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 정외과 총동창회 "고은광순 '이모 미군 성상납' 증언 거짓"(종합)
송고시간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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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인기자
이유미기자
"이모 정외과 재학시기 등 사실관계 틀려…13살에 성상납 망언에 분노"
이대 "학교 역사 왜곡 유감"…총동창회 "1만1천여명 김 후보 사퇴 서명"
김준혁 후보자 사퇴 촉구하는 이대 총동창회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4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이대 총동창회 회원들이 김준혁 후보자의 망언을 규탄하며 사퇴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4.4.4 jjaeck9@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유미 장보인 기자 =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총동창회는 9일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후보의 '이대생 미군 성상납' 발언을 두고 "내 이모 일"이라며 사실이라고 주장한 고은광순 씨의 증언이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정외과 총동창회 회원들은 이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이모 일'이라고 주장한 고 씨의 고백은 사실과 전혀 다른 거짓"이라며 "13살에 이화여대 정외과를 다니며 성상납했다는 망언과 선동에 분노한다"고 말했다.
이대 사회학과 73학번이라고 밝힌 고은 씨는 지난 8일 기자회견에서 1935년 태어나 이대 정외과를 다닌 자신의 이모 은예옥 씨가 당시 김활란 이대 총장이 주도한 미군 성 상납 피해자였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고은 씨는 "이모가 잔디밭에 미군과 함께 앉아 있는 사진을 봤다. 여대생들이 미군들과 커플이 돼 집단 미팅을 하는 것과 같은 사진이었다. 1948년 무렵 낙랑클럽(에서) 김활란(당시 이대 총장)에게 걸린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외과 총동창회는 "고은 씨는 1948년에 이모가 정치외교학과 학생 내지는 졸업생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외과는 1950년 창설돼 1회 입학생을 맞았다"며 사실관계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또 "은예옥이란 학생은 1956년 입학해 1960년 졸업했다. 1948년 무렵 낙랑클럽에서 성 상납 당했다는 말은 사실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미 군정기는 1953년 끝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런 극단적 스토리텔링에 정치외교학과를 언급한 것에 대해 이대 정외과 학생들은 심히 불쾌하며 모욕감을 느낀다"며 고은 씨의 사과와 민주당의 김 후보 공천 철회를 촉구했다.
이화여대는 이날 고은 씨 발언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며 "고은 씨의 이모가 입학할 당시는 이미 낙랑클럽이 해체된 이후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후보 발언 이후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 사건의 본질은 김 후보의 막말과 여성 비하적 발언에 있으며 공직 후보자의 품위와 자격 조건에 관한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며 "본교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 사건의 본질을 흩트리고 학교의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에 대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이화여대 총동창회도 전날 오후 더불어민주당 여의도 당사에 1만1천533명의 동문이 서명한 김준혁 후보 사퇴 촉구 이화인 서명서를 전달하고 당대표의 책임 있는 답변을 촉구했다.
yu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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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광순] 이화여대에 드리는 공개서한
작성: 자유신청산민주연대
작성일 2024-04-17
이화여대에 드리는 공개서한
‘73학번 사회학 전공 고은광순 (’56학번 정치외교학과 은예* 조카)
총선과정에서 김준혁(수원 정)후보의 과거 발언(김활란의 친일행각과 미군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이대생 활용)을 상대진영이 ‘성상납’ 단어를 사용하여 변조하여 크게 문제 삼았고 연일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내 유년시절에 보았던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큰이모가 넓은 잔디 언덕에 머리에 쪽배처럼 앞뒤로 긴 모자를 쓴 미군과 함께 나란히 앉아있고 그 주변에도 역시 군인과 여성이 쌍쌍으로 앉아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아! 어린 나의 뇌리에 박혀있던 의문의 그 사진도 바로 그것과 관련이 있었나?
급히 미국에 있는 오빠와 카나다에 있는 막내 이모를 통해 큰이모가 1935년 출생했고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입학년도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모의 불행한 삶의 시작은 분명히 김활란 때문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근엄한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계셨던 모습으로 기억되는 외할아버지는 3남3녀 자녀에게 엄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가풍 속에서 미군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던 이모는 환영받을 수 없었지요. 맏이였던 어머니와는 자주 다투었지만 이모는 조카인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함박웃음을 터뜨렸던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던 이모가 언제부터인가는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가족은 냉대하고, 미국으로 떠난 애인은 소식이 없고... 뜨거운 가슴을 가졌던 이모에게 정신분열증은 지옥을 피하는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모는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할머니 돌아가신 뒤 우리 집에서 기거할 때도 있었는데 환청과 환시로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던 이모에게 나는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폭력적 발작을 보여 수용시설로 보내어진 이모. 수년 후 어머니는 이모가 수용시설에서 음식을 거부하고 마지막을 선택했다는 말을 전하시며 깊은 한숨을 토하셨습니다. 이후 이모는 어두운 동굴 속에 조용히 앉아있는 모습으로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했습니다. 활짝 피어보지 못한 꽃. 누구도 보듬어주지 않았던 꽃. 비참한 시간들만 안고 떠나버린 꽃.
낙랑클럽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이번 총선의 논란을 보고서야 이모의 비참한 삶은 김활란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입학년도를 확실히 말하지 못한 것을 두고 이대에서는 ‘13살에 이화여대 정외과를 다니며 성상납했다는 고은광순의 망언과 선동에 분노한다’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나는 ‘이모가 13살에 성상납했다’는 발언을 한 바가 없습니다.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은 <1935년생. 이름 은예*, 이대 정치외교학과. 미군과 어울린 이모의 사진은 미군과 여대생과의 미팅프로그램으로 보였음. 1948년 무렵부터 시작된 낙랑클럽, 재학 졸업이후인지 김활란한테 걸려들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 어떻게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나의 발언을 망언과 선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지 않은 말을 한 것처럼 망언과 선동을 하는 것은 이대 측입니다.
모윤숙, 박마리아와 함께 이화3인방이라 불리운 김활란은 1930년대부터 1945년 해방까지 지독한, 상상을 초월한 친일을 했습니다. 미국 영국은 짐승과 같은 침략자라며 조선의 청년들에게 미영과 맞서 싸워 유골이 되어 영광되게 돌아오라고 부추겼던 김활란은 일본이 패망하자 카멜레온처럼 변신해서 미국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녀를 여성교육의 선구자, 여성교육기관의 발전을 위해 애쓴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을 원수로 여기며 친일했던 사람이 친미로 신분세탁을 하기 위한 도구로 제자들을 이용했는데 이런 자를 어찌 여성교육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군방첩대 CIC의 공개문서를 보면 1948. 49년경 조직된 낙랑클럽은 ‘영어가 능통한 고학력자 여성’이 모여 김활란총재(고문), 모윤숙회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고급 호스티스단체’입니다. 외국 귀빈, 미군 장성, 외교사절 등을 접대하기 위해 항상 파티 계획을 했고 때로 어딴 이는 정부(情婦)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1공화국 기간 중 15개 중요협정 중 최고로 일컬어지는 한미경제조정협정(1952. 5 마이어협정)은 <70대 대통령 이승만, 40대 장관 백두진, 20대 여대생들>의 합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협상과정에서 일(미국으로부터 1억 달러 받아내는)이 잘 안 풀리자 김활란 총장에 연락해서 영문과 학생들에게 한복을 입힌 뒤 부산 송도의 미진호텔 파티장으로 보내 시중을 들도록 했고 다음날 미국 측으로부터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지요. 김활란은 이승만 정권에게 고급 호스테스를 대주는 공급책이었습니다. 물론 미국은 돈을 주면서 끊임없이 내정간섭을 하게 됩니다.
박혜성(찰스턴 서던 대학교)은 그의 논문 Christian Feminist Helen Kim and Her Compromise in Service to Syngman Rhee에서 김활란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활동 중 하나로 기생파티를 꼽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을 위해 미군 등을 접대했고 이대학생들과 동문들을 이용했는데 1948~1960 간에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1951년 1월에는 정보친선비상시민연맹(Emergency Citizens League for Information and Friendly Relations)을 설립했는데 이 중 하나의 활동이 기생파티였고 이 논문은 김활란의 기독교와 페미니스트 신앙이 어떻게 여성의 몸을 착취하게 되었는지 탐구한다고 밝혔습니다.
박혜성씨의 논문대로라면 이모가 재학중이던 1956~1961년에도 김활란은 여전히 팔을 걷어붙이고 이승만정권을 위해 이대생들을 도구로 이용하여 미군을 접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급 호스테스들의 낙랑클럽은 다른 이름으로 적어도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60년까지 꾸준하게 작동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이모의 비참한 삶은 일본의 개가 되었다가 해방 후 180도 변신하여 이승만의 개가 되었던 김활란 때문이라는 것이 너무나 확실해졌습니다.
김활란의 동상이 이대교정에 버티고 있는 것은 너무나 치욕적인 일입니다. 후배들이 수차례 김활란 동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지만 이화여대 당국은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화여대는 역사의식도 민족의식도 교육의식도 없는 김활란 따위를 영웅시하면서 역사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화여대는 정권에 아부하기 위해, 신분의 변신을 위해 이용했던 내 이모 은예*과 동 시대에 이용당했던 학생들에게 깊이 사과해야 합니다.
이화여대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말고 이제라도 김활란의 치명적인 과오를 인정해야 합니다. 김활란의 동상을 치우고 차라리 그 자리에 메리 스크랜튼 여사의 동상을 세우십시오. 아니면 동상 앞에 그녀의 과오를 낱낱이 기록한 비석을 세우고 대학당국도 제대로 된 여성교육에 대해 고민하십시오. 일본이 권력을 가졌을 때 일본에 붙었다가, 미군이 점령하니 미국에 붙었다가, 이승만 독재의 하수인이 되었다가 박정희 심부름을 다녔던 김활란. 카멜레온과 같은 그런 지도자를 받드는 교육기관이 제대로 된 제자들을 키울 수는 없습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수백 년간 한국의 여성들을 옥죄어온 호주제 폐지를 주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화여대에서 두 번이나 제적된 본인 고은광순입니다. 여성운동 이후 제가 현재 집중하고 있는 것은 평화운동입니다. 한 세기 전에 선조들이 외쳤던 척양척왜(斥洋斥倭)는 지금 이 시기에도 절박한 구호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한 민족의 분단을 공고히 하고 70년 넘게 전쟁을 끝내지 못하게 방해하면서 동포간 전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미자주 한국중립화 운동>을 시작합니다. 외군과 군사동맹 맺지 않고, 외군에게 기지를 내어주지 않고, 외군과 군사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키지도 휘말리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면서 평화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대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당당한 여성들을 키워내는 교육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달라진 이화여대에서 배출된 후배들은 할 일 많은 한반도의 자랑스러운 주역이 될 것입니다.
2024. 4. 11 고은광순(‘73. 사회학 / 2회 제적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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