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커먼즈와 공공성: 공동의 삶을 위하여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백영경 白英瓊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문화인류학. 논문으로 「지식의 정치와 새로운 인문학: ‘공공’ 연구의 확장을 위하여」 「사회과학적 개념과 실천으로서의 ‘위기’」 등이 있음. paix@knou.ac.kr
* 이 글의 일부는 졸고 「커먼즈와 복지: 사회재생산 위기에 대한 통합적 접근을 위한 시론」(『환경사회학연구 ECO』 제21권 제1호, 2017.6)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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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봄의 위기가 제기하는 문제
지난해 출간되어 화제를 모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은 그 나이대 한국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겪었을 특이하지 않은 경험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점에서 특이해 보인다. ‘지영’이라는 이름 자체가 1982년에 태어난 여아 중 가장 많이 등록된 이름이다. 의도적으로 통계적 평균을 추구한 듯한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 김지영씨가 특별히 불운했다기보다 오히려 그만하면 평탄하게 살아온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딸, 여학생, 여자친구, 여직원, 아내, 며느리 노릇을 해내는 동안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피하지는 못했노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별의 경험을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분노하기는 해도, 김지영씨는 대체로 그냥 입 다물고 견뎌내는 편을 택한다.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것 같던 그의 일상은 출산과 그에 이어지는 양육의 경험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실 스스로 이전 세대와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던 김지영씨 또래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좌절하고 분노하는 모습은 단지 소설 속 풍경이 아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기르게 된 여성들에게 아이를 돌보는 경험은 지금까지 맺어온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혼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고립감과 고단함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낯선 것이다. 김지영씨를 좌절하게 만든 마지막 한방은 바로 공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시고 앉아 있다가 엿듣게 된, 자신을 향한 ‘맘충’이라는 비난이었다. 애 기르는 데 크게 보태주는 것도 없는 이 사회는 엄마들에게 숭고한 모성의 의무를 지우고 사사건건 간섭할 뿐만 아니라, 남편이 직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동안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낸다면서 버러지 취급을 한다.
이 소설에 대한 대중적 호응은 마치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 같은 데가 있다. 듣다보면 김지영씨의 삶에 대한 공감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독자 스스로가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겪은 고생들을 풀어내고 싶은 것이다. 사실 정부 정책이 왜 그렇게 효과가 없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출산장려책의 직접 대상인 김지영씨들의 경험을 그저 개인적인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김지영씨의 삶을 빌려서 작가가, 그리고 독자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돈 버는 일에 비해 결코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 돌봄에 함께 힘을 보태고 필요한 지원을 해주기보다는 대체로는 여성인 일부 사람에게 ‘독박’을 씌우고, 심지어는 그들은 깔보고 비난하는 사회, 생계를 위해 필요한 일과 돌보는 일을 함께 하다보면 절대 일상이 유지될 수 없는 팍팍한 사회가 한국사회다. 한마디로 돌봄에 대해서는 총체적인 재앙 상황이다.
사실 2000년대 들어 저출산 현상이 국가의 위기로 간주되면서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증가해왔다. 충분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 여건이 나아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일 터이지만 현실은 조금 더 복잡하다.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은 여성들이 스스로 취업을 원하게 된 것 이상으로 임금노동에 종사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도 증가했다. 고용 안정성과 노동환경이 악화되면서 취업자와 실업자 모두 누군가를 돌보고 살아갈 여유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가족구조가 변화하면서 가족끼리 돌봄을 주고받기도 어려워졌다. 이렇게 돌봄을 둘러싼 여건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사회적 지원은 더디게 증가하고 있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구호가 사회적 관심사이자 정책 의제로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실은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을 동시에 수행하기 어려워진 시대상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시간 근로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대개 엄마가 ‘독박’ 육아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배우자나 동반자들 간에도 갈등을 야기하며, 가족 내에서나 공동체 속에서 성인들끼리 친밀함을 나누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시간도 부족하다보니 사회 해체의 경향은 더욱 가속화된다. 다시 말해 이렇게 가족을 포함한 사회적 관계망이 붕괴하면서 돌봄은 더 어려워지고, 구성원들에 대한 돌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사회적 관계의 해체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 자체의 존속이 문제 될 수 있는 전반적인 사회재생산의 위기의 핵심에는 돌봄의 위기가 있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현 사회의 위기에 대해 논하면서 우선 2008년 이후 자본주의가 경험하는 위기는 생태적 차원과 사회재생산 차원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발현 양상은 지역마다 다를지라도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돌봄의 위기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돌봄 위기의 원인이 이제껏 사회재생산을 체계적으로 위협해온 금융화 자본주의(financialized capitalism)라고 보는데,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든 사회재생산의 위기를 피할 수 없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금융화 자본주의에서는 사회 보호가 약화되고 시장화가 강화되는 양상이 강해 사회재생산의 위기가 격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대개는 무급으로 재생산노동을 수행하던 여성들이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약화됨에 따라 점차 유급노동으로 편입되는 비율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이제까지 이 여성들이 수행해오던 돌봄노동을 누가 할 것인가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 이는 가사노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의료와 간병, 양육 등 돌봄노동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으로서, 부유층은 빈곤층에게, 빈곤층은 다시 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돌봄노동을 떠넘기는 상황이다.2 이 과정에서 필요한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동이나 노인,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돌봄노동과 복지 서비스를 늘리고 공공성(公共性)을 확대하라는 요구가 커지는 중이며, 실제로 사회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공적 개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사회재생산의 위기가 자본주의체제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며, 돌봄의 결핍 역시 금융화 자본주의에 따라오는 결과라고 한다면 돌봄의 위기를 더 많은 공적인 지원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공공성의 문제를 돌봄과 관련해 숙고하다보면, 일반적으로 공공성을 논의할 때 잘 이야기하지 않는 지점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우선 떠오르는 것이 주체의 문제와 젠더의 문제이다. 공공성이라는 용어에는 서로 의미가 다른 두개의 ‘공(公/共)’이 포함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현대사회에서의 공공성은 공(公)적인 것을 중심으로 논의되는 경향이 크며, 그때의 공적인 것은 다시 국가를 중심으로 이해되곤 한다. 특히 복지는 국가에 대해 시민들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서, 세금을 재원으로 하여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라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돌봄을 제공하는 주체는 공공기관부터 시장, 가족, 지역의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할 때, 국가의 지원을 늘리는 것만으로 바로 돌봄의 문제가 해결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고 공(共)의 문제, 다시 말해 돌봄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共同體)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가족과 공동체가 돌봄 제공의 중요한 주체임을 인정하는 논의에서조차도, 돌봄노동의 부담이 가족이나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고르게 나눠지기보다는 여성들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되곤 한다. 다시 말해 돌봄의 문제는 바로 젠더의 문제와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이루어졌던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에 대한 논의 가운데는 젠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종종 국가와 시장에 맞서 공동체를 활성화시키자는 취지의 논의들이 고정된 성역할을 문제 삼지 않도록 하며, 암묵적으로 돌봄이란 여성들의 일임을 전제하거나, 가족의 이름으로 여성들이 인정받지 못한 노동을 수행하곤 했던 전통적인 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곤 한다. 이러한 논의들에서 드러나는 가족과 전통적인 공동체에 내재하는 젠더 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특히 젊은 여성들을 비롯한 새로운 세대들에게 공동체 전반에 대해 반감을 갖게까지도 하는데, 그 결과 새로운 주체들이 공동체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막는 역효과를 부르기도 한다.
이 글은 우선 공공성 개념이 공(公)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그 결과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곤 하지만 실제로는 공(公)이라는 개념 자체가 본디 국가로 수렴되지 않는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의 것임을 지적하는 데서 시작하고자 한다. 그런 후에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운동이라고 할 커먼즈(commons)론을 검토하면서, 일반적으로는 공(共)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커먼즈가 실제에 있어서는 공(公), 공(共), 사(私) 영역 전반에 걸쳐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나아가 커먼즈가 자연자원의 관리 방식으로만 협소하게 이해돼서는 안 되고, 돌봄을 중심으로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상상하고 현 사회 재생산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긴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
2. 공공성, 공동체, 그리고 커먼즈
‘공공’은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막상 엄밀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영어 ‘public’의 의미를 따라서 사사롭지 않은 것, 공동의 것, 열린 것 등의 의미로 이해되곤 한다. 좀더 현대적인 의미에서는 공동체 구성원들 다수의 삶에 관계되는 공동의 관심사로서 누구에게나 드러나게 처리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을 공공적인 사안이라고 하며, 절차적 공정성과 개방성, 연대성을 두루 갖춘 것을 공공적인 가치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한자어권에서는 공공이 “공(公)과 공(共)의 합성어로서, 공(公)이 공(共)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국가주의적 전통이 강한 동아시아에서는 “공(公)이 곧 관(官)으로 간주되는 사고”가 남아 있다는 지적이 존재한다.3 그런데 미조구찌 유우조오(溝口雄三)의 『한 단어 사전, 공사(公私)』를 보면 중국에서도 공(公)이 단순하게 관이나 통치의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조구찌에 따르면 공(公)은 수장(首長)의 의미를 지니지만 통치자나 통치가 곧 공(公)은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공동체의 우두머리로서 공동체의 수확물들을 배분함에 있어서 공정하고 균평하게 나누는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중국에서 공(公)이 곧 평분(平分)으로 이해될 만큼 윤리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 데는 공동체를 하늘의 뜻에 따라 공정하게 다스리는 것이 수장의 역할이며, 수장은 민(民)을 곧 하늘로 여겨야 한다는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공(公)에는 수장성, 공동(체)성, 윤리성이라는 세가지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4 이렇게 본다면 이미 공(公)에는 함께 혹은 ‘모두 같이’라는 공(共)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굳이 어원을 따지지 않아도 현대의 공공성을 논의하면서 국가나 관의 역할뿐 아니라 공동체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많다. 우선 마을공동체나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공동체 단위에서 공공성을 직접적인 화두로 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국가가 곧 공공성의 담지자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시장과 마찬가지로 공공성 훼손의 주체로서 공동체를 파괴해온 무수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와 시장에 의해 파괴되어온 공동의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공유지, 공유재, 혹은 공동자원으로도 번역되는 커먼즈를 들 수 있다.5 공동자원으로서의 커먼즈는 토지, 물, 숲, 공간 등과 같이 잠재적인 사용자를 배제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고, 한 주체의 사용량이 증가함에 따라 다른 사용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양이 감소하는 자연적 자원이나 인공시설이라고 정의된다. 전통적으로 커먼즈가 공동체에 의한 지속적이고 도덕에 기반한 이용을 강조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통합적인 관계에 입각해 있었다면, 근대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는 커먼즈를 지속적으로 파괴해왔고 국가는 자연자원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를 법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파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왔다. 근대 사유재산제도는 전통적 커먼즈가 생계와 생존의 필요에 따라 영위해온 관습과 실천들을 부정했고, 이를 통해 자연을 단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간주하여 이윤을 목적으로 한 지속 가능하지 않은 방식의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연 것이다. 결국 커먼즈를 지키거나 다시 회복하는 문제를 고민하다보면 국가와 시장을 넘어서 ‘공동의 것’이라는 주제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며, 국가와 공동체, 그리고 공공성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커먼즈의 파괴를 정당화해온 것이 국가이기는 하나 커먼즈를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국가일 수밖에 없으며, 현대 국가의 존재가 단지 사유재산제도를 보호하고 이윤추구 행위를 보장하는 데만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복지국가시대 이후 국가가 주체가 되어서 제공하는 사회적 보호와 공공서비스의 많은 부분은 커먼즈로 간주되고 있으며,6 그러한 차원에서 국가는 공(公), 커먼즈는 공(共)으로 간주하는 일반적인 이해를 넘어 공공성을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낳고 있기도 하다. 시장도 사(私)적인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수하게 개념적인 차원에서 논의하는 게 아니라면, 현실에서 시장의 역할은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다.7 특히 신자유주의시대에 국가는 공공서비스의 상당 부분을 시장으로 이관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은 국가와 시장을 각기 공(公)과 사로 손쉽게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최근 부상하고 있는 공유경제(sharing economy)나 사회적 기업의 성격에 대해서도 그것을 과연 공(公), 공(共)과 사의 관계 속에서 어디에 위치시킬지를 두고 논자마다 다른 입장을 보인다는 점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커먼즈가 국가와 시장 그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음은 분명하지만, 국가를 곧바로 공(公)이라 보기 어려운 만큼 커먼즈에 대한 논의가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전통적인 공유지 차원을 넘어 현대적인 삶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커먼즈로 발전하는 순간 그 역시 단순하게 공(共)으로 간주하기는 어렵게 된다. 특히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공동의 것을 새로이 만들어나가는 노력은 국가와 시장을 넘어 공공성을 확장하는 중요한 시도라는 점에서, 국가나 커먼즈 어느 한쪽을 공(公)이나 공(共)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현대적 커먼즈를 추구하는 운동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국가와 시장,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돌봄의 복지가 현대적 의미에서 공공성의 이름에 값하기 위해서는 복지를 둘러싼 국가와 가족의 관계, 국가와 커먼즈의 관계와 함께 사적인 것과 커먼즈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복지와 커먼즈에 관련해서는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를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공공재(public goods)로 보는 반면, 그중에서도 의료보험이나 복지서비스의 경우에는 경합성이 있다고 보아 시민들의 공동자원(CPRs)으로 보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하여 커먼즈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국가와 복지, 시장, 공공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용어 이상으로 따져봐야 할 점이 많으며, 시기에 따라 그 관계의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적인 의미에서 복지국가라고 하면 세금을 재원으로 하여 개인이 살면서 겪게 되는 위협에 대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호를 제공하는 존재로 간주된다. 국가의 역할이란 그런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며,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곧 공적(公的)인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시대의 국가는 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며,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복지 공급 자체가 시장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증가했다. 이전까지는 일반적인 상품과 동일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 속에서, 의료나 주거, 교육, 물, 에너지 등에 대한 접근권은 모두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누려야 할 권리로서 간주되어왔지만 신자유주의적인 경향이 강화되면서부터 점차 모두 시장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가격의 급등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국가는 단순히 공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없고,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사회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게 되었다 할 수 있지만, 이는 단지 신자유주의시대에 국한된 현상만은 아니며 실제로 국가와 공적인 것은 언제나 긴장관계 속에 있어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클로저(enclosure) 이전의 커먼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그가 개별적으로 소유한 것이 없어도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원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직접 모이고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자 그들이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커먼즈 자체가 공(公)적인 공간이며, 공적인 것의 본질 역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라는 자각 속에서 국가와 공적인 공간을 장악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 그 자체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바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커먼즈를 통해 자원을 얻고 주체가 되는 과정, 그리고 이용하고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원 즉 커먼즈를 확보하고, 공동체를 능동적으로 구성 및 재구성하는 전 과정을 일컬어 커머닝(commoning)이라고 한다.8
한편 국가가 공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동안 사적인 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 입장으로 나뉘는데, 한편에서는 시장과 이윤을 사적인 것으로 보았던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과 가족같이 시장의 이해관계에 결코 물들어서는 안 되는 존재를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공/사 구분에서도 국가와 시장을 대비시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국가와 시장 등 제도화된 영역을 모두 공적 영역으로 놓고 가족이나 개인, 자원봉사 등 제도화되지 않은 영역은 사적인 것으로 대비시키는 입장도 있다. 그러므로 공적인 것을 국가와 바로 등치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한 만큼, 커먼즈를 가족이나 개인에게 귀속되는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9 커먼즈가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일상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스스로 확보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내적 노력 못지않게 공동체는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양질의 공공서비스를 확보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있는 커먼즈를 지키거나 그것을 새로이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커먼즈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 해당 사회에서 공공서비스가 이루어지는 방식이나 성격, 이러한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정치구조 자체를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에 참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 과정에서 돌봄을 둘러싼 여성과 가족들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공공서비스의 배정 및 분배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공적(公的) 사안인 동시에 공적(共的)인 차원에서도 공동체 내 민주주의의 상태를 보여주는 핵심 문제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돌봄의 문제는 개별 가족에게 맡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국가의 지원만으로 해결될 수도 없는 사안이며, 시장을 통해서 구매하는 서비스로도 역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삶을 함께 꾸려갈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커먼즈를 만들어내고 확장하는 일,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 스스로 공(公)적인 영역의 일원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국가 차원의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사회재생산의 문제는 종종 특정한 공동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결정사안을 다루게 되며, 때로는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의 문제와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 경계 밖으로의 확장은 최근 지역공동체를 만든다고 할 때면 흔히 이야기되는 민관 협력 모델과는 다른 것이다. 즉 커머닝이란 국가와 시장 혹은 국가와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는 시민사회나 공동체가 각기 공과 사의 영역을 유지한 채 만나서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민과 관이나 공과 사 구분을 넘어서 커머너(commoner)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커먼즈 자체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커먼즈란 그런 의미에서 “자각한 시민들이 스스로의 삶과 위협에 놓인 자신들의 자원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책임지겠다는 비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유와 협동, 호혜성과 사회문화적 변화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적 실천과 가능성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10 그렇다고 해서 커먼즈가 완전히 새로 만들어지거나 발명되어야 하는 공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조직과 동네 모임, 선주민(先住民)들의 관습 및 실천이나 종교공동체의 실행 속에서도 커먼즈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거창하고 획기적인 무엇이기보다는 국가와 시장의 영역이 아닌 일상 속에서의 생계유지를 가능하게 해온 작은 실천들에서 커머닝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보육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품앗이를 조직하여 공동육아를 하고, 시장의 압력 속에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고, 마을 속에서 돌봄의 공동체를 꾸려가는 등등의 모든 노력이 커먼즈를 확대하는 커머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돌봄과 사회재생산의 문제를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공동체의 중요한 정치적 사안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는 진정한 커머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까지 커먼즈론은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관계성과 돌봄의 문제에 대해 중요한 문제제기를 해왔으면서도 돌봄에서 가족의 역할이나 사회관계에서 젠더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아왔다. 그러나 생태나 환경, 공동체의 회복과 사회정의를 비롯하여 커먼즈운동이 제기하는 여러가지 문제를 국가와 시장에 맡겨 해결할 수 없는 만큼이나 복지의 문제 역시 개별 가족에게 맡겨두거나 아니면 공동체 안에서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회재생산의 위기를 가져온 원인 자체가 개별 가족의 힘으로는 현대사회의 복지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특히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증폭시키고 있는 돌봄의 위기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3. 복지 커먼즈: 복지를 위한 투쟁과 커먼즈에 대한 요구는 어떻게 만나는가
21세기 들어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운동에서 중요한 특징은 커먼즈 혹은 공동자원이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지, 물, 공간, 시간, 창의성, 공공서비스, 돌봄 등 삶을 꾸려가는 데 필수적이지만, 신자유주의시대 이후 사유화되고 상품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자원들을 요구하는 투쟁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커먼즈를 요구하는 투쟁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앞서 이야기한 다양한 사회운동들을 개념적으로 연결해줄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11 예를 들어 돌봄노동의 부담을 과중하게 져야 하는 여성들의 투쟁과, 도시민들이 공유하면서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려는 투쟁, 자연자원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약화시키려는 투쟁, 금융자본의 약탈을 제어하려는 투쟁, 더 나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투쟁, 원자력발전의 중단을 요구하는 투쟁, 다양한 가족 형태와 성정체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 등은 모두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현재의 사회에서 박탈당한 어떤 자원의 공유를 요구하는 커먼즈운동 속에서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12 예를 들어 대만 원주민의 토지반환 요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훨씬 다층적인 요구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원주민공동체와 국가의 갈등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개발 문제거나 자연자원 관리방식의 차이라는 점에서 원주민들의 토지반환 요구는 정체성과 관련된 정치적 사안 또는 환경이나 생태 운동의 쟁점으로 이해되곤 한다.13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토지를 반환받는다는 것은 원주민 인구의 열악한 건강, 낮은 교육수준과 높은 실업률,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는 의미도 크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 토지의 공동체적 관리 문제와 삶의 복지 문제는 뚜렷이 구분되는 사안이 아니다. 캐나다 선주민운동의 경우에도 토지를 찾거나 국가로부터 배상 개념의 재원을 분배받는다는 것은 20세기 초반부터 진행되어온 백인동화정책의 피해자로서 여전히 정신건강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구성원들을 백인들의 생의학이 아니라 선주민의 방식으로 치유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는 문제다. 또한 그러면서도 백인들의 의학이 주는 혜택에서 소외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의료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문화가 배제되지 않는 방식의 교육을 받는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선주민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숲이나 바다, 그리고 거기서 수확되는 생산물은 선주민들이 자기 삶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의례를 치르고, 어린 세대를 교육하며 나이 든 세대를 죽을 때까지 돌볼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공동체가 주체가 되어서 자연자원을 관리한다는 것은 결국 그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돌보는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공동자원을 잘 활용하여 성공적으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라 평가받는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마을의 경우에 마을 숲인 동백동산을 가꾸고 생태관광을 활성화하는 것과 더불어 마을의 노인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마을활동의 중심축이자 이후 주요 계획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마을에서는 노인들의 생일을 모두 마을 달력에 새기고 수년간 이를 빠짐없이 챙김으로써 외지에 나가 있는 자식 세대들이 마을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기도 했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과연 마을이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왜 필요한지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마을 노인들의 구술을 기록해 과거에 수행되었던 공동체적 자연관리에 대한 지식과 마을의 역사를 전수받기도 하는데, 이러한 기록들 자체가 마을의 중요한 자산이기도 하고 마을 숲을 보전하는 방향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이때 자연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자원관리의 기술을 전수받는 차원뿐 아니라 그 전수의 과정 자체가 세대 간의 교류이자 사회적 관계를 새로이 구축하는 과정이며, 그것이 노인들의 일상을 지켜주는 돌봄의 한 형태라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학생 수가 계속 줄던 마을의 학교가 되살아났다. 학교는 세대의 전승이 이루어지는 중심 공간으로, 공동체의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의 경우 공동목장을 풍력발전사업에 임대해 얻은 수익을 마을의 복지사업을 위한 재원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 결과로 활성화된 마을공동체는 다시 무분별한 개발에 저항하면서 마을의 공동자원을 보전하는 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끝없는 갈등과 조정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뜻 분리되어 보이는 생태적인 요구와 사회복지적인 요구가 현실에서는 맞물려 나타나곤 한다는 점이다.
커먼즈에 대한 요구에 담긴 이러한 복합적인 차원을 드러내기 위해서, 피오나 윌리엄즈(Fiona Williams)를 비롯하여 주로 유럽의 사회정책 연구자들과 활동가들 가운데 사회복지의 문제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복지 커먼즈’(welfarecommons)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14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세상을 위한 현재의 투쟁에서 돌봄이야말로 핵심적인 쟁점으로, 이 돌봄 문제를 해결하다보면 결국 생태환경 및 자연자원의 관리 문제와도 만나게 되는데, 흐름을 달리하나 상통하기도 하는 이 두 영역을 매개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지 커먼즈 개념이라는 것이다. 커먼즈라는 것이 자연자원의 관리방식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특정한 삶의 형태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복지 커먼즈는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커먼즈의 어떤 특성을 강조하는 것이지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틀이 중요한 이유는 우선 서로 다른 저항과 비판의 지점들을 연결해서 사고할 필요가 점점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돌봄과 복지의 위기를 단지 재원의 부족이나 금융위기로 인한 여파 등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입장을 넘어서 통합적인 시각에서 사회재생산의 위기로 바라보게 해준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개념적인 연대에 기초할 때 커먼즈는 그 자체로 비자본주의적인 것을 상상하는 투쟁의 거점이 될 수 있으며, 다른 삶을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토지, 물, 공간, 시간, 공공서비스와 돌봄, 교육과 의료 및 건강 등의 상품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생존을 위협받아왔고, 자원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시민으로서의 삶을 박탈당해왔음을 상기할 때, 복지 커먼즈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저항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개인화 및 상품화에 대한 저항이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들을 제공할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단순하게 확인하는 데 그치거나, 돌봄의 책임을 일차적으로 가족이나 친족이 감당하는 오래된 방식으로 회귀시키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복지 커먼즈에서 핵심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공적인 자원을 공동체 앞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이며, 이러한 자원을 기반으로 하여 구성원들의 복지 필요에 응답할 수 있는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이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공적인 장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4. 돌봄Care이 가능한 공동체를 위하여
공동체가 자원을 가지고 직접 참여해서 돌봄의 필요를 감지하고 제공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돌봄이라는 것 자체가 단순히 서비스 형태로 주어질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시장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복지 수요를 양적으로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술적 문제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니 일상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문제는 무엇이고 돌봄이 필요한 영역은 어디인지를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서류에 의존하는 관료적인 태도나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입장에서 비용과 수요를 감축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는 듯 보이곤 한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복지 수혜의 자격을 규정하고, 그 요건에 맞는지를 입증하고 감시하며 관리하는 체제가 만들어낸 여러 비극적 사례를 목격할 수 있으며, 반대로 규정을 악용해 공적 자원을 사취하는 사례 역시 다수 존재한다. 보육이나 요양 서비스의 경우에는 공적 지원이 증가하면서 지원금이 유인이 되어 오히려 시장 영역이 확대된다든가, 복지를 관장하는 행정 영역으로 투입되는 비용이 실제 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비용을 능가하는 사례가 낯설지 않다. 결국 국가 주도의 관료적 복지체제 속에서는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탈인격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시장 주도의 체제 속에서는 복지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이윤창출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돌봄은 그 성격 자체가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시공간에 대한 관심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표준화된 국가 시스템이나 시장 기제에 맡겨 생산하고 분배하면 되는 물건이 아니다. 돌봄이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감지하고 그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 혹은 개인과 자연을 포함한 주변 환경 사이의 관계를 포함하는 여러 관계성을 떼어놓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관습법에 가깝게 정해진 운영원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커먼즈는 각 기관이 운영되어야 할 방안을 촘촘히 규정하고 있는 정식 법률체계와는 달리, 커먼즈마다 주어진 자연환경과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달리 작동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있으며, 시장의 교환논리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중앙집중화되지 않은 방식의 참여를 끌어냄으로써 운영된다는 강점을 가진 체제이다.15 따라서 현재 시장과 관료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돌봄과 복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동자원뿐 아니라 공적 지원을 활용하되 공동체 스스로 구성원들의 필요에 맞게 조직하고 활용할 수 있는 복지 커먼즈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복지 시스템이 지금의 체제로 지속된다면 그 문제점은 단순한 돌봄의 위기나 비용의 급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지 시스템 자체가 작동하지 않게 되는 위기 상황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삶의 국면마다 겪게 되는 생활의 필요를 함께 나누고 헤쳐나가며 서로 돌보는 일은 커먼즈가 커먼즈로서 기능하기 위한 기본이다. 국가나 시장, 가족을 넘어선 공동체로서 커먼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돌봄의 필요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돌봄이란 그 성격상 선험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우며 개인이 처한 삶의 맥락과 특성을 고려해서 관심과 배려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돌봄은 이윤을 추구하는 시장도, 관료화된 국가도 제공할 수 없으며, 일부의 통념과는 달리 가족 내에서 제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돌봄의 위기를 극복하는 공공성의 확대 문제를 국가나 시장의 손에 맡겨놓을 수는 없으며, 대체로 여성들의 드러나지 않은 노동으로 지속되어온 기존의 가족이나 공동체 역시 공공성을 담지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첫머리에 언급했던 82년생 김지영씨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그가 겪은 곤경에 한국사회에 만연한 성차별, 일과 가정의 양립을 허용하지 않는 노동환경, 돌봄을 오롯이 가족의 몫으로 돌리는 공적인 복지의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현재 정부의 출산지원 정책에 쏟아지는 비난은 대체로 더 많은 국가의 지원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제껏 저출산대책을 계속해오면서 나라를 믿고 아이를 낳으면 국가가 책임지겠노라 선전해온 것을 생각하면, 대중의 그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김지영씨들이 겪는 위기를 들여다보면 돌봄이 끼어들어갈 자리가 없는 팍팍한 삶이 단순히 복지서비스가 확충되고 양육비 지원을 조금 더 받는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현재 재생산위기가 이토록 첨예하게 부각되는 것은 신자유주의 이후 자연자원, 토지, 공적 공간과 공공서비스 등 이제까지 커먼즈로 간주되어왔던 영역이 지속적으로 사유화되고 상품화되어왔기 때문임은 이미 강조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김지영씨가 어린아이를 홀로 돌봐야 하는 독박 육아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고 해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주거공간은 물론 의료, 교육, 돌봄,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자연이나 공간에 이르기까지 삶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급속하게 사유화되면서 점점 더 높은 비용을 주고 구매해야 하는 상품이 되어가는 현실이다. 이는 어차피 나와 내 가족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으며, 국가의 지원으로 해결하기도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게 보면 김지영씨를 비롯해서 출산과 양육 과정에서 고통받는 많은 여성들의 좌절은 이미 주어져 있는 사회적 구조의 바깥, 다시 말해 국가, 시장, 그리고 가족의 경계 밖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 곁에는 함께 문제를 해결해갈 이웃이 보이지 않으며, 그들은 ‘맘충’ 소리에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은 해도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서 단절되어 기죽은 나머지 부당한 언사에 동등한 시민으로서 맞설 생각은 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김지영씨가 자신에게 필요한 삶의 조건을 만들어낼 의지를 품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을 확대하고 그들과 연대할 가능성을 찾아나가는 또다른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공동의 삶에 대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돌봄이 가능한 삶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현실이 가능함을, 국가나 관만이 공공성의 담지자라는 인식을 넘어 커먼즈를 확대하는 것이 곧 공공성을 확보하는 과정임을 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돌봄의 위기가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이뤄낼 수 있는가 여부는 결국 위기를 통해 공유와 협동, 호혜성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적 실천과 가능성의 공간으로서의 커먼즈를 얼마나 확대해나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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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낸시 프레이저 「자본과 돌봄의 모순」,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자기보다 가난한 누군가에게 가족과 공동체의 일을 떠맡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는 돌봄 떠넘기기의 연쇄를 라셀 파레냐스는 ‘글로벌 돌봄사슬’(global chain of care)이라고 부른다.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세계화의 하인들』, 문현아 옮김, 여이연 2009.
- 백영서 「사회인문학의 지평을 열며」, 김성보 외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길사 2011, 36면.
- 미조구치 유조 『한 단어 사전, 공사』, 고희탁 옮김, 푸른역사 2013, 56~63면.
- 본디 영국에서 공유지를 의미하는 개념인 ‘commons’는 공유지, 공유재, 공유자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된다. 최현은 commons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오스트롬(E. Ostrom)이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common pool resources’(CPRs)를 소유권과는 별개로 다수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자원이라는 의미에서 공유자원(common property resources)과 구별되어야 한다며, 그 번역어로 ‘공동자원’을 택할 것을 주장한다. 한편 그는 오스트롬이 commons와 common pool resources를 구별하지 않았다고 파악한다.(최현 「공동자원 개념과 제주의 공동목장: 공동자원으로서의 특징」, 『경제와 사회』 98호, 2013) 그런데 commons를 common pool resources와 구분하지 않고 공동자원으로 번역하는 것은 common pool resources는 학술적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역사적인 현상으로서의 커먼즈를 망각하기 쉽게 만든다는 문제가 있다. commons는 자원의 문제로 환원되기 어려운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공동자원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대목도 많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commons에 대한 논의를 할 때는 발음 그대로인 ‘커먼즈’로 표기할 것이다. 이는 마땅한 번역어를 찾기 어려워서이기도 한데 실제로 국내의 여러 연구자나 활동가가 커먼즈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 학계에서도 commons를 그대로 발음하여 コモンズ(코몬즈)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
- Francine Mestrum, “Human Rights and the Common Good: why social protection is a social commons?,” Other News (www.other-news.info) 2013.10.24.
- David Bollier and Silke Helfrich (eds.).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Levellers Press 2012.
-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 정남영 옮김, 갈무리 2012.
- Bollier and Helfrich, 앞의 책.
- Thomas Allan, “Beyond Efficiency: Care and the Commons,” Centre for Welfare Reform (www.centreforwelfarereform.org) 2016.10.6.
-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한상영 옮김, 에이도스 2014.
- 최근 들어 도시를 중심으로 한 커먼즈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여기에 대한 사회적·학술적 관심도 크다. 특히 현재 도시 공간에서 진행되는 젠트리피케이션과 관련하여 커먼즈 논의가 가질 수 있는 시사점에 대해서는 본지 이번호에 실린 전은호의 글을 참조. 그러나 자연의 공동체적 관리를 기본으로 하는 커먼즈의 기본 특성을 고려할 때, 새로운 현상이고 도시민들의 삶과 가까운 곳에서 진행된다고 해서 도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커먼즈운동에만 관심이 쏠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비도시 지역의 커먼즈 또한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정영신·백영경 「대만 원주민의 토지반환운동과 공동체-공동자원 관계의 변동」, 『환경사회학연구 ECO』 제19권 2호, 2015.
- Fiona Williams, “Towards the Welfare Commons: Contestation, Critique and Criticality in Social Policy,” in Social policy review 27: Analysis and Debate in Social Policy, Policy Press 2015.
- David Bollier and Burns H. Weston, Green Governance: Ecological Survival, Human Rights and the Law of the Comm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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