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3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②미 러브콜과 여운형의 거부 : 네이버 뉴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②미 러브콜과 여운형의 거부 : 네이버 뉴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②미 러브콜과 여운형의 거부
신문A11면 TOP 기사입력 2018-04-08 22:18 최종수정 2018-04-09 09:07 기사원
ㆍ미국 정책에 적합하지 않아 골치 아프지만…
ㆍ소련에 우호적인 좌파를 갈라놓으려면 여운형은 여전히 중요하다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의 요청으로 광복 직후 귀국한 서재필(가운데)과 김규식(왼쪽), 여운형이 자동차에 탄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은 신탁통치에 부정적이었으나 반대하지 않았고 여운형과 함께 모스크바 3상협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여운형이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미군정은 왜 그를 붙잡으려 했고
일부 요원들은 존경을 표했을까
하나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었다
38선 이남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여운형이 필요했다
미군정의 또 다른 목적은
조선공산당과 그를 갈라놓아
좌파의 힘을 빼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정치적 힘을 줄이려
동생 여운홍과 분리시켰지만
그는 잘 도망다녔다
“돌아가신 위대한 선생님에 대하여 나는 조선말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는 영원히 침묵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와 나는 항상 선생으로부터 감화받은 교훈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조선 사람들은 울고 있지만, 여운형 선생의 정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돌아가신 사람이 아닙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인물입니다. 우리 이제 남아 있는 사람에게 큰 교훈을 준 사람입니다.”
버치는 서툰 한국어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바꾸어 조사를 읽었다. 잘못된 발음도 적지 않아 제대로 된 한국어로 이해되기도 쉽지 않은 조사였다. 아마도 그가 한국에서 근무했던 2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유일하게 한국어로 한 연설이었을 것이다. 버치 문서에 있는 유일한 한국어 연설문이다. 제대로 할 수도 없는 한국어로 조사를 읽어나간 버치는 여운형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과 그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표현한 것이다.
냉전시대,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로 규정되었던 여운형에게 버치는 왜 이렇게 최고의 존경을 표했던 것일까? 버치뿐만 아니라 또 다른 미군정 관리이자 <주한미군사>의 저자였던 로빈슨 역시 그의 책 <미국의 배반: 미군정과 남조선>(과학과사상, 1988) 맨 앞 장에 다음과 같이 여운형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을 표했다.
버치보고서에 들어있는 여운형 추도사. 한글발음을 영어 알파벳으로 옮겨 썼다.
‘추모: 1947년 7월19일 한국의 서울에서 암살된 여운형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그는 미국의 분별없는 외교정책의 비극적인 희생자이다. 인민의 대의를 옹호하던 위대한 진보적 민주주의자인 그는 좌익과 우익의 전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여운형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하고 있었던 버치 중위를 하지 사령관과 함께 가장 위험한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버치 중위와 하지 사령관이 여운형이 참여하고 있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38선 이남에서 정부를 수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버치에게, 그리고 당시 미군정에 여운형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여운형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해방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목표는 한국을 전범국가인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강대국 중 한 국가의 절대적 영향력을 받지 않으면서도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친소비에트연방(소련·현 러시아)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아야 했다.
미국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공적이지도 않았던 여운형은 이러한 미국의 대한정책에 적합한 지도자가 아니다. 여운형은 조선공산당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공산당과 함께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을 조직하였다. 아울러 그는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 김두봉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버치의 문서 중에는 여운형과 김일성, 김두봉 사이에서 오고 간 편지의 번역본이 있으며, 거기에는 미군정을 비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여운형을 끌어안으려 했다. 버치가 한국 땅을 밟기 이전에 여운형은 이미 미군정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미군정은 한국 통치를 위해 1945년 가을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보수적이고 자산가이거나 친일 경력이 있었던 한국민주당 소속의 인물들을 임명하면서, 예외적으로 여운형을 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여운형은 그러나 미군정의 자문위원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의 러브콜과 여운형의 거부는 1946년 2월 다시 재현되었다. 버치 중위가 한국에 부임해 정치인들을 담당하는 정치자문단(Political Advisory Group) 소속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직후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이 결성될 때 미군정은 여운형이 여기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이승만과 김구가 주도하는 민주의원 참여를 거부했다. 특히 ‘친일파’로부터 정치자금을 수수했고, 그들에게 관대한 이승만이 주도하는 조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운형은 1946년 가을 미군정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좌파의 리더가 되었지만, 당시 조선공산당의 후신으로 창당된 남조선노동당과의 갈등, 그리고 개인적인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들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미군정 내에서 정치공작에 관여하고 있었던 또 다른 인물이던 링컨 대령은 경제정책을 담당하고 있었던 번스 참사관에게 보낸 문서에서 ‘여운형은 미군정의 정책으로부터 잘 도망다니고 있다’고 지적했다(1947년 4월4일자, 버치 문서 박스 2). 이렇게 잘 도망다니는 여운형을 미군정은 왜 그가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붙잡으려 했고, 일부 요원들은 그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했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좌파 계열에서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는 청년들의 영웅이었다. 여운형뿐만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좌냐 우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과 서울대 사회학과의 창시자이며 한국 농구계의 산증인인 이상백 교수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군정으로서는 이렇게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여운형이 38선 이남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했다.
또 하나의 이슈는 한국 내 좌파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해방된 한국에서 조선공산당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는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미국과 달리 소련이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당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국제정치학자 게디스가 언급한 것처럼 동유럽의 공산정권은 ‘내부로부터 초대받지 않은 정권’이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중국과 베트남 공산정권은 대중적 지지를 통해 수립되었다. 한국 역시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하고 미군정뿐만 아니라 일본 총독부와 소통이 가능했던 여운형을 통해 좌파를 분열시키고 강경한 입장의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이는 소련에 우호적인 좌파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
미군정이 벌였던 공작에는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을 갈라놓는 전략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여운형의 힘을 빼는 것 역시 또 다른 중요한 공작의 하나였다. 여운형의 힘을 뺀다면 잘 도망다니는 그에게 계속 구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첫 번째 공작은 여운형으로부터 그의 동생 여운홍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여운홍은 미국 유학을 했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지만, 여운형만큼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의 동생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면, 여운형 개인과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선인민당에는 큰 타격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에게 타격을 입히는 공작은 이승만의 정치고문이었던 굿펠로로부터 시작되었다. 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의 대령 출신인 굿펠로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부터 이승만을 옆에서 도운 인물이었다. 미국 국무성에서 해방 직후 이승만의 귀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자, 굿펠로는 비자 발급을 도왔다. 준장 진급에 실패한 굿펠로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1945년 12월25일 방한했고, 하지 사령관의 특별정치고문으로 1946년 5월26일까지 한국에서 근무했다(이상,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참조). 그는 처음에는 보수우익으로만 구성되어 ‘대표’도 아니고 ‘민주적’이지도 않은 민주의원에 여운형을 참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자, 여운홍을 여운형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공작에 나선 것이다.
굿펠로는 여운홍으로부터 조선인민당에서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정치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는 버치 중위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여운홍의 탈당(동아일보 1946년 5월10일자)이 가져온 정치적 효과가 미미하자 정치자금 지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버치 문서 박스 2). 굿펠로의 공작으로도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링컨 대령의 1947년 4월4일자 문서에는 ‘여운형은 아직도 중요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여운형 때문에 골치가 아픈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소비에트에는 더 위험이 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소비에트에는 더 위험이 되고 있다’는 점은 소련이 지원하고 있는 조선공산당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여운형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미군정은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2단계 작업에 들어갔다. 여운형의 친일행위를 찾는 것이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박태균 | 역사학자·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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