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김정인 (지은이)한울(한울아카데미)2009-01-23

384쪽
152*223mm (A5신)
691g
ISBN : 9788946050891
책소개
천도교의 발자취를 '민족운동'의 프리즘으로 재구성한 책으로, 일제강점기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친일화, 그 역사성을 묻는다. 이 책은 서론과 결론 및 4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도교의 교세신장, 노선갈등 및 분화, 각 계파의 노선과 민족통일운동, 친일로의 방향 전환을 다루고 있다.
천도교의 민족운동은 광범위했고 역동적이었다. 좌와 우의 이념과 운동, 그리고 합작의 역사가 천도교의 운명을 이끌었다. 천도교는 민족운동 진영의 일원으로 민족운동의 역사를 이끌어가던 주인공이었다. 그만큼 천도교의 친일은 변절로 받아들여졌고 해방 후에 재기가 어려울 만큼 여파가 컸다.
이 책은 이러한 궤적을 복원하기 위해 천도교의 성립과 분화 과정, 지도부의 정치노선, 교리체계의 변화 등에 초점을 맞추어 일제강점기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친일로의 방향 전환을 시계열적인 흐름을 좇아 계통적으로 분석한다.
문명화·근대화를 추종하던 동학 북접 지도부로부터 발원한 천도교 신파는 독점적으로 교단을 장악하고, 자주 독립을 모색하던 소수파인 천도교 혁신파와 천도교 구파를 때로는 배제하고 때로는 견인하면서 자치와 친일노선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토착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정체성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음을 이 책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목차
서론
1부 천도교의 문명개화노선과 3·1운동
1장 천도교의 창건과 정치노선
2장 대한제국기 정치세력화와 정치 투쟁
3장 천도교의 성장과 3·1운동
2부 천도교의 노선 갈등과 분화
1장 근대화 노선을 둘러싼 갈등과 분화
2장 민족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과 분화
3부 천도교 계파의 노선과 민족통일전선운동
1장 천도교 혁신파와 고려혁명당
2장 천도교 신파와 조선농민사
3장 천도교 구파와 신간회
4부 천도교의 친일화와 친일활동
1장 천도교 신파의 민족진영 이탈과 친일논리
2장 천도교의 통합과 친일협력활동
결론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정인 (지은이)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민주주의의 시각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오늘과 마주한 3·1운동>, <대학과 권력>,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등이 있다.
최근작 : <3.1운동에 앞장 선 여성들>,<한국 민주주의, 100년의 혁명 1919~2019>,<너와 나의 5.18> … 총 2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민족운동'의 프리즘으로 재구성한 천도교의 발자취
- 일제강점기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친일화, 그 역사성을 묻다 -
천도교의 민족운동은 광범위했고 역동적이었다. 좌와 우의 이념과 운동, 그리고 합작의 역사가 천도교의 운명을 이끌었다. 천도교는 민족운동 진영의 일원으로 민족운동의 역사를 이끌어가던 주인공이었다. 그만큼 천도교의 친일은 변절로 받아들여졌고 해방 후에 재기가 어려울 만큼 여파가 컸다.
이 책은 이러한 궤적을 복원하기 위해 천도교의 성립과 분화 과정, 지도부의 정치노선, 교리체계의 변화 등에 초점을 맞추어 일제강점기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친일로의 방향 전환을 시계열적인 흐름을 좇아 계통적으로 분석한다. 문명화·근대화를 추종하던 동학 북접 지도부로부터 발원한 천도교 신파는 독점적으로 교단을 장악하고, 자주 독립을 모색하던 소수파인 천도교 혁신파와 천도교 구파를 때로는 배제하고 때로는 견인하면서 자치와 친일노선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토착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정체성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음을 이 책의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족운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천도교의 과거를 재구성한 이 책은 동학 창도에서 일제강점기 친일로의 방향 전환까지, 천도교의 역사를 다음과 같은 사안에 집중해 살펴보고 있다.
첫째, 민족진영의 일원인 천도교의 좌·우·중도로의 정치노선의 분화와 정치활동에 주목했다. 둘째, ‘동도주의’에서 출발한 동학이 문명개화를 표방하는 천도교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인내천주의·수운주의’를 제창하기까지의 사상적 계보에 주목했다. 셋째, 기호·호남·서북 등의 지역성과 천도교의 행보와의 연관성을 면밀히 분석했다. 넷째, 천도교의 갈등과 분화에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종교정책이 미친 영향을 여타 종교와 비교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천도교가 국권회복기에 탄생한 토착종교로서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성장하여 3·1운동을 주도하고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참여했으나, 종국에는 민족자주노선을 포기하고 친일화해 결과적으로는 일제의 침략과 함께 흥하고 일제의 패망과 함께 망하고 만 이유를 제시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 역사성을 평가했다.
천도교의 일제강점기 정치·사회적 비중을 반영하듯, 당시의 공문서나 신문·잡지를 비롯하여 각종 논저에서 천도교를 언급한 부분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천도교에서 발간했던 ≪만세보≫, ≪천도교회월보≫, ≪신인간≫, ≪개벽≫, ≪당성≫, ≪동학지광≫ 등의 기관지를 비롯하여 천도교단에서 보관 중인 법령집, 문서존안·일지류·직원록 등의 1차 사료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일지류는 1930년대 이후 신파의 것이 주종을 이루는데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저자는 충실한 사료 수집과 일독, 그에 대한 분석으로 그간 거의 활용된 적이 없었던 자료들을 십분 활용했다. 그 결과 기존 연구에서 활용된 일제 측 자료에 많은 왜곡과 변질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로잡아 서술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책은 서론과 결론 및 4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도교의 교세신장, 노선갈등 및 분화, 각 계파의 노선과 민족통일운동, 친일로의 방향 전환을 다루고 있다.
1부에서는 1905~1919년 천도교 문명개화노선의 정립과 문화계몽운동, 그리고 1910년대 교세 신장을 바탕으로 한 3·1운동에서의 활약을 살펴본다. 19세기 중반 종교적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창도된 동학의 사상·조직·운동의 변천과 동학 지도부의 분화 과정, 그리고 보호국 체제하에서 대한협회를 통해 전개한 정권획득운동이 국망으로 좌절된 뒤 천도교가 1910년대의 급격한 교세 신장을 바탕으로 민족진영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3·1운동을 주도해가는 과정을 고찰한다.
2부에서는 1920년대 전반 근대화와 민족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으로 야기된 두 차례에 걸친 천도교의 신구파 분화에 관해 규명한다. 1920년대 초반 자본주의 근대화 노선과 사회주의 근대화 노선을 둘러싼 천도교 지도부 간의 ‘좌우’ 노선 갈등이 1922년 제1차 신구파 분화로 비화되고 결국 천도교 혁신파가 교단에서 이탈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후 최린계가 교단을 장악하고 이종린계와 갈등하면서 타협적 우파와 비타협적 우파로 분화되고 이것이 제2차 신구파 분화로 비화되는 과정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혁신파와 보수파 간의 좌와 우를 지향하는 사상적 차별성과, 근대화·문명화를 추구하는 동질적 집단이면서도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는 차이를 보인 신구파 노선 갈등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3부에서는 1920년대 후반 계파별로 전개된 천도교 민족통일전선운동에 관해 분석한다. 각기 다른 인적·사상적·지역적 계보 및 민족운동노선의 차이에 근거해 전개된 혁신파의 고려혁명당 건설, 신파의 조선농민사 조직, 구파의 신간회 참여 등을 통해 나타난 통일전선운동의 구체적 활동 양상을 고찰하고 그 특징을 추출해본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사회주의계로 분류되었던 혁신파와 민족주의계로 분류되었던 구파가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의 성향을 갖는 계파라는 점을 규명하고 일제강점기하에서 중도파의 존립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해본다.
4부에서는 1930년대 이후 천도교의 친일로의 방향 전환에 대해 알아본다. 우선 천도교 신파의 민족진영 이탈 과정을 천도교 신파의 동향과 좌파 언론과의 사상논쟁, 시중회 결성으로 나누어 살피고 그 사상적 귀결이라 할 수 있는 대동방주의와 신앙보국주의 등에 관해 고찰한다. 특히 1930년대 초반 천도교 신파와 좌파 언론 간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사상논쟁은 단순한 반종교투쟁이 아니라 천도교의 친일로의 방향 전환을 둘러싼 좌우투쟁이었다는 점을 규명한다. 또한 신파를 필두로 민족진영을 이탈하여 중앙집권적인 전국 조직망을 활용해 조직적인 친일 행각을 펼친 천도교의 친일 조직과 행적에 대해서도 정리한다.
독자 대상
-천도교에 관심 있는 연구자 및 교인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 및 학생, 일반인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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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근대 민족운동 연구
□ 개요
동학운동으로 시작한 천도교의 조선말기 및 식민지배시기에 전개되는 양상을 파악하여 동학운동 및 천도교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알기 위한 것임
□ 동학의 탄생 및 초기 활동
◦ 1860년 포의한사 최제우가 이란으로 상징되는 민심 동요를 “오도”의 수양을 통해 극복하고자 도학인 동학을 창조하였으며, 동학(東學)은 단순히 유학(儒學), 불교(佛敎), 선가(仙家)의 전통을 넘어 서양의 서학인 천주교학까지 섭렵한 동도(東道)를 의미하는 것임
◦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후기 열강들이 식민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제국주의가 열풍이었으며, 경제적 사회적인 조건으로 자본주의산업체계가 도입되면서 자국 내의 상품의 판매 및 원료의 공급을 위한 시장을 찾기 위해 조선 역시 시대적 흐름을 타고 있음
◦ 최제우의 동학사상은 서양에서 넘어온 서학사상에 대비되는 것으로 본래 천주교는 18세기 양반 및 지식인 계열이던 성호학파(정약종, 이승훈, 이벽)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1801년 신유사옥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정치적인 숙청에서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운동으로 넘어가게 되어 동학사상은 서구의 사상 및 농촌의 황폐화에 대한 민중운동으로 시작하게 됨
◦ 천주교 사상은 인간과 신은 이분적인 존재로서 신은 완벽한 존재이나, 동학에서는 신은 인간과 이분법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서로 통하여 인간이 하늘이 될 수 있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설법하여 한국의 본래 사상인 단군신화처럼 민족성과 더불어 하느님 아래 우리도 같이 하느님처럼 될 수 있기에 인본주의 사상이었으며, 추후 이런 사상은 남녀노소, 빈부격차, 신분체계가 엄격한 봉건사회에서 상당히 과격한 사상이 됨
◦ 동학은 계몽주의에 의거한 사상보단 일련의 메시아주의에 의해 탄생한 민중운동이었고, 이런 운동은 1864년 최제우 사망과 동시에 최시형의 교단등극에 따란 새로운 체계가 되었으며, 동학운동으로 인한 교세가 강원 및 삼남으로 이어지고, 전국으로 확장되어 동학조직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갈등이 발생하여 동학농민전쟁 중 1894년 8월 기준으로 호남에 기준으로 한 세력을 남접, 호서에 기반을 둔 세력을 북접으로 함
◦ 동학운동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많은 동학농민들이 처형을 당하고, 동학을 종교적 체계에서 시작되기보단 농민봉기 수준이었으며, 이때의 기준으로 남접은 몰락하고, 호서의 북접의 세력을 중심으로 동학 및 천도교가 세력을 확장함
□ 동학운동에서 천도교로 전이과정
◦ 1898년 2월 최시형이 체포되어 6월에 처형되자 동학 내부에서 큰 문제가 되었고, 동학운동의 존속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노선으로 갈등을 빚게 되고, 북접 출신의 지도자로 손병희와 김연국 계열이 양대계파로 주축을 이루고, 북접의 거점이 호서지방이기에 평안도 지역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이와 달리 남접은 북접의 활동노선과 전혀 다른 노선으로 독립운동으로 뛰어들고, 천도교의 본신은 동학의 북접 손병희에 의해 체계화
◦ 손병희의 천도교 집권에 따라 천도교는 기존의 외세침략과 농민봉기 등의 운동보다는 새로운 길로 가기 시작하는데, 손병희는 자민족적인 동학운동에서 시대적 흐름을 따라 문명을 받아들이고, 계몽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여 일본을 비롯한 외국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추구하며, 일본에 유학가게 되면서 일본 내의 친일세력과 친분을 쌓게 되며, 실제 일본국가의 주요정치인들과 교류를 시작
◦ 손병희가 받아들인 새로운 종교적인 체계는 주로 일본의 근대문명화에 따른 신문화체계이고, 메이지유신에 따른 군국주의 및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며, 실제 그것을 천도교 이념으로 활용하여 신지식인으로서 근대문명을 조선에 도입하여 부국강병이 중요한 사실을 인지했으나, 문제는 단순히 그것을 바라는 것이 하나의 정치적 책략(일본의 조선침략)에 해당하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음
◦ 손병희가 천도교를 정식 종교화로 선포한 것은 1905년 을사불평등조약 이후이며, 천도교 정식 종교선포 이전에 동학은 국가적으로 불법이었으므로 불법 단체에서 합법적 종교단체로 인정받으며 종교 활동을 시작하고, 본래의 최시형과 최제우의 동학사상에 따른 자유와 평등을 기반 하기보단 손병희 자신이 하나의 절대적 종교인으로서 중앙집권화로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천도교대헌 1장에 대도주에 관한 장에서 “제1조 천의 영감으로 계승함, 제2조 도의 전체를 통리함, 제3조 교를 인계에 선포함.”하여 절대적으로 손병희가 천도교의 모든 것을 주도하게 됨
◦ 남녀노소 내지 신분과 관계없이 평등을 추구한 동학운도이나 실제 천도교는 하나의 가족의 작은 그룹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기를 포교했고, 집안 가장이 중심으로 되어 화목과 가정을 중시하게 되는 유교적인 가치관 내지 일본 메이지유신과 같은 천황중심 체계를 손병희 자신으로 연결하여 천도교는 일본적 서구를 지향한 문화체계가 특징이었으며, 또한 그것이 하나의 한계점이었음
◦ 을사불평등조약에 따른 일본에 대한 불만의식에 따라 종교가 새로운 형태를 발생되는데, 나철 및 오기호 중심으로 개설된 대종교는 민간신앙인 단군신앙을 필두로 민족주의 종교체계를 만들었으며, 이후 많은 독립투사들이 대종교 신도로서 항일항쟁을 하게 되나, 천도교는 항일항쟁보단 종교적 구축에 집중 투자하였으며, 특히 종교계몽 운동으로 문맹을 타파하고 지식을 가르치는 근대문화에 큰 역점을 둠
◦ 초반 천도교 활동에서 손병희 및 지도부들은 일본에 대한 신뢰가 속임수란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여 1904년 러일전쟁에서 손병희는 일본군에 군자금을 지원해주고,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큰 외교 및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지원에 따라 일본이 천도교에 대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실제 을사불평등조약에 따라 조선에서 손병희의 활동이 자유롭게 되자, 정치적인 세력으로 통해 천도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송병준과 같은 친일정치인과 연계하여 일본이 조선의 발전이 될 것이라 여겼으나, 그것은 1910년 한입병합이란 경술국치일로 기해 무용지물이 되어버림
□ 천도교의 일제강점기 시대의 활동
◦ 천도교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민족이 스스로 만든 종교이며, 또한 계몽주의사상을 발휘하여 보성학원을 설립하여 많은 민중들이 합세하게 되었으며, 천도교 주요인물이며 추후 친일행각에 매우 협조적인 최린이 입도하게 되고, 당시 1916년 일본인 다케우치는 천도교의 신앙인이 107만명이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
◦ 일제강점기 시대에 천도교는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보다는 주요 활동은 여전히 종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었으며, 초기 조선총독부에서는 천도교가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일반 종교단체보다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간주하였기에 한일병합 이후 천도교는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으나, 손병희를 비롯한 지도부는 친일활동에 따라 메이지신궁 건축비 기부 및 각종 활동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행동을 함
◦ 천도교는 1910년대 주요 활동범위가 주로 문명인으로서 자질과 계몽이 위주였으므로 지식을 전수하거나 산업사회에 어울리는 기술전도, 생활하면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도적인 요소를 전파하여 근대화적인 요소를 강조했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음
◦ 동학의 2대째 교주인 최시형의 장남 최동희는 손병희에게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구했으나, 손병희는 이를 거부하고, 세계의 흐름을 계속 주시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복잡한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다가, 미국 대통령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내지 개방화로 통해 들어온 자유주의 내지 사회주의 등 각종 새로운 사상들이 민중들에게 전파되어 민심이 새로운 계기에 기대를 걸자 천도교 지도부 역시 그런 민심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전환점을 고심하게 됨
◦ “3·1 운동”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2·8 독립선언문”이 발표되면서 민족문제를 외면할 경우 천도교는 조선인들의 신뢰를 잃게 되는 딜레마 속에 “3·1 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33인 명단에서 천도교인 명사는 15인으로 거의 반 정도 차지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지도부가 일본에 체포되어 심문할 때 천도교의 입장은 민족의 독립과 자족보다는 조선인들이 일본인과 너무 다른 처우와 불평등한 사회적 차별을 받으므로 거기에 대한 선처를 바라는 정치적 해석으로 일본에게 요구함
◦ 천도교는 “3·1 운동” 이후에 전개되던 무력항일투쟁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이런 개량주의적인 행태는 결국 친일이란 반민족행위에 대한 하나의 연결성을 가지게 되며, 당초 손병희를 비롯한 지도부의 생각은 만약 조선의 독립되어 군주제가 아닌 삼권분립의 입헌국가가 될 경우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주요 지도부를 장관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천도교의 정치적 독립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종교적 맥락으로 활용하고자 함
□ 천도교의 내부 분란과 친일행각
◦ “3·1 운동” 이후 손병희는 여전히 실세였으나, 천도교 내부에도 신지식인들의 참여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시작되었으며, 보수적인 관점은 중앙집권적인 체계를 유지를 목표로 하고, 진보적인 관점은 지방에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며, 또한 민족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와 소극적인 태도로 구분하게 됨
◦ 이후 천도교는 구파와 신파로 분리되는데, 구파는 이종린계고, 신파는 최린계로 최린계는 일제와의 타협 속에 자치운동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종린계는 사회주의 내지 다양한 사상을 통합하여 일제와 비타협적인 노선이었으며, 대부분 권력과 재단은 최린계가 독식하고 있었으며, 이후 천도교는 각자의 경로로 돌입하게 됨
◦ 천도교의 혁신파인 구파는 최시형의 장남이자 손병희의 조카인 최동희가 주요인물로 만주를 근거지로 한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을 결합한 민족운동 방략을 주목하고 있으며, 연해주 망명 이후 신채호, 유동렬, 김좌진, 황상규 등과 같은 민족독립운동가와 교류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 자신의 뜻과 어울리지 않아 실망한 후 러시아소비에트 영수인 레닌을 직접 만난 경험을 살리기로 함
◦ 실제 조선인 중에 러시아 소비에트에서 개최한 코민테른에 참석하여 고려혁명당이란 명칭이 있었으며, 레닌을 만나 제3국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받는 일화도 있으나, 1924년 1월 레닌이 뇌일혈로 사망한 후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말자 레닌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기회도 없어지고, 게다가 러시아소비에트는 1925년 1월 20일 “소일상호관계의 기본원칙에 관한 협약”으로 조선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철회로 끝냄
◦ 또한 러시아 소비에트는 천도교가 코민테른 지휘 아래 소속되는 게 아니라 자치적으로 활동하기에 지원을 해줄 수 없으며, 일국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주변 식민지국가의 문제와 제국주의국가들의 횡포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게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동희를 비롯한 구파세력들은 러시아 및 중국 등의 연계로 민족운동을 하려는 외교활동으로 통해 민족운동노선이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 자신들의 원칙을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는 큰 의의를 보여주었음
◦ 최린을 비롯한 신파들은 농민들의 생활을 위해 정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구파에서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발각되어 검거선풍에 큰 고비를 치루고, 신간회 활동 등으로 꾸준히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으나, 세력의 열세로 인해 신파와 같이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활동하여 멸망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갈등에 놓이게 되면서 친일성향의 신파로 흡수되고 천도교는 민족종교보단 친일의 앞잡이로 전략함
◦ 신파의 친일행각은 초반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나, 현실을 타파하기보단 적절한 타협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나 타협부분이 현실 순응적이고, 일본의 태평양전쟁 이전 검거 및 탄압사태에 대해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런 행각을 보이기 전에 신파는 국내의 사회주의 진영 및 좌파 언론인에게 친일행각 및 반민족행위에 대한 비판을 받기 시작하고, 사상적 기반이 없는 것에 대해 서로간의 언쟁을 하기 시작함
◦ 신파는 구파를 흡수한 후 친일세력으로 급부상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의례 및 행사를 일본군의 전쟁자금 및 물적 지원을 해주며, 천황에 대한 숭배와 더불어 친일적인 요소를 덧붙이기 위해 손병희가 과거 일본에 가서 친일명사 및 일본정치인과 친하게 지낸 것을 강조하고, 특히 러일전쟁에 전쟁지참금을 준 것을 강조하여 일본 당국에게 호의를 보여줌
◦ 일본조선총독부를 천도교는 계속 감시하고 탄압했으나, 그런 지도부들의 이익이나 이권에 대해서는 용인하며, 친일행위는 천도교의 민족적 종교로서 지도부가 이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하나의 유지형태이고, 노골적인 친일행각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에 추수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한 선발대원을 모집했으나, 일본 당국의 거부로 계획이 성사되지 못할 정도임
- 접기
만화애니비평 2014-01-1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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