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4

2004 조성환 [1] 위기상황을 통해 본 한국사회의 공공성 – 다른백년



국내기고문[1] 위기상황을 통해 본 한국사회의 공공성 – 다른백년

스페셜 현안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는? - World after COVID-19
국내기고문[1] 위기상황을 통해 본 한국사회의 공공성

민주와 공화의 어우러짐
조성환 2020.04.03


편집자 주:

다른백년은 현재 지구적 규모에서 진행중인 COVID-19 팬데믹을 새로운 형태의 세계전쟁(World War–C, WWC)로 정의한다.

지난 세계1, 2차 대전은 눈에 보이는 적국과 전쟁을 수행하며 물리적 무기를 포함한 전통적 방식의 전술전략을 사용하였다면, WWC는 국경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상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난 수세기 쌓아온 인류문명(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를 포함한)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새로운 성격의 전쟁이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지만 COVID-19가 진정된 이후의 세계와 인류문명은 거대한 변화를 겪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다른백년 은 “World after CoronaVirus? –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는?”라는 주제로 세계 주요한 칼럼을 매주 번역 소개한다. 또한 이와 관련한 국내 필진들의 자유로운 기고를 환영하며 앞으로 뜨거운 논쟁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지구적 위기와 다양한 반응

중국의 한 도시에서 시작됐다고 하는 신종 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어 전 지구를 휩쓸고 있다. 우려하던 ‘지구적 전염병’(global pandemic)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각국의 대응과 시민의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중국은 초기에는 정보은폐와 늑장대응으로 비난을 받다가, 감염자 발생률이 줄어듦에 따라 ‘우한봉쇄’라고 하는 중국식 대응법이 유효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사태 초기부터 발 빠른 대처와 개방적 대응으로 국제사회에서 호평을 받다가, 2월 말부터 특정종교 신자들의 집단감염 사태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중국과 같은 ‘도시봉쇄’ 조치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조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한국인은 별로 없는 듯하다.

한편 국내에서의 시민들의 대응도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에서는 연예인들과 일반시민의 기부금이 잇따르고 있다는 기사가 보이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비록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마스크 사재기로 폭리를 취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는 뉴스가 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 초기에는 특정집단을 향한 혐오발언과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엇갈리곤 했다.

이처럼 지구적 위기상황에서 국가마다, 시민마다 평가와 반응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본의 보수논객으로 알려져 있는 구로다 가쓰히로(黒田勝弘) 씨의 반응이었다. <모든 재난은 인재이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구로다 논설위원은 “아베 정부는 한국 정부의 코로나 대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한국에 대해서 쓴소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구로다 씨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인 평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만큼 이 기사는 “위기 상황에서의 한국인의 공공성”의 일단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구로다 씨와 같은 해외 언론의 기사를 실마리로 삼아, 위기상황에서 발현된 한국사회의 공공성의 형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관민일체의 대응

구로다 논설위원의 글은 《산케이신문》 2월 17일자에 실린 칼럼으로, “한국은 지금 코로나바이러스의 봉쇄에 성공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성공요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지난번에 다수의 사망자를 냈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때의 교훈도 있어서 이번에는 처음부터 관민이 하나 되어(官民挙げて) 대대적으로 대응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중에서 당장 나의 눈에 띄는 말은 “관민이 하나 되어”였다.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관민일체’이다. 실제로 구로다 논설위원은 뒷부분에서, 과거에도 이런 분위기가 있었다고 소개하면서, ‘관민일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에서 ‘관민일체’는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관계가 아닌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관이 명령하고 민이 따르는 식의 ‘상명하달’과는 다르다.

일본에서는 ‘관’을 ‘오카미’(お上)라고 하여 윗사람처럼 받드는 경향이 있다. 관에서 하는 일에는 좀처럼 거역을 안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정반대로 ‘관’에 대한 저항감이 강한 편이다. 그러나 그런 한국조차도 국가적 위기상황이 닥치면 관과 민이 일심동체가 되어 위기를 극복하곤 하는데, 구로다 씨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개방적·민주적 사회시스템

물론 전국적인 위기극복 노력은 비단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전 국민이 하나 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가령 일본의 경우에는 지난 2011년의 3·11대지진 때에 피해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재난을 극복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때에 ‘관(官)’은 일본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아야 한다. 특히 원전사고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 그리고 공무원들은 책임 떠넘기기, 정보 숨기기, 매뉴얼 고집하기 등의 태도로 국민들의 공분(公憤)을 사고 말았다. 결국 2012년 7월에 일본 국회조사위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명백한 인재였다”는 최종 보고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도 당시와 비슷한 비난과 지적이 일고 있다. 정부의 소극적 대응은 물론이고 매뉴얼 사회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매뉴얼에 없는 비상사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속하게 매뉴얼을 만들만큼 일본사회가 발 빠른 것 같지도 않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에는 개방성과 투명성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제일 먼저 조지메이슨대학(한국)의 방문학자로 와 있는 앤드레이 아브라하미안(Andray Abrahamian) 박사는 지난 2월 24일에 있었던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에서 확진자 수가 부분적으로 많아 보이는 것은 한국이 높은 진단능력, 자유로운 언론환경(a free press), 민주적으로 책임지는 시스템(a democratically accountable system) 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이 모든 것을 갖춘 나라는 매우 드물다.”

한국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뛰어난 의료기술과 자유로운 정치환경, 그리고 민주적인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고, 바로 이러한 장점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갑작스런 위기상황에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구로다 논설위원은 그것을 ‘관민일체’에서 찾은 것 같다. 그렇다면 ‘관민일체’는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그 배후에 깔려 있는 사상은 무엇일까?



125년 전의 관민상화(官民相和)

이와 같은 관민일체의 모습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미 한국 역사에서 구현된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에서 실시된 ‘집강소’ 체제이다. 집강소는 1894년 5월에 동학농민군이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한 뒤에,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이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에 따라 전라도 53개 군·현에 설치한 자치행정기구를 말한다. 이 체제에 대해서 경희대학교 김상준 교수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사건”이라고 극찬하였다. 그 이유는 보통 ‘혁명’이라고 하면 백성이나 시민이 군주나 정부를 죽이거나 무너트리기 마련인데, 동학농민혁명에서의 관민상화나 관민공치(官民共治)는 오히려 양자가 손을 잡고 협력 관계로 나아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관민상화와 관민공치가 가능했던 이유는 동학이 지향한 이념이 ‘혁명’이 아니라 ‘개벽’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이 적을 폭력으로 쓰러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개벽’은 생명존중사상에 입각해서 상대와의 상생을 도모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협치 내지 공치의 이념은 일찍이 조선 유학에서도 ‘군신공치(君臣共治)’와 같은 이념으로 주창된 적이 있었다(대표적인 예가 율곡 이이). 이 ‘군신공치’에서 한 단계 더 내려오면 ‘관민공치’가 되는 것이다. 상화(相和)나 공치(共治)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화(共和)’에 해당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할 때의 그 ‘공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 한국의 출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이 주도하여(민주) 공화를 이루는 ‘민주공화’적인 사회시스템을 이미 구현했기 때문이다.



집중도가 높은 사회

구로다 논설위원의 분석 또 하나 눈길이 가는 단어는 ‘집중도’였다. 한국은 집중도가 높은 사회로 이번 위기에서도 ‘고도의 집중력’이라는 사회적 특성을 발휘하여 잘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무슨 일에 있어서든 집중도가 높은 사회로, 사람들의 관심이 단숨에 고조되어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5천만 인구 중에서 관객이 천만을 돌파하는 인기영화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서울 도심이 종종 ‘100만명 데모’로 정치적으로 고양되는 것도 같은 일일지 모른다. 한국은 이번에 과거의 군사적 경험에 더해서 집중도가 높은 사회적 특성으로 잘 대응하고 있는데 ….”

나 역시 한국인이니까, 천만 영화도 관람해 보았고 100만 데모 현장에도 가보았지만, 이런 현상을 ‘집중도’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오히려 “유행에 민감하다”거나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개인에 대해서 “집중도가 높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사회나 나라에 대해서 “집중도가 높다”는 표현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집중도는 어떻게 해서 길러졌을까? 아마도 그것은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이다.



외환위기 때의 보국안민 운동

생각해 보면 이번뿐만이 아니라 국가적 위기 때마다 한국인들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왔다. ‘관민일치’도 이 집중력의 일환일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20여 년 전의 외환위기 때 전국적으로 일어난 ‘금모으기 운동’을 들 수 있다. 98년 한 해 동안 351만 명의 국민이 227톤의 금을 모았다(당시 가치로 환산하면 2조 5천억원). 고 김수환 추기경은 취임 때 받은 금 십자가를 내놨고, 97년 프로야구 MVP 이승엽과 양준혁 등은 금메달을 기부했다.

그런데 이 운동을 제안한 그룹은 사회지도층이나 유명인사가 아니라 뜻밖에도 지역에 사는 부녀자들이었다. 전국새마을부녀회가 주도하여 2017년 12월 3일부터 1주일 간, 돌 반지를 기부받는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가정살림을 맡고 있는 부녀자들이 나라살림을 돕자고 일어난 것이다.

실로 1894년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했을 때의 상황과 유사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으니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나라를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고 일어난 보국안민(輔國安民) 운동이 제2차 동학농민개벽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성들이 너나할 것 없이 거국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하늘이다”는 ‘인내천’의 인간관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인내천(人乃天)은 정치적으로 말하면 “누구나 나라의 주인이다”는 민주주의 이념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농민이든 백정이든 신분에 상관없이 나라를 살리는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들이 정부와 합작하여 자치를 한 것은 말 그대로 ‘공화’의 이념을 실현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지금의 한국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민주적 책임의식 하에 공화적 관민일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을 배워라

국가가 부도가 난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이었던 만큼 1997~1998년의 금모으기 운동은 지금까지도 국민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IMF 외환위기 20년을 맞아 실시한 대국민 여론조사에 따르면, “외환위기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으로 응답자의 42.4%가 ‘금 모으기 운동’을 꼽았다고 한다. 아울러 외환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으로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국민의 단합(54.4%)을 들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배워야 할 사례로 소개가 될 정도였다. 당시에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한 그리스 같은 나라에서는 긴축 재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오히려 금 사재기와 외화 빼돌리기 같은 사태가 벌어지자 “한국을 배우자!”는 기사가 잇따라 등장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유로존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2010년 5월 14일에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나랏빚을 갚는 데 쓰라고 자신의 결혼반지를 내놓기 위해 줄을 설 수 있을까?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인은 그렇게 했다.”

이러한 평가는 “아베 정권은 문재인 정권에게 배우라”고 한 구로다 논설위원의 평가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국가적 위기 때마다 이러한 평가를 받아왔는지 모른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사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가장 가깝게는 지난 ‘촛불혁명’이 그러지 않았던가?



위기상황에서의 휴머니즘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난 2월말부터 뜻하지 않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대구에서 집단 감염자가 발발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정부와 공무원들의 대응도 필사적이지만 의사와 시민들의 대응 또한 감동적이다. 대표적으로 대구에 자원봉사를 자처한 의료인들이 나흘 만에 853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의료인으로서 대구의 열악한 상황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자원하고 나선 것이다. 심지어 광주에 사는 안과 전문의의 경우에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이 먼저 나서서 “왜 대구에 자원봉사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서까지 험지에 들어가려 하는 것일까? 물론 의료인이라는 의무감이나 직업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휴머니즘’이 아닐까 싶다. 즉,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는 윤리의식이 앞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의식을 유학(儒學)에서는 ‘인(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였다. 인(仁)은 보통 ‘어질다’라고 풀이하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랑,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공감능력”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다움은 가족 안에서의 인간관계에 의해서 학습되고 발현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간관은 평소에는 평범하고 진부한 도덕론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위기상황이야말로 인간의 생존본능이 극대화되어 이기적인 행동을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그가/그녀가 인간다운지 아닌지가 드러난다는 것이 유학의 메시지이다. 대표적인 예가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이다. 이런 극한상황일수록 이기주의와 휴머니즘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나타나게 마련이다.

코로나 사태 초기에 우한에 있는 한국 교민들을 데려올 때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2주간의 임시 격리지가 아산과 진천으로 정해졌을 때 초반에는 지역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일어났다. 자신들도 바이러스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공포심과 더불어, 그런 갑작스런 공포를 사전에 충분한 대화나 양해 없이 일방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는 분노심이 앞섰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의 사건으로 갑자기 사태가 급전되었다. “우리가 아산이다”는 슬로건을 내건 교민환영운동이 SNS를 통해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론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의 일은 우리가 잘 아는 바 대로이다. 서로 따뜻하게 맞아주고 감사하게 여기는 상호배려의 손짓들이 오고 갔다. 이것이야말로 유교에서 말하는 휴머니즘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지향성과 도덕지향성

일본의 저명한 한국학자인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모시는사람들)라는 저서에서 한국인의 특징을 ‘도덕지향적’이라고 진단하였다. 매사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연예인들조차도 ‘기부’와 같은 선행을 해야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예를 들고 있다. 실제로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연예인들의 기부 행위가 줄을 잇고 있다. 심지어는 어떤 연예인은 기부 액수가 적다는 이유로 네티즌의 비난을 받기까지 하였다. 이에 대해 과연 이런 비난이 옳은지 문제제기하는 네티즌도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의 도덕지향성이야말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아산이나 대구 지역에서 보여준 휴머니즘은 바로 그러한 사례이다.

아울러 오구라 교수는 한국인들은 항상 ‘하나’를 지향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제목을 붙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도덕을 지향하기 때문에 도덕을 실현하기 어렵듯이, 하나를 지향하기 때문에 하나가 훼손되는 딜레마에 빠진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도덕지향성’에 빗대어 말하면 일종의 ‘하나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확실히 한국어의 ‘하나님’이나 ‘한살림’, 또는 ‘한울’ 같은 개념들을 보면, 한국인들이 ‘하나(oneness)’를 지향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하나지향성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바로 국가적 위기 상황이다. 이런 위기상황에서는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한 위기의식과 함께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도덕의식이 작용하여, 전 국민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쉽게 말하면 국민의 공공의식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안정 상태로 돌아오면 각자가 싸우기라도 하듯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주말마도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집회와 구호들이다.

이러한 현상을 ‘민주공화’의 틀로 해석해 보면, 위기상황에서는 모두가 하나 되는 공화적(共和的) 요소가 강조된다면, 평소에는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민주적(民主的) 요소가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평소에 강조되는 민주가 위기상황에서 공화를 실현하는 바탕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각자가 주인이 되는 경험이 쌓여야 자발적 조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화는 위기상황에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드러나지 않게 작동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전체가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한 날 한 시에 서로 다른 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리는 상황이다. 비록 정치적 의견은 정반대이지만 두 집단이 전체의 조화를 깨트리지는 않는다. 단지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민주와 공화, 공화와 민주가 서로 어우러지는 “민주와 공화의 공화국”, 다른 말로 하면 “민주와 공화의 조화를 지향하는 사회”라고 규정될 수 있지 않을까? 즉, ‘민주들의 공화’, ‘공화속의 민주’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구로다 논설위원은 ‘관민일체’(관민공화)라는 공화적 측면에 주목하였고, 앤드레이 아브라하미안 박사는 ‘민주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민주적 요소에 주목하였는데, 실은 민주와 공화가 한데 어우러진 ‘민주공화’야말로 이번 위기를 헤쳐 나가고 있는 한국인의 공공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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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을 썼고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번역하였다. 지금은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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