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6

손민석 - 이영훈의 여성에 대한 성착취의 존재양태

(2) 손민석 | Facebook

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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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영훈의 기생론은 경제사적 베이스에 기초한 여성에 대한 성착취의 존재양태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알기에 여성학계까지 포함해서 이러한 시도를 한 이는 없다. <반일종족주의>가 지니는 학술적 가치는 여기에 있다. 

 그는 여성 성착취의 형태를 전근대와 근대로 나누어서 전근대는 신분제에 기초한 성착취로, 근대에는 상품교환에 기초한 성착취(=성노동론)으로 파악한다. 이 둘을 매개하는 것은 소농경제에 기초한 가부장제의 존속 여부이다. 소농경제의 미성숙으로 인해 전근대 한국에서는 가부장이 가내구성원인 여성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여성에 대한 착취는 그 경제적 기반의 협소함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나타나지 못하고 사회적 차원에서의 신분제적 착취, 천인 계층에 속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양반계층의 신분제적 착취로 나타난다. 이러던 것이 근대 경제의 발전 속에서 소농경제가 안정화되고 가부장의 권리가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공인됨에 따라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가부장의 절대적이면서도 억압적인 권리가 확립된다. 이제 가부장은 가족구성원을 상품교환의 한 형태로 "매매"할 수 있다.
 이영훈은 위안부를 그러한 경제적 조건의 질적 전환의 연장에서 파악한다. 이미 식민지기 조선에는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성매매 시장에 유입될 수 있는 여성들이 풍부하게 존재했고, 그 여성들을 팔아넘길 조선 가부장제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이미 물적 조건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풍부했기 때문에 굳이 억압적이지 않게 하더라도 충분히 여성들을 조달할 수 있었다. 성노예제설을 뒷받침하는 1. 국가기구에 의한 강제적 동원, 2. 무無임금에 가까운 저임금, 3. 위안부의 이동성 부재가 모두 실증적 근거를 결했다고 지적하면서 이영훈은 성노예가 아닌 위안부들을 성노동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영훈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1) 기생론이 제기하고 있는 여성 성착취의 계보 부정, 2) 성노예제설의 입증. 1)은 전근대 신분제적 성착취(=기생제도) -> 근대 상품교환적 성착취(=성노동자)로의 이행을 부정해야 한다. 2)와 연결되는 것인데 전근대 신분제적 성착취에서 근대적 형태의 성착취로 이행하는 데 있어 상품교환적 형태를 지닌 성노동자적 유형이 기본적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영훈은 "민간"에서의 여성 성착취, 상품교환적 성착취가 기본적인 유형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반대로 군의 형성과 그런 군집단을 뒷받침해주는 국가의 여성 노동력의 활용이라는 차원에서의 성매매 "제도"의 도입 및 확정(예컨대 공창제)이 본래적인 형태의 상품교환적 성착취, 근대적 성착취의 형태라 주장해야 한다. 유럽의 성매매 시장의 형성을 본다면 썩 유효한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민간에서부터의 형성으로 보는 게 맞기는 하다. 아무튼 이러한 군대=공창제와의 결합 속에서 근대적 형태의 성매매의 제도를 찾는 시도를 하면서 새로운 계보를 그리든지, 아니면 2) 성노예설을 입증해야 한다. 실증적으로 어려운 게 현실이다.
 더 잘 비판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성착취에 대한 역사적 형태의 변천을 사회경제적 발전 수준에 맞춰서 새롭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엥겔스가 이미 오래 전에 이론화를 해놓았던 것처럼 원시공동체에서의 여성교환 - 고대에서의 여성교환 - 중세에서의 여성교환 - 근대에서의 여성교환을 이론화, 계보화 해놓고 그것을 동아시아적 맥락과 비교하면서 이영훈의 입론을 비판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런 걸 하지 않고 "식민사학"이니 "식민주의적 관점"이니 같은 소리들만 하고 있으니..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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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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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에서 시도하는 세종 시대의 재조명 시리즈, 

이영훈의 세종성군 부정론에 대한 반박은 예상대로 "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솔직히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첫 연재를 시작한 정다함의 논지는 

1. 이영훈이 기존 학계의 연구물을 충실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학설사를 서술하고 그에 따른 분석과 비판을 행하지 않았으며 그바람에 기존 학계의 논의에서 이미 되짚은 지점까지 논하는 우를 범했다. 
2. 이영훈의 사관은 식민주의 사관이다. 
3. 이런 나쁜 콘텐츠가 유튜브를 통해 퍼지고 있으니 우려해야 한다. 

일단 39페이지나 될 정도로 길게 쓸 내용인지 의심스럽다. 1에 대해서는 좀더 충실하게 정리해서 논지를 비판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은데 내용상 부실했다. 예컨대 1차사료 하나 인용하는 게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비평"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비판적 학술연구가 아니다. 기획의도에 맞는지 의심스럽다. "다시 새롭게 세종과 그 시대 당대의 역사상을 모색하고 재구성"하겠다는 거창한 기획의도와 달리 이영훈에 대한 비판은 고작 기존 학술연구 몇 개를 소개하고 이영훈의 역사관이 식민주의적이라 하는 것에 그쳤다. 이영훈과 그 무리들은 30여년동안 식민주의 운운하는 비판을 받아왔다. 효과적인 비판일까? 진보 성향의 역사학계는 예전부터 자위만 해왔지, 군위안부, 건국논쟁, 식민지근대화론 등 뉴라이트식 역사해석에 대해 유의미한 논점 하나 제시한 적이 없다. 적어도 나는 동의되는 게 거의 없다. 가령 식근론을 비판하기 위해 그를 대체할 장기통계를 하나라도 제시한 적이 있는가? 이제는 어떠한 역사학자도 식민지기가 근대였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경제성장 또한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 됐다. 근대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틀을 제시했나? 임지현, 윤해동 등까지 포괄해봐야 겨우 포스트모더니즘 이론틀 그중에서도 특히 그놈의, 죽일놈의 알튀세르 개념 몇개 가져와서 비판하는 국민국가론이다. 알튀세르 자체가 조잡하지만 국민국가론은 근대 전체를 국민국가와 일치시키고 폭력적이라고 울부짖는 더 조잡한 이론이다. 이 이론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든지, 근대성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줄 수 있는 통찰이 거의 없다. "국민이라는 폭력" 운운하는 것이 기존의 강고한 내셔널리즘에 균열을 낼 수는 있어도 경제성장 등의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한다. 근대가 무엇인지, 경제사적 베이스에서부터 이론적으로 논파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영훈 류의 논의에 이제는 별 관심도 없고 조잡해졌다고 판단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은 더 조잡하다. 너무 실망스럽다. 이러니까 이영훈 류의 인간들이 더 흑화하는 것이다. 연재 안 하는 게 낫다. 솔직한 내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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