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주의 때문에 타락했다”
중앙일보
입력 2018.05.11 00:15
서경호 기자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한국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윤소영 한신대 교수
윤소영 한신대 교수가 9일 서울 사당동 개인연구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경제학자 고(故) 정운영은 생전에 윤 교수에 대해 ’민중민주주의 논쟁을 주도했으며 아마도 우리 사회과학계 최초로 알튀세르의 이론을 본격 소개한 ‘벤처 학문의 첨단주자라고 평가한 바 있다. 윤 교수는 현재 대학과 연구실을 오갈 뿐, 다른 사회활동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명함도 파지 않고, 휴대폰도 쓰지 않고 있었다. [최정동 기자]
지난 5월 5일은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생일이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세계 이곳저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마르크스가 태어난 독일 트리어시는 0유로짜리 마르크스 탄생 기념지폐를 3유로에 파는 상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윤소영(64)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를 9일 서울 사당동 과천연구실에서 만났다. 1994년 과천에서 문을 연 연구실은 이듬해 사당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이름은 여전히 ‘과천연구실’이다. 과천은 ‘과학과 실천’에서 따온 말이기도 했다. 한때 20~30명에 달했던 연구실 멤버는 지금 7~8명으로 줄었지만 ‘공감개론신서’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책을 내고 있었다.
올해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다. 관련 기사도 쏟아졌는데 대체로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 비판으로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많았다.“나도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마르크스 이론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마르크스를 계승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있느냐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외국의 마르크스 관련 학술대회 참석자는 60대, 70대 노인이 대부분이다. 청년들이 없다. 마르크스주의가 옳다고 해도 실천도, 전수도 못하는 위기 상황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실 타당성을 강조하는 게 청년 세대의 감수성과 맞지 않아서다. 사회운동을 하거나 사회 비판적인 젊은이들도 마르크스가 아닌 다른 데서 근거를 찾으려 한다. 30여 년 전인 1983년은 마르크스 사망 100주년이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학술대회가 많이 열렸고 관심도 뜨거웠다.”
마르크스주의의 퇴조는 마르크스라는 상품에 대한 현실적 평가가 아닐지.“90년대 초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타개하자는 취지에서 경제학자 정운영 선생 등과 계간지 『이론』을 냈는데 판매부수가 1만 부를 넘을 정도로 인기였다. 이런 사실을 교류하던 외국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전했더니 "별나라 얘기”라고 놀라워했다. 서구에선 80년대 중후반부터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고 있었다. 우리와 10년 정도 시차가 있었던 거다. 80년대는 20여년 간 축적된 운동과 연구의 성과가 총정리되는 ‘마지막 잔치’였는데 우리는 그게 출발점이라고 오해를 한 거다. 돌이켜보면 근거 없는 낙관주의 같은 게 있었다.”
중국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마르크스가 태어난 독일 트리어시에 동상을 세웠다. ‘시진핑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의 적통을 잇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시진핑 사상이 21세기판 마르크스주의라는 건 처참한 농담이다. 중국도 러시아도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판·소련판 10월 유신’이다. 김정은의 3대 세습으로 백두혈통이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다는 것도 처참한 얘기다. 군주정이 부활한 것이다. 문제는 시진핑·푸틴·김정은이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현실이다. 일반 대중이 보기엔 그게 사회주의인 거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 어떻게 축제가 될 수 있겠나.”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한국사회를 독점 강화-종속 심화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신식국독자)론으로 분석했다. 지금도 유효한가.“80년대 이론 작업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신식국독자론을 제기할 당시는 한국 경제가 86~88년 3저 호황을 누리면서 학계·운동권에서 자립화·개량화론이 나올 때였다. 한국 경제가 종속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립 경제로 가고 근본적인 변혁이 아니라 개량으로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쟁점은 이미 끝났다. 종속 심화와 독점 강화의 결과가 97년 외환위기였다는 점에서 당시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자립화·개량화론이 맞았다면 97~98년의 엄청난 위기는 올 수 없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엔 상황이 다르다. 신식국독자나 독점 강화-종속 심화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윤 교수가 신식국독자론을 폐기했다는 비판도 있던데.“폐기했다기보다 ‘독점’이니 ‘신식민지’라는 말이 아닌 자본주의에 대한 일반론으로도 충분히 현실을 설명할 수 있어서다. 예를 들어 삼성바이오로직스 같은 이슈나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삼성과 현대차 지배구조를 흔드는 현실을 신식국독자론으로 어떻게 분석하겠나.”
지난해 출간한 『위기와 비판』에서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주의 때문에 타락했다”고 썼다. 대기업과 공공부문 중심의 양대 노총에 대한 비판으로 들린다.“노동자주의는 노동자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다. 여성주의가 여성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주의가 아닌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주의가 아니다. 노동자주의나 여성주의는 지대추구적 집단 이기주의일 따름이다. 얼마 전까지는 한국노총이든 민주노총이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조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책도 쓰고 공적 발언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노동자들도 자기 행복이나 안위가 1차적인 관심이지 사회변화나 미래세대의 복지에는 관심 없다.”
윤 교수는 이날 “처참하다”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는 “현재는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며 “노동자나 청년들에게 마르크스가 옳다고 아무리 얘기해 봐야 지금은 꼰대 취급밖에 못 받는다”고 했다. 윤 교수는 행도(行道)에서 전도(傳道)로 방향을 전환한 말년의 공자 얘기를 꺼냈다. 그는 “도(道)를 행할 수 없지만 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사라지지 않도록 도를 지키고 전해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의 마르크스 연구를 정리하고 후세에게 전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유학·역사·문학을 중심으로 공부를 새로 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문학의 경우 소설가 이문열의 작품을 다시 읽고 있다.
의외다. 과거 운동권에선 이문열 작가의 소설을 반공 보수주의로 평가했는데.“이문열의 『영웅시대』를 반공소설로 보지 않는다. 작가의 부친이 모델인 소설 속 주인공은 끝까지 공산주의에서 전향하지 않는다. 해방 정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박 겉핥기식 얼치기로 받아들인 지식인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경고한 것이다. 소설이 나온 게 1984년이다. 예술가의 본능적 감수성으로 80년대를 미리 걱정한 게 아닌가 싶다. 소설에 나온 지식인의 고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박완서 선생의 소설도 읽고 있다.”
『위기와 비판』과 2016년 출간한 『한국의 불행: 한국 현대지식인의 역사』에서도 지식인 실명 비판을 했다.“마르크스 이론은 문제없다. 이걸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지식인이나 현실에 적용하겠다는 활동가들의 문제다. 마르크스를 같이 공부했는데 세월이 지나 달라진 사람을 보면서 ‘왜 저렇게 살까’ 의아했다.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김문수 선배가 좋은 예다. 혈연(血緣)과 지연(地緣), 즉 지식인의 집안과 고향을 넣으면 해석되는 게 많다. 김문수 선배는 경북 영천이 고향이다. 보수적인 지역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문열을 이해하기 위해 올 여름 그의 고향 경북 영양에 내려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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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리영희 교수, 백낙청 교수, 김상곤 교육부총리 등 진보 출신 인사들에 대한 실명 비판이 많던데. 강준만 교수가 과거 『인물과 사상』에서 표방했던 실명 비판 못지 않다.“특정인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고 우리 세대의 자기비판이라고 이해해달라. 우리는 이런 걸 놓쳤으니 다음 세대는 그러지 말라는 뜻이다. 할 말은 해야겠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헤겔의 경구를 인용하면서 첫 번째는 비극이고 두 번째는 소극(笑劇)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위기와 비판』에서 역사는 세 번째로 반복될 수 있는데 그건 바로 ‘사기극’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문재인 정부의 지난 1년이 왜 사기극인가.“노무현식 인민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그런 인민주의를 ‘정치가적 포퓰리즘’이라고 부른다. 정치를 피아(彼我)로 나눠 적대시하고 의회정치를 무시하고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쇼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경제학적 사기다. 기존의 성장론과 대비되는 반(反)경제학이다. 『시장과 전장』에서 박경리 선생이 갈파했듯이, 얼치기 지식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바보가 되든지 사기꾼이 되든지. 지식인은 바보 노릇 할 수는 없으니 사기꾼이 되는 거다.”
윤 교수의 과천연구실에서 펴낸 수십 권의 책 앞표지에는 알튀세가 직접 그린 유명한 오리 그림이 실려 있다. 알튀세의 자서전 제목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글씨와 함께. 윤 교수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알튀세의 말을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미래는 온다, 앞으로 올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새무얼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끝내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윤 교수는 “내 생전에 좋은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윤소영 교수는 …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복중·고교를 거쳐 73년 서울대 상대(경제학과)에 수석 입학, 수석 졸업을 했다. 주류 경제학을 공부하다 현대경제학의 이론적 결함을 마르크스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박사 논문을 썼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건 그가 처음이었다. 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성격을 진단하는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민중민주(PD) 진영의 핵심 논객이었다. 무크지 『현실과 과학』을 발행하며 독점 강화 종속 심화를 내용으로 하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펼쳤다. 84년부터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내년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 94년 과천연구실을 설립해 마르크스주의 일반화를 위한 중장기적 이론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
※이 취재에는 황병준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서경호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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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m3**** 2018.05.22 14:02
그런데 그 분께서는 촛불을 들고 모인 광장의 시민들을 극도로 훈련된 북한의 매스퍼포먼스 정도로 묘사하더군. 세월 앞에 뇌가 온전할리 있겠나. 어떤 사회구성체가 적절한 규정인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강바닥 파헤쳐 치적 쌓기 바쁜 놈이나 이 시대에 새마을 운동 운운하던 년은 아니어야지. 거창한 미래를 그릴 필요도 없고, 현실을 극단적으로 규정해 갈 필요도 모르겠어. 어차피 친일파도 극복 못한 떠중이들이 조금씩 달라져 보려는 걸음마 수준이 고작일 테니... 격하게 바뀔 게 있을 턱 없는 세상으로 본다. 촛불 조차도 격하진 않았잖아? 그냥 상식의 수순대로 흘러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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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ub**** 2018.05.11 23:22
헤겔의 말대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니 노정권의 실패한 역사를 문정권이 반복하네요. 같은 일을 반복하며 다른 기대를 갖는것이 바보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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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11**** 2018.05.11 18:02
끝까지 주자학적 세계관에 목매여 조선을 세계 유래없는 노비제 국가로 만들고 백성을 철저히 유린했던 ×선비가 생각나네요. 입바른 소리도 왠지 측은합니다. 변교수 제자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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