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쟁
By demitrio | 201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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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나 같은 비전문가는 문제가 되는 역사교과서를 봐도 어느 부분이 식민사관에 젖은 부분인지 정확하게 도려내지 못한다. 문제가 된 교학사 교과서라 하더라도 일반인들에게 이상한 점을 지적하라면 아마 한개도 지적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내용이 ‘독도는 일본땅이다’, ‘일제가 고맙게도 우리를 근대화로 이끌었다’,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임나가 있었다’와 같이 명확하게 지적될 수 있을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굳은땅에 스며든 빗물처럼 교묘하고 섬세하게 무의식 중 그것을 항상 말하고 지나친다. 그것도 아닌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참 이 싸움이 힘든것 같다.
이번 이덕일씨의 소송건도 마찬가지.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를 부정하는 대전제하에 임나란 단어만은 인정하고, 그 영역을 한반도 남부전체로 확장시킨 지도(일본 극우파 교과서의 지도)를 그대로 인용하고, 임나의 지배권이 백제에 있었는데, 백제는 일본에 조공하는 관계인 것 처럼 주장하는 모순을 보였는데 이는 하도 교묘해서 이덕일씨같은 사람이 전체 논리흐름을 지적해주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 버릴수도 있는 문제다. 결국 그렇게되면 김현구 교수는 식민사학을 반대하는 학자로 남는것이다.
이건 마치 피아구별이 안되는 첩보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보스가 사실은 악당의 우두머리였음을 최종단계에가서 알게되는 형국인것과 같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덕일씨같은 비주류 재야사학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집단의 말실수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어제 잠깐 얘기한대로 친일파들을 프랑스방식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사례는 말을 너무 심하게 한 케이스다. 또한 식민사관을 옹호하는(내 생각엔 식민사관인지 구분도 못하는 처지에서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본다) 집단과 포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페이스에 이끌려 막말을 주고 받는 모습은 당연히 그 자체로 좋지않으며 결국 본질은 뒤로 한채 자신들이 논쟁에서 내뱉은 단어에 꼬투리를 잡혀 그것으로 지루한 공방을 이어가는 것으로 그들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린 꼴이다.
지금은 한마디로 식민사관을 주제로 내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그것도 현재의 정치와 연결되어 말이다. 새누리당 김무성씨 아버지에 대한 친일파 논란도 볼쌍사나운 모습으로 양쪽 모두 진흙탕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잠깐 스쳐지나간 기억이지만 이에 대해 누군가 민족문제연구소에 원군을 요청했었는데 민족문제연구소측은 아버지가 친일파란 이유로 그 후손들을 평가하는것은 기본적으로 연좌제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 하여 거절한 것으로 들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태도라 생각한다. (물론 그 연구소도 여러가지 문제를 만들어 낸 전력이 있지만..)
상대방을 잡기 위해 굳이 진흙탕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신속하게 마무리지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건 역시 마찬가지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오히려 지금은 진보인줄 알았던 사람들이 박교수의 우군으로 등판을 자청하는 양상이라 양측의 의견을 다 읽어보면 진짜 어떤 진영이 옳은 얘기를 하는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역사앞에선 피아가 있을 수 없다. 냉정하게 진실을 증명하는 자가 옳은 것이다. 설사 마음에 안드는자라도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해석하는자에 따라 최대의 명분을 제공하는 무기가 된다.아래 링크의 자료를 한번 읽어보시라 http://www.factoll.com/page/news_view.php?Num=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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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그런데 왜가 이 무렵 신라를 공격한 기사는 삼국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38년(393)에는 "5월에 왜인이 금성을 에워싸 5일 동안 풀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장수가 나가서 싸우기를 청하자 내물왕은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에 있으므로 그 봉을 당하기 어렵다."하고. 이에 성문을 굳게 닫았는데, 왜군이 물러가자 왕이 기병과 보병을 보내 습격했다는 내용이다. 이 때는 문제의 신묘년 2년 후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왜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했다고 기록한 이 무렵 삼국사기도 왜가 신라의 금성, 즉 서울을 포위하고 위협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일본사 연구자들은 신묘년. 즉 4세기 후반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4세기 후반에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정도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연구 결과다. 이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현해탄을 건너 신라를 공격할 만한 능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들에 나오는 왜의 실체는 무엇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왜는 한반도 정세에 여러 차례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진지를 인질로 보냈는 기사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혼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한반도에 있었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싸웠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이덕일, 교양한국사1, 2005, 휴머니스트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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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김현구 교수 등이 박살낸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살린건 이덕일이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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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다음 해인 영락 10년(400)광개토대왕 비문 기사는 광개토대왕이 대규모의 군사를 보내 왜군을 물리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는 내물왕의 지원 요청에 따라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고구려군에 쫓긴 왜군이 도망간 지역이 임나가라인 점은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당시 임나가라가 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보낸 군사가 무려 5만에 달하는 것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군사는 보내야 물리칠 수 있었던 강적이 왜였음을 말해준다.…… 고구려에 맞서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왜국은, 이렇듯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400년에 남하한 고구려군에 타격을 받은 후 진열을 재정비해 404년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선제 공격하다가 또 다시 패배를 당했다. 두 번의 걸친 패배로 왜국의 국력은 약화되지만 여전히 신라왕이 선왕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405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왕 4년조는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 에서 이를 요격하여 두 번 싸워 파 하고 300여 성을 살획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고구려 대방 지역을 공격한 왜가 1년 후에는 다시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이 약하되어 가던 왜는 5세기 경 일본열도로 이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이 무렵부터 일본 나라 지역에 거대한 고분들이 조성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열도로 이주하던 왜는 500년 무렵 그 중심 세력의 대부분이 이주를 마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500년(신라 소지왕 22년) 3월 장봉진을 공격한 왜인을 끝으로 삼국사기는 왜인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이덕일, 교양한국사1, 2005, 휴머니스트 22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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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단순히 지도에 임나가 나온다고 해서 임나일본부 주장한다고 볼 수는 없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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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아.....facttoll기사일뿐 여긴 개인 블로그였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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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오 아닙니다.다만 양쪽의 어조가 너무 흥분일색인지라 저는 그게 좀 불편할뿐입니다.저야 뭐 아마추어지만 역사는냉랭하게얘기해야 맞는것 같은데 말이죠 어쨋든 저도 어디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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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임나라는 단어 인정타령 하시려면
고구려군에 쫓긴 왜군이 도망간 지역이 임나가라인 점은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당시 임나가라가 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이덕일의 이 말이나 좀 신경쓰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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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아래 상세한 자료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시야를 넓혀주셨군요. 결국 장세윤님의 결론은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교묘하게 부각시고 있는 장본인은 이덕일씨란 얘기죠?
그럼 이덕일씨가 문제삼고 있는 김현구 교수의 지도문제는 그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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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http://orumi.egloos.com/63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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