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는 소녀상이 왔다. 그 곳에 모셔 놓았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말라고 메스콤에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개인의 공원에서 표명을 했다. 한국인의 진정한 염원 보다 일본인이 내미는 503이 협약한 내용이 현실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이 상황이 싫다면 소녀상을 이전하시라고 매우 이성적으로 제의를 했었다.따라서 개인공원의 이사장에게 그 어떤 잘못을 물을 수는 없다. 잘못은 한국인에게 있다.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여 독일사회에 이 문제를 알리고 토론에 올려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한국인이 정녕 해야 할 일이었다. 한 시가 급한 일이었다. 그러나 교민들은 두 가지 의견으로 분산되었다.
심지어 공원에 다녀가신 안점순 할머님께서 그 당시에는 비교적 정정하셨는데 소녀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국에서 전해 주었다. 누가 어떻게 설명을 했던 것인가? 비문도 없이, 안내장 조차 없이 외부에 알리지 않으며 개인공원에 그냥 놓아두는 것을 원하셨다고 당당하게 내밀었다. 얼마나 신이 났던지 그 뜻을 거역하는 자는 없으리라고 의기 양양했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이런 인간들과 함께 일을 도모해 왔던 나의 모든 시간들이 그대로 부서져내렸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할머님께 말씀 드렸단 말인가? 누가 어떻게? 독일에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하여 성의를 보였다고 건네준 유리에 새긴 감사패도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님의 간절한 소원은 전 세계에 이 살인적인 일을 알리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어 저 승에 가더라도 함께 끔찍했던 지난날의 소녀들을 만나면 최소한 억울함을 풀어헤쳤노라고 뜨거운 눈물로 끌어안고 싶으셨을 것이다 이제 할머님은 돌아가셨다.
어떻게 한국인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가? '소녀상을 다른 곳에 옮겨도 지금 처럼 똑 같은 일본의 압박이 올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 곳에 소리 없이 놓아두면 언젠가 이 문제가 해결이 된 후에 역사의 한 장면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죽은 역사*를 만들자고 성금을 내어 소녀상을 만들었던가?
당장 다른 곳으로 옮겨서 사회의 이목을 집중 시켜야하며 그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마치 할머니의 뜻을 거역하는 불효막심한 그룹으로 치부하는 웃을 수도 없는 한심한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 무엇을 누가? 할머님께 말씀드렸던 것일까?.....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리라 ! 할머님이 진상을 알으셨더라면 할머님이 진상을 알으셨더라면. . . . . . . . . 종교나 신앙으로 장사를 하는, 사업을 하는 순수하지 못한 이들은 제말 역사를 운운하지 마라 . . . . . 어리석은 자는 같은 수준의 사람을 긁어모으며 집단의 힘으로 현자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기나긴 어제의 역사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 . 할머님, 부디 편안한 곳에 ......
박유하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호사카 교수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인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교수가 일본의 침략전쟁이 본격화하던 1937∼1945년 일본에서 만들어진 위안부 관련 문서 80건을 번역하고 그 의미를 분석한 책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을 출간했다. 호사카 교수는 10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가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침략전쟁 속 위안부 문제를 논리화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라며 "지금까지 나온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과거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가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결론적으로 위안부는 성노예였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는 그 범죄성을 우선 인정하고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우선 역사적인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게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인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교수가 일본의 침략전쟁이 본격화하던 1937∼1945년 일본에서 만들어진 위안부 관련 문서 80건을 번역하고 그 의미를 분석한 책 '일본의 위안부 문제 증거자료집 1'을 출간했다.
호사카 교수는 10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가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침략전쟁 속 위안부 문제를 논리화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라며 "지금까지 나온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과거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가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례 중에서 호사카 교수는 1940년 10월 11일 다카모리(高森)부대가 경비구역에서 활동하는 지방상인의 영업에 관한 규정이 담긴 특수위안업무 규정 문건을 소개했다.
이 문건에는 "위안소 위안부는 황군(일본군) 100명에 1명꼴"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위안부 1명이 100명의 병사를 상대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며 "위안부들은 병사들의 성적 도구, 성노예였다"고 호사카 교수는 지적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군을 제외한 사람을 손님으로 맞이해서는 안된다는 규정과 함께 위안부들이 산책할 수 있는 구역을 지정해 신체의 자유를 빼앗았다는 내용도 이 문건에 담겨 있었다.
또 호사카 교수는 일본군이 업자를 고용해 '야전병원의 간호사로 일한다', '군 식당의 종업원이 된다'는 식으로 조선 여성들을 속였고 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넘어갈 때에는 신분확인절차를 간소화시켰다고 주장했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은 신분증명서를 발행해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척했지만 그 방법은 생략되거나 종군간호사·야전병원 잡역·군식당 종업원 등 군 관계자라는 신분으로 속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강제 매춘 자체가 군의 공무였다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 자행됐다"며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책 출간을 준비하며 지난해 9월 세종대에서 중간 발표회 성격의 기자회견을 열었던 호사카 교수는 회견 직후 윤모 씨로부터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 "테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는 협박 메일을 받았다고 전했다.
호사카 교수는 해당 메일을 보낸 사람을 협박과 정보통신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서울동부지검에 고소했지만,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기소중지 처분이 내려졌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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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집 전시회
정준호 기자 승인 2018.04.10
지난달 안점순 할머니의 별세로 올해만 벌써 세 분의 할머니들이 영면에 들면서 생존해 있는 29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마음은 더 애타기만 합니다. 할머니들은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영화와 그림으로 표현해 상영회를 개최했다고 하는데요. 정준호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
성동구청 대회의실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를 다룬 영화 <에움길> 상영회가 열렸습니다.
에움길은 순 우리말로 굽은 길, 멀리 둘러가는 길을 뜻하는데,
영화 <에움길> 이승현 감독은 해방 73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치유되지 못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할머니들을 ‘성노예’라는 단편적인 시각이 아닌 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는 제작의도를 밝혔습니다.
영화에서는 할머니들의 실생활을 그대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작업 중인 할머니가 그림위에 앉은 파리를 생각 없이 내리친 할머니와 투닥 거리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냅니다.
현장음 -16초
영화 상영회 뿐 아니라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 전시회도 동시에 진행됐습니다.
과거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가는 모습과 일본이 사실을 은폐하는 행위, 일본정부에 진상규명과 사죄배상을 요구하는 할머니들의 모습 등을 사실적으로 그려 전시했습니다.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29명의 평균연령이 91세라며 문제해결을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sync- 안신권 / 나눔의집 소장 ( 가해국 일본이 지금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똑같은 전쟁범죄인 홀로코스트 피해자 문제는 전 세계인이 다 아는데 왜 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대한 문제는 모르느냐 그래서 우리가 금년에 국내외 전시회를 준비했습니다. )
영화와 전시회를 관람한 학생들은 다시는 이런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다며 할머니들의 아픔에 공감했습니다.
INT- 허유미 / 마장중학교 ( 그림에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많이 마음이 아팠고요. 일본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빨리 사과를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영화 <에움길>은 오는 11일 경기도 광주 동원대학교와 5월 23일 서울 한양대학교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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