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9

알라딘: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 친밀성의 구조 변동 앤서니 기든스 (지은이),배은경,황정미 (옮긴이)

알라딘: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 친밀성의 구조 변동   
앤서니 기든스 (지은이),배은경,황정미 (옮긴이)새물결2001-06-30
원제 : Sexuality, Love, and Eroticism in Modern Societies (1992년)

양장본312쪽152*223mm (A5신)562gISBN : 9788988336984

목차
1. 일상적 실험.관계.섹슈얼리티
2. 푸코와 섹슈얼리티
3. 낭만적 사랑. 그리고 다른 애착들
4. 사랑.헌신. 그리고 순수한 관계
5. 사랑.섹스. 그리고 다른 중독들
6. 공의존의 사회학적 의미
7. 인격적 교란.성 트러블
8. 순수한 관계의 모순들
9. 섹슈얼리티.억압.문명
10. 민주주의로서의 친밀성

책속에서
옮긴이들이 보기에 **섹슈얼리티는 결코 별개의 영토를 갖고 있는 미개척지가 아니다. 성은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재구성되어 온 인간관계와 사회적 제도의 장(場) 속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으로부터 섹슈얼리티만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성에 대한 관심이 소중한 까닭은 성이야말로 우리가 일상생활의 인간관계 속에 스스로를 위치짓는 중요한 **기준점이며,
그것을 통해 **삶의 모든 면을 다시 성찰하는 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립되고 신비화된 성의 세계에 함몰되어서는 안되며, 연애·사랑·결혼·가족·외로움 · 증오 · 수치심등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자리잡은 제도들과 인간적인 감정들이 뒤얽혀 있는 관계망으로서 섹슈얼리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나아가 우리가 (사회)구조‘ 라고 불러온 것들, 즉 생산과 소비와 지배가 조직되는 (공적)영역의 변화 속에 그러한 관계망을 정당하게 위치지울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 숨어있는 억압의 기제와 해방의 잠재성들을 새롭게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13쪽.  접기 - Cinema Paradiso
기든스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내부-준거적 체계(internally referent system)라는 점에서 전통사회와 구분된다.

이전에는 관습이나 전통, 아니면 자연의 명령을 따라서 이루어졌던 인간 활동의 많은 부분들이 점차 사회 체계의 내적 논리 속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재생산(자녀의 임신과출산)이 자연의 섭리이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현대 이전 사회에서는 섹슈얼리티 역시 자연으로부터 이미 결정되어 주어지는것이었으나, **재생산 없는 섹슈얼리티(피임)와 **섹슈얼리티 없는 재생산(시험관 아기 등의 테크놀러지)이 모두 가능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성이 더 이상 단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결정하고 선택하는 문제로 변해가고 있다.

**‘조형적 섹슈얼리티 (plastic sexuality)‘는 기든스가 이러한 상황을 조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한편 인간관계 역시 더이상 관습이나 전통에 따라 유지되지않고, 각각의 개인이 그 관계에 부여하는 의미와 관계의 내재적 속성에 따라 그 형태와 존속 여부가 결정되게 된다.

한번 결혼했으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식의 전통적 결혼관계가 관계 ‘외적 인 관습과 전통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결혼생활을 통해 줄기차게 배우자의 사랑을 확인하려 하고 사랑이 없다면 결혼관계를 미련없이 깨어버린다거나 혹은 사랑하면 되었지 결혼이라는 형식이 왜 필요하냐는 식의 **인간 관계는 그 관계에
**‘내적인‘ 속성에 대한 당사자들의 판단에 따라 지속 여부가 좌우되는 것이다.

혈연에 의해 의무처럼 부과되던 *친족관계가 점차 엷어지고 **친밀성과 애정에 기초한 관계가 보다 중시되는 것도 마찬가지 흐름이다. 기든스는 이치럼 관계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관계 그 자체의 내재적 속성에 따라 유지 · 변화되는 관계를 순수한 관계 (pure relationship)‘ 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15쪽.  접기 - Cinema Paradi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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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앤서니 기든스 (Anthony Giddens)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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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학계의 세계적인 석학인 그는 사회 이론과 계층론 분야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유럽 지성의 쌍벽을 이루며 ‘영국의 자존심’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 지지와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거장이다. 특히 사회 이론 분야에서 유럽의 지적 전통과 현대적 흐름을 반영한 ‘사회 구조화 이론’으로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하였으며,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제3의 길’이라는 새로운 사회 발전 모델을 주창하였다. 이 ‘제3의 길’은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등 유럽을 이끄는 중도좌파 정치가들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기든스는 고전 사회학자들의 이론을 검토하는 작업부터 현대성에 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사회 이론가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적인 사회학자가 사회학 입문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기든스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 책을 계속 보완하며 제8판에 이르렀다. 그의 저작은 전 세계 29개 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데, 기든스 자신이 폴리티(Polity)라는 학술 전문 출판사를 공동 설립해서 매년 80여 권의 학술 서적을 간행하는 출판인이기도 하다.
영국 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1959),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976). 영국 레스터대학교 사회학 강사(1961~1970),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사와 교수(1970~1997)를 거쳐 런던정치경제 대학교 학장(1997~2003)을 역임했다. 현재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자본주의와 현대 사회 이론』(1971), 『선진 사회의 계급 구조』(1973), 『사회학 방법의 새로운 규칙』(1976), 『사적 유물론 비판』(1981), 『민족 국가와 폭력』(1985), 『근대성의 결과』(1990), 『근대성과 자아 정체성』(1991), 『친밀성의 변동: 현대 사회의 성, 사 랑, 에로티시즘』(1992),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1994), 『사회학의 변론』(1996), 『제3의 길: 사회 민주주의 쇄신』(1998), 『노동의 미래』(2002)가 있다. 접기
최근작 : <사회학의 핵심 개념들>,<현대사회학>,<제3의 길> … 총 208종 (모두보기)

배은경 (옮긴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성학협동과정 겸무교수로 일하고 있다. 인간 재생산과 돌봄 사회, 젠더 정치와 여성정책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막힌 사회와 그 비상구들』(공저, 2019), 『경계를 가로질러 가족만들기』(공저, 2017), 『현대 한국의 인간 재생산: 여성, 모성, 가족계획사업』(2012), 역서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공역, 1999),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친밀성의 구조변동』(공역, [1996]2001) 등이 있다.
최근작 : <막힌 사회와 그 비상구들>,<성.사랑.사회 (워크북 포함)>,<경계를 가로질러 가족만들기> … 총 13종 (모두보기)
황정미 (옮긴이)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HK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다문화주의의 성찰과 전망》(공저, 2014), 《국경을 넘는 아시아 여성들》(공저, 2009)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현대사회의 성 / 사랑 / 에로티시즘》(공역, 2001)가 있다.
최근작 : <젠더와 사회>,<교육이주의 추이와 미래 정책과제>,<이주민의 사회통합을 위한 지역사회 참여현황과 증진방안> … 총 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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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 중독자들이 자기들의 활동을 윤색하는 말들은 알콜 중독자가 음주를 정당화할 때 사용하는 말과 유사하다. ‘딱 이번 한번만이야’, ‘이건 아무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아’, ‘내 마누라는 결코 모를 거야’

  여성의 성적 평등은 정숙한 여자와 부정한 또는 타락한 여자 사이의 오래된 구분을 해소한다. 유혹자의 ‘죽이기’는 정조의 파괴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이제 추구는 그 주요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유혹자가 빼앗으려던 혹은 그의 권력 안으로 가져오려던 ‘통합성(혹은 고결함’이란 이제 더 이상 성적 순결성과 같은 것이 아니게 되었으며, 성별에 따른 어떤 것도 아니다. 순수한 관계의 맥락에서도 통합성은 여전히 근본적 역할을 유지하지만, 이제 그것은 각 파트너가 상대방에게 가정하는 어떤 윤리적 속성이 되고 있다.

  유혹이라는 일상사를 처리하고 있을 때에는 그토록 달변이고 확신에 찬 사람이었던 남자가, 일단 성행위가 끝나고 나면 어색하고 눌변이며 또 떠나지 못해 안달인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는 결국, 인간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대신 단지 여자의 구두만을 갈망하는 페티쉬스트(물신숭배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난봉꾼들은 섹슈얼리티와 친밀성 그리고 자기 정체성의 성찰적 구성 사이의 연관들을, 어떤 다른 남자들보다도 더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주고받을 능력이 있는 독립적 존재로서 여자들을 만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여자들에게 예속된 상태에 있다. 난봉꾼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녀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떠나버리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은 그는 ‘그녀들을 떠날’ 능력이 없다. 하나의 이별은 언제나 또 다른 하나의 만남을 위한 서곡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중독을 아주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현대인들은 모두 어느 정도 중독자이다. 휴대폰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휴대폰 중독’, 백화점 세일 광고를 보면 가지 않고는 못 살 것 같은 ‘쇼핑 중독’, 아파트에 살 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건설 중독’(?)...재미있는 것은 최신 휴대폰을 사고 난 후에 꼭 며칠 지나지 않아 더 새로운 기능을 가진 휴대폰이 광고에 나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혹시 이러한 중독이 자본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쇼핑 중독은 현대의 광고와 마케팅에 상당한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랑 중독(혹은 섹스 중독)은 발렌타인 데이를 노려 재고 초콜릿을 처리하려는 과자 업계와, 멋진 자동차를 사면 예쁜 여성을 취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자동차 업계와, (한국의 특이한 문화인) 모텔 업계가 모의한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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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2007-01-01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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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난 독자들을 위해서 새창으로 보기
글 읽고 나서도 난해한 부분도 많고 논점이 쓸데 없이 많고 잘 정리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이 속에 담겨있는 놀라운 통찰과 시사하는 바는 매우 위대하기에 이를 하나의 글로써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기존에 가부장제적인 권력구조,빅토리아 시대에서의 억압적인 권력구조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원칙에 입각한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남성과 여성과 같은 ‘성’끼리의 대립되는 관계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와 같은 기존의 상하관계가 이제는 수평관계에 의하여서 재평가되고 재인식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저자는 이를 가능하게 했던 건 위로부터의 개혁(정치적인 제도의 구비)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개혁(일상 생활속에서의 대인관계의 변화), 특히 여성들이 주도해온 새로운 가치관에 따르는 생활속에서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그들의 성과 인권을 억압해오던 그러한 압박속에서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써 ‘낭만적인 관계 ’를 발전시켜왔다고 말한다. 낭만적인 관계란 서사가 존재하는 사랑의 이야기로써 이 관계 속에서의 사랑이란 사회적인 재생산과 주변의 환경이 맺어주는 정혼이 아닌 순수한 관계에 기반한 사랑, 그리고 결혼을 의미한다. 아마도 저자의 말처럼 여성들의 이러한 노력내지는 시도가 그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위로부터의 통제에 의해 구동하는 사회구조 자체가 무너지고 민주적인 원리에 입각한 사회가 출현해서 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러한 ‘낭만적 관계 혹은 사랑’이라는 개념은 역사속에서 출현한지가 얼마되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현재 우리들의 삶 속 깊숙이 들어와 사랑에 관하여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전 세대에서 통용되었던 뚜렷한 가치관 내지는 도덕적인 윤리 그리고 성에 대한 옳고 그름을 가르던 기준이 퇴색되어 가면서 이제는 그것들을 우리들 스스로가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끊임없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찾아가고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보다 큰 자율성을 허용해주었기 때문에 삶 속에서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더 자기 성찰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해졌다. 그리고 그렇기에 성과 사랑은 자기 정체성과도 연결이 되고 그것들을 우리는 끊임없이 재평가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그 자체의 순수한 관계에 의해서 우리는 그 관계를 지속할지 그만둘 지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 관계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 역시도 일부분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자신이 상대방과 건전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바람직한 관계의 전제란 각 개인이 사적인 영역을 설정해 두고서 그 안으로는 타자를 들이지 않는 즉, 자신만의 프라이버시가 존재하는 그런 영역을 보존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관계이다. 따라서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해버리고 상대로부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공의존적인 관계란 결코 바람직한 관계일 수 없다. 우리는 상대로부터 무엇을 바라는 지를 결정해야 하며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하고 역시 상대가 무엇을 바라는 지를 파악하고 배려해야 하며 그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것이 가능할 때에만 관계는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한 욕구 내지는 열등감을 채우기 위한 보조적인 의미의 관계란 끊임없는 갈증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오히려 그 관계 자체에 더욱 의존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술,담배 마약에의 중독과 같은 강박적인 현상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섹슈얼리티와 친밀성이 연결되어있는 이 시대에서 과연 우리가 섹슈얼리티에 대해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서 접근하는 지에 대해 한번 잘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섹슈얼리티는 성욕 그 자체로서 설명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 내면에 남자로써(성 정체성의 부족) 여자로써(독립심의 부족) 유아기에 형성된 어떤 결핍감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써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섹스에 중독되어 버린다면 혹은 버린 것이라면? 아무리 그것을 많이 향유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설령 남자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뭔가 잘못된 방향을 잡은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섹슈얼리티가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데에 기여한다면 그리고 섹슈얼리티가 수많은 다른 순수한 관계들 중의 하나라면 우리는 이를 단순히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닌(마치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과정 그리고 밥을 먹고 나면 모든 게 채워지고 완료되는 행위)하나의 관계로써 기능하는 거라면 우리는 섹슈얼리티 속에서 관계를 통해서 채워질 수 있는 어떤 사회적 그리고 더 나아가 개인적인 ‘의미’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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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님하 2016-03-13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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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은 민주주의!! 새창으로 보기
난 성에 대해서 누구와 얘기하거나 토론을 한적이 있는가?? 있다..아주 조금..!! 그러나 그것이 뭐 열띤 토론이 아니라 여자들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뭐 시시콜콜한 얘기들..뭐 그런 얘기들이다. 그레서 내가 옛날 구성애의 열렬한 팬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나서 '음..그런가?? 잘모르겠는데..' 솔직한 말이다. 앤소니 기든스-영국의 사회학자-의 책은 이 번이 처음이고 아니 이런류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평소 듣도보도 못한 단어들과 어려운 단어의 번역..옆에 국어사전 갔다놓고 봐야되나..그런 생각까지 했으니까!!

푸코의 이론(담번에 도전할 책)을 분석하고 비판 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내새운다.. 그러면서 혼란한 성규범과 그 대책으로 민주주의로의 귀착!! 권리와 의무, 개방이라는 요소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사랑(열정적,낭만적,합류적)에 대한 그의 주장은 그래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책표지에 나와 있듯이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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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매니아 2003-12-05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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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고 싶다면... 새창으로 보기
사람에 따라 책을 읽는 이유는 다르겠지만, 그것이 내 삶 속에서 유의미한 성찰을 하게 한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특히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든 문제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연애를 하면 대중가요가 다 내 얘기 같다는 말이 있던가? 연애라는 게 그렇다. 한없이 감정적이 되고 혼란스러워지고, 집착하게 되고... 사실 연애 거의 안해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럴 때 읽어보면 괜찮을 법한 책이다. 원제는 '친밀성의 구조변동'.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가장 일상적인 듯 보이는 성과 사랑의 문제를 사회 구조의 변동 속에서 분석하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사랑에 대한 넘쳐나는 말들이 낭만적, 열정적 사랑을 칭송할 때 합류적 사랑(친밀한 관계)으로부터 개인 생활의 민주적 질서를 끌어내는 저자의 논리는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고답적인 이론 정도로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벽에 부딪혔을 때 이 책은 좋은 성찰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친밀성의 구조변동은 단순한 벗어남이 아닌, 개인의 진정한 해방의 가능성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단점이 있다면 하드커버라 좀 무겁다는 것. 근데 뭐 전공책에 비하면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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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2-03-2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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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낚였나? ^^; 새창으로 보기
유후~ 이 뿌듯함.^^ 어젯밤, 드디어 다 읽어버렸다!!!!!

내가 왜 이 책을 집어들었을까, 게다가 선물을 받았으니 묵힐 수도 없고...ㅠㅠ 라는 초반의 후회가 무색하게, 중후반부터는 문장마다 눈이 깜짝깜짝 열리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물론, 책을 100% 이해한 건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조형적 섹슈얼리티, 아무르 빠시옹과 낭만적 사랑, 그리고 합류적 사랑. 라이히나 마르쿠제 같은 딴나라 말 같던 단어들에 이젠 감을 좀 잡았다. 게다가 친밀성의 구조변동, 즉 여성, 혹은 적어도 <여성적인 감성과 관계>가 앞으로의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성과 재생산 능력의 분리와 친밀성의 구조변동 사이에 한 계단 정도는 아직 이해가 잘 안되지만.^^;)

'서재 결혼시키기'의 앤 패디먼 말마따나, 책을 깨끗이 보는 것만이 사랑하는 방법은 아닐터! 중간부터는 마음을 다잡고 예진이 2B연필로 죽죽 줄도 긋고, 별표에 나름 각주를 달며 신이나서 읽었다. 색인 목록에서 의문나는 단어나 새로 알게 된 단어를 동그라미 한 데 이어, 목차에 중요하다 생각되는 부분을 간단요약을 해 놓고는 학구적인 비소설을 효율적으로 읽는 방법을 개발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 학교 다닐 때 전공서적을 이렇게 들고 팠으면 분명 A+은 따논 당상이었을 텐데....ㅋㅋ

PS.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친밀성의 구조변동>이라는 제목을 보고는 어느 정도 <킨제이 보고서>류의 성적 에피소드들을 기대했었는데, 성격이 전혀 다르다. 굳이 무게를 싣자면 주황색 커다란 글씨로 쓰인 성, 사랑, 에로티시즘 보다는 앤소니 기든스라는 이름 위에 새끼 손톱보다 작게 써진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이 책의 더 큰 주제이다.

고로, 책을 덮고 순간 느낀 감정....'나, 낚였나? ^^;;;;;'

ㅎㅎ, 앤소니 기든스가 세상사람들을 <낚으려고> 저런 제목을 달았는지는....글쎄, 아닐 것 같지만, 표지디자인을 한 출판사는 분명히, 독자들을 <낚으려> 한 저의가 보인다. ^^

PS2. 이벤트 선물을 주신 마태님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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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7-05-02 공감(2)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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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gue 200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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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출판사 2008-08-27
앤서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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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200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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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Sociology: 국제사회학회(ISA) ‘(20)세기의 책‘ 조사 결과 새창으로 보기
  국제사회학회(International Sociological Association)는 1997년, 20세기 사회학 유산에 대한 비판적 평가 작업의 일환으로, 회원들을 대상으로 '세기의 책(Books of the Century)' 조사를 실시하였다(http://www.isa-sociology.org/en/about-isa/history-of-isa/books-of-the-xx-century/).



  "사회학자로서 자신의 작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 다섯 권을 뽑아 달라."는 질문에 대하여 회원 2,785명 중 455명이 답하였고, 막스 베버의 미완성 유작 『경제와 사회』가 전체 표 중 20.9%를 얻어 1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중 일부를 국역한 박성환 교수 논문에 따르면, 『경제와 사회』는 편집자와 판본에 따라 수록된 글과 배열순서 등이 너무 달라 1위를 차지한 책은 엄밀히 말하면 영역본인 『Economy and Society』이고, 독일어 원본인 『Wirtschaft und Gesellschaft』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독일어 원본도 편집자-Marianne Weber(부인), Johannes Winckelmann, Wolfgang J. Mommsen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국내에도 부분적으로 발췌, 번역된 두 권이 있기는 하나, 독일이나 영어권에서도 사정이 특별히 더 낫지는 않은 것 같다.







  아래에 30위에 든 책들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1위가 95표이고, 10위가 25표이며(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17표로 16위), 50위부터는 벌써 6표 정도여서 순위에 과한 무게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위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표를 한 표라도 받은 978권 전체의 목록이 있고, 성별에 따라, 연령대에 따라 어떤 저자들에 투표하였는지도 따로 나온다).


1. 막스 베버, 『경제와 사회』(워낙 방대한 책이어서, 두 번역본의 번역된 부분이 다르다. 1997년 문학과지성사 본은 Winckelmann이 편집한 5판 앞부분을 번역한 것이고, 2009년 나남출판사 본은 Mommsen이 편집한 1부 제22-1권 '공동체들'을 번역한 것이다. 아래는 4위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제외한 막스 베버 저작, 해설서들이다.)































2. 찰스 라이트 밀즈(왜인지 보통 C. 라이트 밀즈라고 쓰는...), 『사회학적 상상력』





3. 로버트 킹 머튼, 『Social Theory and Social Structure』(1997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Robert Cox Merton은 그 아들이다. 아직 국역되지 않았다. 아래 『On Theoretical Sociology』3~5장에 1부가 실려 있다.)






4.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번역본이 여러 권 있으나, 단연 2010년에 나온 김덕영 교수님 번역으로 읽어야 한다. 다른 것들은 방대한 각주를 아예 번역하지 않았거나, 번역이 부정확하고, 국어 문장도 좋지 않다. 그래서 따로 언급하지 아니한다.)





5. 피터 버거, 토마스 루크만, 『실재의 사회적 구성』(2014년에 국역본이 나왔다.)





6.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7.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과정』





8.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9. 탈콧 파슨즈, 『The Structure of Social Action』(위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사회의 유형』(이종수 역, 홍성사, 1978) 등 그의 다른 책들이 몇 권 번역되었다가 모두 절판되었다. 파슨즈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영역자이기도 하다. 베버는 사실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위 글을 『사회과학과 사회정책 연지 Arc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20권과 21권에 나누어 실었다가, 1920년에 『종교사회학 논문집』 제1권에 이를 다시 수정, 증보해 실었다. 그런데 두 원고는 주제가 상이하다고 한다. 이후의 학자들은 첫 번째 원문을 찾아보지 않은 탓에, 두 번째 원문이 첫 번째 원문인 양 잘못 믿어왔다고 한다. 파슨즈가 번역한 것도 후자이다.)





10. 어빙 고프먼, 『자아연출의 사회학』(2016년에 국역본이 나왔다.)





11. 조지 허버트 미드, 『정신 자아 사회』





12. 다시 9위에 나왔던 탈콧 파슨즈, 『The Social System』(위 책의 국역본은 없지만, 『The System of Modern Societies』는 국역본이 있다.)





13. 에밀 뒤르켐,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





14. 앤서니 기든스, 『사회구성론』







15.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013년에 각 권별로 색깔을 달리 한 개정 번역본이 나왔다.)





16.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2016년에 오생근 교수님의 개정 번역본이 나왔다.)









17.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국회의원이기도 했던 김명자 교수님의 기존 번역본에 대해서 말이 많았는데, 2013년에 출간 50주년을 기념한 개정판이 나왔다. 홍성욱 교수님께서 개정판 번역에 참여하셨는데, 여전히 번역에 대한 평이 좋지 않다.)





18. 게오르그 짐멜, 『Sociology』 (게오르그 짐멜의 책이 특히 김덕영 교수님 번역으로 꽤 나와 있는데, 이 책은 아직이다.)





19. 울리히 벡, 『위험사회』(뭐 번역이 엄청 좋지는 않은데 참을 만하다. 사견이지만, 이 책의 가장 큰 기여는 '제목'이 아닐까 싶다.)





20. 해리 브레이버만, 『노동과 독점자본』 (이 책이 20위인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대학가의 커리큘럼에만 단골로 등장하는 책인 줄 알았는데...)





21. 아도르노 &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교수님이 계셔서 참 다행이다.)







22.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원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권, 『감옥에서 보낸 편지』로도 나왔다. 민음사 본에 나오는 80페이지에 달하는 편집자 서문과 꼼꼼한 번역, 주석 등은 호평을 받았는데, 현재 알 수 없는 이유로 절판되었다. 민음사의 대답이 명확하지 않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권은 현재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로 바뀌어 있다. 위 전집에서 『롤리타』와 『감옥에서 보낸 편지』 두 권이 딱 절판되었는데, 롤리타는 문학동네 전집으로 다시 나왔다.)





23. 제임스 콜먼, 『Foundations of Social Theory』(아직 번역은 되지 않았다.)





24. 다시 위르겐 하버마스, 『인식과 관심』 (위 8위에서 본 것처럼, 하버마스 책이 그렇게 많이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하버마스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탓인지, 이 책은 1996년 고려원에서 강영계 교수님 번역으로 나오고 절판되었다가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25. 배링턴 무어,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까치에서 1985년에 진덕규 교수님 번역으로 나왔는데,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저나... 이쯤되면 '갓'까치)





26.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역자인 홍기빈 님은 요즘 로버트 오언에 관심이 많으신 듯 보인다.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번역하여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에서 내셨다.)





27. 피터 블라우, 오티스 던컨, 『미국의 직업구조』 (리스트에서는 제목이 잘렸는데, 『The American Occupational Structure』이다.)





28. 앨빈 굴드너, 『The Coming Crisis of Western Sociology』(1982년에 한길사에서 『현대사회학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나온 적이 있다. 한길사에서 프레이리 『민중교육론』 등 여러 번역서를 내고, 2000년대까지 신학 서적도 몇 개(『예언자적 상상력』, 『마르크스와 성서』 등) 번역하셨던 김쾌상이라는 분이 번역하셨다. 이 분은 앨빈 굴드너의 『이데올로기 그 기원과 원리와 미래』라는 책도 번역하신 적이 있다.)





29. 니클라스 루만, 『Soziale Systeme』(국내에는 한길사에서 『사회체계이론 1, 2』로 번역되어 나왔다가, 번역에 대해서 욕에 가까울 정도의 엄청난 혹평을 받다가 그 중 1권이 극히 최근에 품절되었다.)





30. 카를 만하임,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덧. 마르크스의 『자본』은 9표로 32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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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17-05-04 공감 (60)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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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나의 힘 새창으로 보기




































인간관계의 폭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시기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같은 경우 회사를 그만둔 후가 그랬다. 임신, 출산, 육아의 철인3종 경기는 혼자서 해야 하되 혼자서만 하기에는 버거운 일들이다.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가까이 사는 친구들이 극렬하게 필요한 때다. 나로 말하자면 엄마와 이모가 가까이 살고 계시어 전업주부임에도 육아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지척에 계신 시어머니도 주2회 아이와의 시간을 따로 내어 아이를 돌봐주셨기에, 인생 최대 암울한 시절을 최고의 조건과 최상의 상황에서 보낼 수 있었다. 아이들 둘 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늦게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아이들 엄마들을 만나게 된 건 큰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고, 좋은 언니, 좋은 동생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독서모임 언니들을 제외하고는 깊은 관계로까지 이어지진 못 했다.





나는, 사람이 스스로를 솔직하게 보여주고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축에 속한다. 7-8명 혹은 12명. 최대로 한다고 해도 20명을 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언제든 고등학교 친구를 만날 수 있고, 대학교 친구들은 동아리와 학과로 나누어 만나고 있기에, 새로운 관계, 새로운 친구는 내게 절실하지 않은 무엇이었다.





빈소에서 입관예배를 마치고 일어선 교회 식구들이 남편과 도련님, 어머님에게 위로 인사를 전했다. 그 다음은 내 차례다. 아직 말을 건네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는 한참 동안 눈물을 닦기에 바빴다. 긴 연휴의 가운데날, 비가 오는 오후에 이 분들은 남편을, 나를, 우리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위로 받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장례식장에서 알았다. 아버님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으셨던 한 달 동안 겉으로 보여지는, 혹은 예상되는 나의 어려움 이외에, 내가 겪었던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고단함을 그 분들은 “수고했다”는 말로 위로해 주셨다. 내 어려움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너무나도 뻔한 상황이라 말하기도 우스운 내 억울함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하나도 모르시는 그 분들이 건네는 “애썼다”, “고생했다”는 말이 내 마음의 짐을 걷어내 버렸다.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위로 받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이번에 배웠다.





좋아지지 않고 나빠지지도 않는 상황이 2주 이상 계속되고 있었다. 상의 끝에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학교캠프에 보내기로 했다. 큰아이는 평창으로, 작은 아이는 충북으로 2박 3일 일정으로 떠났는데, 아이들이 떠난 오후부터 아버님의 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수요일 오전. 담당교수는 수치로 확인되는 상황이 이렇게 나쁜대도 불구하고 아버님이 이렇게 버티시는게 놀랍다고 말했다. 작은 아이가 돌아오고, 큰아이가 돌아오고, 도련님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님의 유일한 혈육인 고모님의 찬송 소리를 들으며, 우리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님은 숨을 거두셨다. 하늘 나라, 예수님의 손을 잡고 천국으로 향하셨다.









아버님이 갑자기 쓰러지셨던 그 날부터 긴급 수술과 중환자실의 매일이 너무 급박해서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 말을 하지 못 했다.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됐다. 하지만, 중환자실 앞 긴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날들이 계속될 때면 나도 모르게 알라딘이 생각났고, 자꾸 생각나는 알라딘이 그리워 간단히 상황에 대한 글을 썼는데, 몇몇 분들이 위로의 댓글을 써주셨다. 서로의 핸드폰 번호를 알고, 사는 곳을 알고, 얼굴을 마주보고, 밥을 먹고, 하하호호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알라디너 뿐만 아니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글을 통해서, 알라딘을 통해 알게 된 분들의 댓글에도 깊은 위로를 받았다. 알라딘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어제는 도서관에 갔다. 두 개의 트럭에 새 책이 가득했고,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누구에게 해가 되지 않고, 누군가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 책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독감의 4월과 중환자실의 5월, 그리고 이별의 6월이 반이나 지나갔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늘이다.

오늘은 2019년 6월 1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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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6-15 공감 (39) 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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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놀기의 달인 - 녹색 도서를 찾아라 새창으로 보기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헤르베르트 시선》이반 부닌 《어두운 가로수 길》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욘 포세 《이름/기타맨》아우구스토 몬케로소 《검은 양과 또 다른 우화들》존 음비티 《아프리카 종교와 철학》녹색 도서는 예전 지만지고전 이 시리즈만 다 갖고 있어도 게임 아웃ㅎ;이 시리즈에서 보고 싶은 책이 있어도 중고도서로는 상태가 좋은 게 많이 없어 아쉬운 책들이 많다.요즘 나오는 새 디자인보다 이게 더 정이 많이 감.한 손에 쏙~ 느낌도 좋지.     &nbs... + 더보기
AgalmA 2018-03-19 공감 (34)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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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외로운 날 새창으로 보기











































낭만적 사랑의 허구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던 건 ‘고미숙’ 선생님이었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남녀간의 불꽃 튀는 찰나의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이상화되었는지 설명하셨는데, 사랑의 절대적 힘을 맹신하고 있던 당시에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내 사랑이 만들어진 것이었다니. 사랑이라는 허상에 대해 정희진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결핍이나 욕망에 대한 자기 판단, 회계(대차대조표), 자기 확신의 활동이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절대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받음은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기 혼란이다. 사랑은 내가 타인의 상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본인이 매력적이고 잘나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38쪽) 







사랑 없는 삶이 더 흔하더라도 혹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하기를, 사랑 받기를 원한다. 핑크빛 기류, 강렬한 눈맞춤, 격정적인 몸짓, 뜨거운 손길, 거부할 수 없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한다는 말하는 그의 자기 혼란에 근거하고 있다고 정희진은 말한다. 사랑한다 말하는 그도, 사랑받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나도, 오해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을 역사적 산물로 이해하는데  『낭만적 사랑과 사회』(재클린 살스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앤서니 기든스)이 도움이 될 거라 하시니, 찾아보아도 좋겠다. (민음사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감상과 생각을 모아둔 글이라 혹시나 내가 본 영화가 있나 목차를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나는 이미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싶다. 아는 영화가 없다. 나는 영화를 모르고 산다. 본 영화가 하나도 없는데, 정희진의 영화평을 읽는다. 꼼꼼히 읽는다. 제일 좋아하는 문장은 19쪽에 있다.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19쪽)







정희진은 영화를 ‘내 경험 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라고 말한다. 고급 도서관을 통째로 가진 기분이라 표현한다. 내게 영화는 그렇지 않은데, 화려한 영상과 웅장한 음향, 구성과 편집으로 숨겨놓은 단서를 찾아가는 작업이 내게는 무겁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면, 영화가 이렇듯 인생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타인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로 나를 이끌어준다면, 나는 영화를 보고 싶다. 왜냐하면 내게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나는, 외로움을 원한다.





아침에는 『랩걸』을 마쳤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과학자이자 아들을 위해 호랑이로 변신하는 약을 제조하는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오후에는 『제2의 성』을 읽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어 깜짝 놀란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읽었다. 마칠 것을 알기에, 마무리해야 또 새로 시작할 것을 알기에, 차분히 한 장, 또 한 장을 넘겼다.



저녁에는 아침에 주문해 오후에 배송된 『혼자서 본 영화』를 읽었다. 내게 정희진은 언제나 정/희/진/이기에 단어를 딱 하나씩만 따라가며 천천히 읽었다.





충분히 외로운 날이었다.

후회 없이, 충분히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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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2-23 공감 (32)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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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최소한의 윤리성 새창으로 보기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는 저자가 빨래를 하지 않는 남편에게 화가 나서 빨래를 날려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빨래를 날려버린 적은 없지만 설거지와 청소 요리 육아를 둘러싼 시시콜콜하고 애매모호한 일상의 일들 사이에서 소리지를까 화낼까 그냥 내가 할까 고민하기 일쑤였다. 그런 것들에 관해 불만을 말할라치면 남편은 말없이 그냥 듣고만 있는 거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하면, 남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성들은 해결해주기보다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더 원한다며?”



왜 우리는 원하는 걸 직접 물어보기보다 이런 주워들은 이데올로기를 더 믿을가? 여성은 이럴 것이다, 남성은 이럴 것이다라는 납작한 관념에 의존하는 걸까?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그 이론들은 정말 과학적인가? 과학적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볼 수 있다. 이 책들의 원류는 아마도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정도가 아닐가? 가장 흔한 이야기로는, 여성은 관계맺기를 원하고 남성은 해결하기를 원한다는 것. 그래서 여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원하고 남성은 헤결해준다는 것이다. 남자는 씨를 많이 퍼트리는 것이 진화론적으로 이득이기 때문에 바람둥이로 진화했고, 여성은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진화론적으로 이득이 되었다는 것들이다. 심리학자나 자기계발 전문가, 생물학자 등 이른바 과학자들이 이 책을 인용하며 남녀가 심리적, 감정적, 성적으로 엄청나게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며, 남녀 관계 문제들은 서로의 성 특이적인 욕구, 강점, 속성, 혼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는 신념을 고수해왔다. 그것들은 모두 유전적으로 진화한 산물이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며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 개인이 태어나서 유년기를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겪는 경험과 성장의 역사 등은 진화심리학자들에게 철저히 배제되고, 이때 남성과 남성간의 차이, 여성과 여성 간의 차이는 남성과 여성간의 차이보다 훨씬 더 멀어진다. 말하고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언어를 쓰면서 삶을 영위해나가는 인간종이 암컷은 침팬지나 보노보의 암컷과 더 비슷할까? 인간종인 남성과 더 비슷할까? 그런데도 진화생물학은 언제나 침팬지나 보노보를 예로 들며 동물학적 생식이론에 여성에 삶을 가두고 보편과 객관이라는 허울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이 책에서는 남녀 관계에 관한 진화심리학이 성 고정관념을 과학적 타당성이 있다 주장하며 대중에게 납득시키려 한다는 점을 폭로하며 이 모든 것이 젠더프로파일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단지 생기를 앗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얻어 가기를 바라는 것을 딱 하나만 고른다면, 그것은 젠더 프로파일링이 관계를 다루는 폭력적인 방식임을 아는 것이다. 우선 무엇이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만드는가에 시선을 고정할수록, 우리는 사랑한다고 고백한 상대방을 포함한 타인들의 특이성을 볼 수 없게 된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타인들이 품고 있는 특이한 의심, 욕망, 고난, 불안, 불안정, 혼란, 갈망을 덮어버리고, 그럼으로써 그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어렵게 만든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남성과 여성을 파넹 박힌 틀에 끼워 맞추기 때문에, 우리는 좁은 시야를 통해 사람들을 판단하려는 유혹에 빠지고, 그 결과 어떤 한 사람이 남성 또는 여성 외의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천 가지 이상의 방식을 놓치게 된다.” (p.283-284)





그러면 진화생물학자들은 왜 젠더에 관련한 사항만 나오면 이렇게 덜떨어진 과학자가 되어 한심한 소리만 늘어놓는걸까? 그건 그들이 그런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으 마지막장이 특히 재미있었는데. 그 장에서는 젠더파일링이 이성애 기반의 정상가족 성역할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충실하게 복무하는지 보여준다. 그것이 결국 남성우월주의의 가부장제 사회를 지지하며, 이를 곤고히 하기 위한 학문적 수사임을 밝혀낸다. 여성이 반복해서 당하는 성차별은 그들의 이론이 과학이라는 미명을 등에 업은 채 큰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이 더 평등한 삶을 원할수록 성에 대한 불평등적인 시각을 장려한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이 “빠르게 변하는 젠더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하며 남성과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모호한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답을 제공한다.” (p.137)라고 말한다. 인간 삶의 다채로운 모습은 생물학으로 환원되고 우리가 노력하고 공부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진화생물학이라는 이름으로 대화불가능성에 막혀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진화생물학을 현대의 성서처럼 받아들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화성남-금성녀’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관계 문제에 대한 즉효약을 제공한다. 남녀 차이가 관계 문제를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할 때, 관계 맺기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긴장과 관련한 온갖 종류의 다른 원인들을 무시할 수 수 잇다. 남녀가 다른 것이 문제라고 추정하느 것은, 관계 맺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복잡한 일임을 인정하는 것보다 쉽다“





즉 사회가 다변화되고 커뮤니케이션이 복잡해지고, 이전과 다른 삶의 양식들이 많이 나타날수록 진화심리학이라는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사회적 클리셰를 팔고 있는“ 상황이 빈번해지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과 동성애 운동이 점점 늘어나는 시기에 진화생물학 모델에 대한 과학적 집착이 심해진 때가 시기적으로 맞물려 잇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젠더 프로파일링에서, 깊이 뿌리박힌 관계 패턴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적합한 조건들을 결정하는 집단적인 문화규범들과 섞여 들어간다. 이러한 사회적 길들이기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권장된다. 우리 사회의 그 누구도 행복이 인간의 존재 목표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행복이라 불리는 이데올로기의 초상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이 사회에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결혼’이다. 사라 아메드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행복의 각본’은 천편일률적으로 이성애적 욕망의 정점인 결혼을 지향하느 젠더화된 각본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의 베이스캠프는 진화심리학자이다. 진화심리학이 여성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 자식의 아버지가 되어줄 좋은 남자를 만나 조신하게 평생 살면서 그가 바람을 피는 것을 남성의 본성이라고 이해하며 살라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은 우리가 정말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이 말하는 ‘행복’한 관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족이 정말 행복한 것인지,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관계에서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개인의 좋은 삶에 대한 상상력을 더 없애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관계를 더 얄팍하게 만든다.







앤서니 기든스는 <성 사랑 에로시티즘>에서 섹슈얼리티를 서구 사회에서의 ‘현대성(modernity)’의 전개와 ‘공/사(public/private) 영역분리’라는 구조적 변동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현대 사회에서 성은 더 이상 단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결정하고 선택하는 문제’로 변해가고 있다며, 인간관계 역시 관습이나 전통이 아닌, 각각의 개인이 그 관계에 부여하는 의미와 관계의 ‘내재적 속성’에 따라 그 형태와 존속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또한 현대사회는 합리적 이성에 따라 조직됨으로써 감정의 문제를 사적영역으로 추방하였다. 기든스는 오늘날 개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불거지는 여러 가지 갈등들이 공적 영역과 대비되는- 이제껏 베일에 가려있던 친밀성의 영역- 이른바 사적영역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공/사 분리에 의해 친밀성 영역의 전문가가 되어버린 여성들이 이 혁명의 담당자로 부상하고 있다.





진화심리학은 이 친밀성영역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교과서와 같은 것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행히 젠더와 성에 대한 전통적이 이상들이 너무나 지루하고 전제적이라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 관계가의 다양성을 인정할수록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계가 더욱 쉬워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통이라는 안전망 없이 관계의 매개 변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가? 진화생물학처럼 원래 그런 존재하면서 덮어놓고 치워버려? 전통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항상 제로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이는 그만큼 우리가 관계를 맺어가기 어려운 존재임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어자피 우리는 타인을 다 알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 알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즉 알 수 없는 타인을 알아감으로서 고통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어떤 과학적 이론이나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배운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인정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사랑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 ‘성숙한‘ 사랑은 연애에서 환상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냉철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현실을 겨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것은 관계 맺기라는 양가성의 땅으로 용기 있게 들어가는 문제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상대방을 다 알지 못하고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변화의 여지가 생긴다.“(p.291)



기든스는 ’생활정치‘를 이야기한다. 섹슈얼리티 역시 기본적으로 나와 타자의 관계, 곧 인간관계의 문제이고, 이제껏 당연시해왔던 전통과 관습이 아닌 그 관계가 갖는 의미와 지속여부에 따른 지속적 선택으로 관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과 관습에 관계를 의지해오던 이들에게는 충분히 힘들고 괴로운 과정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추세의 확장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대세이고 이런 '일상생활의 민주화'로 인해 현대의 삶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모든 관계의 최소한의 윤리성은 여기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라고 말하는 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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