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4

이영훈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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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최근 수정 시각: 2018-03-25 02:31:09

분류
경제학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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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 이영훈(작곡가)


배우 - 이영훈(배우)


좋은사람의 등장인물 - 이영훈(좋은 사람(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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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자본주의 맹아론, 식민지 근대화론, 뉴라이트, 경제학




1. 개요2. 상세3. 비판 및 논란
3.1. "세종대왕이 군위안부의 원류"4. 오해5. 주요 저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경제사학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취득하였고,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활동 후 2017년 2월부로 정년퇴임 하였다.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살아온 행적과 생각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년퇴임 인터뷰 기사

80년대까지 마르크스 학파였다가 지금은 뉴라이트로 전향한 안병직 교수[1]의 제자이다. 근현대 한국 경제사를 연구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다.[2] 다만 중요한 점은 식민지 수혜론자는 확실히 아니며, 강점기의 근대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특징이다. 한마디로 최소한 일빠는 아니다.

2. 상세[편집]


일제강점기에 근대 문물의 유입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한 한반도 경제의 양적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대표 학자이다. 기본적인 주장은 조선이 자생적으로 근대화, 자본주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은 허상이며, 직접적인 근대 문물의 유입 시기-실질적으로 개항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것이 본래 일제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한국이 근대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이다.단순히 피상적인 주장이 아니라 이영훈 교수와 경제사학계에서는 자료를 수집하여 계량화, 추계하여 입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는 “법률, 건축, 직물, 의류업 및 화학, 실용 학문, 경제, 산업 등이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것은 사실이고, 이 때 억지로라도 도입된 근대적 시스템을 겪은 것을 실증적으로 부정할 수 있겠냐?”는 것인데, 주로 이영훈의 연구는 안병직의 뒤를 이어 해방 이후 죽 90년대 국내에서 주류를 점하던 사회경제사학계와 민족주의 사학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주로 식민지 근대화론일지라도 '정치-법''사회-문화' 부문 보다는 자신의 전문분야인 경제사, 특히 농업경제사 부문에서 기존의 연구에 이론을 제기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60년대 등장한 자본주의 맹아론의 하나인 경영형 부농론에 반론으로 '소농 사회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후 조선후기 경제사에서 수량경제지표를 만들어 연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많은 관심을 얻었다. 자본주의 맹아론 비판 말고도 호적 - 특히 조선 초기 호적 연구 - 이나 여타 사회사 연구 -고대의 奴 관념 등- 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글에서 비유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편이라 잘 읽힌다. 문장력도 훌륭하다. 칼럼을 읽어 보면 형상화를 참 잘 한다. 논문에서 한 문장이 열 줄을 넘어가고 주술이 안 맞는 건조한 글만 수두룩한 한국 학계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이영훈은 개중에서도 무척 글을 잘 쓰는 학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충남대 허수열 교수는 이영훈 이하 여러 학자들이 수집한 경제적 지표들은 일관적이지 않은데다가 이런 부족한 근거로 비약을 너무 심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이영훈은 스스로 공동 연구자들과 함께 여러지표를 가지고서 그중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취사선택해서 특정한 결론을 내놓는 다는 것으로, 공동연구이면 같은 수치자료를 사용해야 하지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을 강화할 A지표를 사용하고, 불리한 지점에선 그것을 약화시킬 B지표를 사용하는게 주된 수법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사례로 신빙성이 우려되는 1918년 이전 조선총독부 통계를 무분별하게 원용하는 등의 오류를 저지른 적이 있다. [3] 또, 일찍이 김건태는 안동 금계리 의성 김씨가 문서 등의 실증적 자료를 들어 이영훈이 주장한 19세기 위기론을 반박하였다. 19세기 위기론은 개항과 제국주의, 식민화가 아니었다면 조선이 19세기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수량경제사로 본 조선 후기>를 읽어보면 이영훈은 19세기 조선이 산림파괴 등의 알 수 없는 요인으로 엄청난 토지생산성 감소와 농지 축소를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조선 사회가 생태학적 위기에 봉착했고 그 벽은 엄청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토지가 버려졌다면 과세대상 토지를 조사하여 부과기준을 정하는 양전사업이 19세기 수 차례 다시 시행되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은 없다. 대한제국이 실시한 광무양전 문서를 토대로 추적해 보면 조사 대상지의 거의 모든 농지가 과세대상이 되는 토지, 곧 소출을 내는 토지임을 알 수 있다. 또 이영훈이 주요 증거로 제시하는 지대량의 감소는 늘어난 부세가 조정되지 않고 소작인에게 전가되던 부패한 당시 상황 때문이지 토지 생산성 감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김건태의 주장이다.

2004년 기점으로 이영훈은 연구실을 벗어난 행보를 보였다, 경제사학, 그것도 자기의 주력하던 농경제사학 논문집필이나 연구보단 농경제사학은 커녕 경제사학이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근현대사 역사서 집필활동’이나 ‘방송 출연’ 등을 때때로 하면서 자신이 앞에 나서기보단 공저자의 저작에 참여하는 활동이 많아졌다. 이후 뉴라이트 활동에 참여하며 안병직과 함께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 등 기존의 식민지 수탈론을 부정하였다. 그의 동료인 조선 사회사 연구자 미야지마 히로시도 이러한 정치화한 행보에 걱정을 표한 바 있다.

2006년엔 몇몇 학자들과 공동으로 1979년도에 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를 반박하는 서적인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집필했고, 08년에 발간된 '대안교과서' 집필에 같은 해 주역으로 참여했다. 이후 2014년엔 한국경제[4]의 팟캐스트 정규재TV나 자유경제원의 자유티비에 출연하며 08년엔 대안교과서 지면紙面을 빌어 다수의 공저자와 함께 공개적으로 주장을 소개했다. 졍규재TV의 ‘대한민국의 나라만들기 역사’ 에 출연한 이영훈은 여기서 이승만과 박정희을 재평가 하고 그밖에 4.19와 5.16을 재평가 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유튜브에 그의 방송특강이 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 교과서 출판사들이 4.19혁명을 민족통일운동의 상징으로 교육하고 있는것에 대하여 강한 반발심을 나타내고 있다

3. 비판 및 논란[편집]



2003년 화랑세기에 대해서, 화랑세기속에서 묘사되는 삼국시대의 노비가 조선시대의 노비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며, 이러한 것은 필사자가 위서로 꾸며낼 수 없다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계에서 화랑세기 위서론이 강세를 띄고 있기 때문에 빈축을 사는 편이다.




2004년 이영훈은 100분 토론 및 저서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다가 언론의 왜곡과 해당 토론 당시 초래된 난타전으로 인해 심한 비난을 받았다. 언론에서는 이교수가 “위안부가 조선인들의 자발적 참여고 매춘과 동일하다”#는 발언을 한 것처럼 기사를 써서 논란이 일었다. 이로 인해 연구실이 계란투척을 당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위안부 피해여성들에게 찾아가서 큰절까지 하며 사죄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 토론 논지를 살펴보면 이영훈은 해당 발언을 전혀 한 일이 없으며, 이는 사회자 손석희 교수가 해당 논지를 다시 정리하도록 한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건 이후에는 저서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해당 토론회에 대한 회고를 적었고 위안부 및 근대사 관련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밖에 <환상의 나라 -위안소의 여인들->에서 '위안부를 일반적인 성노예 혹은 노예의 개념으로 볼 수 없으며 일본의 공창제와 동등한 개념으로 운영되었다'고 강의하여 비난을 받았다. # 정확하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영훈의 견해는 군과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위안부 징집은 없되, 군이 중개업자들에게 모집 위탁을 맡기어 위탁모집과정 도중에 중개업자들에 의한 취업사기나, 폭행, 납치, 인신매매등이 일어났고, 당시 총독부가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에 들어가게 된 사람은 분명히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 운영이 전시 공창제같이 군부대내의 윤락소처럼 운영했으되, 모집경로를 비롯하여 해방직후의 여러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것 역시 분명하므로 이들의 치료와 생활복지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이미 저서나 대담을 통해 여러차례 밝혔다.[5] 다만, 여기서 한일협정으로 위안부 피해여성에 대한 개인적인 보상과 복지의 길을 박정희 치하 당시 한국정부가 사실상 막아놨기 때문에 보상책임은 일본정부가 아니라 한국정부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스승인 안병직이 정신대대책협의회에 활동했었던 경험담을 토대로, 정대협을 포함한 대부분의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복지와 보상보다도 반일민족주의를 조장하는 것에 더 열중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역시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20세기 일제강점기때 생긴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민족'개념 까지 부정하였는데#, 그것으로 반박을 받았다.#




2006년에 이영훈ㆍ안병직ㆍ유영익 등 우파 성향의 학자들이 참가한 《교과서포럼》[6]에서 역시 4.19혁명 격하 및 5.16을 격상했다는 논란이 일어 회장에 쳐들어온 4.19 기념단체 및 유족회 회원들에게 폭행당하였다.###




2007년에 이영훈이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에서 조정래의 '아리랑'(이하 소설로 칭함)을 광기로 가득 찬 역사 왜곡 소설이라며 비난#했고 조정래는 이영훈을 "이영훈 교수는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진실만을 말한다. 난 근거 없는 건 절대 쓰지 않는다”# 라고 반박했다. 구체적으로 이교수가 비판한 내용은 이렇다.이영훈 시대정신 기고문. 기고문2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소설에서는 토지조사사업당시 농민이 지주총대에게 땅을 빼앗겨 분에 못참아 지주총대를 폭행하자 경찰에게 토지조사사업 방해 명목으로 즉결처형을 당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그런데 소설에서 경찰이 언급하는 법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당시 재판없이 경찰에 의한 직결처분권이 있었는지도 의문인데다, 정작 기록에도 확인되지 않는다. [7] 둘째로 소설은 지시마 열도에서 이뤄진 비행장 공사가 끝난 후인 1944년 초여름에 4천 명 가량의 조선인노무자가 일본군에게 기관총으로 학살되었다고 묘사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일대의 공사는 1944년 말까지 진행되었고, 다른 지역의 공사도 있었으며, 그나마 있는 노동자들도 전염병등으로 죽어나가(일본인 포함) 노동력이 부족했던 상황이므로 학살이 벌어질 리도 없고 실제로 일어난 적도 없었다. 셋째로 소설에서는 러일전쟁 이후부터 이미 풍요로운 곡창지였던 서해안과 김제평야의 토지를 일본인들이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 곡창지대를 탐낸 이완용이 1898년부터 직권을 이용해 사들이는 등의 모습이 보인다. 문제는 실제로 이지역은 광범위한 평야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3.1운동이 일던 1919년때까지 수확량이 거의 없는 황무지나 다름없었고, 1925년 동진수리조합이 개설되고 난 후에야 수확량이 늘어났다. 즉, 그전까지 황무지로 수십년간 방치된 지역을 이완용이 탐낼리도 없을 뿐더러 그지역에 거주한 일본인 지주들의 위세역시 소설에서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 특히나 소설속에서는 방조제와 저수지의 위치 조차 실제 김제일대의 지형과 지리와 무관하게 묘사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다만 기고문2에서 일본육군이 발행한 <옥구도엽>이라는 지도의 연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릇되게 표시하여 비판받기도 한다.






2013년 4월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식민통치가 정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서울대 교수가 일제 강점기때 인구가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라는 언급을 했는데 아마 이영훈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칭한걸로 해석한다. 아베 신조는 아예 공정한 동북아시아 역사 연구라는 미명하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미국 학자를 초빙할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다만 이영훈 교수 본인은 식민지 수혜론자가 아니며, 단지 근대화론자일 뿐이다. 많이 오해받지만 이 둘은 다른 개념이다. 식민지 근대화론 항목 참조.




2015년 9월 8일 이영훈은 아베 신조가 자민당 총재 3선 기념을 겸해 한 담화의 내용을 옹호하며 한국의 민족주의에 책임을 돌리는 발언들을 연달아 쏟아냈다.#
3.1. "세종대왕이 군위안부의 원류"[편집]


인제는 세종대왕이 군 위안부의 원류라는 소리까지 한다.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정부와 지방관아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기생 신분의 여인들이 있었다. 기생의 신분은 딸에게 세습되었다. 특정 여인에게 성 접대의 역을 강요하고 세습시킨 다른 나라의 예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기생제는 세계사에서 한국사가 지닌 개성적 특질을 상징하고 있다. 그 기생제를 사실상 창출한 군왕이 다름아닌 세종이었다. 기생의 딸은 기생이라는 법은 세종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기생은 관비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이전 고려시대만 해도 기생은 관비가 아니었다. 나아가 세종은 국경지대의 고을에 군사를 접대할 기생을 설치하였다. 이후 전국의 각 군현에 수십 명씩의 기생이 배치되었다. 세종이 창출한 기생제는 20세기 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원류를 이루었다.#

이영훈은 경제전공이다.
4. 오해[편집]



이영훈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이지만, 식민지 수혜론자는 아니다. 일제하의 근대화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제하의 조선 지배체제는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일제가 토지와 식량을 수탈했다는 교과서의 서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자는 말이냐”라고 불쾌해합니다. 저는 제국주의 비판의 논리가 그렇게 단순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는 수탈 여부로 비판할 것이 아니지요. 수탈 여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는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름 아니라 인간 본성에 반하는 체제가 제국주의이기 때문입니다.(중략)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체와 다를 바 없지요. 인간생명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한용운 선생이 일제의 조선 지배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자유의 논리에서였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한용운 선생의 글을 읽고 일본인 검찰은 마음으로 승복하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입니다. 그에 비출 때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각종 세금은 거두어 가면서 정치적 권리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 일제의 지배체제였습니다. 그런 모순은 어차피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모순을 해소하는 한 가지 방책은 조선인을 모조리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입니다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제2장에서 썼습니다만, 차별을 받는 가운데 조선인들은 그들이 하나의 운명공동체인 민족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민족의식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동화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일수록 더욱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동화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의 방책은 조선인이게도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제는 1942년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군대로 동원할 계획에서 1946년부터 조선인의 참정권을 인정할 방침을 세웁니다. 일제가 일찍 패망하는 통에 이 방침은 공수표가 되었습니다만, 실제 실현되었더라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지는 짐작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는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에 가득 찬 것이었다고 보지요.


저서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발췌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는 이유는, 일반인들의 인식에서는 '근대화=좋은 것'으로 생각되어 식근론을 긍정하는 것이 곧 일제의 수혜를 긍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흔히 식근론에 대한 비판으로 "그 근대화가 조선을 위한 근대화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의견이 붙는데, 식근론은 '근대화 여부'를 논하는 학문이지, 조선을 위한 근대화냐 그렇지 않느냐를 논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는 '조선을 위한 근대화가 아니였다'는 쪽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좌파, 우파를 가를 수 있는 담론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근대화론 그 자체는 민족주의, 국수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담론이기 때문에 좌파 담론에 가깝다. 이는 외국학계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그런 점에서 이영훈 교수는 과거 맑스주의자에서 인식의 전환이 일부 있을지 모르지만, 경제사를 보는 시각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5. 주요 저서[8][편집]



조선후기사회경제사(1989) :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정리한 책.


근대조선수리조합연구(일조각, 1992), 공저로 참여


한국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특질(2000)


맛질의 농민들-한국근세촌락생활사(2001), 공저로 참여


한국경제사(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2002), 장시원과 공저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2004), 공저로 참여


한국의 은행 100년사(2004), 공저로 참여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2004), 공저로 참여


식민지 시대의 視座-조선과 일본(2004), 공저로 참여


한국의 유가증권 100년사(2005), 공저로 참여


경제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2005), 김승욱과 공저


새로운 한국경제 발전사(2005), 공저로 참여


동아시아 근대경제의 형성과 발전(2005), 공저로 참여


東亞近代經濟的形成與發展(2005), 공저로 참여


고종황제 역사청문회(2005) : 이태진, 김재호, 이영훈 등의 대담내용을 엮은 책


동아시아근세사회의 비교-신분,촌락,토지소유관계(2006), 공저로 참여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2006), 공저로 참여. 초반부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를 적었다.


박정희 시대와 한국 현대사(2006), 공저로 참여


조선시대 생활사3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2006), 공저로 참여


대한민국 이야기(2007) :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구어체로 술술 풀어 대중 친화적으로 쓴 책.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2007) : 안병직과 이영훈의 대담내용을 엮은책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2007), 공저로 참여


한국의 경제발전과 경제정책(2008), 공저로 참여


한일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히스토리 :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2008), 공저로 참여


세계시스템과 동아시아(2008), 공저로 참여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재인식(2008), 공저로 참여


한국경제의 선진화를 위한 제도개혁 과제(2009) , 공저로 참여


한국현대 정치외교의 주요 쟁점과 논의(2000), 공저로 참여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2010), 공저로 참여


대한민국은 왜 건국을 기념하지 않은가(2011), 공저로 참여


인촌 김성수(2011), 공저로 참여


대한민국역사(2013)


한국경제사 I, II(2016) : 한국경제사 통사 교과서로 그간의 연구내용과 성과를 집대성했다. 일조각 출판


초기에는 단행본을 어느정도 있었으나, 이후 공저로 부분저술하는 편이 많다. 목록중에 5권만이 단행본이고, 3권이 2명이서 공저한 책이다.


[1]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80년대 중반 NLPDR그룹의 이론적 토대가 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다.[2] 다만 본인 스스로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명명한 적은 없다.[3] 이후의 논쟁양상은 본글의 토론게시판에서 지적된 바 있다. https://namu.wiki/topic/17531[4] 우익성향이다.[5] 이영훈은 스승인 안병직과 이에 대해 토론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도 잘 나온다.[6] 초,중,고 국사교과서가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고 때문에 이를 교정하겠다는 부류들이 모여서 구성한 뉴라이트의 하부조직, 2005년에 구성되었다.[7] 토지조사사업항목에도 나오지만 당시 지주총대는 땅을 소유하지 않은자도 명단에 올라와 있는 등 경제적 실권이 없었고 또 종전부터 소유권조사를 철저히 한 탓에 다른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땅을 남이 함부로 빼앗을 수도 없었다. 자세한 것은 토지조사사업 참고[8] http://econ.snu.ac.kr/html/procatagory/?temp=v&idx=0024&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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