그러셨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넉넉히 짐작하게 되면서 사고의 확대를 경험한다.
말로는 세밀하게 담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가 글로 정리되는 순간, 글쓴이의 성찰에 더해 그간 우파 아버지 세대와 거리두기해온 아들 세대가 서로 교감할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자서전 글쓰기의 힘이라 하겠다.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인 분들을 위한 자서전 쓰기의 모범
“나와는 한 세대 차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사람처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글을 본 가족의 반응은 이 한마디로 응집할 수 있다. 소용돌이치며 급변해온 이 나라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아버지 세대는 그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도 짱돌이 되고 징검돌이 되고 초석이 되고 디딤돌이 되면서 오늘을 일구어왔다. 개인의 역사와 한국사가 한 호흡으로 읽히는 것이 비단 이 책의 주인공의 삶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조부모 세대라면 누구나 한 편의 대하소설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과 그 아들은 부디 이 책이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이분들이 스스로의 일생을 정리해보거나, 또는 후대가 나서서 선대의 지난날을 각자의 작은 역사를 기록해 나가기를 바란다.
피너츠 패치 파우치 (대상도서 25,000원 이상 구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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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39년생 김동훈의 파란만장 해방일지
김동훈, 김형민 (지은이) ㅁ(미음) 202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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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포인트 1,255
352쪽
책소개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싶다!”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의 합작 자서전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1939년 토끼띠 김동훈은 대한민국 80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특히 흥남부두 탈출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방불케 하고,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 부흥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리즈 시절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넘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입체적이면서도 흡입력 있게 그려낸다. 개인의 역사와 한국사가 한 호흡으로 읽히는 이 책은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인 분들에게는 자서전 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올 뿐 아니라, 후속 세대에게는 부모님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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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펴내며: 어느 ‘복 많은 놈’의 이야기
39년생 김동훈의 ‘나의 살던 고향들’
1 평온했던 내 어린 시절: 만주벌과 두만강 이남
함경북도 남양에서 태어난 이유 | 아버지의 유학과 슈퍼우먼 어머니 | 옥자 누나의 죽음, 그리고 다시 만주로 | 달 속 십자가의 조짐 | 내가 마지막으로 본 만주
2 눈보라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부두
내세우자 인민의 대표 | 내가 교사를 평생 싫어한 이유 |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 내 생애 최고의 한 달 | 흥남부두의 통곡 | 구사일생, 흥남의 방주 | 흥남부두를 떠나며
3 남도의 끝섬들에서
남녘땅의 나그네 가족 | 회중시계와 동해남부선 | 거지들의 재회 | 두만강 소년 제주도 가다 | 열 살 기억 여든까지 간다 | 내 평생의 찰떡 | 오이의 비극 | 거제도의 졸업식
4 밀양과 대구의 악동, 부산의 대학생이 되다
밀양 친구 수봉이 | 대구에서의 봄날과 치욕 | 행운과 액운의 쌍곡선 | 날아간 파일럿의 꿈 | 수산대학생이 맞은 태풍 사라 | 큰형을 떠올리며 | 대한민국의 격변, 그러나 바빴던 대학생
5 가난한 날의 행복과 슬픔
당당함에 대하여 | 큰형 결혼 대작전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천재를 돕는다 | 노총각의 세 가지 원칙 | 처갓집 이야기 | 가난한 날의 행복과 슬픔 | 나쁜 이 이상한 이 좋은 이
6 거인의 어깨 위에서 놀던 시절
고려원양 판매과장이 되기까지 | 황태 덕장 앞에서 | 거인과의 만남 | 동원산업 부산 지사장이 되어 다시 부산으로 | 거인의 어깨 위에서 | 주먹과 개밥 | 안타까운 죽음들 |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일들 | 한국에서 참치 통조림을 처음 먹은 사람은 | 동원참치의 신화와 홀로서기의 꿈 | 나의 달란트
7 디아스포라 우리 가족
다섯 남매 이야기, 그리고 중국에서 온 편지 | 중국으로 가는 길 | 간도에서 만난 주현미
강 건너 고향 | 피는 물보다 진하고 돈은 피보다 진하다
글을 마치며: 화살 같은 여든네 살의 돌아보기
아들의 후기: 자서전 쓰기, 우파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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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나는 내가 태어난 곳을 남양으로 여태껏 읊고 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이다. 온성군은 한국 최북단의 지명이다. 한반도 지형을 토끼로 묘사하자면 길쭉한 귀의 끄트머리에 붙은 곳이고, 호랑이로 보자면 만주를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의 오른쪽 앞발톱에 해당한다. 여기서 부산 수영천보다도 폭이 좁은 곳이 지천인 두만강을 넘으면 오늘날의 옌볜(연변)자치구, 과거의 지명으로는 도문, 용정 등이 나온다. ― 〈아버지의 유학과 슈퍼우먼 어머니〉 중에서
그때의 만주는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와 비슷했다. 개척하고 개간하고 소출을 거두면 도적 같은 만주국 관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몰려왔고, 마적들이 서부 영화 속 인디언들처럼(인디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불시에 뻔질나게 총칼 휘두르며 쳐들어와 사람들의 목숨과 재산을 노렸다. 내가 이도구 살던 무렵에 그들에게 습격당한 적은 없었지만 성벽 넘어 먼발치에서 ‘행군’하는 그들을 본 적이 있다. 더럽고 남루한 옷을 입은 수십 명의 무리가 가족들까지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저것들이 마적들이야.” 그게 내가 봤던 유일한 마적이었다. ― 〈달 속 십자가의 조짐〉 중에서
청진 역시 추위는 만만치 않은 동네였다. 11월쯤 되면 무시로 영하로 떨어졌다. 그런데 영하 10도가 넘는 꼭두새벽에 학교에 나갈 일이 생겼다. ‘새벽송’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김일성도 기독교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김일성이 하는 짓은 기독교를 본뜬 게 많았던 것 같다. 이북에서 처음 실시하는 선거 날 새벽, 아이들로 하여금 가가호호를 돌아다니며 ‘새벽송’을 부르게 한 것이다. (중략) 크리스마스에 새벽송 부를 때는 하나도 추운 걸 몰랐는데 내키지 않는 걸음 때문인지 그날 추위는 유난히 혹독했다. 그때 내가 부른 선거 종용 새벽송 가사 일부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내세우자 인민의 대표〉 중에서
국군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나와 만세를 불렀다. 대체 이들은 태극기를 어디에 숨겨놓고 살았던 것일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인공기를 펄럭이던 사람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중략) 어린 나는 어른들이 그렇게 좋아하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국군을 볼 때 머리부터 보았다. 머리에 뿔이 나지는 않았는지 꼬리는 없는지 궁금했다. 교육의 힘이었다. 인민학교에서 마르고 닳도록 들은 얘기가 머리에 뿔 난 괴뢰 국방군이었으니까. 학교에서 “입이 세 개요 코가 둘이요 기형으로 생겨서 어린아이들을 보면 잡아먹는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 〈내 생애 최고의 한 달〉 중에서
몇 년 전 영화 〈국제시장〉이 설 연휴를 앞둔 겨울에 개봉되었다. 1950년 크리스마스에 며칠 못 미치던 그즈음 흥남부두에 열두 살 소년으로 서 있었던 나는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아내와 함께 극장을 찾았다. 주인공 덕수는 딱 내 나이였다. 막내 여동생을 안고 악착같이 배에 오르던 그 모습에서 나의 옛 모습이 오버랩됐다. 뜻하지 않게 덕수와 헤어지게 되는 덕수의 아버지 모습을 볼 때는 아버지와 떨어져 부둣가에서 대성통곡하느라 갈라지던 목소리가 몸을 감아왔고, 실감나게 재연된 흥남부두 풍경에서 그날의 추위가 다시 엄습해왔다. 며칠 뒤 아들과 사위 가족을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영화 국제시장 봤냐?” 아들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벌써 봤지요. 재미있게 봤어요.”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또 봐라. 내가 돈 내줄게.” (중략) 가족 모두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날 흥남부두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대구 사람 사위 외에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흥남부두는 우리 가족의 출발지 같은 곳이었다. ― 〈흥남부두를 떠나며〉 중에서
문익환 목사의 부친 문재린 목사는 만주에서부터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셨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 목사는 후일 둘째 형 동식과 잘 어울려 다녔다. 그 친척 가운데 환(煥)자 돌림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거제도에 함께 있었다. 그 집안에 문성근 같은 배우가 나왔으니 얘기지만, 그 사람의 끼도 매우 충만했다. 다들 배곯고 헐벗었던 어느 날 교회에서 소풍을 갔다. 그때 그 문씨 친구는 딱 깍지를 끼고 열렬하게 기도를 시작했다. “저에게 복을 주시려면 멋들어진 한‘복’ 하나 주시옵고, 저에게 벌을 주시려거든 양복 한 ‘벌’을 주시옵고….” 사람들이 뒤집어져서 웃는데 그는 연이어 찬송가 한 곡을 능청스럽게 불렀다. 원곡은 “내 평생에 소원, 내 평생에 소원, 대속해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였는데 이 노래 가사를 바꿔 불렀다. “내 평생에 찰떡, 내 평생에 찰떡, 찰떡에 기름을 발라서 한 조각 먹길 원하네.” 다들 처음엔 배를 쥐고 웃다가 잠시 뒤엔 모두 사무치게 같이 불렀다. 갑자기 배가 얼마나 고픈지 배들을 부여잡고서. 처음에는 깔깔대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울먹이며 불렀다. ― 〈내 평생의 찰떡〉 중에서
“야 동훈아, 이리 와서 앉아 봐라. 너 왜 공부 안 하냐.” “공부에 취미가 없어요. 제가 전학을 수십 번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공부하는 법을 잊어버렸어요.” “이 자식아. 그럼 네 형은 어디 붙박이로 있었냐. 핑계는. 그래 어디까지 배웠어. 이 문제 풀어봐.” 성락이 형이 내미는 문제를 보고 내가 한 대답은 지금 생각해도 걸작이다. “소수점 찍을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진도를 못 따라가요.” 고등학교 2학년이 소수점을 찍을 줄을 모른다? 입을 헤 벌린 채 뭐라 할 말을 잇지 못하던 성락이 형의 표정은 지금도 기억 속에 박제돼 있다. 그런데 이 형이 뜻밖의 결단을 내린다. “알았다. 너 오늘부터 나랑 공부 좀 하자.” (중략) 문리가 트인다는 말을 그때 약간이나마 경험한 듯싶다. 소수점도 못 찍던 아이가 유리수와 무리수를 구분하게 됐고, 루트와 근의 공식을 이해하게 됐다. 처음에는 도망가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나중에는 공부에 재미가 붙는 초유의 경험이었다. 공부가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 〈행운과 액운의 쌍곡선〉 중에서
나는 첫 데이트에서 나름의 온갖 화술과 유머를 발휘하여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믿었다. 다시 만나줄 것을 청하고 서울 처녀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중략) 2차 약속 역시 다방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동작동 국립묘지 공원으로 이동했다. 빈약한 공무원 월급으로 택시는 과했으나 당시로서야 달러 빚을 내서 캐딜락이라도 빌릴 기세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작동 국립묘지 공원은 호젓하게 걷기 좋은 곳이 많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벤치에 앉게 됐다. 사실 두 번째 만난 남녀가 무에 할 말이 그리 많겠는가. 서로 어색해지려는 찰나, 나는 교회 성가대원이었던 아내에게 이렇게 제안을 해봤다. “노래 같이 해보시겠습니까?”― 〈노총각의 세 가지 원칙〉 중에서
나는 동원산업 김재철 사장을 찾았다. 항상 근엄한 모습에 올려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여러 구름 위에 있던 고려원양 이학수 회장과 달리, 친구 최 차장에게 보여주던 서릿발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김재철 사장은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매우 중대한 제안을 해오셨다. “지금은 동원산업이 다른 회사에 비해 별로 크지 않지만 언젠가는 우리나라 굴지의 회사로 키울 거야. 내 꼭 그렇게 할 거야. 김 과장 얘기는 내 최 차장을 통해서나 다른 사람 통해서 들었어요. 김 과장, 나랑 같이 일해봅시다.” 살아오면서 내가 교류하고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큰 인물이라면, 즉 거인이라면 나는 김재철 사장, 후일의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을 꼽겠다. 아직 그를 잘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첫 만남과 제안에서 나는 이 사람의 포부와 국량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제안의 내용도 파격적이었다. “부산 지사장을 맡아주시오. 부산 책임자로 가란 말이야.” ― 〈거인과의 만남〉 중에서
“당신 참치 통조림 한번 만들어볼 수 있겠소?” 이미 서구에서는 참치 통조림이 일반화돼 있었지만 당시 한국에서 참치는 통조림 ‘따위’로 만들기엔 너무 귀한 생선이었다. 어찌 참치를 고등어나 꽁치 정도로 만드는 통조림으로 만들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김재철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난감해 보이지? 하지만 이제 한국 국민소득도 높아지고 있고 외국처럼 참치 통조림이 일반화될 날이 올 거요. 어떻게 할 수 있겠소? 참다랑어는 안 되더라도 가다랑어는 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못하겠는데요”라고 대답하는 직장인은 지구가 끝날 때까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중략) 라벨링도 없고 포장도 없는, 노란 양철캔 통조림이 완성되자 나는 집으로 가져와서 아들에게 먹여보았다. 당시 중학생쯤 됐을 아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뭐 비린내는 덜 나네요.” 녀석은 몰랐지만 그것은 한국에서 참치 통조림이 소비자의 입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한국에서 참치 통조림을 처음 먹은 사람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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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김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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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나의 살던 고향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 총 1종 (모두보기)
1939년 여름, 식민지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에서 태어났다. 그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만 두 살 때 태평양전쟁(1941)이 터졌으며, 여섯 살 때 해방을 맞이했고, 열한 살 때 6·25 전란에 휘말리는 등 그야말로 격동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립수산대학 졸업 후 농림부 소속의 중앙수산검사소 공무원을 거쳐 고려원양 판매과장, 동원산업 부산 지사장을 지낸 다음 부산에 정착했으며, 멀미 나도록 변화하고 눈부시도록 발전한 대한민국 사회의 일원으로, 한 가족의 가장으로 치열하게 살았다.
피난민의 자식으로 먹고살기 위해 눈치를 익혔고, 텃세와 구박을 무찌를 깡도 있지만, 남을 짓밟으며 내 몫을 챙기겠다는 두꺼움은 모자랐으며, 누군가를 박정하게 대하면 오래도록 마음이 쓰이는 ‘새가슴’을 지녔다.
그의 가장 특출한 ‘달란트’는 일제강점기 만주와 해방이후 북한에서의 생활, 흥남부두 탈출기와 피난살이 등 평생의 파노라마를 유장하게 읊을 수 있는 기억력이다. 팔순의 어느 날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어 워드프로세서를 익히고 독수리 타법으로 2년 넘게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고향 없이 타향살이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온 곳 모두가 이미 자신의 고향임을 깨달았으며, 스스로 ‘복 많은 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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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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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나의 살던 고향들, 그 속에서 놀던 때가>,<세상을 뒤흔든 50가지 범죄사건>,<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 총 25종 (모두보기)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으나 대학 입학 후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다. 방송 PD인 본캐보다 필명 ‘산하’로 유명하다. 〈리얼코리아〉, 〈특명 아빠의 도전〉, 〈긴급출동 SOS 24〉등 시민의 삶과 풍경을 그리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한겨레21》에 ‘김형민의 노땡큐’, ‘응답하라 1990’을 연재했고, 《시사IN》에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는 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썼다. 저서로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역사를 만든 최고의 짝』, 『딸에게 들려주는 한국사 인물전』(1·2),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1·2), 『한국사를 지켜라』(1·2), 『양심을 지킨 사람들』, 『접속 1990』, 『그들이 살았던 오늘』, 『마음이 배부른 식당』, 『썸데이 서울』 등이 있다.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다듬으면서 아버지를 재발견하고, 나아가 식민지에서 태어나 전쟁과 분단을 경험한 후 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분투의 세대’ 일원과 만나면서 아버지 세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이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각자의 작은 역사를 기록해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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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누구나 한 편의 대하소설을 가슴에 품고 사는
대한민국 조부모 세대의
여느 역사소설보다 재미난 리즈 시절 이야기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싶다!”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의 합작 자서전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1939년 토끼띠 김동훈은 대한민국 80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특히 흥남부두 탈출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방불케 하고,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 부흥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리즈 시절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넘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입체적이면서도 흡입력 있게 그려낸다. 개인의 역사와 한국사가 한 호흡으로 읽히는 이 책은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인 분들에게는 자서전 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올 뿐 아니라, 후속 세대에게는 부모님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야기꾼 산하 김형민 PD가 다듬고 정리한 아버지의 자서전
이야기꾼 산하 김형민 PD가 아버지가 쓴 살아온 이야기를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50대 아들 김형민이 본 80대 아버지의 가장 큰 ‘달란트’는 예전 이야기를 파노라마처럼 유장하게 읊을 수 있는 기억력이다. 수십 년 전 만난 사람의 이름과 스친 사연을 생생하게 되살려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런 아버지가 팔순 잔치 즈음 말씀하셨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겨보고 싶다!” 8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의 합작 자서전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한 사람의 삶을 넘어 시대가 보이는 개인 기록물의 탄생
아버지는 이후 워드프로세서를 새로 익히고 독수리 타법으로 천천히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고, 그 기간이 2년이 넘는다. 이 기록물을 무심히 흘려보냈다면 아버지의 기억은 방대한 세월의 창고 속에서 부스러져 먼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는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아들은 아버지 원고를 다듬고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에 돌입한다.
켜켜이 쌓인 아버지의 글들을 정리해 다듬던 아들은 아버지의 삶 속에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한다. 단순히 개인의 회고록이라 생각했던 글 속에는 한 사람의 삶을 넘어 시대의 역사가 보인다. 이 책 본문 곳곳에는 종종 ‘주’가 등장하는데, 이는 아버지 개인의 삶에서 역사적 맥락의 갈피를 잡아보는 재미에 빠진 아들이 아버지의 역사를 구체화하기 위한 ‘오지랖’의 결과물이다.
여느 역사소설보다 재미난 우리 조부모 세대의 한국 근현대사
이 책의 주인공 김동훈은 1939년 토끼띠로 대한민국 80대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한강의 기적’ 등 해방 전후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겪는다. 한반도 최북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만주와 북한을 오가며 살았던 그는 만 열한 살 때 6.25 전란을 겪으며 가까스로 남으로 내려와 이후 부산, 제주, 거제, 밀양, 대구, 포항, 서울 등 수많은 도시를 오가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냈다.
특히 그가 경험한 극적인 흥남부두 탈출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방불케 한다. 부산과 제주, 거제에서의 피난살이는 당시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듯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특히 배고픈 아이들이 찬송가 가사를 개사해 “내 평생의 찰떡”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울컥하는 감정을 함께 느끼게 한다. 피난 생활 중에도 학업을 이어 거제 장승포국민학교에서 마침내 졸업식을 치르는 모습에서는 교육열 가득한 대다수 한국인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부산과 밀양, 대구를 넘나들며 보낸 학창 시절 이야기에서는 악동의 성장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태풍 사라호를 직접 경험한 이야기,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수산대학을 나와 시작한 공무원 생활, 고려원양을 거쳐 동원산업 부산 지사장을 지내는 등 1970~80년대 대한민국 경제 부흥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거인의 어깨 위에서 놀던’ 리즈 시절 이야기는 개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넘어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입체적이면서도 흡입력 있게 그려냄으로써, 여느 역사 소설 못지않은 흥미진진함을 선사한다.
글쓴이의 성찰과 더불어
우파 아버지 세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한 자서전 글쓰기의 힘
이 책의 주인공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기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돌이켜보니 부모님과 형제자매의 보살핌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는 것을, 전쟁의 비참함을 알기에 더 이상 그런 비극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비록 거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어깨 위에서 신나게 일하면서 그런 거인과 함께하는 행운을 누렸다는 것을, 자신은 고향 없는 ‘삼팔따라지’인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곳이 자신의 ‘고향들’이었으며, ‘복 많은 놈’이라는 것을.
80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정리한 50대 아들과 그 가족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아래 세대는 위 세대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부정하면서 성장한다. 이 책의 주인공과 그 아들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아버지 세대의 꽉 막힌 반공 이데올로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들은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듬으며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된다. 더불어 일제강점기와 분단, 한국전쟁을 거쳐 한강의 기적을 이룬 ‘분투의 세대’를 만난다. 아들은 아버지의 반공 이데올로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아버지와 그 세대가 왜 그러셨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넉넉히 짐작하게 되면서 사고의 확대를 경험한다.
말로는 세밀하게 담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가 글로 정리되는 순간, 글쓴이의 성찰에 더해 그간 우파 아버지 세대와 거리두기해온 아들 세대가 서로 교감할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자서전 글쓰기의 힘이라 하겠다.
‘내 인생을 책으로 묶으면 대하소설감’인 분들을 위한 자서전 쓰기의 모범
“나와는 한 세대 차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사람처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글을 본 가족의 반응은 이 한마디로 응집할 수 있다. 소용돌이치며 급변해온 이 나라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아버지 세대는 그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도 짱돌이 되고 징검돌이 되고 초석이 되고 디딤돌이 되면서 오늘을 일구어왔다. 개인의 역사와 한국사가 한 호흡으로 읽히는 것이 비단 이 책의 주인공의 삶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조부모 세대라면 누구나 한 편의 대하소설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과 그 아들은 부디 이 책이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이분들이 스스로의 일생을 정리해보거나, 또는 후대가 나서서 선대의 지난날을 각자의 작은 역사를 기록해 나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