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2

오빠 세 명이 북송선을 탔던 조총련 집안… '가족의 나라' 영화감독 양영희씨



[최보식이 만난 사람] "영광스러운 조국에 간 것도 아니고, 이건 조국도 아니고, 가족이 있어 간다" - 조선일보 > 사회



[최보식이 만난 사람] "영광스러운 조국에 간 것도 아니고, 이건 조국도 아니고, 가족이 있어 간다"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8.05.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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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세 명이 북송선을 탔던 조총련 집안… '가족의 나라' 영화감독 양영희씨]

"오사카 집에는 아직도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걸려 있어…
부모님 인생이 모두 부정되니까, 너무 잔인한 것 같았어요
'왜 김정은은 안 모셔요?' 농담하니 어머니는 말없이 웃었죠
'김정은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묻자, '살 빼야 한다'고 말해"

"조총련 오사카 지부 고문이었던 아버지는 2009년 돌아가셨고, 87세인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사카에 있는 부모님 집에는 아직도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 있어요. 기괴하지요. 젊었을 때는 '미친 짓'이라며 몇 번이나 내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부모님의 인생이 모두 부정되니까, 너무 잔인한 것 같았어요. 치매에 걸리기 전 어머니에게 '왜 김정은은 안 모셔요?'라고 농담하니까 아무 말 없이 웃어요. 그래서 '김정은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하니 '살 빼야 한다'고 답했어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양영희(54)씨를 만났다. 그녀의 부모는 조총련 간부였다. 그녀의 오빠 세 명은 모두 북송선을 탔다. 그녀보다 여덟 살, 열 살, 열두 살 위였다. 그 뒤 큰오빠는 북한에서 우울증으로 숨졌다. 두 오빠 가족은 여전히 북한에 있다.




양영희씨는“북한에서 한 친척이‘너는 돌아갈 수 있어 좋겠구나’라고 속삭이던 말에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도쿄=최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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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과 가족 스토리로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가족의 나라' 등의 영화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조선대학교이야기(朝鮮大學校物語)'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된 것은 세월덕분이었어요. 옛날에는 오빠를 만나서도 울고 돌아와서 생각나도 울고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났는지 분해서 울었어요. 좀 더 나이가 들자 이런 집안의 운명이 뭐랄까 재미있게 보였어요. 그래서 작품을 만들 생각을 했어요."

1959년 말부터 1984년까지 '재일조선인 귀국사업(북송사업)'이 있었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에게 '귀국하면 취학과 의식주를 위한 일체의 비용을 책임진다'고 선전했다. 당시 일본에서 차별받던 이들은 '새로운 지상낙원'을 꿈꾸며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을 탔다. 그 숫자는 9만3000여 명(일본인 아내를 포함). 역설적이게도 이 중 90%가 한반도 남쪽 출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런 북송사업의 깃발을 흔드는 역할을 했다. 그 영향으로 1971년 중·고교생인 둘째와 셋째 오빠가 지원했고, 1972년에는 김일성의 환갑 선물로 조선대학생 200명을 보낼 때 큰오빠가 뽑혀 들어갔다.

―자식 셋의 인생을 모두 수렁 속으로 밀어 넣은 아버지는 그 뒤 후회와 자책을 했겠군요.

"말년에 아버지께 '오빠들을 보낸 것을 후회하세요?'라고 물을 때 긴장했어요. 기질상 '시끄럽다'며 화를 벌컥 낼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처음으로 '후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 보내도 좋았을지 모르겠다. 그때는 내가 너무 젊었고 재일조선인 운동이 앙양되는 시기여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어요. 그것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던 셈입니다."

그녀가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을 개봉하자 조총련은 반성문 제출을 요구했다. 그 뒤로 북한 입국이 거부됐다.

"영화에 나오는 '영광스러운 조국에 간 것도 아니고 이건 조국도 아니고 가족이 있으니까 간다'라는 내레이션이 자극했던 것 같아요. 고마운 점은 어머니와 오빠가 내게 영화 작업을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북한을 다녀오면서 '고모, 유명한 감독 되세요' '열심히 하세요' '재미있게 사세요'라는 조카들의 메시지를 담은 종이를 꼬깃꼬깃 접어서 들고 나왔어요."

그녀는 여고 2학년 때 학생대표단으로 선발돼 2주일 일정으로 북한에 처음 들어갔다.

"오빠들이 타고 간 그 북송선을 타고 이틀 걸려 원산항으로 들어갔어요. 11년 만에 오빠를 만나 보는 게 목적이었어요. 하지만 막상 허락된 것은 호텔 로비에서 하루 20분 면회였어요. 면회라면 감옥에서나 쓰는 말이잖아요. 오빠도 말을 조심했고 몹시 어색했지요. 2주 내내 평양에 있는 수많은 박물관만 견학했지요. 조선중앙역사박물관과 조선민속박물관, 농업박물관, 철도박물관… 어느 박물관을 견학하든 내용은 같았어요. 수령님의 현지 지도와 공적 소개였으니까요. '우리 조카들이 이런 나라에 있으면 바보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그녀는 조선대학교에 다닐 때 두 번째 북한 수학여행을 갔다. 그때는 백두산 일정이 있었지만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평양에 남았다. 밤에 오빠를 불러서 택시를 타고 오빠 집에 갔다고 한다.

"음악가를 꿈꿨던 큰오빠가 그때 보니 말수가 적고 행동이 이상했어요. 그 체제를 견디지 못했던 것이지요(2009년 사망). 그 뒤로 북한을 열 번쯤 갔습니다. 요령이 생겨 오빠 아파트에서 자고 나오기도 했지요."

―일반 방문객이나 관광객들보다는 북한 일반 가정의 내부를 들여다봤겠군요. 내밀한 얘기를 할 수 있었을 테고.

"호텔 방에는 도청이 있으니까, 오빠는 거의 얘기하지 않습니다. 집 안에서도 우리는 정치적인 얘기를 거의 안 합니다. 오빠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저도 그런 얘기를 안 했습니다. 다만 한번은 내가 '가슴에 달고 있는 배지에 김일성·김정일 말고 얼마나 얼굴이 더 들어갈 것 같은가. 3명, 4명? 그때 가야 통일이 될까?'라고 물었어요."


양영희(가운데)씨가 영화 '가족의 나라' 촬영할 때
―북한 안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는 뜻입니까?

"농담처럼 했으니까요. 오빠는 웃으며 '그래도 이 체제는 안 변할 것'이라고 답했어요. 그게 오빠의 본심이었을 것이고 진짜 그렇게 느꼈을 겁니다."

―1999년에는 셋째 오빠가 치료를 위해 일본에 들어온 적 있고, 이를 소재로 영화 '가족의 나라'를 만들었지요?


"뇌 속에 혹이 발견됐는데, 부모님이 조총련 본부에 애걸을 해서 치료차 들어올 수 있었어요. 당초 석 달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연락을 받고 2주 만에 돌아갔어요. 어안이 벙벙했어요."

―신변이 구속된 상태도 아니었고 집안에서 같이 지냈는데, 북한으로 안 돌아갈 수 있었지 않았나요?

"북한에 가족과 생활 기반이 있으니까요. 제가 '진짜 돌아가야 해요?'라고 물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만 답했어요. '그러면 포르노 영화도 보고 북한에서 못 하는 것 많이 즐기고 가라'고 하니 '북한에 돌아가 생활총화(자아비판 모임)를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나. 위에서는 다 안다'고 했어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제가 '왜 폭동이 일어나지 않느냐. 너무 배고파 힘이 없어 못 하나?'라고 농담으로 물었어요. 오빠는 '그런 무리는 다들 없어진다. 싹을 다 잘라버린다'고 말했어요. 그만큼 감시와 처벌이 심하다는 거죠."

―오빠들은 북송선을 탄 것에 대해 말한 적 있습니까?

"오빠에게 '북한에 온 것 후회하세요?'라는 질문을 할 수가 없어요. 후회를 안 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만날 후회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런 생각을 계속하면 알코올 중독이 되거나 불평분자로 찍혀 수용소에 갈 수밖에 없어요. 북한에서 한 친척이 '너는 돌아갈 수 있어 좋겠구나'라고 속삭이던 말에 소름이 돋았어요."

―북한 체제에 사는 오빠가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인생은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다른 인생을 살도록 해줘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했어요. 그러려면 본인은 평양에 남아 있어야 하고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거죠. 북한 주민들은 사회를 바꿀 수는 없고 자기 생활을 바꾸려고 합니다."

―자기 생활을 바꾼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아파트 안에는 가게나 회사 간판이 없지만, 그 속에서 다들 장사를 하고 있어요. 오빠가 '3층의 어디에는 국수로 유명하고, 어디에는 스웨터를 잘 만든다'고 알려줘요. 남편은 평양 시민으로 살기 위해 직장에서 정치 학습을 받고, 아내는 집에서 물건을 만들어 암시장에 내다 파는 겁니다. 그 수입이 남편의 열 배, 스무 배가 넘습니다. 북한 내부로 들어가 보면 황금만능주의이고 자본주의입니다. 암시장에서 북한 주민은 어떻게 저럴까 싶도록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자기 물건을 팔면 가족을 먹일 수 있으니까요. 이는 동원된 매스게임이나 행진할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탈북 얘기를 해본 적은 없습니까?

"제가 '탈북할 생각이 있느냐'고 한번 물어보자, '너무 위험하다. 그래도 우리는 일본에서 물품을 보내주니 생활이 괜찮다. 이 살림에서 아이를 키우는 쪽을 택한다. 탈북한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내겐 그런 용기가 없다'고 했어요."

―한국에서는 얼마 전까지 김정은의 인기가 대단했지요. 그래도 김일성·김정일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있는데, 과연 어떨까요?

"젊고 외국에서 공부했으니까 개혁·개방하지 않을까 기대를 걸지만, 그렇게 되면 체제 유지가 어려워요. 인권을 유린해야 유지되는 정권이니까. 안 그러면 김정은은 그 자리에 있지 못하니까요. 저는 북한에서 정치범 수용소가 없어졌으면 합니다. 그것만 바랍니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친척이 있습니까?

"북한에서 아버지 고희(古稀) 잔치를 열자 10년간 수용소에 갇혔다가 풀려난 아버지 친구분이 찾아왔습니다.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 북한에서 '세상에 부럼 없어라'는 선전 간판을 보면 코미디 같지요."

―한반도 문제가 잘 해결되면 북한에 있는 오빠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처음 만나서 정(情)을 잠깐 나누고 나면 그때부터 돈 얘기만 나올 거예요. 10년 전부터 늙은 부모님이 더 이상 오빠 가족을 도울 수 없었어요. 그러자 제게 손 벌리는 편지가 왔어요. 제가 돈벌이 되는 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보내면 영원히 보내고 한 사람에게 보내면 모두에게 보내야 합니다. '여기서 부모님은 내가 돌본다. 북한의 가족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답장했어요."

―짧은 감동 뒤에 냉정한 현실이 기다리는군요.

"문재인 대통령이 그걸 알고 판단을 했겠지만, 남한도 진짜 힘들게 될 겁니다. 현실은 잔인해요."

그녀는 마흔 살이 됐을 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해 처음 한국에 왔다.



조선일보 A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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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joseph****) 2018.05.22 01:07:26신고문재인 대통령 당신이 김정은 체제를 통일 연방제로 이끌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라. 정은이가 원하는 통일은 주체사상 북한식 공산주의 통일이다. 당신도 정은이를 수령으로 모시고 당신의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수모를 격는 의식을 치뤄야 당신이 원하는 통일이다. 일반 국민도 알수 있는 상식을 왜 답답하게 모를까..쇄뇌의 결과다. 주사파 사상교육..무섭다.18 0댓글
조민(joseph****) 2018.05.22 01:04:09신고북한 3대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추종자 세력이 호의 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양에 추종자들은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정은이 직속부하에 속한 이상 자유, 경제, 안전 모두 보장된다. 무엇때문에 통일을 하고 핵을 포기 하겠는가? 통일은 남한의 꿈일뿐 김정은 체제의 추종자는 절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적화 통일로 남한까지 북한처럼 지배하길 원할뿐이다.17 0댓글
이병훈(hoon****) 2018.05.21 21:28:05신고김정은은 절대 북한이 잘 살게 되길 바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잘 살게 되면 정권과 목숨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금처럼 가난하게 살면서 특권층만 조금 먹고 살만하게 하는 정책을 사용하겠지요. 나머지는 다 헛소리라고 봅니다.27 0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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