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3

나의 아버지, 김기근(金基根. 1919. 12.14 - 2008.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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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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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김기근(金基根. 1919. 12.14 - 2008. 4.12)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덕안면(德安面) 남오동(南五洞)에서 태어 나시고, 캐나다 온타리오 런던에서 잠 드시다.
세월 무상! 아버지 돌아 가신 지 벌써 13번째 기일을 맞는다.
'엄마랑 아버지도 캐나다 와서 같이 살자!'는 내 누나의 말에 별 다른 생각없이 '그러자꾸나!'하고 대답한 지 불과 6개월만에 영주권이 나와서 적잖이 당황하셨고,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1982년 4월 9일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른 때가 63세의 나이였다. 밤과 낮이 바뀐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게 낯설고 물설은 외국에서의 삶! 평생동안 가깝게 오가며 지냈던 친척 친지들,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믿음의 동지들과 나누었던 교제를 더 이상하지 못한 채, 이역만리 떨어져 지내야 했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남겨 놓으신 기록을 통해 아버지가 걸었던 고난과 희생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며 그중에서도 가장 긴박했던 1950년 이전까지의 삶을 정리해 보았다.

< 글 1 > 은 내가 기술해 나가는 방식으로 기록했다.
 
(1) 평안북도 박천에서 하얼빈까지 다녀 오심

지난 70년 넘게 영영 가 볼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고향 평안북도 박천군 덕안면 남오동. 아버지가 태어 나셨을 때(1919년)의 가정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아버지 기록에 '연안 현씨(延安 玄氏)'로만 남아 있는 나의 증조 할머니(1870 - 1951)께서 이미 10여년 전 40의 나이에 남편 찬린(贊麟) 증조 할아버지가 행방불명 되어 홀몸이 되셨고, 나의 할머니 홍몽룡(洪夢龍. 1899 - 1979)은 아버지의 유일한 여동생인 나의 고모 옥근(玉根. 1923 - 2002)이 태어 난 지 불과 6개월만에 남편 김승풍(金勝灃. 1903 -1924. 나의 할아버지)을 잃어 역시 과부의 몸이 되었다.
이렇게 되니 1930년대 중반까지 우리 집안의 형편은,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나의 증조 할머니와 할머니 두 분과, 2대 독자인 나의 아버지와 열 살이 채 안된 나의 고모가 살아 가고 있었다. 두 분 할머니에게는 나의 아버지가 유일한 희망이었고, 앞으로 이 집안을 끌고 갈 중심 역할을 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나의 할머니의 결단으로 1935년경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당시 유교적인 풍습에 살던 여러 친척들의 시련을 받게 되고, 집안 어른이 찾아 와 문짝을 뜯어 내며 행패를 부릴 때마다 부엌에 숨어 있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석하던 '하사리 교회(下四里敎會)'에서 18-9세 어린 나이에 '집사'로 선출된 성실하고 믿음 좋은 아버지를 모든 교인들이 ‘조달집사(早達執事)’라고 불렀다고 한다. (LA 박근서 목사님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이때 선천읍(宣川邑)에 미국 북장로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동계 성경학교에도 40여일간 참가하여 세상을 향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하셨다.
교회에서 윤기안(尹基安) 선생님(정의 여자 중고등학교 창설자)을 만나 교제하게 되었고, 그 분이 소장하고 하고 있던 많은 서적들을 빌려 보면서 새로운 학문과 일본 무교회 관련 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윤기안 선생께서 함석헌 선생님과 교제하고 있던 연유로 함 선생님을 덕안면까지 모셔 와서 신앙 모임을 여러 차례 가졌고, 최태사(崔泰士) 선생님등 많은 분들과 교제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본 천황에 대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요구하던 때여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주 피신 하곤 했는데, 김윤섭(金允燮) 전도사가 숨어 있는 동안 그가 목회하던 덕인동(德仁洞) 교회를 맡아 달라고 부탁해서 아버지가 약 6개월간 시무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한 방안을 의논하던 중에 김윤섭(金允燮) 전도사, 김광호씨와 함께 귀성군을 경유해서 삭주군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는 계획을 세우고 집을 떠났다가 계획 미비로 도중에 집으로 돌아 온 적도 있었다.
1941년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한국의 젊은 남자들을 일본군인으로 전쟁터에 내 보내는 때여서, 모두들 불안한 상황에 떨면서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다. 더구나 유일한 남자로써 집안을 끌고 가야 할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다면 살아서 돌아 온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 때였기에 모든 가족이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으로 배달된 일본군 징집서에 놀란 아버지는 계창주 목사님을 찾아가 징용을 피할 방법을 상의하였고,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학생 신분을 갖고 있으면 징용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회에서 치르는 시취 시험을 통과한 후, 평양 신학교에 합격하여 주중에는 기숙사에 머물며 일본군 징용을 피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1947년 졸업을 앞두고 남쪽으로 내려 오게 되어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1943년경에는 아버지의 6촌 형 홍근(弘根)께서 타지에서 옥사하셔서 그 시신을 수습하러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長春)까지 기차를 타고 갔는데, 이때 일본 경찰의 신사참배 압박과 일본군 징용을 피할 곳을 찾기 위한 복선의 목적을 갖고 가셨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에 발을 디뎠을 때는 숙연한 마음으로 그곳을 둘러 보셨다는 기록을 남기셨다. 이때 아버지 생애 처음으로 러시아의 건축물과 외국의 물품과 모습을 보게 된 기회였고, 하얼빈 및 만주 지역의 광활함에 큰 충격을 받고 돌아 오셨다.

(2) 월남
히로시마에 떨어 진 원자폭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38선 북쪽에는 소련이 들어 와 공산주의 사회로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고, 토지 개혁으로 인해 재산을 빼앗긴 지주들, 공산주의에 반감을 갖게 된 수많은 지식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 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면사무소 직원이 ‘형님! 남오동 3구 민청 위원장 임명장입니다.’하면서 아버지에게 봉투를 주고 갔다. 아버지는 그 길로 이장 댁으로 달려 가 그 봉투를 돌려 주면서, ‘난 이런거 못하니 다른 사람 시키세요!’하고 돌아 왔다. 공산체제 조직이 아버지를 포섭하려 손을 뻗치는 것을 깨닫고 남쪽으로 내려 갈 계획을 암암리에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7년 3월 초, 교회에서 만난 박승방님으로부터 ‘함석헌 선생님이 수일 내로 평양에 나오셔서 38선을 넘을 계획이다’라는 말을 듣고 ‘저도 그동안 내려 갈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잘 됐군요! 평양 장기려(張起呂) 박사님 댁으로 가겠습니다.’하고 헤어졌다.
떠나는 전날 밤,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예배를 드리며 찬송가 '우리 다시 만날 때 까지'를 같이 불렀지만, 모두 울먹이는 목소리에 노래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소나무 언덕이 있는 곳까지 따라 오던 할머니에게, 그만 들어 가시라며 손을 흔들던 아버지의 모습이 두 사람의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평양에 도착하여 신학교 친구 최천구, 김준문의 기숙사에 짐을 내려 놓고, 평양 신학교 다닐 때 여러 번 만나 뵈었던 평양 중앙 병원 장기려 박사님을 찾아 갔더니 ‘함 선생님이 어제 용암포에서 오셨다.’고 하셔서 박사님 댁으로 따라 갔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함 선생님은 박승방님의 안내를 받으며 해주로 내려 가실 계획이라 했고, 아버지는 평양에서 원산을 거쳐 철원 쪽으로 내려 가기로 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서울에 도착하면 구기동 유영모(柳永模) 선생님 댁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불심검문에 걸려 구치소에서 몇 일을 보낸 후 풀려 나기도 했고, 몇 번의 아슬아슬한 위험을 피해 가며 38선을 넘은 아버지는 성북동에 있는 고향 친구의 집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먼저 내려 와 있던 절친한 친구 김정흡을 만났다. 얼마간 그곳에서 소일하던 아버지는, '고 김교신(金敎臣)선생님 댁에 일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함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정릉 한씨 사모님 댁으로 가서 머물었다.
1947년 말 즈음에, 북쪽과 남쪽의 정치 상황이 냉전체제로 바뀌어 가고, 제한적이나마 오가던 왕래마저도 어려워지면서 남과 북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화 되어 가는 형국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아무 연고없이 홀몸으로 서울에 내려와 일거리도 없이 지내던 아버지는, 두고 온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함 선생님께 그런 뜻을 말씀드렸다.
이때 함 선생님의 강하고 확고한 말씀이 아버지 삶, 나아가서 우리 가정의 방향을 크게 돌려 놓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북쪽으로 돌아 가려느냐? 북은 이미 다 버린거다. 고향도, 가족도 다 버리고 내려 온건데 거길 왜 다시 가겠다는거냐?"하고 강하게 말씀하셔서 아버지는 북으로 돌아 가려던 생각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때 함 선생님 역시 부모와 가족을 모두 남겨 둔 채 홀몸으로 내려 와 계셨다. '아버지가 북으로 돌아 가셨다면 과연 지금의 우리 가족이나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함 선생님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에 감탄할 뿐이다.)
1948년 초, '충남 홍성 근처 시골 작은 교회에 목회자가 필요한데 그곳에 가서 목회를 해 보라'는 함 선생님의 제의를 들었지만 여러가지 생각 끝에 거절했더니 '목회를 하긴 해야 할 사람인데 본인이 싫다고 하니 할 수 없지....'하고 말씀하셨다 한다.
얼마 후 다시 함 선생님께서 '인천에서 '주신 목장'을 운영하는 김봉국 선생 댁에 가서 일을 좀 도와주라'는 제안에는 선뜻 마음이 내켜 인천에 내려 가 생활하게 되었고, 그 해 10월 중순에 이북에 남아 있던 나의 어머니와 진석 형, 나의 증조 할머니가 서해를 통해 밀선으로 내려 와 극적으로 재회 하였다.
< 글 2 > 로 이어짐




가운데가 나의 고모 김옥근. 나의 할머니와 이북에 남아 한번도 만나 본 적 없다. 나의 아버지와 1947년에 헤어진게 마지막이 되었고, 나의 아버지보다 먼저 2000년에 돌아 가셨다.

이 사진은 중국에 살고 있던 먼 친척 계근 삼촌(오른쪽)이 1993년 7월 북한을 방문하여 친척을 만나 찍은 사진을 캐나다에 있는 우리에게 보내 주어서 고모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분단의 아픔!










유영모 선생(흰 수염)댁 정원에서.(1960년경. 구기동)
가운데 키 작으신분이 최태사 의사 선생님. 왼쪽에서 네번째가 아버지.


1964년경부터 1982년 캐나다로 이민 오기 직전까지 엄청난 피와 땀을 흘렸던 곳. 이제는 아파트 단지와 새로 어지럽게 만들어진 아스팔트 길로 옛 모습을 다 잃어 버렸지만, 내 마음 속엔 그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함석헌 선생님과 나의 아버지(뒷줄 왼쪽)

진석 형(앞에 학생모자) 1953년경. 성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대구 미군 공군부대에서 목수로 일하던 때.

함석헌 선생님(중절모 쓴 이)
왼쪽부터: 김동욱. 최익상. 아버지. 함선생님. 김해암. 김봉국. 함석조. 앞에 앉은이는 고창정

1951년경




부모님의 뒷 모습....

2006년 여름.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 공원에서.


Ottawa Parliament Hill 국회의사당에서
Ottawa River를 바라보며


아버지가 직접 그린 고향 지도. 5번 삼각형이 우리 집 위치



아버지 그린 지도가 한자로 표기 되어 있어서 내가 다시 그리고 한글로 표기함.



나의 아버지 김기근, 어머니 박찬빈 생전 모습


Grace Hyej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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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오마이뉴스에 기고 해 보시지요? 혼자 읽기 너무 아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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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 h
  • 선생님..기억을 위한 기록.. 중요하고 꼭 해야하는 일이지요. 멋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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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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