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4

[집중 인터뷰]「한국 보수세력 연구」펴낸 南時旭 : 월간조선



[집중 인터뷰]「한국 보수세력 연구」펴낸 南時旭 : 월간조선

[집중 인터뷰]「한국 보수세력 연구」펴낸 南時旭
『영원한「進步」는 없다 進步도 목적 이루면 保守』


배진영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는 舊韓末 개화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을 지키는 것이 保守』

南時旭
1938년 경북 의성 출생. 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獨 베를린국제신문연구소 수료. 서울大 대학원 외교학 석사. 동아일보 정치부장·同 출판국장·편집국장·논설위원실장·상무이사, 관훈클럽 총무,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문화일보 사장. 고려大 석좌교수 역임. 現 세종大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 저서 「항변의 계절」, 「체험적 기자론」, 「인터넷 시대의 취재와 보도」, 「한국보수세력연구」 등. 동아대상, 서울언론인클럽 칼럼상, 위암장지연상 등 수상.
「파괴시대」와 「보수주의」

<수구를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눈이 뚱그렇고 입이 벙벙하게 하여 그 뿌리를 영영 제거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뒤로 퇴보할 여지가 없게 한 후에 앞으로 진보하는 길로 인도하여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갈겨 新사상과 新정신을 발휘하고 4000년 舊大韓으로 하여금 新大韓이 되게 하는 것이 파괴시대라 하노라>

<유럽 열강을 보면 영국은 보수주의가 最勝(최승)하여 2000년 역사상 규모를 지금까지 준수하는 기초로써 때에 따라 적절히 하여 진보발전을 勵行(여행)함으로 그 나라의 문명사업과 발달정신이 가장 완전 공고하고, 동양의 일본도 그 維新(유신)의 실상을 관찰하면 표면적 개혁은 없지 않으나 또한 보수주의의 근거로 그 발달의 효력이 그렇게 완전한 바라, 프랑스 인민은 파괴행동이 심히 격렬한 결과 지금까지 다대한 손해를 입은 영향이 있도다>

前者(전자)는 대한매일신보(1910년 7월30일)에 실린 사설 「파괴시대」, 後者(후자)는 황성신문(1909년 11월17일)에 실린 사설「보수주의로 진보함이 佳良(가량)한 방침」의 일부이다.

둘 다 進步(진보)를 얘기하고 있지만 前者는 「파괴주의」, 즉 급진적 개혁을, 後者는 「保守(보수)주의」, 즉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오늘날 우리 사회의 保·革 논쟁을 방불케 한다. 이를 보면 「보수와 진보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쟁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위에서 소개한 두 개의 사설은 南時旭(남시욱·67·前 문화일보 사장) 세종大 석좌교수가 지난해 말 펴낸 「한국 보수세력 연구」(나남출판사 刊)에 소개되어 있다. 654쪽 분량의 이 책은 舊韓末(구한말) 개화파에서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 보수세력의 뿌리를 탐구하고 있다. 舊韓末 발간된 漢城旬報(한성순보)에서부터 舊소련 기밀문서, 근래에 나온 뉴라이트 관련 논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들을 종횡으로 섭렵하고 있는 이 책은 방대한 분량과 딱딱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술술 읽힌다.

동아일보 정치부장·편집국장·논설실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 동아대상(논설 부문)·서울언론클럽 칼럼상 등을 수상했던 著者(저자)의 필력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保守세력은 무얼 保守해야 하나?

지난 2월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 있는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사무실에서 南時旭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기자가 「어느 정치학자도 손대지 못했던 대단한 力作(역작)임에도 술술 잘 읽히더라」고 하자, 南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 역사왜곡이 심해 젊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읽혔으면 하는 생각에서 될 수 있으면 쉽게 쓰려고 애썼습니다. 읽을 만하던가요?』

―네,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습니까.

『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盧武鉉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대통령들을 모두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역사가들이 과거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라면, 언론인은 현재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근래 한국의 右派(우파)가 몰리게 되면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젊은 左派(좌파) 지식인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검토해 보게 됐습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는 美 군정 시절, 미국이 이 땅을 反共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移植(이식)한 외래 사상」이라면서 「한국의 保守세력에게 保守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주장하더군요.

그들이 역사가로서 과거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 과거와 현재를 裁斷(재단)하려는 것을 보고 「저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舊韓末 서구 정치사상을 국내에 소개했던 한성순보.
―책을 보니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를 舊韓末 개화파에서 찾으셨더군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대학에서 언론사를 가르치다 보니, 한성순보나 독립신문 등 舊韓末 언론에서 당시 서양의 정치와 새로운 정치사조,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이념 등이 소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한성순보 2호(1883년 10월1일자)는 유럽의 각국 사정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는데, 자유주의를 찬양하고 「君民同治(군민동치)」, 즉 입헌군주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소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부강이 입헌군주제도에서 나오므로 조선도 종래의 고식적 태도에서 탈피해 마땅히 올바른 대책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어요. 그 밖에 한성순보는 主權在民(주권재민), 미국식 대통령제, 심지어 러시아의 虛無黨(허무당·無정부주의)이나 프랑스의 사회주의 등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나중에 나온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舊韓末 개화파의 계보와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해 보니, 그들에게서 자유민주주의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멸망 후 민주주의 본격 등장』



舊韓末 개화파는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南교수는 舊韓末 개화파의 계보를 이렇게 설명했다.

『1830년대에 태어난 오경석·유홍기 등을 개화파 1세대라고 한다면, 1850~1860년대에 태어난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은 개화파 2세대, 1870년대에 태어난 李承晩은 개화파 3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중 개화파 3세대인 李承晩을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겠죠. 李承晩은 개화파 2세대인 서재필에게서 배운 사람입니다. 서재필은 개화파 1세대와 함께 당시 개명한 정치인이던 朴珪壽(박규수)에게서 배운 「박규수 스쿨」의 일원입니다.

朴珪壽는 실학자인 朴趾源(박지원)의 손자고, 오경석은 秋史 金正喜(추사 김정희)의 제자 아닙니까? 이렇게 보면 개화파의 뿌리는 실학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舊韓末 언론에 자유주의·민주주의 등 歐美(구미)의 정치개념이 소개됐다고 해도, 당시 지식인들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개화파들은 自由民權(자유민권)과 富國强兵(부국강병), 萬國公法(만국공법·국제법)에 의한 국제질서를 주장했습니다. 이건 당시로서는 엄청난 進步사상이었습니다.

다만 舊韓末에는 「국가권력의 제한」을 의미하는 「자유주의」는 주장할 수 있었어도, 「主權(왕권)의 귀속」을 의미하는 「민주주의」는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립협회나 舊韓末 애국계몽운동단체들은 「忠君愛國(충군애국)」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개화파 3세대 인사들은 민주주의·공화주의를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1917년 신규식 등이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에서는 「隆熙(융희) 황제가 三寶(삼보)를 포기한 8월29일(1910년 경술국치)은, 즉 吾人동지가 三寶를 계승한 8월29일이니… 저 帝權(제권)소멸의 時가 곧 民權(민권)발생의 時」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그 例입니다.

舊韓末 개화파 등에게는 자유주의·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있었지만, 당시 정치상황 속에서 그것을 온전히 주장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조선왕조 500년 동안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性理學(성리학)은 한국 보수주의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舊韓末 성리학자들이 내세운 「衛正斥邪(위정척사)」 사상은 완고하게 開國(개국)을 거부하다가 결국 나라를 일본제국주의의 밥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박은식·신채호 등 개명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부 유학자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儒學(유학)은 한국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性理學은 하나의 문화로서 이후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행태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공부했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체험한 李承晩 대통령도 유교적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사사오입 개헌을 하면서 무리하게 장기집권을 꾀했던 것은 유교적 엘리트 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舊韓末 「진보적」 사상이었던 자유민주주의가 「보수주의」로 불리게 되는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舊韓末 개화파들이 꿈꾸었던 자유민주주의·공화주의의 꿈은 3·1 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실현됩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오면서 그들이 「進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舊韓末 개화파의 맥을 이은 세력들 중 일부는 「민족주의」 세력으로 불리게 됩니다. 光復(광복) 후 한민당 등 保守세력은 스스로를 「민족주의」 세력이라고 불렀습니다. 金日成도 保守세력을 「민족주의자들」이라고 불렀는데, 물론 여기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한편 개화파의 일부는 日帝 말기에 이르러 親日派로 변절하게 됩니다. 이는 개화파의 근대화론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歐美를 풍미했던 사회적 다위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適者生存(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생물이 진화해 온 것처럼, 세상은 優勝劣敗(우승열패)의 법칙이 지배하는데, 조선은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생각에서 현실 순응의 길로 돌아선 것이죠. 윤치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지키는 게 保守』

南교수는 『「보수주의」니, 「진보주의」니 하는 것은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진보」는 특정 시점에서는 새로운 것을 담고 있지만, 목적을 이루고 나면 그때부터 「보수」가 됩니다. 자기들도 가치와 체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죠.

서양에서도 자유주의는 전제군주정에 대항하는 「진보」의 이념이었지만, 이후 사회주의에 「진보」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공산체제가 붕괴할 무렵의 소련·東歐(동구)나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에서는 기존의 공산주의는 「보수」이고, 자유주의가 「진보」 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영원한 「진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변증법」이라고 할까요』

―우리나라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을 지키는 것이 「보수」가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보수」나 「진보」 모두 헌법을 지킨다는 데에는 異論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헌법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 아래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冷戰(냉전)지대일 뿐 아니라, 신문법이나 私學法(사학법) 개정에서 보듯이 정부의 과도한 시장개입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정강정책에서 모든 대학의 國有化(국유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거 反독재나 反共투쟁의 차원에서는 아니더라도, 「자유」와 「反자유」는 여전히 유효한 개념입니다』



舊韓末 개화파들이 꿈꾸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3·1 운동 후 임시정부에서 구현됐다.


金大中·盧武鉉 정권의 性格

―金大中 정권이나 盧武鉉 정권을 「진보」정권이라고 보십니까.

『金大中 정권은 경제정책 면에서 보면 보수적이었는데, 북한정권에 대해서는 보수적이 아니었죠.

盧武鉉 정권은 스스로 진보 정권이라고 하는데, 新자유주의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FTA(자유무역협정)는 열심히 추진하고 있습니다. 盧대통령이 미국에 갔을 때에는 「6·25 때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더니, 국내에 돌아와서 하는 말과 정책은 또 다르고…. 盧대통령 스스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 正體性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기승을 부리는데, 「국가」와 「국민」은 실종되어 버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국가」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국 국적을 취득해도, 엄연한 중국 공민인 조선족도 모두 「우리 민족」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혈연의식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日帝시대와 분단을 겪으면서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이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공동체」, 「정치공동체」 의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민족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식의 이야기는 웃기는 얘기입니다』



『자유·인권에 반하는 민족주의는 죄악』

―과거에는 「민족주의」는 보수세력의 전유물이었습니다만, 오늘날에는 민족주의마저도 左派세력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日帝시대와 분단을 겪으면서 형성된 저항적 민족주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神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근대적 가치인 자유와 인권에 반하는 민족주의는 죄악입니다. 민족주의의 가장 극악한 형태가 나치독일의 아리안 민족주의였잖습니까?

오늘날 북한은 애국주의·조선민족제일주의·先軍정치·「우리 민족끼리」를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에 호소합니다만,全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민족주의는 초월해야 할 이데올로기입니다. 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민족주의 운운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지역주의를 말하는 것만큼이나 편협한 이야기입니다』

南교수는 『「민족주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보수세력의 잘못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통일」을 앞세운「민족주의」 공세에 적극적·공세적으로 대처한 적이 없어요. 李承晩 대통령 시절 「북한은 국가가 아니다. 괴뢰정권일 뿐이다」라며 北進(북진)통일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시대착오적인 思考로 몰려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北進통일론을 좀더 정교하게 이론화하기만 했어도, 지금처럼 左派의 민족주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金大中 정권이 左派 지식인들 살렸다』

―대한민국의 正體性을 지켜야 할 盧대통령 스스로가 대한민국의 正體性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면서, 「대한민국의 법적 정통성은 인정하지만, 대한민국은 분열주의 세력이 만들었다」는 식의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盧대통령의 생각은 1980년대 운동권에게 영향을 끼쳤던 리영희 교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면,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본에서는 소련·동구권이 붕괴한 후 과거 左派 지식인들이 했던 잘못된 주장에 대한 대대적인 검증과 반성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없었어요. 일부 左派 지식인들은 1990년대 초·중반에 과거 자신의 잘못된 주장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다가, 金大中 정권이 들어선 후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군요. 金大中 정권이 그들을 살린 것이죠』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左派들의 잘못된 주장을 정리하고 넘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식인들의 책임이 큽니다. 게으르고 비겁했던 것이죠. 지금도 그렇고요. 일례로 舊소련이 붕괴한 후 소련의 기밀문서들이 공개됐어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蘇 軍政문서나 스티코프(美蘇공동委 소련 측 수석대표. 初代 북한주재 소련대사) 일기를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브루스 커밍스 등 수정주의자들이 남한 內 자발적인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는 「9월 총파업」이나 「10월 폭동」 때, 소련이 자금지원을 했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자료들을 제대로 활용해서 左派논리를 비판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보안법 폐지 투쟁도 필요하지만, 知的(지적)투쟁·문화투쟁이 필요합니다. 특히 경제인들이나 출판인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左派민족주의적 시각인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판하는 책 「해방전후사의 再인식」을 내려는데, 이 책을 출판하겠다는 출판사가 없어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출판사 가운데 하나였던 K출판사에서 高校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가운데 가장 左派的 성향이 강한 책을 펴내고 있는 것이 생각나네요.

南교수는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그게 賤民(천민)자본주의자죠. 그렇게 자본주의의 열매만 따먹겠다는 사람들만 있어서는 이 체제를 지킬 수 없어요』

―근래 金大中 前대통령의 4월 訪北 추진 등을 보면서, 盧武鉉 정권이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북한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내지 「국가연합」 진입을 선언할 것이라는 이른바 「연방 事變(사변)」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인터뷰 내내 거의 표정변화가 없던 南교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연방제 사변』은 일어날 것인가?

『저도 그 문제를 매우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선 盧武鉉 대통령이 2004년 2월 「우리의 통일은 독일처럼 흡수통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일종의 국가연합 체제로 갈 것」이라고 한 것에서 보듯, 연방제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姜禎求(강정구) 교수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南과 北의 통일을 기정사실화해야 한다」면서 「연합형 연방제」라는 것을 주장한 적이 있는데, 姜교수는 現 정권의 외교안보팀과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姜禎求 교수는 李鍾奭 신임 통일부 장관의 논문지도 교수였음-기자 注).

저는 지난번 장관급 회담에서 「상호체제존중」을 다짐한 것이나, 북한의 달러貨 위조 문제 등에 대한 盧武鉉 정부의 태도를 볼 때, 이 정부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나 「연합제」로 가기 위해 무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南時旭 교수는 단호한 어조로 『헌법상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통일은 안 된다』고 말했다.

『설사 改憲(개헌)을 한다고 해도 우리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제4조) 원칙은 바꿀 수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헌으로도 바꿀 수 없는 우리 헌법의 核(핵)이기 때문입니다. 통일은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통일, 행복과 번영을 이루는 통일이어야 합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신년 對국민연설 등에서 「양극화 문제」를 강하게 거론했습니다. 2007년 大選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갈등 구도로 끌고 가려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 양극화 현상이 왜 생겼습니까.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중산층이 몰락한 것은 盧武鉉 정권의 경제 失政(실정) 때문이죠. 대통령 후보 시절 年 7% 성장을 약속했지만,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3~4% 성장에 머물고 있잖아요.

신문 정책에서 보듯이 정권이 反자유주의적 思考(사고)를 가지고 있는데, 경제가 발전하고 富가 형성될 리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정권이 양극화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南美型 포퓰리즘 통치로 가겠다는 것이에요』

―2007년에 보수세력이 정권을 탈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南교수의 대답은 깜짝 놀랄 정도로 단호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선 盧武鉉 정권의 계속된 失政으로 民心 이반이 심각합니다. 반면에 보수세력에서는 과거와 관련해 약점이 없는 뉴라이트 세력이 조직화되고 있어요. 여론조사 등을 보면 국민들의 의식도 눈에 띄게 보수화되고 있어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2007년 大選을 낙관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야 물론이죠. 특히 북한과의 「낮은 단계의 연방」이나 「연합」을 추진하면서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려 들 가능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뉴라이트에 기대 크다』

―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도된 민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차떼기」와 같은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한 右派의 개혁운동이 있어야겠죠. 그 점에서 뉴라이트 운동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아직 시작 단계인 뉴라이트 운동에 너무 큰 기대를 걸고 계신 것 아닙니까.

『뉴라이트 세력에게는 과거의 業報(업보)가 없어요. 독재와 무관하고, 신선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左派 출신으로 사회주의와 북한에 대해 실망한 사람들입니다. 左派의 논리나 그들과 싸우는 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뉴라이트 운동을 하고 있는 前 主思派(주사파) 운동권 인사의 自省(자성)을 담은 책을 읽었는데, 「이 정도의 진지함과 성실함이라면 기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現 정권이 親日(친일) 진상규명 등 과거사청산에 나서는 것이나, 朝鮮日報·東亞日報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는 것은, 보수세력의 기반을 허물어 보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과거 독립운동하던 분들이 앞장서서 만든 반민특위법에 의해 親日派를 처단할 때에도 그 대상은 600명을 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親日派로 단죄해야 할 대상이 30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합니다.

親日派 청산을 역설해 온 모씨는 「親美派의 뿌리를 찾아보니 親日派더라」는 주장을 펴더군요. 이것은 지금의 親日 진상규명 작업이 反美운동의 일환이고, 불순한 저의가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지어야 할 시간이다.

―대학 시절 스스로를 「保守」와 「進步」 중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그런 거 없었어요. 1954~1958년 대학을 다녔는데, 6·25 직후라 反共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어요. 물론 李承晩 정권의 反민주적인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의식들을 갖고 있었지만, 그런 의식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은 우리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이었어요』

―참 좋은 시절에 대학을 다니셨네요. 이후 한국의 대학은 4·19부터 시작해 199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寧日(영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참 예외적인 대학생활을 한 셈이네요』



『李承晩의 교육혁명과 韓美동맹 평가』



고종 폐위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을 당시의 李承晩.
南교수가 인터뷰 첫머리에서 『기자 시절 盧武鉉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대통령들을 모두 취재했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를 물어보기로 했다.

―체험하셨던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 평가해 주시겠습니까. 李承晩 대통령을 취재하신 적이 있다고 하셨죠.

『그때는 경무대 출입기자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중앙청 출입기자들 중에서 1진 기자들이 경무대에 출입하면서 취재했어요. 나는 2진이어서 경무대에 출입할 기회는 없었어요. 한번은 지금 스위스 그랜드 호텔(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소재) 자리에 있던 커다란 한옥에서 열리는 야외파티에 李承晩 대통령이 나오는데, 1진 선배기자가 못 나오게 됐으니 나보고 취재하라고 하더군요』

―李대통령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미웠어요. 자유당 말기, 그의 終身(종신)집권이나 권위주의적 행태가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대통령으로서의 李承晩 박사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李承晩 대통령은 건국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하신 분입니다. 특히 李承晩 대통령의 교육혁명과 韓美동맹은 이후 경제발전의 토대가 됐습니다.

李대통령은 6·25가 끝나자마자 대학생들에게 復學令(복학령)을 내렸고, 그 없던 시절에도 유학생들을 내보냈어요. 南悳祐(남덕우)씨 등 후일 朴正熙 정권 시절 경제발전의 주역이 됐던 분들이 모두 그때 미국 유학을 한 분들입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韓美 방위조약이 假조인되던 날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의 과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李承晩 대통령이 再選 대통령으로 그쳤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죠. 당시에는 李대통령을 견제할 만한 정치세력이 없었기도 합니다. 4·19도 야당이 아니라 학생과 군대가 한 것이니까요. 親日派 청산을 제대로 못 한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최소한 당시 사형선고를 받았던 몇 명만이라도 刑을 집행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朴正熙, 자유민주주의 부인 안 해』



5·16군사혁명은 근대화를 갈구하던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은 비판받아야죠. 하지만 5·16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민주당 정권에 실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신생독립국들이 경제발전을 갈구하면서도 민간 리더십은 취약해, 군사혁명이 빈발하던 시절이었어요.

1960~1970년대에 군사독재는 全세계적인 현상이었지만, 경제발전에 성공한 것은 한국뿐이었습니다. 朴대통령은 시대적 상황에 맞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朴正熙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이념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경제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朴대통령은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전체주의를 주장했던 파시스트들과 구별됩니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사고방식은 이후 全斗煥(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졌습니다』

―朴대통령 시절, 우리나라가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민족의 우수성, 李承晩 대통령 시절의 교육혁명, 군사독재의 효율성 등을 들 수 있겠죠. 분단 상황 아래서 북한과의 체제경쟁이나 駐韓美軍(주한미군) 철수에서 비롯된 위기감도 작용했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긴장 상황에 처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 간에는 차이가 크겠죠』



『「햇볕정책」은 높은 평가 받기 어려울 것』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는데, 南교수는 全斗煥·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은 그냥 넘어갔다. 기자도 굳이 묻지 않았다. 南교수는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도 『文民化에 성공한 것은 평가받겠지만, IMF 외환위기를 부른 것은 과오로 기록될 것』이라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與野(여야) 간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시민사회를 활성화한 것은 업적으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햇볕정책」은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일방적인 對北(대북)정책으로 사회갈등을 야기했고, 북한 인권문제와 北核문제를 방치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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