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최진석(저자) | 위즈덤하우스 | 2015-03-12
정가 14,800원
반양장본 | 308쪽 | 215*148mm | 520g | ISBN : 9788960867970
"노자를 오늘, 다시 불러내야만 하는 까닭"
공자와 노자는 동양문화권에서 가장 자주 호명되는 철학자다. 게다가 둘은 대척점에 놓여 비교되기 일쑤다. 보통 공자는 인위에 기반한 문화론자로, 노자는 무위에 기반한 자연론자로 해석되는데, 이런 해석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도 끝이 없다. 두 철학자가 살던 시대가 오늘과 다르기에 해석이 분분할 테고, 두 철학자가 마주하고 해결하려던 문제는 여전하기에 끊임없이 이름이 불릴 텐데, 철학자 최진석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왜 굳이 노자를 선택했고, 그 사상을 어떻게 해석한 걸까.
최진석은 우선 동양사상의 큰 줄기를 짚어가며 노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무언가를 하자고 주장한 게 아니라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며 그것을 하자고 주장했다는 말인데, 이념보다 일상에서의 삶에 주목하고, 개인을 구조 속에 통합하는 조직보다는 자발적 개인의 자율적 통합을 강조하는 노자의 사상이 각자의 특성보다 표준화를, 구체적 실재보다 이념을 중시한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넘어설 방법이라 해석한다. 거대 국가 시스템으로 이행하던 노자 시대와 거대 국가 시스템이 한계에 이른 오늘 시대가 맞닿아, 노자를 불러내야만 했다는 말이다. 이런 시선은 당연히 사회 시스템에 그치지 않고 개인으로 연결되는데, 자신을 시스템의 일원, 즉 일반명사로 방치하지 말고, 개별자의 자발성이 발휘되는 고유명사로 살려내라는 결론에 이른다. 최진석의 적극적인 해석 속에서 비로소 노자 철학이 오늘의 철학으로, 노자가 현대 철학자로 되살아나는 듯하다.
- 인문 MD 박태근 (2015.03.10)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단순히 노자 철학을 소개하거나 《도덕경》을 해설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노자와 《도덕경》을 화두로 삼아, 인류의 생각과 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여 인생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 개인의 삶을 바꾸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변혁하는 데 노자의 사상이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도 설명한다. 노자의 시대적 맞수 공자의 사상과 치밀하게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헤겔·다윈·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 등 근현대 서구의 사상가들과도 전방위적으로 견주며 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저자의 지적 모험은 인문학적 생각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그 길을 바로 ‘도道’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만의 능력이란 믿음의 힘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말해요. 인간은 이제 천명을 따르지 않고 도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도의 출현은 바로 중국 문명에서 최초로 터져 나온 인간의 독립선언이에요. 도의 출현 이전에 중국인이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개의 중심축은 ‘천’과 ‘덕’이었습니다. 도가 출현하고 나자 이제 중국인들은 세계와 관계하고 세계를 해석하며 또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새롭게 갖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도와 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道德’은 바로 이 도와 덕을 붙인 말이지요.---71쪽
노자의 꿈은 인간의 주관성을 완전히 탈피해 자연의 객관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가치’의 세계와 결별하고, 자연이라고 하는 ‘사실’의 세계에서 인간질서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것이죠. 자연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 혹은 모방해서 살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의 질서는 누구나 관찰할 수 있지요. 또 누구에게나 똑같은 모습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러니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투명하고 어디에나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성을 가지게 되겠지요. 천명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객관성?보편성?투명성은 이렇게 확보되었습니다.---87쪽
노자는 거대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작은 나라 시스템인 지방자치제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지방분권이나 지방자치를 하려면 하나의 표준으로 전체를 묶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분리된 곳들 각자에 맞는 다양한 기준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 멀리서 표준으로 기능하는 보편적 이념을 버리고 바로 여기에 있는 구체적인 것들의 자율성을 취하는 방식, 즉 ‘거피취차去彼取此’가 더 적합한 방식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습니다.---160쪽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어때야 할까요? 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지知’의 방법이 아니라 ‘명明’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해와의 관계 속에서, 해를 달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지요. 해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은 해와 달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요. 분리된 것으로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지’라고 합니다. 반면 해와 달을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하는 것을 ‘명’이라고 하는데, 달과 해가 존재적으로 따로따로 분리된 두 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한 벌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죠. 해와 달을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통찰입니다.---194쪽
대립면의 긴장 상태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과감하지 않으며 광신狂信하지 않아요. 광신은 대개 협소한 믿음에서 옵니다. 앞서 말한 “저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자들로 하여금 과감하게 무엇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한다[使夫智者不敢爲也]”는 말은 사람을 광신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광신하는 사람은 대개 헛똑똑이라는 말입니다. 충혈된 눈으로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 굵은 팔뚝을 휘저으며 주장하는 사람, 깃발을 들고 소리치는 사람, 머리띠를 하고 내달리는 사람, 서둘러 충고하려 덤비는 사람이 대개 헛똑똑이라는 것입니다. 헛똑똑이들이 판치는 세상은 거칠고 갈등이 심하며 선명성 경쟁이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시 말해 대립면의 경계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진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214쪽
무위란 바로 이런 이념이나 기준과 같은 관념의 구조물에 수동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세계의 변화에 따라 자발적이고 유연하게 접촉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유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되지만, ‘무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기준의 지배도 받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고 반응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과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 무위의 태도를 지녀야만 변화하는 진실과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244~245쪽
당신은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입니까, 자기 꿈의 실현자입니까?
당신은 바람직함을 수행하며 삽니까, 바라는 걸 실행하며 삽니까?
당신은 원 오브 뎀 one of them 입니까, 유일한 자기입니까?(306)
- miru2003
왜 집착을 할까요? 그 대상을 더 좋은 것 또는 `진짜`라고 가치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137)
- miru2003
저자 :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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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1959년 음력 정월에 전남 신안의 하의도에서 태어나고, 유년에 함평으로 옮겨 와 그곳에서 줄곧 자랐다. 함평의 손불동국민학교와 향교국민학교, 광주의 월산국민학교, 사레지오 중학교, 대동고등학교를 나왔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중국 흑룡강대학교를 거쳐 북경대학교에서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成玄英的‘莊子疏’ 硏究)'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에 가르침을 받았던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해 한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건명원(建明苑) 원장과 섬진강인문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쓴...
역시 좋은 책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madwife ㅣ 2017-11-16 l 공감(2) ㅣ 댓글(1)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노자관련 책으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일부 내용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뭔가 배운다는 것에 대해 친구에게 한 말은 바로 나에게 한 말 같았다. 책의 내용이 이미 과거이고 남의 얘기인데 왜 본인의 얘기를 하지 않느냐는 질책에 정신이 번쩍든다.
울프심 ㅣ 2017-02-05 l 공감(0) ㅣ 댓글(0)
사상가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자
ㅇㅅㅇ ㅣ 2017-02-03 l 공감(2) ㅣ 댓글(0)
노자사상을 처음 접하는 제경우 편안하게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느낌입니다
momo ㅣ 2016-07-22 l 공감(1) ㅣ 댓글(0)
최진석 교수님 강의는 보거나 듣거나 읽는 데 좀 부지런하게 되버린 독자입니다 ^^ 인간의 무늬가 어떻게 그려져오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김보빈 ㅣ 2016-06-23 l 공감(0) ㅣ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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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총 : 49편
동양의 영원에 지혜에 감춰진 지배술 음양오행 ㅣ 2018-03-03 ㅣ 공감(2) ㅣ 댓글 (0)
생각해보니, 지난 주 우리가 소막창 안주에 ‘처음처럼’을 마시며 나눈 노변정담 중, 우주생물학적 관점의 필요성과 함께 최진석 교수의 노자론 까기가 있었습니다. 지구생물학의 에피스테메라는 한계를 드러내는 우주생물학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안선생님이 비판하신 노자론에 대해 함께 까보기로 하겠습니다.
마침 김진석 교수가 2011년 <동양담론의 허구성>이란 제목으로 동양담론 전체를 비판했던 적이 있는데, 그 중 ‘노자’ 관련 부분만 정리해보겠습니다.
김진석 교수는 “儒家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양한 방향에서 환영을 받은 것. 특히 서양의 기술문명을 극복한다는 신과학, 그리고 서양의 근원적 근대성에서 이탈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론에 의해서까지 재발견되고 찬송 받은” 道家에 대해서 분석합니다.
김교수는 우리에게 도교는 “흔히 개인적인 은둔을 강조한 세계관이라고 알려졌”고 “무위자연도 많은 경우 이런 범주 아래에서 이해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도가는 유가적 수신제가치국과 직접 부딪치기보다는 그것과 피하거나 그것에서 조용히 도망가는 모습이었”고 “비교적 개인적인 몸가짐의 차원에 주의를 기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던 것이 서양문화를 비판하는 대안으로 해석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제 도가는 유가적인 가치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사회적 세계관으로 해석되”고 “서양문명을 비판하는 기준이자 동시에 대안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해체론자들에 “따르면 노자의 도(道)는 우주론적 실체가 아니라 해체적 방법이라고 해석되었”는데, 김교수는 “이러한 시도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해체론은 “모든 텍스트에 틈입하여 텍스트에 틈을 내고 균열을 내는 일”인데, “도덕경은 그렇게 틈을 내는 텍스트에 못 미치는, 오천 자 남짓으로 이루어진 자기 암시적인 주장의 나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천 자로 세상을 해체하고 텍스트를 해체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과대망상이 아닌가”라고 김교수는 묻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학문을 배우면 나날이 분별이 보태지고, 도를 닦으면 날마다 망상이 덜어진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니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도 없다. 따라서 천하를 취함에 있어서 항상 무욕으로 하지만 욕심으로 꾀하면 천하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而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故取天下 常而無事48 장)" 이 문장에 대한 김교수의 논평은 이렇습니다.
“학문은 분별을 자행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배우는 일과 이렇게 단순하게 대립된 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단순한 주장과 대립을 좋은 뜻의 해체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노자는 세상을 취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체적 관점에서 도가를 번역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치세술의 관점을 대개 은폐하고 가린다. --- 이러한 탈정치화는, --- 무지한 왜곡 아니면 음모의 결과이다. 동양의 지배계급은 그러한 탈-정치화된 노자 해석을 선호하고 더 나아가 널리 유포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김교수는 또다른 예를 듭니다. “장차 움츠러들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펴야 하고 약해지려고 하면 반드시 강해야 한다. 장차 쓰러지려고 하면 먼저 일어나야 하고, 빼앗으려고 하면 마땅히 보태주어야 한다. 이것을 미묘한 이치라 한다. 유약함은 강장함을 이기게 마련이므로 물고기는 연못의 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로운 유약함이라는 통치법을 백성들로 하여금 보게 해서는 안 된다(36장)”
이 문장에 대해 김교수는 노자는 “백성을 무지하게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만든 채로 다스리는 법”을 설하고 있다며 “도가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라고 일컫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꼽는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명백히 나와 있는 지배술이 알게 모르게 가려지는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요컨대 “노자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와 서양의 대안으로 여기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음모와 새로운 음모의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김교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노자는 그저 아주 약한 것, 겨우 존재하는 것, 아주 낮은 데 있는 것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노자가 우주적 상징으로 내세우는 물에서 드러”납니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강한 것을 꺾는 데에는 이보다 나은 게 없으니, 물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드러움이 강장함을 이기고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줄은 누구나 알지만 어느 누구도 행사하지 못한다(78 장)” 김교수는 이 챕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물론 이렇게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차원이 있고,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경우도 꽤 많다. 그리고 그것을 활동하는 것이 처세와 치세의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가 물의 상징을 빌려 말하듯이, 낮은 곳에 있고 미미한 것은 그 자체로 긍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기고 지배하기 위하여 높이 평가된다면, 그런 현명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현명함은 노회함과 음험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왜 강하게 하면 좋지 않은가? 강한 것은 다시 강한 것을 유발하고, 사회적으로 적을 만드는 일이다. 노자의 무위는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다스리는 법이다.”
결국 노자의 “무위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정치, 자연의 정치”라는 게 김교수의 설명입니다. .
“물의 현묘한 겸손은 은근하고 노회하기는 하다. 그러나 최상의 선은 물과 같기만 한 것일까? 지나치게 노회한 부드러움이 아닐까? 장기적으로는 물이 바위도 뚫고 불로 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다만 그런 장기적인 기획만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실천은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순간적이고 직접적인 힘의 표출을 요구하고, 때로는 그냥 이기지 않기로 끝나는 수도 많다.”
김교수는 끝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양문명이 초래한 위험과 위기를 이야기하는 담론이 흔히 의존하는 노자의 이념”은 “환경 생태론의 이름을 빌려 가상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은 소중한 이념”이지만 결국 노자의 철학은 “상대를 앞에서 공격하지도 않고 적을 만들지도 않는 노회한 방법.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 배로 늘어나고 인을 끊고 의를 잊으면 백성은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며, 기교를 끊고 지혜를 놓으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絶聖棄智 民利白培,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絶智 盜賊無有, 19장)”
이 문장에서도 김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으로 바라봅니다. “인간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관계를 순백으로 부정하고 비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안선생님이나 김교수의 논의가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지젝이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고 불평한 걸 생각하면 이러한 소수의 비판적 관점 역시 의의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노자를 전쟁기계로 쓰느냐 국가장치로 쓰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듯합니다. 모든 게 그렇겠지만요...
정말로 도를 아십니까? cyrus ㅣ 2017-10-11 ㅣ 공감(32) ㅣ 댓글 (16)
남들보다 더 살고,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자신의 유능함을 과시하는 성향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자와 빈자가 구분되는 세상이 되면서 부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단어’를 만든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도 귀족이 되는 부자들은 자신만의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을 드러내고 싶었다. 혈연관계 중심으로 신분이 세습되는 고대 중국 사회에서 탄생한 ‘특별한 단어’가 바로 ‘군자(君子)’다. ‘군자’의 반대말은 ‘소인(小人)’이다. 소인은 육체노동을 하는 백성이다. 그러면 군자는 정신노동, 학문을 가까이하는 사람이다. 맹자(孟子)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를 가지고 군자와 소인을 정의했다. 계급 사회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철기 시대부터 봉건적 계급의식은 공고해진다.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는 인류가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오는 최대의 격변기였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생산력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고, 비교적 윤택하게 살 수 있게 된 소인들이 군자를 따라 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계급 갈등이 일어난다.
자기들만의 이익만을 위한 갈등과 분쟁이 극에 달할수록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는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때 공자(孔子), 맹자, 한비자(韓非子) 등 제자백가(諸子百家)로 알려진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노자(老子)가 빠지면 섭섭하다. 노자는 동시대 사상가인 공자처럼 분열과 반목이 이어지는 난세의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노자는 공자와 사뭇 다른 사상적 노선을 취했다. 공자는 바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인(仁), 즉 군자의 덕목을 사람들이 추구하지 못해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고 생각했다. 반면 노자는 오히려 사람들이 오히려 인위적인 법과 도덕에 얽매여서 자연스러운 본성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노자는 공자의 주장에 반대했다.
노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을 잃어가는 것을 일찌감치 우려했다. 그는 인위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가치론적 판단’을 부정하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인 무위(無爲)의 경지를 지향한다. 무위의 경지는 모든 가치 판단이나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의 단계이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원래 자연 그대로의 순리에 따르는 것은 인간 본연의 회복이며,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다. 유가 사상가들은 도가사상을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자들이 좋아하는 초월적인 사상’이라고 비난한다. 요즘에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가끔 길을 걷다 보면 “도를 아십니까?”라는 말로 사람들에 접근해 귀찮게 하는 수상한 사이비 종교 전도사를 만난다. 사이비 종교 전도사를 만났던 찜찜한 기억 때문인지 도(道)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노자의 도를 현실성이 떨어지는 관념적 개념으로 인식한다. 사실 원문 풀이가 제대로 된 《도덕경》을 읽어도 도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에는 시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실전 감각이 깃들어 있다. 건명원 초대 원장인 최진석 교수는 노자를 ‘시대가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아들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성세대로 상징하는 아버지에 반항한다. 노자는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인위적인 기성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했다. 노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상제(上帝)’라고 부르는 신에게 빌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 노자는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야 할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개인의 자유’라고 봤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은 ‘관계’를 지향하는 사회이다. 최진석 교수는 노자 사상의 핵심을 함축한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현대적인 단어인 ‘관계’와 함께 설명했다. 유무상생. 이 말은 ‘있음(有)’과 ‘없음(無)’이 새끼줄로 꼬여 있는 형태가 되어 서로 어우러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유무상생의 세계는 ‘대림면의 꼬임’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로 대립하는 사물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수 있도록 수양을 권한다. ‘군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받고, 제대로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일반 명사다. 그러나 노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공자가 만들어낸 일반 명사를 거부했다. 그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세상을 원했다. 유가 사상과 도가 사상을 비교하는 순간,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편견이 생긴다. 편견은 우리의 눈과 정신을 가리는 인위적인 거미줄과 같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거미줄 틈 사이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좁은 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사회의 다양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나와 정반대인 대상을 만나면 무조건 나빠 보이고, 해롭다고 믿는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은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다. ‘생각하는 힘’이 없으니까 ‘편견’의 거미줄에 걸린 ‘자기 자신’을 구출해낼 능력도 없다. 거미줄에 빠져나오려면 남의 시선, 남의 눈치, 남의 생각 등 인위적인 요소들로 채워진 가짜 ‘나’를 비워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보다 더 혼란스러운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각하는 힘’을 키우려면 노자를 공부해야 한다. 노자의 사상은 현실적인 학문이다.
노자와 최진석선생님이 나를 바꿔놓다. 김경록 ㅣ 2017-07-06 ㅣ 공감(0) ㅣ 댓글 (0)나를 감싸고 지배하던 수많은 논리와 이념 가치에서 벗어나 좀더 유연한 사고를 하게 되었다. 진정한 역발상이 가능해지고 쏠림 없이 사고할 수 있는 중심축을 얻게 된 기분이다. 이제 길들여져 있던 나의 힘을 잃어가던 눈빛속에 야생의 빛이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
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bookholic ㅣ 2017-03-01 ㅣ 공감(15) ㅣ 댓글 (0)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동양 철학의 두 주류라고 하면 공자와 노자를 들 수 있단다. 보통 공자는 현실 정치에 꾸준히 참여하려고 했고, 노자는 현실을 떠나 은둔의 생활을 한 사람으로 인식들 하고 있어. 아빠도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끔씩 교양 서적을 통해서 읽고, 지나면 또 까먹고 그러니까 자세히는 몰라. 그래도 노자의 도덕경 첫 번째 구절은 알고 있단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그 문구가 너무 멋지게 들렸어.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리고 노자는 현실을 떠나 무위(無爲), 즉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강조했다고 알고 있었어. 스트레스와 집착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는 아빠로서는 그의 그런 무위 사상이 늘 동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단다. 더욱이 ‘무위’ 다음에 ‘자연’이라는 말까지 붙여 무위자연이라는 부르기도 하잖니. 자연 속에 묻혀 아무것도 안하고 자연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생각만 해도 여유롭고 평온한 삶이 그려지잖니..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좀더 노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 책을 들었단다.
이 책은 이미 EBS에서 지은이 최준석이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단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강연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아빠는 보지는 못했어. 그래도 강연을 책으로 옮겼으니, 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선택했단다. 강연이 그리 긴 강연은 아니었기 때문에, 책도 노자 전체에 대해 주석을 달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대략적인 내용과 강연을 듣는 사람들이 관심이 있을 내용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사상에 대해 그 전보다는 더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았어. 예전에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을 통해 노자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김용옥이 해석한 것과는 또 다른 해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김용옥의 책을 읽은 지 오래 되어서 아빠 머리 속에서는 느낌만이 남아 있지만 말이야.
1.
인간은 왜 다른 동물들에 비해 두뇌가 발달했을까? 이것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해주었단다. 불에 익힌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동물성 단백질 섭취가 쉬워졌고, 그로 인해 뇌 발달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생각하는 동물이 되었다는 거야. 고대 중국에서도 사람들이 씨족을 이루면서 살다가 초기 국가 형태에 이르게 되었어. 당시 사람들은 나라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하늘이 점지해주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가 생겼는데, 이것은 하늘의 뜻을 어긴 것이 되었잖아. 그래서 그들은 “덕(德)”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주나라의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단다. 덕이 있으면 하늘의 뜻인 천명이 오고, 덕을 잃으면 천명도 떠날 수 있다고 했어. 그렇게 해서 덕을 잃은 은나라는 천명이 떠나고, 덕이 있는 주나라에 천명이 왔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철기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었단다. 철기를 가진 자들이 부를 쌓게 되고, 그 전에 소인으로 취급된 사람들이 세력을 키워가게 되었어.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게 되었지.
그 때가 춘추전국시대였단다. 그러면서 점점 이 세계의 주인이 하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단다. 이때 공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하늘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했어. 그리고 그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인(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인(仁)이란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인(仁)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 “예(禮)”라고 했어. 그러면서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로 설명했지. 이것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인간은 인간이 지켜야 할 보편적 기준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지. 바로 이 점을 노자가 비판했단다.
노자 또한 인간의 존재를 하늘이 아닌 인간 자체에서 찾으려고 했어. 하지만, 공자와 달리 인간의 보편적 기준을 인정하지는 않았어.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한 거야. 노자는 공자의 보편적 기준을 따르려다 보면 갈등을 초래한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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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이런 연유로 공자와 다른 방식으로 객관성, 투명성, 보편성이 확보된 질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하고자 자신만의 도를 건립하면서 인간 세계, 인간의 내면성으로부터 인사이트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주관성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노자는 ‘인간’을 완전히 벗어납니다. 우리 밖에 펼쳐진 ‘자연’에서 인사이트를 구하지요. 자연에는 주관성이나 가치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데, 노자는 이를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자연의 질서에는 더 친하게 여기고 덜 친하게 여기는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어떤 주관적 가치도 개입시키지 않고 아주 평등하게 대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의미에서 자연 질서는 매우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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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하자면, 공자와 노자는 모두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관점을 바꾸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런 점에서 공자와 노자 모두 도(道)를 추구했단다. 그 도(道)란 것은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길을 이야기하는 것이거든… 그런데 공자와 노자의 차이점은… 공자는 인간의 내면성을 근거로 한 인간의 길을 이야기하였고, 노자는 자연의 존재 형식과 운행 원리로 한 인간의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란다. 자, 그럼 이제 노자가 이야기하는 도와 무위에 대해서 이야기해줄게.
2.
일단, 도(道)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야. 도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할 수 있대. 여기서 무(無)는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비어있다는 의미라는구나. 우리가 지금은 무(無)를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노자가 살던 시절에는 비어있다는 뜻으로 쓰였대. 있음과 비어있음이 서로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 노자로 대표되는 도교는 관계론에 주목을 했대. 도교가 공자의 유학과 가장 큰 차이점 중을 보이는 하나가 바로 이 관계론이란다. 유학은 가치론을 중시했기 때문에 ‘좋다’와 ‘나쁘다’의 주관적 판단이 있었고, 그를 위해서는 구분을 해야 했고 이것은 배제와 억압을 불러왔다는 거야. 이에 반해 도교는 관계론을 중시했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불교, 주역, 포스트모더니즘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대.
사실 불교도 관계를 중요시 했거든. 불교는 이 세계를 고통의 바다라고 해서 여덟 가지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넘어서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무소유를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뜻을 개입하지 않는 자세라고 보면 돼. 소유라는 것은 바로 자기 생각의 틀을 가지는 것이거든. 그렇게 자기 생각의 틀과 현실과 맞지 않아 집착하게 되고 고통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깨달음이 되는 것이고… 불교에서 또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인연’이잖아… 그게 곧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
도교에서는 도를 행하는 이유는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라고 했어. 그렇게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르는 것이야. 무위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야. 무위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자세라고 할 수 있어. 세상 사람들이 정의 내린 신념, 이념, 가치관 등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 돼서 자신만의 의식으로 세계와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이지. 좀 말이 어려운 것 같지만, 세상을 볼 때 기준을 갖지 말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자, 그러면 이제 무위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면 무위를 한번 실천해보자꾸나. 왜, 노자는 이렇게 무위를 주장했을까? 그것은 더 높은 경지를 위해서였던 거야. 무위를 지나 무불위(無不爲)에 이르기 때문이래. 무불위가 뭐냐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란다. 그러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자가 현실을 초탈하는 철학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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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而無不爲
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을 말할 때, 노자의 시선은 절대 ‘무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무위’를 지나 ‘무불위’에 가서야 멈추지요. 노자의 시선이 닿고 싶어 하는 곳은 바로 ‘무불위’의 지경입니다. 노자가 무위를 강조한 이유는 무불위의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현실을 초탈하려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현실적 성취를 매우 중시했던 철학자입니다. 세상 속으로 아주 깊숙이 들어간 철학자였죠.
(25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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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면 노자의 가르침을 보고 나서,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냥 책으로만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노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꾸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 그런데 그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는 것이 아니야. 자꾸 내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떨까? 그 기준과 변화된 세상과 차이 때문에 문제, 그래, 스트레스가 생길 거야.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내 마음 속의 기준 같은 것은 갖다 버리라는 거지. 바로 그것이 무위의 태도를 갖게 되는 거야. 그럼, 위해서 말한 것처럼 안 되는 일이 없게 된다는 거야. 이것은 비단 세상과 나의 관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란다. 아빠와 너희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야. 아빠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너희들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이지. 아빠는 아빠만의 길, 너희들에게는 너희들만의 길이 있다는 것이 바로 노자의 사상인 거야. 그러면서 지은이는 자식에게 세 가지만 해주라고 하는데, 아빠가 생각하기에 그 세가지는 너무 당연한 것들이더구나. 믿어라, 사랑하라,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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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겪은 여러 시행착오들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식에게는 세 가지만 해주면 될 것 같아요. 첫째,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예뻐 보이질 않습니다. 자식의 꿈과 희망을 존중하고 믿어야 합니다. 둘째,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닌 자식의 성공이나 출세를 사랑해선 안 됩니다. 성적이 올라가면 더 예뻐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덜 예뻐진다면 아마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가지고 온 성적표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셋째, 기다려줘야 합니다. 간혹 실패하더라도 기다려줘야 해요. 실패를 통하지 않고는 배울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눈앞의 작은 실패들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학습장을 잃게 됩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다리기. 다만 진심으로. 여기서 가정의 행복이 나오고 창조적 성휘가 이루어집니다.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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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아빠가 맨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노자의 핵심 사상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했다고 했잖아. 노자의 도덕경 전체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책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동양 철학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고 싶은데, 쉽지는 않구나. 나중에 너희들이 크고 나서 너희들이 동양 철학에 관심이 생기게 된다면.. (만일 말이야.) 그럼 같이 공부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다가도… 아빠가 아빠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 노자의 사상에 어긋나는 것인데 말이야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더구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차우 ㅣ 2017-02-05 ㅣ 공감(0) ㅣ 댓글 (0)
이 책에선 노자의 철학 이전에 생각의 탄생, 생각하는 힘의 역사 등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책에서 노자는 자기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발적인 생각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거듭강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부분이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비교하는 파트였다.
공자는 보편적인 기준, 즉 '인간의 길'을 지향하지만,
노자는 정반대인 '자신만의 길'을 지향한다.
개인적으로는 노자의 철학이 더 좋지만,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입되느냐에 따라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음,솔직히 역사가 엮이는 부분이 많기도 했고,
교과서에 외의 곳에서 노자의 철학에 대해 접한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어려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최진석 저자가 친절한 예시가 담긴 설명을 해준 덕에 천천히 이해할 수 있었고,
기본적으로 노자의 철학과 비슷한 나름대로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읽으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 같은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깨달음을 얻을게 많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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