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8

대한진국(大韓陣國)과 진민(陣民)의 탄생|신동아 2310

대한진국(大韓陣國)과 진민(陣民)의 탄생|신동아

대한진국(大韓陣國)과 진민(陣民)의 탄생

[강준만의 회색지대] 왜 우리는 ‘진영 논리’를 키우면서 욕하는가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입력2023-10-05
 
● 편가르기 싸움에서 진실은 쓰레기통에
●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도리는 없다”
● 2019년 조국 사태는 ‘좌우’ 아닌 ‘수준’ 문제
● ‘부대’와 ‘빠’들이 휘두르는 예초기에 상식 찢긴 지 오래
● 진영 논리가 탐욕의 문제라면 ‘계몽’ 아닌 ‘통제’가 답
● 진영 있어야 보장받는 영향력·자리·계급이 문제
● 바야흐로 정치군수업자들의 전성시대
● ‘밥그릇 논리’로 귀결되는 진영 논리 개혁 시급

“진영 논리는 보수와 진보 혹은 좌와 우라는 특정한 이념과 이념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 조직, 패거리, 파벌 등이 자신의 집단과 타인 집단의 경계를 배타적으로 구분하여 상대와 맞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이념적 정파적 논리와 태도 그리고 전략전술을 제공하는 하나의 ‘이념적 틀’(이데올로기)과 ‘패러다임’(세계관)이다.”

정치학자 채진원이 ‘진영 논리의 극복과 중도정치에 대한 탐색적 논의’(2014)라는 논문에서 내린 정의다.

진영 논리는 모두가 욕하지만,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멍에다. 진영 논리는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너의 진영 논리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악(惡)이지만, 나의 진영 논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숭고한 대의로 반드시 수호해야 할 선(善)이라는 게 진영 논리 중독자들의 생각이다. 그러니 나의 진영 논리는 진영 논리가 아닌 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기후변화를 부정한 공화당원들지금은 너무도 익숙한 말이 됐지만, 진영 논리라는 말이 지금처럼 널리 쓰인 건 1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채진원은 저서 ‘무엇이 우리 정치를 위협하는가: 양극화에 맞서는 21세기 중도정치’(2016)에서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주요 언론을 통해 노출된 진영 논리 검색어의 횟수를 분석했다. 이 분석에 따르면, 2000년 175회이던 검색어는 2011년 748회로 약 7배 증가했다. 증가의 전환점은 826회를 보여준 2007년이다. 2007년에 진영 논리 검색어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은 17대 대선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간의 이념 갈등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2013년 이후 진영 논리란 검색어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결국 오늘날엔 우리의 일상용어로 자리 잡게 됐다. 채진원은 진영 논리의 문제점으로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진영 논리는 자신의 이념과 진영 이외에는 중도와 무당파 등 다른 정치적 다양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특정 이념만을 부풀려 반영함으로써 정치적 다양성을 정치 과정과 대의 과정에 반영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 진영 논리는 정치적 다양성과 정치적 공론장의 형성을 약화시킴으로써 민주주의 절차적 두 축인 ‘대표성’과 ‘숙의성’을 약화시킨다. 셋째, 이러한 대표성과 숙의성 약화로 나타나는 ‘반응성’과 ‘책임성’ 약화는 유권자의 정치 불신을 조장하고 정치적 효능감을 낮추게 됨으로써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넷째, 진영 논리가 이념주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환원해 해석함으로써 나타나는 정당의 이념적 양극화와 정치공학적 편향성 동원 전략은 유권자의 민심과 정당의 당심을 분열시킨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 삶에서 접할 수 있는 진영 논리의 부정적인 면은 일반 유권자가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유보하거나 뒤집은 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주장을 따라가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진영 논리에 의해 과학적 견해가 바뀔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미국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자. 경제학자 유종일이 ‘한겨레’(2014년 1월 14일자) 칼럼에서 말한 걸 소개하련다.

2010년 미국 내 갤럽 조사에 의하면 ‘인간에 의해 기후변화가 초래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의 비율이 공화당원들 사이에서는 31%에 불과했고, 민주당원들 사이에서는 66%였다. 묘한 것은 1998년 조사에서는 두 집단 간에 이 비율이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12년 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미국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 때문이었다. 그는 집권기간(2001년 1월~2009년 1월) 내내 국제기후변화협약의 구체적 이행 방안인 교토의정서에 반대하면서 이를 민주당과 대립하는 정치적 이슈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유종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자 공화당원들 사이에서는 기후변화를 부정해야 자기 진영에 충성도가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기후변화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며 걱정하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불편함이 발생한 것이다. 과학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일수록 전문가의 판단과 진실에 대한 존중보다는 자신이 속한 진영 내부에서의 심리적 편안함과 사회적 인정을 추구했다. (…) 과학적 판단의 문제도 일단 정치적 이슈가 되면 전문가의 견해를 근거도 없이 무시하고, 진영 논리에 휩쓸려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게 된다. 편가르기 싸움이 벌어지면 객관적 사실과 증거에 입각한 합리적 토론은 사라지고 진실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조국 사태’는 ‘진영 논리 폭발 사태’


2019년 8월 27일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서울 종로구에 마련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언론에 심경을 밝히고 있다. 이날 검찰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뉴시스]“진영 내부에서의 심리적 편안함과 사회적 인정”, 이게 참 무서운 말이다. 일견 유치하고 추해 보이는 진영 논리가 진영에 속한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지 그 메커니즘의 핵심을 잘 짚어준 말이기 때문이다. 진영의 주류 의견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는 순간 외로워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탈의 정도가 심해지면 비난이 빗발치고 지인들의 거센 압박이 들어온다.

자기 진영에서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되면, 반대편 진영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가? 잠시 그럴 수도 있고 이론적으론 가능한 일이지만, 실제 세계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다. 특히 한국처럼 진영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곳에선 더욱 그렇다. 그간 자신의 주요 삶이 특정 진영 내에서 이뤄져 왔는데, 그걸 다 내팽개치고 새로 시작할 수 있겠는가?

진영 논리를 넘어서 사실과 진실에 다가서려는 시도는 늘 소수에 의해서나마 이뤄져왔지만, 여기엔 이미 진영 논리의 기득권자나 포로가 된 사람들의 공격이 가해지곤 했다. 소설가 김훈은 “사실 위에 정의를 세울 수는 있어도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도리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지만, 진영 논리는 늘 사실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도록 요구한다.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한겨레 사회부장 강희철은 ‘신문 만들기의 어려움’(2014년 10월 20일자)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그런 요구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언론인의 비애를 털어놓았다.

사고 발생 한 달이 돼가던 5월 13일, 한겨레는 두 면에 걸쳐 ‘세월호 여섯 가지 소문과 사실 확인’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SNS 등을 온상으로 창궐하던 대표적 풍문들을 꼼꼼히 검증해 무엇이 사실인지를 독자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었으니,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과 의견의 경계를 애써 무시하려는 ‘어떤 사람들’은 기사를 쓴 기자들을 주저 없이 ‘기레기’로 매도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강희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반응은 주로 ‘한겨레’를 ‘자기편’이라고 생각해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나왔다. 그들 중엔 대놓고 ‘절독’을 들먹이며 ‘위협’하는 부류도 있었다. 사실이야 어떻든 자신들의 확신만을 기사로 쓰라는 노골적인 압력으로 들렸다. 그런 악다구니에 놀라 왜 그런 기사를 썼냐고 은근히 따져 물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일부 ‘내부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때도 이미 세월호 사건은 진영 논리에 휘말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사회에서 이 사건 역시 무사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영 논리는 민주당의 고질병이 돼갔고, 민주당도 이 문제를 절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016년 1월 26일 민주당 뉴파티위원회는 ”기존 우리 당에서 있었던 나쁜 문화와 고질적 병폐가 국민들에게 심각한 불신과 실망을 안겨드렸음을 깊이 반성한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올드파티인 기존 정당에 대비되는 뉴파티 거부 10계명을 선정해 발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 10번째 계명이 인상적이었다.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후 진영 논리에 더 빠져들었고, 이를 잘 보여준 게 2018년 7월 29일 민주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 출마한 이해찬이 내놓은 이른바 ‘20년 집권론’이었다. 그는 “개혁 정책이 뿌리내리려면 20년 정도는 집권하는 계획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국가와 국민보다는 민주당 진영 중심의 발상이었다.

훗날 누군가가 ‘진영 논리의 역사’라는 책을 쓴다면 2019년 8월 27일은 진영 논리의 열정이 폭발한 사태의 시발점으로 기록할 것이 틀림없다. 여야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일정을 결정한 상황에서 돌연 검찰이 조국 주변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임으로써 이른바 ‘조국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2019년 8월 27일 검찰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사모펀드 관련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이날 서울 영등포구 한국투자증권 영등포PB센터 앞에 취재진이 몰려 있다. [뉴시스]그로부터 약 2주 후인 9월 9일 ‘동아일보’ 논설주간 박제균은 ‘이게 정말 나라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조국 사태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높이, 즉 수준의 문제다. 사람이면 마땅히 갖춰야 할 격(格)의 수준 말이다”라며 이렇게 개탄했다.

“한데 이걸 자꾸 좌우의 문제로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 수준의 문제를 좌파·우파의 진영 논리로 호도하려는 사특한 기도다. 그런데 그게 먹힌다. 대한민국의 기막힌 현실이다. 좌우 진영 논리는 어느새 이 나라에서 만능 열쇠가 돼버렸다. (…) 심지어 실정법을 어겨도 진영의 틀 안에서 정신적 무죄를 받는다. 그래서 누구보다 떳떳하다. 정상적인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대한진국(大韓陣國)의 지속과 고착2019년 가을 내내 한국은 ‘조국 사태’로 뜨거웠다. 언론엔 큰 시련의 계절이었다. 한겨레 논설위원 곽정수는 한국기자협회보(2019년 12월 4일자)에 기고한 “‘진영 논리’서 독립한 새 언론을 갈망하며”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30여 년 전 ‘땡전뉴스 시대’의 공포는 사라졌지만, 이젠 ‘진영 논리’라는 새로운 성역이 만들어졌다고 개탄했다. “요즘에는 진보성향 언론이 어쩌다 진보 정부를 비판하면, 팩트 여부와 상관없이 진보성향 독자들로부터 ‘기레기’라는 욕이 쏟아진다. 보수성향 언론도 똑같은 처지다. 기사의 기본인 ‘팩트’가 설 자리가 사라졌다.”

그런 비극은 2020년에도 지속됐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경향신문’(2020년 7월 22일자) 칼럼에서 “나를 포함, 미디어의 폭발과 그들이 쏟아내는 뉴스를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며 “나 역시 진영 논리에 갇혀 자기 검열, 커뮤니티의 검열, 사회적 검열 때문에 하고 싶은 말 혹은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니, 답답하다”고 했다.

시인 김택근은 경향신문(2020년 7월 25일자) 칼럼에서 둘로 갈라진 세상을 묘사하는 데에 ‘예초기(刈草機)’라는 비유를 동원했다. “우리 사회도 예초기가 돌아가고 있다. 진영 논리(논리 아닌 생떼라 하고 싶다)가 다양한 의견과 건전한 비판까지 밀어버리고 있다. ‘부대’와 ‘빠’들이 휘두르는 예초기에 금도와 상식이 찢기고 있다. 우리 편이 아니면 살피거나 따져보지 않는다. 결론을 미리 내고 논리는 나중에 세운다. 먹물들도 편싸움에 가담해 시류에 둥둥 떠다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악담이 서로를 저주하며 썩어가고 있다.”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정권이 출범했지만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악화됐다. 정치학자 박명림은 경향신문(2023년 6월 16일자)에 기고한 ‘‘진영공화국’의 고착 막아, 나라의 살 길 틔워야 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지금 한국은 진영국가와 진영시민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다. 좌파국가와 우파국가, 보수시민과 진보시민으로 정렬되고 있다. 진민(陣民)의 탄생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영은 본래 극, 군대 주둔 진지, 파벌·부족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공통점은 투쟁대오 또는 시민 이전 상태를 말한다. 이성과 대화, 도덕과 법률 이전의 가족과 혈연, 명령과 복종의 단계나 상태를 말한다. 민주공화국에서 국민과 시민들의 갈등은 결코 진영과 진지 간의 죽기살기 투쟁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진영화·진민화의 길은 문명화·시민화·근대화·공화화의 반대다. 포퓰리즘과 중우정으로 치닫는, 국민과 시민이 아니라 신민(臣民)과 우민(愚民)의 토대가 되고 있는 진민의 고착을 막아야 한다.”

이어 그는 “일부는 벌써 확실히 국민과 시민을 넘어 철저하게 신민과 진민으로 행동한다. 진민들에게 상대 절반은 증오와 혐오, 적대와 척결의 대상일 뿐이다. 진민들은 마음속에서는 이미 반대 진민들이 사라져주길 바라고 있다. 안 된다. 반대다. 자기 진영과 진영 주자의 승리 때 흘리는 눈물을 옆 사람과 이웃을 위해 흘릴 수 있을 때 나도 나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라도 똑같다. 나라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든다. 그 남들을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속한 진영과 나라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을 망칠 진영국가, 즉 대한진국(大韓陣國)의 지속과 고착만은 막아야 한다.”


입으로만 진영 논리 비판하는 여야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진영 논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비판하는 망국병이다. 우리는 박명림의 사자후(獅子吼)를 비롯해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진영 논리 비판을 잘 감상했지만, 문제는 ‘어떻게’다. 어떻게 진영 논리를 넘어서거나 그걸 없앨 수 있을까.

혹 우리는 모두 다 진영 논리는 나쁘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진영 논리를 키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적어도 집단적인 진영 논리 키우기를 방관하거나 그 일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진영 논리를 비판하는 위선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쉽게 말해, 왜 우리는 ‘진영 논리’를 욕하면서도 사실상 그걸 키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 이게 이 글을 쓰게 된 나의 문제의식이었다.

우리는 앞서 진영 논리에 의해 과학적 견해가 바뀔 수 있다는 미국 사례를 보았다. 한국에서 일본의 오염수 방류 문제는 어떤가. 문재인 정권의 외교부 장관 정의용은 2021년 4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에서 일본의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성물질 오염수 해양 방류 결정에 대해 “(정보 제공 등) 세 가지 여건이 마련되고 (오염수 방류가) 국제원자력기구(IAEA) 기준에 맞는 적합성 절차에 따라서 된다면 굳이 반대할 건 없다”고 말했다.




2021년 4월 20일 정의용 당시 외교부 장관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인한 오염수 방류 결정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 기준에 맞는 적합성 절차에 따라서 된다면 굳이 반대할 건 없다”고 말했다. [공동취재사진]물론 이는 곧 문재인의 생각이기도 했다. 만약 이재명 정권이 들어섰다면 달라졌을까. 그럴 리 없다. 그러나 들어선 건 윤석열 정권이었고, 그래서 이재명 진영에서 진영 논리와 내로남불의 원리가 작동했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이 8월 25일자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한 것처럼 말이다.

“오염수 방류를 보는 시각은 대개 정치적 성향과 맞아떨어진다. 오염수 방류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기보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찬반으로 쏠린다.
인간 본성이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이기에 정치적 세몰이에 휩쓸리기 쉽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스스로 ‘이성적’이라 자부하며,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비이성적’이라며 배척한다. 착각이다. 이성적인 인간이 되려면 먼저 스스로 비이성적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비이성적이다.”

이 칼럼의 취지에 전폭적 지지를 보내지만, ‘이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과학을 진영 논리에 종속시키는 게 이성적인 것일 수도 있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나의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했다. 흄의 논점은 우리가 무엇을 욕구하든 그것이 이성의 판단에 입각할 수는 없으며, 이성은 주어진 목적에 대한 수단을 모색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때 아닌 ‘이성 논쟁’을 벌일 수는 없다. 그냥 쉽게 ‘어리석음’과 ‘탐욕’을 대비해 보자. ‘어리석음’과 ‘탐욕’의 경계가 늘 명확한 건 아니지만, 어떤 행위의 주요 원인을 ‘어리석음’으로 보느냐 ‘탐욕’으로 보느냐에 따라 대응 방안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진영 논리가 어리석음 때문이라면 그걸 깨우쳐줄 수 있는 계몽이 답이겠지만, 탐욕 때문이라면 탐욕의 통제가 답일 게다.

전반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진영 논리 비판은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 비판은 동어반복에 가깝다. 해법이 사실상 계몽에만 치우치고 있을 뿐 기존 제도와 관행 중 무얼 어떻게 바꿔보자는 구체적 제안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아니 손으론 진영 논리를 키우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입으로만 진영 논리를 비판하는 모순적 행태가 집단적으로 저질러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영 논리를 일종의 문법으로 본다면, 그건 정치적 문법인 동시에 경제적 문법이지만, 우리는 사실상 정치적 측면에만 주목할 뿐 경제적인 측면은 외면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밥그릇 전쟁’으로 인한 ‘분열 디폴트’누구나 인정하겠지만, 한국 정치는 전형적인 승자독식 전쟁이다. 전형적이라 함은 한국의 승자독식 정도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심하다는 뜻이다. 선거에서 이긴 진영의 승자독식 체제는 한국 특유의 연고 중심의 사적 네트워크와 결합하면서 전체 국민의 절반 이상을 진영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고 들어간다. 한국 사회의 최대 문제는 바로 이런 ‘밥그릇 전쟁’으로 인한 ‘분열 디폴트’에 있는 것이지, 어떤 진영이 승리하느냐는 부차적 문제다. 어느 한 진영이 상대 진영을 완전히 압도해 버린다면 ‘분열의 사회적 비용’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겠지만, 그게 불가능한 이상 어떤 정치와 개혁도 분열 비용을 넘어서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만다.

진영 논리의 본산은 승자독식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정당이다. 거대 정당들은 서로 원수처럼 싸우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일에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로 협력을 잘한다. 이들은 정당의 힘을 키우기 위해 온 사회를 정치판으로 만든다. 한국에서 실제로는 중도의 비중이 꽤 높음에도 중도가 지속적인 정치세력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 거대 정당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영향력·자리·계급을 보장받는다는 걸 반세기 넘게 보아온 집단적 학습효과 때문이다. 입으론 무슨 미사여구를 늘어놓건 거대 정당들이 암묵적으로 사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늘 단순 명료하다. “우리에게 줄 서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 한국처럼 정치 과잉인 나라에서 그 메시지는 절대 어겨서는 안 될 철칙이 되고 만다.

공익적 목적을 위해 진정한 의미의 참여를 원하는 사람일지라도 정당에 줄을 서지 않고선 기회를 얻기 어렵다. 각종 공적 조직의 대표, 이사, 위원의 문호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걸 전제로 만인에게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진영에 대한 충성도와 친밀도로 결정된다. 정당의 힘을 빌려 특정 자리를 차지했더라도 자신의 독립적인 소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이론적으론 열려 있지만, 그건 이론일 뿐이다. 한국에선 자주 ‘법’보다는 ‘문화’가 더 무섭다.

이와 관련, 8월 24일 ‘미디어오늘’이 주최한 ‘2023 미디어의 미래 컨퍼런스’에서 언론학자 강형철이 중요한 말을 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는 한국이 서구보다 크게 문제적이지 않다. BBC는 이사회를 정부가 뽑는다. 그럼에도 공정하다고 한다. 정치 문화의 차이가 있고, 정권 바뀌었다고 무도하게 사장 잘라내는 게 없다. 그렇다 보니 조직 내 프로페셔널리즘이 발전한다. 법이 아니라 실행의 문제다.”

그렇다. 영국에선 무난하게 추진할 수 있는 일도 한국에선 안 된다. 한국에선 특정 진영의 도움으로 공직을 맡은 사람이 진영 논리를 거부하면 도움을 준 사람들로부터 다시는 상종해선 안 될 사람으로 낙인찍히며, 이는 진영 내에선 퇴출된 것이나 다름없다. 멀쩡하던 사람, 아니 존경을 누리던 사람들마저 정당의 추천이나 도움을 받아 어떤 공직을 맡고 나면 그 정당 진영의 하수인 역할을 지나칠 정도로 잘해 내는 걸 우리는 질리도록 보아오지 않았던가.


누가 진영 논리를 방관하는가그럼에도 우리는 허공을 향해 진영 논리만을 탓할 뿐, 독립적인 지식인·전문가들의 정치화·진영화를 부추기고 강화하는 그런 시스템과 관행에 대해선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누가 그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하는가? 직종으로 보자면 언론인, 대학교수, 시민운동가, 변호사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이들은 그런 시스템과 관행의 최대 수혜자들이다. 그래도 비판을 하지 않을 순 없어서 하긴 하는데, 그 비판이란 게 상대 진영의 수혜자들을 향한 비리 의혹 제기 등과 같은 인신공격 수준에 불과하다. 자신들이 진영 논리의 전사(戰士)로 싸우는 것 자체에 대해선 아무런 말이 없다.

디지털 혁명은 진영 논리 전사들을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집단적으로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 민주당 의원 표창원은 ‘게으른 정의’(2021)에서 “극단적, 일방적으로 자기편에 유리한 선동을 하며 금전적 이익을 챙기는 언론이나 유튜버 등 소위 ‘진영 스피커’들”을 가리켜 ‘정치군수업자’라고 했는데, 때는 바야흐로 그런 정치군수업자들의 전성시대다.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비교적 드물다. 정치군수업자들이 보수·진보에 걸쳐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일까?

정치군수업자들의 유튜브 등과 같은 아지트는 진영 논리의 극단화를 집단적 오락으로까지 승격시켜 온 나라를 증오와 혐오의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 군수업자들에게 환호하는 사람들은 무지하거나 어리석어서 그러는 걸까? 2021년 중앙선거관리위에 각 정당이 보고한 ‘2021년도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보고’는 좀 다른 그림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이 보고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485만여 명, 국민의힘 407만여 명, 정의당 5만여 명 등 한국의 전체 정당 당원 수는 1042만여 명에 달했다. 대중 정당의 역사가 100년이 훨씬 넘는 영국·독일 등은 당원이 100만 명이 안 되고 감소 추세인데 한국은 1000만 당원으로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당원인 나라가 됐으니, 이 어찌 놀랄 일이 아니랴.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국회미래연구원이 공개한 ‘만들어진 당원: 우리는 어떻게 1천만 당원을 가진 나라가 되었나’란 제목의 보고서는 1000만 당원의 비밀을 80%에 달하는 △자신이 당원인지조차 모르는 ‘유령 당원’ △각종 공직 후보자들에 의해 ‘매집된 당원’ △대통령 후보자 등 특정 팬덤 리더를 위해 당을 ‘지배하려는 당원’ 등 3가지 유형으로 분석했다.

이 3가지 유형 가운데 ‘매집된 당원’과 ‘지배하려는 당원’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다. 한국적 처세술이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다. 진짜건 가짜건 특정 정당의 당원이 돼 정당의 권력 장악에 도움을 주는 건 ‘보험’의 가치가 있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영업자나 건설업자들이 정치적 카르텔 네트워크에 끼지 못하면 수의계약 한 건도 못 한다는 건 상식으로 통한다.

진영 논리? 지역에선 비웃는다. ‘밥그릇 논리’라고 부르는 게 옳다. 이제 우리는 진영 논리를 키우면서 욕하는 오래된 게임을 중단하고 진영 논리에 중독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렵게 만든 각종 제도와 관행을 찾아내 개혁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때가 됐다.



강준만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現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外





신동아 202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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