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6
김영환은 주체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김영환은 주체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김영환은 주체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김제완의 '좌우간에']<8> 한국의 체게바라인가 변절자인가
김제완 세계로신문 대표
2012.08.08
80년대에 "주사파의 대부"로 알려졌던 김영환씨(49)가 뉴스의 중심에 섰다. 중국에서 114일동안 구금돼 있다가 지난 7월20일 인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기자회견을 갖고 중국 안전부에 의해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뒤 활발하게 언론을 접촉하고 있다. 8월1일 2일 양일간 TV조선 인터뷰를 통해 그의 모습과 생각을 직접 국민에게 전했다. 종이신문의 기사와 달리 그의 정서적인 모습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 사회자는 마치 흑백사진 속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난 듯하다고 말했다.
김영환을 소개하려면 어쩔 수 없이 영웅전의 어투가 튀어나온다. 김일성이 수많은 간첩을 남파해서 하려고 했던 일을 23세의 대학생이었던 그가 해냈다. 그가 인터뷰에서 스스로 발설한 표현이다.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의 전국적 대학생 조직을 상대국의 이념으로 무장시킨 사례를 세계사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당시 현장을 지켜보지 않은 사람들은 몇 번을 설명해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워낙 만화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박홍 사건이 일어났다.
박홍 서강대 전 총장은 호탕한 성격이어서 80년대부터 학생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나름대로 운동권에 호의적이어서 술도 같이 하곤 했다. 학생들이 빨갱이로 매도되면 그게 아니라고 변호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어느 때엔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 당시 만났던 학생들은 진짜 빨갱이였기 때문이다. 크게 놀란 박홍은 이 사실을 빨리 사회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샤우팅"을 시작한다. 그들은 진짜 빨갱이다! 라고.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주위 사람들은 박홍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다. 역시 당신도 빨간 안경을 쓴 보수반공이구나라고. 주사파 학생들은 전술적으로 박홍의 발언을 부정했다. 성질이 급한 그는 속이 터지는 듯했을 것 같다. 그래서 광분하여 거품을 물고 운동권을 비판했다. 그는 이때 "주사파 5만 명이 학계와 정당, 언론계, 종교계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것이 필자가 기억하는 94년 7월의 박홍 사건이다.
박홍의 속을 뒤집어지게 만든 사람이 바로 김영환이다.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많을 때 주사파가 10만 명쯤 됐을 거라고 밝혔다. 흥분한 박홍의 추산보다도 두 배나 되었다. 김영환이 아니었다면 주체사상이 한국사회에 도입되기까지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을 것이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주사파의 대부"라는 별칭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필자가 전해 듣기로는 그가 주체사상의 핵심을 고등학생 때에 포착했다고 한다. 장충동 반공센터에 단체로 가서 북괴의 사상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가를 배웠다. 그런데 명석했던 그는 교육내용을 뒤집어서 보고는 주사가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짐작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전두환 통치 시기여서 진실은 늘 정권이 말하는 것의 반대쪽에 있기는 했다.
그는 서울법대 재학 중이던 20대의 나이에 이미 남조선혁명의 최고 지도자였다. 그가 집필한 수령론과 품성론 등 주체사상의 기본이 담긴 팸플릿 '강철서신'은 86년경 대학운동권의 필독서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당시 운동권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적인 비판적인 분위기가 주조였는데 이 책의 따뜻하고 정중한 말투가 호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운동가의 품성을 강조한 것은 경북 안동 출신인 그의 선비적인 풍모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남한 혁명 관련 활동만으로도 현대사에 한 페이지를 남길 사람이었는데 또 한 페이지를 추가한다.
잠수정 타고 평양 가서 김일성 만나
91년 그는 북한 간첩의 안내에 따라 서해 앞바다에서 북에서 온 잠수정을 타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난다. 그런데 김일성을 두 차례 만나 토론을 하고 나서 북한에 대한 시각을 바꾸게 된다. 김일성은 민족공산주의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 주체철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평가했다. 고등학생 때는 제도권 반공교육에서 공산주의의 진실을 눈치챘던 그가 공산당 수령을 만나고는 북한 사상의 허구를 간파한 것이다. 그 뒤로 그가 만들었던 민혁당을 해체하고 전향을 선언한다. 그는 혼자서 빠져나오는 것은 혁명가의 품성과 도리에 맞지 않다고 보고 동지들을 설득해 이끌고 나왔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지금의 뉴라이트 운동세력이다.
▲ 주체사상의 대부에서 북한 인권 활동가로 변신한 김영환 씨 ⓒ뉴시스
김영환은 인터뷰에서 전향을 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김일성에 대한 실망과 당시 동유럽 소련의 붕괴가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북에 다녀왔던 91년부터 94년까지 생각의 변화를 홀로 내연시키고 있다가 94년 말부터 조금씩 주위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 민혁당을 개조해서 서구의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정당으로 바꾸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때마침 90년대 중반에 시작된 북한의 대기근과 아사, 탈북 사태 등을 보면서 북한민주화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우파가 활동해온 영역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는다.
김영환은 북중 접경지역에 장기간 머물며 어떤 일을 했던 것일까. 그는 인터뷰에서 중국에서의 활동 일부를 소개했다. 북한에는 소규모의 민주화조직들이 있는데 그들을 지원하는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온 탈북자들을 돕는 수준이 아니었다. 황장엽이 죽기 전에 그에게 넘겨준 정보들을 활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그는 통합진보당 이석기의원에 대한 언급도 남겼다. 이석기가 비례 2번에 올라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하에서 리더 역할 할 사람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합법영역 활동에 비중을 두어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민혁당을 지휘했던 당시에는 이석기를 노동당에 가입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그 후의 일은 자신이 알 수 없다면서.
김영환이 그린 사상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김영환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을 보인 변절자라고 불릴 만하다. 그의 사상이 어떻게 선회했는지 그 궤적을 따라가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삶은 시대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가 진전 심화되어서 앞으로 관련 논문들이 나오길 기다린다.
프랑스 사회학자 알렝 뚜렌은 사회운동의 방향을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찾았다. 권력이 극우이면 사회운동은 극좌로, 권력이 극좌이면 사회운동은 극우, 그리고 권력이 중도우이면 중도좌, 중도좌이면 중도우... 이런 식으로 청개구리처럼 권력의 반대쪽에 서는 것이 사회운동의 속성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기능을 통해서 불균형한 사회의 균형잡기라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의 이론에 비춰보면 80년대 전두환 노태우의 극우반공 시기에 운동권이 극좌로 나갔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의 철권통치 시기에 학생운동가들이 혁명가가 되어 버린 것도 뚜렌의 이론에 부합한다. 오히려 사회의 건강함을 드러내는 표지였다. 그런데 90년대 들어서 동구 소련의 몰락과 함께 중도우를 지향하는 문민정부가 등장했다. 이에 따라서 사회운동은 극좌에서 중도좌로 즉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이동했다. 이때 다수의 운동권 리더급 인사들이 좌절해서 운동을 중단했다. 사회운동을 지사적인 운동으로 수행했던 사람들 다수는 그들이 지향했던 가치가 훼손당하자 견디지 못하고 손을 놔버린 것이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갖는 특수성이다.
그러면 김영환의 사상 전환은 어떻게 이뤄졌나. 그는 TV조선 인터뷰에서 자신은 극우적이지 않다면서 그에 가해진 비판에 맞섰다. 그의 동지였던 구해우씨는 심지어 신동아 7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환이 형이 주체사상을 버린 건 아니에요. 황장엽 선생하고 비슷한 거죠. 또한 뉴라이트 쪽 사람들에게는 주체사상의 정서같은 게 남아있어요."
전향 주사파들이 주체사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언은 특기할 대목이다. 실제로 황장엽은 남한에 와서 김정일을 비난했을 뿐 주체사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그는 주체사상의 원형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심화시키는 책을 여러 권 펴냈다. 김영환도 황장엽과 같은 케이스일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더 살펴보자.
인간중심의 철학은 인간의 의식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하면 "한다면 한다"는 것이다. 남한의 경제성장 시기 지배이념이었던 "하면 된다"와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이해하기가 어렵다. 주체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통 좌파의 세계관과 비교해야 한다. 그것을 뒤집으며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반한 과학적 사회주의에서는 인간은 객관적인 조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사업을 추진할 때에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구분하며 되는 일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에 반해 주체의 인간들은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하면 객관적인 조건을 무시하고 신념으로 밀어붙인다. 인간의 각성된 의식으로 어떠한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소위 엔엘(NL 민족해방)과 피디(PD 민중민주)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밖에서 보기엔 똑같은 빨갱이로 보이지만 그들은 같은 당을 함께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이다.
이 같은 주체사상의 특성 때문에 전통좌파로부터 관념론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요컨대 인간중심의 철학이라는 우파 철학에 수령론이라는 좌파 모자를 씌운 것이 주체사상이다. 그러므로 수령론이라는 모자만 벗어버리면 남한에서 활동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황장엽이 전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향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구해우의 발언은 김영환이 주사의 몸통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언이다. 김영환은 인터뷰에서 인간중심의 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표현했는데 같은 뜻을 가진 용어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어떠한 탄압에도 북한 민주화를 위해 일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단호한 결기의 표현은 주체의 인간들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주체철학으로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환이 주체철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민감한 문제이므로 본인의 말을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다. 문화일보 8월3일자 인터뷰에서 "주체사상 자체는 여전히 신봉하는 편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신봉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고, 주체철학은 이데올로기로 발전 못했다. 이데올로기는 정치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주체철학은 이론적 뼈대만 있고 전략전술도 없는 것이어서 이데올로기로서 형태가 없기 때문에 신봉이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신봉은 이데올로기로서 정체가 형성돼 있거나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주체철학은 그런 게 필요하지 않다. 그건 이해가 필요한 것이지, 신봉할 만한 것은 아직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주체철학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철학적으로는 자신의 신념에 변화가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간의 시각에서는 그가 극좌에서 극우로 전향한 것으로 본다. 극은 극으로 통한다는 말도 레토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남북한에 걸쳐 혁명운동에 나섰다면 극과 극을 오가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김영환은 한국의 체게바라인가
김영환은 인터뷰 말미에 몇 차례 정치권 입문 권유를 받았는데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운동을 개인 영달의 기회로 이용하게 되면 북한인권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다. 그는 현재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탄압과 위협을 받고 있다. 중국 안전부 요원에 체포돼 전기고문을 당했으며 북한 조평통은 처단해야할 민족반역자 네명 중 첫 번째로 꼽았다. 평양방송은 "온 지구를 다 뒤져서라도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위협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목숨을 건 혁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사회자가 이렇게 묻는다. "8-90년대에는 남조선혁명을 꿈꾸고 지금은 북한혁명을 꿈꾸니 혁명전문가인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회주의혁명에 나선 것도 이 사회의 가장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과 의무감 때문이었다. 게다가 친북사상을 확산시켰던 사람으로서의 도의적 책임감도 작용했다. 이어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기 어렵다고 했다.
체게바라는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완수하고 장관 자리에 취임했다. 그런 그가 안락한 자리를 차버리고 중남미 해방을 위해 볼리비아 전선을 찾아갔으며 그곳에서 정부군에 체포돼 미국 CIA에 의해 사살됐다. 그 뒤 오랫동안 전세계적으로 체게바라 열풍이 일었던 것은 그의 사회주의 사상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열정과 헌신성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헌신성에 관해서는 김영환도 체게바라에 못지않다. 그와 다른 것이 있다면 사회주의 혁명가로 생을 마친 체게바라와 달리 그는 신념을 바꾼 변절자라는 점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을 버림으로써 북한정권을 부정했지만 주체사상의 몸통인 주체철학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게 볼 수 있다. 황장엽과 함께 그는 이 시대가 낳은 이념의 인간이다.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김영환은 한국의 체게바라인가 변절자인가.
김제완 세계로신문 대표hilltop@pressian.com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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