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0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 반성문 (사상전향서)

[스크랩]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 반성문 (사상전향서)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 반성문 (사상전향서) 저는 중,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역사나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또 유신체제와 5공 체제에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부모님의 영향도 받고 해서 당시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 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던 82년경에 이미 서울대 운동권에서는 광범위하게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도 느꼈으나 곧 역사와 사회현상들에 대해 명쾌하고도 정 교한 해석을 내려주는 마르크스주의에 매력을 느껴 다른 운동권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성향 의 학생운동의 길로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각종 영어책, 일어책들을 구해다가 동료들과 같이 공부하고 후배들을 의식화 교 육시키고 시위에 적극 참가하는 등 열심적으로 활동을 벌였습니다. 저는 3~4학년 경에 기존 학생운동에서 '민족자주'나 '미국'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나오 는 것에 불만을 품고 민족문제에 대해 적극 연구하기 시작하여 제가 4학년이던 85년 하반기부터 학 생운동에 '반미운동'을 도입하였습니다. 이러한 '반미운동'을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대학생들의 정 서에 호소해 순식간에 학생운동의 대세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학가의 반미운동을 이끌면서 반미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할 필요성을 느껴 미국이나 일 본, 심지어 제3세계권 자료까지 닥치는 대로 모았는데 마침내 북한과 관련된 자료까지 구하게 되었습 니다. 당시의 우리 처지로는 통일원이나 극동문제연구소 등 정부나 관변단체 등에서 나오는 자료밖에 구할 수 없었는데 그러한 자료들에는 '미국'문제나 '민족해방'에 관한 것도 나오지만 그보다는 '주체사 상'과 관련해서 더욱 자세히 서술해 놓고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민족주체의식'을 교육받아오고 '인본 주의'를 강조하던 우리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내용이었으며, 계급투쟁 선동 일변도의 내용이고 빈정 거리는 식의 말투로 차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들에 식상해있는 우리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 습니다. 이때부터 저와 동료들은 주체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저는 '강철서신' 등의 글을 써 다른 사람들에 게도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가 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받았고 그 결과 소위 '주사파'라는 운동권 최대의 세력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활동과정에서 체포되어 2년 정도 형을 살고 나왔습니다. 교도소에서도 생각이 별로 바뀌지 않았던 저는 출소 직후인 89년 2월 주사파 조직인 '반제청년동 맹'에 가입해서 활동했으며 그러는 도중 89년 7월경 남파공작원에 포섭되어 북과 연계를 맺고 활동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91년 밀입북하여 김일성과 두 차례 만나고 각종 교유을 받고 돌아왔으며 그 후에도 북과 연계를 가지고 활동했습니다. 밀입북했을 때 보니 북한의 경제실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고 당간부들이 하급관리나 일반 주민에게 아주 고압적인 자세로 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고 김일성은 사고가 30~40년 전의 상태 에서 박제화되어 조금도 변화발전하지 않는 듯한, 그리고 남한의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한 발언 만 하였는데 이 모든 것들은 저를 많이 실망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그 때까지는 그 모든 문제점들을 주체사상을 무기로 해서 극복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북과 계속 연계 를 갖고 활동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실망스럽기만 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과 관련해서 북에 도움을 받을만한 것은 없었고 유일하게 도움이 필요한 것이 통일운동이었는데 바로 이 통일운동에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일관되게 방해만 하고 나왔 습니다. 93년 초에 우리는 당시 통일운동이 일반대중으로부터 심각히 유리되어 있고 아무런 발전전망이 없으 며 통일운동 발전의 결정적 걸림돌로 되고 있는 것이 범민련이라고 보았으며 범민련을 해체하고 북과


직접 연계되지 않은 새로운 대중적인 통일운동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러한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북에도 이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북에서는 이를 도와주지 않을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비난하면서 오히려 방해하고 나섰고 그로 인해 남한 운동권이 심각한 분열상황에 빠지게 되고 분위기가 극도로 혼탁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며 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범민련을 해체하는 길 밖에 없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번번이 묵살되었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과연 그들이 남한 진보운동의 발전을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의심하게 되었고 우 리를 단지 그들 체제유지의 소모품으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92년에 넘어온 강철환, 안혁을 비롯해서 끊임없이 이어진 탈북자들의 증언들은 북한 사회의 비참한 실상을 깨우쳐주었습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잘 믿지 않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는데 그러한 길고 복잡한 이 야기를 각본에 따라 외워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 재차 삼차 이야기할 때 일관성을 유지 하는 것은 거짓말일 경우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탈북자들의 증언이 일관되고 꾸며서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며 또 탈북자들 이 정착한 다음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것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면 그 중 일부는 반드시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탈북 자들의 증언이 대체로 진실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한 탈북자들의 처절한 증언으로 94~5년경에는 북한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굳히게 되었고 96년의 이한영의 증언이 나오면서 북한 김일성, 김정일 정권이 극단적으로 부도덕한 정권이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만인평등의 사회주의를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엄청 난 특권과 사치생활을 즐겼으며 일반 주민들이 사소한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가차없이 처벌하면서 자 기들은 첩을 몇 명씩 두고 남의 아내를 빼앗는 등 갖은 부도덕한 짓들을 서슴치 않았으며 인민의 자 주성을 외치는 주체사상을 내세우면서도 인민의 자주성을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억압하고 있다는 것 을, 주체사상은 그들에게 단지 지배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완전히 깨닫게 된 것 입니다. 92년 2월, 북한의 황장엽 비서가 망명하고 식량난으로 북한 주민 수십만,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구체적으로 전해져 오면서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같이 활동 을 해오던 사람들에게 북한 김정일 정권은 남북한 민중 모두에게 적이며 우리 민족 제 1의 과제가 북 한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민혁당 중앙 위원회를 개최하여 민혁당 해산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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