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3

김항석 나의 아버지, 김기근(金基根. 1919. 12.14 - 2008. 4.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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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석
나의 아버지, 김기근(金基根. 1919. 12.14 - 2008. 4.12)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덕안면(德安面) 남오동(南五洞)에서 태어 나시고 캐나다 온타리오 런던시에서 잠 드시다.
아버지의 일기를 정리하여 아버지가 이야기 해 나가는 방식으로 썼다.
 
< 글 2 > 가족과의 극적인 재회

1. 가족의 월남

모든 가족을 이북에 남겨두고 혼자 남쪽으로 내려 온 나는 급변하는 나라의 정세를 살피며 가족들을 걱정하며 지냈다.
남과 북에 대한 처리 문제로 미소 공동 위원회 등 세계 여러 나라들이 수차례 회의와 협상을 했지만, 복잡한 이해 차이로 인해 계속 결렬 되어, 결국 모든 협상이 끝나면서 남과 북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분단되어 가는 양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1948년 8월 15일에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곧 이어 북한에도 김일성이 주도하여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들어 서니 남북간의 왕래가 완전히 막혀 버릴 형국으로 불안하게 바뀌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남과 북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왕래를 통제 하고 있었지만, 감시원의 눈을 피해서 오가고 있었고, 남과 북의 편지 왕래가 아직 가능하던 때여서 나도 가끔 집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의 주선으로 김봉국 선생님의 인천 ‘주신 목장’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아무래도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하다가 3.8선이 막히게 되면 가족들과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급박한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잘 준비해서 식구들과 남쪽으로 내려 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나의 편지를 받은 아내는 어머니와 상의하면서 갑작스런 상황에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나의 유일한 여동생 옥근이가 첫째 아들 ‘원영’을 낳아 이제 겨우 3살이 되었고, 남자도 없는 집에서 여자들의 힘으로 봄 여름에 걸쳐 일구어 놓은 농사를 곧 거두어 들여야 할 때에, 집안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다는게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시간이었다.
이때에도 나의 어머니는 지혜를 발휘하셔서 80을 앞두신 나의 할머니, 아내, 진석이를 떠나게 하고, 당신께서는 동생 옥근 식구들과 고향 집을 지키기로 결단하셨다. 또 얼마 전에 손자 진석이의 손을 잡고 월남을 시도했을 때 ‘고향에 가족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시 집으로 돌려 보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혹시라도 남쪽으로 내려 가던 식구들이 도중에 붙잡히게 되면 집에 누군가 있어야 돌아 올 수 있을거라는 상황까지도 대비하기 위해 나의 어머니는 고향 집에 그대로 남아 있기로 결정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 평안북도 박천군 덕안면 남오동은 평안 북도와 평안 남도의 경계를 만드는 청천강 바로 북쪽이며, 고향 땅 덕안면 남쪽에는 청천강, 북쪽에는 태령강이 두르고 있고, 서쪽으로 흘러 두 강이 만나는 곳이 바로 서해로 만나는 지점이 된다.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 나면서 이곳에서 피난민을 태워 떠나는 밀선이 생겼고, 나의 편지를 받은 아내와 어머니는 이웃에 가깝게 사는 김종석(金宗石)형께 비밀리에 도움을 청했다.
밀물이 들어 오는 날이어야 배가 육지에 가깝게 닿아 탈 수 있는데, 배가 들어 온다는 소식이 오면 짐을 지고 좁은 논둑을 걸어서 배 타는 곳까지 나갔다가도, 정작 배가 미처 육지에 닿지 못하는 날에는 모든 짐을 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 가기를 두 세번 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1948년 10월 어느 날, 배가 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온 식구가 다시 짐 보따리를 이고 배 닿는 곳으로 갔다. 나의 할머니, 진석, 명숙렬 동생(나의 고모의 딸. 사촌 여동생)이 먼저 타고, 아내는 배에 아직 오르지 못했을 때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 식구들을 도와 주던 김종석 형이 아내를 들어서 배에 밀어 올려 주었다고 한다.
이때에도 나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식구들이 밀선에 타는 것을 도우시고, 황망한 상황에서 가족들과 인사도 미처 나누지 못한 채, 밀선이 서해 바다를 향해 나가다가 캄캄한 밤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계셨을 것이고, 앞이 보이지 않는 논둑을 헛디뎌 가면서 이제는 텅 빈 집으로 힘없이 발걸음을 들여 놓으셨을게다.
 
2. 표류하는 밀선, 그리고 재회

우리 가족을 태운 밀선에는 같은 처지의 피난민 30여명 정도가 타고 있었고, 밥솥에 밥도 해 먹으면서 남쪽으로 내려 와 많이 걸려도 이틀이면 인천에 닿을 예정이었다. 그러던 배가 갑자기 기관 고장을 일으켜 엔진이 꺼지면서, 망망한 바다 위에서 바람 부는대로 떠 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 표류하던 어느 날, 멀리서 육지가 보여 사람들이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기적적으로 닿게 하였는데, 선장은 ‘배가 곧 파선될 테니 빨리 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모든 사람들이 하선하여 모래 사장에 짐을 쌓아 놓았는데 그 배가 ‘쩍!’ 소리를 내면서 반으로 부숴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극적으로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목포 근처였다.
이 해(1948년)에는 남한에 ‘제주 4.3 사건’이 있었고, 또 10월에 ‘여순 사건’이 있어서 우리 식구가 목포 근처에 도착했던 10월말경에는 빨갱이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였다. 해안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가 30여명의 표류민을 경찰서 구치소에 넣었다. 며칠을 그곳에서 지내는데, 경찰서로 잡혀 온 사람들 가운데 빨갱이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퍽퍽 패는 소리가 구치소 안에 매일 들렸다고 한다.
일행 가운데 젊은 남자들이 있으면 북에서 내려 온 빨갱이 혐의를 받거나, 자칫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던 극도로 불안한 때였는데, 주로 여자들이었던 우리 가족은 그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또한 하늘이 도운 덕에, 고향이 이북인 경찰관 한 사람이, 우리 가족 일행은 ‘여순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피난민임을 인정해 주어서 무사히 풀려 날 수 있었다.
명숙렬 사촌 동생은 수원 농과 대학에 있던 남편 김정석을 찾아 수원으로 갔고, 나의 할머니와 아내 그리고 진석이는 내가 있던 인천 김봉국 선생 목장으로 어찌어찌 용케도 찾아 와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었다.
( * 김항석 추가 설명 : 내 어머니와 명 숙렬 고모 살아 계실 때, 밀선을 타고 내려 오던 이야기를 하면서 ‘피난민이 겪은 얘기를 책으로 쓰자면 10권은 될거야!’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 때는 ‘목포에 도착한 후에 아버지하고 어떻게 다시 만났어요?’하고 물어 보지 못했다.
그에 대한 답은, 두 개의 단서를 갖고 찾아 낼 수 있었다. 그 첫 번째는, 2014년 한국 방문 중에 명숙렬 고모와의 대화에서 ‘그때 목포 근처 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운 좋게 풀려 나서, 너희 가족은 아버지 만나러 인천으로 갔고, 나는 고모부가 있던 수원으로 간거야!’하고 들은 내용이 결정적이었다. 명숙렬 고모의 이 이야기는 나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머물던 인천 주소를 갖고 왔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그 다음은, ‘내 어머니가 아버지의 인천 거주지를 어떻게 알았을까?’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한 단서는 아버지의 1948년 기록 중에 ‘이때까지는 북으로 (어머님께 – 나의 할머니) 편지를 보내 드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1948년 당시에는 남과 북으로 우편물이 오가고 있었던게 틀림없다. 남과 북의 상황이 급박하게 악화 되면서 38선이 완전히 닫혀 버릴 것 같은 불안함을 느낀 나머지, 어머니에게 ‘남쪽으로 내려 오라’는 편지를 보낼 때, 아버지가 거주하고 있던 인천 ‘주신 목장’의 주소를 적어서 보내셨음에 틀림없다.
이런 나의 추측은 2021년 1월 13일 팔촌 원석 형의 이메일을 통해 정확히 확인 되었다. 원석형이 갖고 있는 김효근 숙부의 일기에 '형님이 남쪽으로 내려 간 지 두 달여 후인 1947년 5월 25일, 큰 어머님을 찾아가 나도 남쪽으로 내려 간다고 인사 드렸더니, 기근 형님 정릉 주소를 알려 주셨다. 밀선을 타고 내려 와 서울에 도착하여 6월 2일 정릉에서 기근 형님을 만났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남과 북의 교류와 왕래가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 도착한 나의 아버지는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는 편지와 ‘함 선생님의 권유로 정릉 김교신 선생 댁에 머물고 있다.’는 서신을 고향으로 수차례 보냈던 것이고, 인천으로 옮긴 후 '남쪽으로 내려 오라'는 편지에 인천 주소를 알리셨음이 확실하다.
효근 숙부가 고향에서 밀선을 타고 내려 올 때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도착지가 되었을 것이고, 나의 어머니와 진석 형도 다음 해인 1948년 10월경에 내려 왔을 때도 같은 밀선을 이용해서 인천을 향해 떠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48년 10월경 서해로 나아가는 청천강 하구에서 나의 가족이 밀선에 오르도록 도와 주신 김정석님. (사진 왼쪽부터 : 김정석. 아버지 뒷모습. 김신일 6촌. 김효근 숙부. 김소일 6촌형. 명숙렬 5촌고모) - 1989년 서울 아서원. 아버지 70회 생신 축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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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규

성과 이름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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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d
  • 선친께서 한국근대사의 비극을 오롯이 체험하셨군요
    80년도에 태동서사에서 만났을때 어르신이 딸기농사를 경영하고 계시다는 말은 기억이 납니다
    저는 지금 태동서원 일로 합천에 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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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d
    • 생각만해도 가슴이 푸근해 지는 유하리 태동서사! 우둔한 제게 너무 좋은 추억으로 평생 남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태동서원에서 돌아 온 직후 80년 2월 15일 아버지 회갑연 후의 모습입니다. 오른쪽 끝에 제가 앉아 있고, 그 뒤 벽에 걸려 있는 귀한 서예 작품은 아쉽게도 그 행방을 알 수 없읍니다. 덕민 스님께 부탁해서 추연 선생님의 친필 작품으로 받은건데....
      May be an image of 9 people, child, people standing, people sitting and in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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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h
  • 사료네! 잘 정리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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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 h
  • 효자이십니다!
    아버님 황해도 월남하시고, 평생눈물로 사셨는데..-기록도 기억 못하는 불효자-
    Avatar sitting at a study table, holding a pencil and thinking what to write in the notebook in front of them. There are books on the table and crumbled notebook pages on the floor. A wall calendar with a bulldog's portrait has the deadline marked in 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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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 h
    김항석 replied
     
    1 reply
  • 글을 읽으면서 꼭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듯한 생생한, 서사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을 남으로 떠나 보내고 홀로 남겨지신 어머니의 마음을 상상하니 참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네요...이런게 바로 숭고한 사랑이 아닐까....
    이 고된 시대를 살아내신 모든 어르신들 삶 자체가 한국의 살아있는 역사일겁니다...
    기록 너무 잘 해놓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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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h
    • Young Gyu Lee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모 생전에는 생각 못하다가 정작 돌아 가시고 한참 후에야 후회하고 있죠... 아버지 남기신 기록을 앞뒤로 정리만 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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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h
  • 故人의 冥福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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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 h
    김항석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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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의 힘은 위대합니다.
    질곡의 근현대사를 오롯이 견뎌내신 선대의 인내앞에 요즘을 살아가며 앓는 소리를 내는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가족들을 보내고 홀로 밤길을 돌아가셨을 선아증조모님의 아픔을 가늠할 길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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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h
    • Yong Seok Choi
       아버지를 기억해줘서 고마워!
      사실 그 대목은 언젠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김종석씨가 네 어머니를 들어 올려 배에 태워 주셨다'는 이야기였는데, 모든 식구들을 떠나 보내던 나의 할머니의 마음이 어땟을까 생각되어져 추가하게 된거지. 그 마음까지 같이 느껴줘서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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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h
      • Edited
  • 선생님 오마이뉴스에 기고 해 보시지요? 혼자 읽기 너무 아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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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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