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호 (2012.05.01) [72]목차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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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김정은 북한`을 읽기 위한 절대지식 10가지 에필로그
분단 67년간 쌓인 남북의 이질감 어찌할까
조우석 문화평론가 thebol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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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사람은 외면하고, 북한 사람은 쉽게 분노하는 안타까운 현실…
탈북자·북한 인권문제 더 이상의 침묵은 안 된다
얼마 전 TV로 방영된 다큐멘터리영화 <김정일리아(Kimjongilia)>를 보며 몇 번이나 속 울음을 삼켜야 했다. 참혹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이 이만할까? “1995년 대홍수로 (북한)국토 75%가 피해를 입은 뒤 굶어 죽고, 물에 쓸려 죽은 시체 처리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김정일 지시 아래 인민군 대대 단위로 시체 처리반을 만들어 그걸 파묻느라(…).”북한 억양 탈북자의 증언이다.
<김정일리아>는 유럽연합(EU) 의회, 워싱턴DC 등에서 먼저 상영된 다음 지난해 국내 개봉됐다. 동족이 당면한 묵시록적 현실 앞에 아연해진다. 저 비참한 현실의 디테일과 역사적 맥락을 우리 사회는 얼마나 자세히 알까? 영화에 따르면 김일성 사망(1994년) 3년 전부터 하루 두 끼 먹기 운동을 전개했다. 95년 대홍수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더 놀라운 건 다음의 증언이다. “만일 북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지금도 저는 김일성·김정일을 존경하고 있었을 겁니다.”
굶어 죽는 인민이 앞으로 더 나와도 북한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왜? 김정일 장남 김정남의 지적대로, 북한은 진퇴양난이다. 개혁 개방을 하면 체제가 무너지고, 안 하면 경제가 더 망가지는 구조다. 신간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중앙m&b)에 나오는 육성 증언이 그러하다. 김정남과 이메일을 교환하고 인터뷰도 해서 그 책을 쓴 일본인 저자 고미 요지(도쿄신문 기자)는 결론 삼아 “김정은은 아버지 이상으로 강경하고 비정한 지도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공포정치가 일상화되고, 주민들이 자동인형이 된 역사적 배경을 월간중앙 3~4월호의 ‘절대지식 10가지’ 상·하편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 글에 기록된 이야기와 정보는 <김정일리아>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특히 북한주민 중 고학력자이거나, 꼿꼿한 성격을 가진 사람 상당수가 자살을 많이 했다는 증언이 스치듯 나왔을 때 ‘절대지식 10가지’에서 언급한 1967년 미술사학자 김용준의 비극적 자살 이미지가 겹쳐져 깜짝 놀랐다. 북한 주민들이 가장 경계하는 게 “수정주의 날라리풍!”이라는 지적을 받는 일이다. 개혁 개방을 말하는 건 수정주의이며, 자유주의적 개성 따위는 날라리풍으로 규정돼 혼쭐나는 게 저들의 끔찍한 일상이다.
미국여성 N.C. 헤이킨이 연출한 <김정일리아>에는 탈북자 12명이 등장한다. 러시아 유학파 피아니스트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곡을 연주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수용소에 감금된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뒤 탈출을 감행한 ‘대 이은 수용소 출신’도 있다. 이 영화는 2009년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상, 2010년 프라하 원월드영화제 올해의 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리얼리티가 그만큼 충격이기 때문이다.
1997년 첫 탈북자 13명의 대하 스토리
참혹성에서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와 동급이다. 기아(飢餓)로 인한 떼죽음만 따지자면, 1950년대 대약진운동 때 3000만 명을 굶겨 죽인 중국 마오쩌둥의 정책실패와 비교된다. 문제는 이 사안을 제대로 다루는 사람이 우리가 아닌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헤이킨 감독은 “탈북 증언을 녹화하며 눈시울을 붉힌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북한 인권을 보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 종북주의 논쟁도 잦다. 북한을 둘러싼 지적 탈진(脫盡)현상’ 내지 ‘지적 분열현상’이다. 15년 전 황장엽 망명 때 비장했던 그의 발언을 기억하시는가?
“가능하면 나는 생의 마지막까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 기여하고 싶다. (…)민족이 분열되어 반세기가 지났지만 (서로) 통일을 말하면서도 북은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떠든다. 이들을 어떻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민족의 적지 않은 인구가 굶주리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부 갈등으로) 데모만 벌이는 (남한) 사람들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황장엽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서문. 일부 문장 다듬었음)
남과 북의 차이와 불신은 얼마나 거대하며, 과연 그게 극복 가능하겠는가? ‘프랑켄슈타인 국가’ 북한을 알면 알수록, 그걸 초기(初期) 디자인한 문제적 인간 김일성·김정일의 실체를 파면 팔수록 자꾸만 겁이 난다.
황장엽의 망명 몇 개월 뒤인 1997년 여름, 북한 남녀 13명이 서울을 찾아왔다. 그들은 북한 식량난을 세계에 알린 기아 난민 제1호였으나 당시는 그 의미를 잘 몰랐다. 단 1980년대 김만철 가족과는 분위기가 달라 귀순자 대신 탈북자로 불렀다. 13명은 실은 대단한 행운아였다.
그 즈음 북한-중국 국경마을에 숨어 지내던 ‘유령의 탈북자’ 수천 명의 일부였다. 앉아서 굶어 죽느니 살기 위해 뛰쳐나온 그들을 돕겠다고 한국의 젊은 활동가들이 나섰다.(그 비참한 현실을 알린 KBS 스페셜 <북한 꽃제비>가 방영된 때는 그 이듬해인 1998년 12월이다.)
구출한 13명을 제3의 은신처인 베이징의 아파트에 수용했다. 그러고는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 망명 신청서를 넣었다. 지금껏 강제 북송을 해오던 중국 눈치가 묘했다. 몇 개월 전 황장엽 사건의 여파가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탈북자 13명을 제3국으로 이동시키자는 절충안을 내놨다. 중국 땅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상황의 전개를 원치 않는다, 자기들은 빠지겠다는 뜻이었다. 유령처럼 살던 13명은 탈북 도우미와 함께 7000㎞의 대장정에 나서야 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은둔하던 그들, 난생 처음 얼굴을 맞댄 그들은 생각도 못했던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중국 공안이 무서우니 아파트는 한국인 두 명만 사는 걸로 위장됐다. 13명은 바깥출입은 고사하고 여름에 커튼도 못 열고 살았다. 정체 불명의 남한 젊은이들에게 생사를 의탁했지만, 혹시 그들은 북한 정보를 빼내가려는 한국 정보부의 끄나풀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동상이몽에 최악의 환경, 여기에 남과 북 모두를 불신했던, 매우 상징적인 시간과 공간이었다.
굶어 죽어도 ‘조국’을 원망하지 않았던 탈북자
끄나풀이 맞다, 아니다 하면서 탈북자들끼리 갑론을박 회의도 수천 번 했고, 수틀리면 자기들끼리 주먹다짐하며 코피 쏟는 일도 잦았다. 꿈에도 그리던 쌀밥은 먹었지만, 조국을 배신한 사람들이고, 중국 불법 체류자 신분에서 오는 불안심리는 어쩌지 못했다. 당시 그들의 ‘숨은 역사’를 상세하게 알게 된 건 그들과 함께 7000㎞ 대장정에 합류했던 용감한 여성 윤정은 때문이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1997년, 우연히 중국에 갔다가 북한 식량난민 소식을 접했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무척이나 놀랐다. 남북은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충격의 연속이었고,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당시 벌어졌던 상황이 무엇이고, 왜 그랬는가를 우리 앞에 들려주기로 결심했다. 15년 동안 가슴에 묻어온 스토리를 공개한 <오래된 약속>(양철북)이 최근 발표됐다. 탈북자 13명의 이야기는 영화 <김정일리아>와 더불어 더 큰 속 울음을 울게 했다. 탈북자 중 나이 스물셋 꽃제비 박철 이야기부터 해보자. 박철은 한없이 소박한 남자다.
수년 만에 받아본 밥상 앞에서 눈물을 좔좔 흘리며 큰절을 한 뒤에야 수저를 들었다. 남한의 활동가 김일영(가명)이 그를 구출했다. 베이징으로 옮긴 한참 뒤, 둘 사이에 최소한의 신뢰가 생긴 뒤 박철이 슬며시 말했다.
“선생님, 재미있는 얘기 제가 하나 해드릴까요?”
“응? 해봐.”
“처음 너무 무서웠습니다. (조선족 마을에서) 이틀 동안 (둘이) 같은 방에서 (잠을) 잤잖습니까?”
“그랬지.”
“그때 내가 가슴에 칼을 품고 있었단 말입니다. 밤에 선생님이 날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칼자루를 한 손에 쥐고 잤습니다.”
남북 불신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남북한, 그래서 잠자는 척하면서도 반격을 준비하던 저 부조리한 상황…. 어이없는 얘기는 더 있다. 수년 동안 굶주려온 박철을 집안에 들이고 밥을 해줬던 사람은 조선족이 먼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박철이 이성을 잃은 채 이 조선족에게 마구 달려들었다.
조선족 교포가 혼잣말하듯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박철을 거의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당시 상황을 책 그대로 인용한다.
“조선족 아바이가 ‘너네 조선은 왜 인민들을 굶기냐?’고 했다. 그 한마디 한 걸 가지고 (박철은) 밥숟가락 던지고 아바이 멱살을 거머쥐는 거야. 정말 죽일 듯한 표정이었어. 조선족 아바이는 싹싹 빌었지.”
6·25 전쟁 직후 북한의 DNA로 새겨 넣은 트라우마와 외부세계에 대한 적개심은 실로 병적이다. 생각해보라. 북한을 대표하는 외교관이 아닌 탈북자 박철은 “저도 조국이 원망스럽습니다”라고 해야 정상이 아니었을까?
남과 북은 실로 너무 오래 갈라져 살았다. 최악의 열전(熱戰) 한 차례, 세계사 최장의 냉전(冷戰)을 21세기 초 지금껏 치르는 분단체제가 한반도 삶의 조건이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가르쳤다. 동족끼리 연대감이나 휴머니즘은 고사하고 칼을 품은 채 날을 갈고 또 갈았다.
우리도 정상이 아니지만, 2000만 명의 북쪽 사람은 모두가 또 다른 박철, 호의와 선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심리적 장애자이다. 논리적 비약이라고? 밥을 위해 몸을 팔던 여인, 인신매매로 중국 국경을 떠돌다가 구출된 성희(가명)라는 여인이 역시 생명의 은인 한국남자를 만나 던진 첫말이 그러했다.
“남조선 동무래, 머리에 뿔은 어쨌습니까?”
성희의 말에는 그래도 유머감각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억지웃음이라도 지었다. 그런데 물어보자. 저쪽 사람들을 뿔 달린 도깨비로 알아온 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2001년 평양에서 미 국무장관 울브라이트를 만난 김정일이 이렇게 말했다.
“남한 사람들이 오면 나는 그들에게 물어봐요. ‘내 이마에서 뿔을 찾았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말합니다. ‘아니오,’ 당신(울부라이트 장관)과 나 사이 대화는 오해를 씻는 데 유익했습니다.”
이마에 솟은 뿔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을 가슴에 품어주기는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차라리 서로를 낮도깨비라고 여기고, 서서히 접근하는 게 상호 이해와 통일 전후 시민교육에 유익하다.
남과 북의 이마에 난 거대한 ‘뿔’
북한은 묵시록적인 체제가 분명하다. 하지만 주민 대다수가 반(反) 북한, 반(反)김정일-김정은 성향일까? 애매하다.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오래된 약속>에 그런 대목이 나온다.
“(탈북자) 모두들 지독한 배고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경을 넘었지만, 북조선의 식량난만 해결된다면, 또 국경을 무단으로 넘은 죄를 묻지 않는다면 북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128쪽).
이 대목을 오래 유념해야 한다. 실은 새터민 중에도 그런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선의와 호의를 일방적으로 베푼다고 저들 가슴이 열리지도 않는다. 어떻게 선의를 베풀까 하는 방법과 절차를 고민해보는 게 우선이다. 분단 67년 남과 북은 각자 마음에 뿔 아닌 뿔을 달고 있는 셈이다.
분단시대가 낳은 뿔, 즉 모순되고 착종(錯綜)된 멘탈리티란 어느 정도일까? 나는 <오래된 약속> 에 등장하는 탈북자 중 리춘희란 20대 여성의 혼란스러운 태도에 주목한다. 의학대학을 다니던 중 탈북했던 그 여성은 지독했다. 굶어 죽을 처지에서 “죽어도 위대하신 영도자 김일성 동지의 품 안에서 죽을 거야”라고 말하며 주저하던 어머니까지 설득해 국경을 넘었다. 두 언니를 포함해 일가족 넷이 대 탈출을 감행해 일단 성공했다. 조선족 마을로 숨어든 이후는 뻔한 코스, 인신매매조직에 걸려든 모녀 4명은 조선족이나 중국인 남자의 여자로 팔려가 헤어졌다.
리춘희는 하필 중국인에게 팔려갔는데, 몇 개월을 살다 보니 조선족에게 시집간 언니들 처지가 상대적으로 좋아 보였다. 자신을 놓아달라고 중국 남자에게 호소해도 응하지 않자 중국 공안을 찾아가 “나 탈북자요” 하고 자수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최악이었다. 결국은 강제 북송을 당했다. 속절없이 생지옥 북한으로 다시 끌려들어가야 했는데, 지옥의 문(북한 검문소) 앞에서 그녀가 보였던 기묘한 행태가 책에 리얼하게 나타난다. 거의 정신적 도착(倒錯)에 가까운 ‘분단시대의 뿔’이 분명하다.
“(북조선) 검문소 정문 위. 김일성 수령의 사진과 함께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의 과업을 이어받아 조국 통일 이룩하자’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자리에서 꼬꾸라져 울었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진정한 눈물이었나요?’ 나(저자 윤정은)의 질문에 그녀가 눈을 흘기면서 ‘그럼 가짜로 눈물을 흘렸겠습네까? 수령님 영전 앞에서?’라고 답했다. 춘희는 진짜로 꺼억 꺼억 울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수령님 품을 떠나 제 살 길만 생각하고 살아왔구나.’ 자기 같은 인간은 죽어야 할 것 같았다. 꼬꾸라져 죽어도 마땅했다.”(293쪽)
리춘희의 반응은 정상이 아니다. 지옥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몸부림을 치며 저항해야 한다. 그런 상식이 무색하게 그녀는 자책부터 했다. 북한의 비밀경찰 앞에서 뉘우치는 듯 보이려는 거짓 쇼? 그것만은 아니다. 끔찍한 빅 브라더이자 유일신(神) 김일성·김정일 앞에서 고해성사하듯 고꾸라져 눈물을 쏟았다면, 실로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리춘희도 그렇고, 그걸 낳은 북한도 그러하다.
더욱 놀랍게도 리춘희는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6개월 동안을 살다 재탈북에 성공했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조국을 망신시키고 중국놈 씨까지 받아온 ‘나쁜 년’으로 찍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상식이라면 북조선 하면 진저리를 쳐야 했다. 나쁜 년 80명을 따로 모은 최악의 수용소를 거쳤으면 진이 다 빠졌으리라. 그런 그녀가 “가짜로 눈물을 흘렸겠습네까? 수령님 영전 앞에서?”라고 답했던 대목은 실로 정신적·정치적 착란의 하이라이트다. 참고로 리춘희의 눈빛은 “두려움과 경계의 눈빛, 심지어 적의를 가진 듯”했다고 한다.
탈북자 중 19세 강민의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갇혀있는 아파트 공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림 그리기가 전부였다. 매번 탱크, 총을 든 군인 따위를 그렸다. 스케치북을 사다 주던 남한의 여성 활동가 나영(가명)이 안타까운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맨날 전쟁 그림이구나?” 일은 여기에서 터졌다. 불 맞은 짐승처럼 벌떡 일어선 강민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큰소리로 ‘선생님(나영)!’하고 불렀다. 그러고는 나영에게 남조선이 왜 전쟁을 일으켰느냐고 잡아먹을 듯이 따졌다. ‘왜 남조선은 북조선을 공격했습니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같은 민족끼리 잘살 수 있었을 텐데, 남조선이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됐잖습니까? 남조선이 전쟁광 미제를 이 땅에 끌고 오지 않았으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고, 북조선이 이렇게 배고파서 못 살게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179쪽)
나영이 차분하게 대응했다.“너희들은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나 보구나. 우리 앉아서 얘기하자.” 마지 못해 앉는 척했던 강민은 “거의 울다시피 발악을 했는데,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남조선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맞습니다. 북침입니다.” 강민은 거의 이성을 잃은 얼굴이었고, 나영을 주먹으로 칠 기세였다고 한다.
누구 말대로 마치 도둑처럼 통일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예상 밖의 상황 발생은 한반도에서는 종종 벌어진다. 향후 1년에서 30년 한반도는 가히 무한변수와 함께 역사의 새 그림이 펼쳐질 텐데, 지금부터가 문제다. 이 글의 주제를 ‘남과 북은 가슴을 마주할 수 있나?’로 잡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답이 안 나온다. 잘 살펴보면 황장엽도 그러하다. 그는 “누가 민족반역자인가? 인민들을 무더기로 굶어 죽게 만들고 동족상잔의 전쟁준비에만 몰두하는 자(김정일)가 민족반역자”라고 말한다. 자신은 “김정일의 개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남으로 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토를 달았다. 김정일이 사람들 굶겨 죽이고 학살하지만 않았더라면, 망명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북한의 앞날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던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라고 털어놓았다. 그 이전까지 시기는 북한이 민족사의 적통성(嫡統性)을 가졌고, 김일성 노선이 옳다고 믿었다는 얘기다. 그게 1990년대 직전까지 북한 50년사는 긍정한다는 말일까? 맞다. 그는 북한 현대사를 긍정했다.
도둑처럼 어느 날 통일이 찾아올 텐데…
박헌영이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소식을 듣는 즉시 “누구도 믿지 못하는 조작”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젊은 날의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닐까라고 판단했다. 그 이전 6·25 역시 남침이었음을 황장엽은 알았다. 하지만 박헌영과 연안파 숙청이 김일성의 올바른 노선 때문이라고 알았듯이 6·25 역시 통일을 하려면 불가피한 전쟁이라고 판단했다. 현대사의 비밀을 꿰던 예외적 인물 황장엽이 이 정도였다. 보통의 주민들은 더욱 심각한 상태가 아닐까? 어쩌면 남과 북은 분단 60여 년의 상처를 씻는데 앞으로도 100년 이상의 치유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껍데기는 가라 /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은 1967년 발표 시에서 그렇게 말했다. 문학적 절창(絶唱)이지만, 따져볼수록 모호하다. 내용만 보자면 4·19 직후 등장했던 중립화 통일론에서 모티프를 딴 작품이다. 신화 속의 캐릭터 아사달과 아사녀로 상징되는 남과 북이 이념을 벗어 던지고, 현대식 무기나 이념 등 온갖 껍데기를 벗어 던진 채 새로운 결혼(통일)의 초례청(예식장)에 오르자는 메시지인데, 그게 가능할까? 당위론으론 안 된다. 과연 어떻게가 문제고, 과정을 담은 절차에 합의해야 하고, 그 이전에 한반도 공동체를 지배할 철학을 세워야 한다. 그런 과제에 비춰 지금 우리는 실로 역부족이다.
한국사회? 사회 주류층이나 집권세력 사이에 통일을 보는 모종의 합의나 큰 그림은 별로 없다. 통합으로 가는 로드맵? 그것도 있을 리 없거나, 있어도 부실하다. 정치권에 그걸 기대하는 건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믿는 셈이다. 그럼 북한 사회? 저들은 존망 자체가 흔들리는 ‘산소호흡기를 단 체제’다. 독재자의 아들 김정남의 통쾌한 지적대로 북한은 “봉건왕조를 떠나 근래 (북한)의 권력세습은 희대의 웃음거리”이며 “사회주의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는다.”(<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67쪽)
그러면 왜 저들은 3대 세습을 했을까? 너무도 취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봐야 한다. 내부 안정을 위해 김정일이 뽑은 최악의 카드, 어쩔 수 없었던 유사(類似)왕정 사회주의, 가짜 주체의 나라였다. 김정일은 생전에 “아들들에게 절대로 세습은 하지 않겠다. 그건 아버님(김일성)에 대한 잘못”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현실에서는 왕조 구축을 택했다. 그의 개인적 욕심이라기보다는 놀라운 ‘자폐(自閉)의 시스템’이 그쪽으로 방향을 몰고 갔다. 결과는 지금 최악으로 나타난다.
남한에서 <김정일리아>를 외면하는 이유는
출범 100일을 넘긴 김정은의 통치의 윤곽은 대충 드러났다. 북한은 내부안정은커녕 개혁 개방의 비전에서 더 멀어져 간다. 광명성 3호 발사를 전후해 한반도 주변정세가 다시 위기 국면이지만, 북한주민의 민생 해결, 그리고 인권 회복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평균적인 북한 주민들의 집단심리는 이판사판의 정서이다. 조금 전 강민의 말대로 “남조선이 전쟁광 미제를 이 땅에 끌고 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배고파서 못 살게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라는 식이다. 이놈의 세상을 빨리 끝내려면 전쟁이 낫다는 심리로 가득하다. 황장엽도 그걸 걱정해 망명을 감행했다.
그의 비유대로 배고픈 쥐가 고양이에게 덤벼드는 ‘자포자기적 전쟁’이 걱정스러워 15년 전에 탈북했다. 굶주려 죽는 걸 미국과 한국 탓으로 돌리는 건 주민들만이 아니다. 군부는 한 술 더 뜬다. “지금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 어려워질 것이고, 하루라도 빨리 일으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황장엽 회고록 293쪽)한다. 이후 15년 김정일은 사망했으나 체제는 여전하고, 벼랑 끝 외교를 반복한다. 거대한 미스터리 체제 북한의 자폐 시스템과 인권 유린은 남의 일이 아니다.
북한은 20세기 한국인 역사경험의 절반이다. 북한 절대지식 10가지는 냉전시대의 관습에서 벗어나 20세기 전(全) 한반도의 시야에서 북한을 바라보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 빡빡한 역사 이야기였기에 에필로그는 사람 이야기를 중심으로 했다.
사족 하나를 붙여야겠다. <김정일리아>가 해외에서 얻은 반향은 컸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진 않았다.
여러 가지가 얽힌 결과이겠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가늠해본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주변현실을 제대로 규정하는 시야 확보에 문제가 있고 자기관리 능력이 2% 부족하다. 지정학적으로 작은 나라의 슬픔이고, ‘기지촌 지식인’ 그룹의 한계다. 밖에서 뭐라고 해야 그렇구나 싶은 뒷북 심리에 우리는 너무 익숙하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신간 <오래된 약속>도 언론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서평으로 다룬 신문은 한두 곳, 그것도 수박 겉핥기였다.
15년 전 탈북자 1호의 증언에 주목하고, 이걸 사회적 어젠다로 확대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언론사는 없었다. 이걸 완전히 외면한 한국 사회는 정말 북한 맹(盲)이 맞으며, 책임 있는 주류가 없다는 점에서 ‘난민촌 사회’다. 최근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탈출한 신동혁(30)의 전기 <14호 수용소로부터의 탈출>(원제 Escape from Camp 14)을 펴낸 블레인 하든(60, 전 워싱턴포스트 기자)은 “한국인들이 탈북자와 북한 인권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새삼 강조했다.
그가 너무도 당연한 소리를 한 이유가 있다. 서방 언론은 이 책이 “닫힌 세상 속 비현실적 냉혹함을 생생하게 묘사”(워싱턴포스트), “세계의 가장 억압적 정권에 존재하는 수용소에 관한 불편한 진실”(CNN)이라 보도했고, BBC는 ‘이 주의 책’으로 선정했다. 책은 일본·독일·프랑스·인도·스웨덴·브라질 등 10여 개 나라에서도 출판될 예정이지만, 한국어 출간 계획은 아직(4월 중순 현재) 없다고 한다. 그게 한국 사회다. 통일 전후를 어느나라 보다 치밀하게 준비해야 하지만, 막상 넋 놓은 채 아무 생각 없는 게 우리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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