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8

⑭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 민경우의 통일운동사 < 연재 < 특집연재 < 기사본문 - 통일뉴스

⑭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 민경우의 통일운동사 < 연재 < 특집연재 < 기사본문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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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우의 통일운동사
⑭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기자명 외부기고
입력 2004.08.16 13:04



통일뉴스는 지난 20년 가까이 통일운동 현장의 일선에서 뛰어온 민경우 통일연대 사무처장이 직접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은 간첩죄명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민경우 처장이 옥중에서 작성한 원고를 '옥중기고' 하는 방식으로 게재된다.

민경우 씨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범민련 공동사무국 박용 부총장에게 8.15 통일대축전 행사와 통일연대 결성 등의 '국가기밀'을 수집 전달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2003년 12월 1일 전격 연행된 후 올해 5월 24일 1심에서 징역 4년, 자격정지 3년 실형을 선고 받고 현재 서울 구치소에 수감중이다.

그간 매주 월요일에 연재되던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는 필자의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앞으로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에 걸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조국통일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1970년대 초반이 커다란 전기가 된다. 남북 당국자간 협상과 대화가 시작되었고 남에서 조국통일노선을 둘러 싼 각축이 본격화되었다. 71년 4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김대중(DJ) 후보가 제기한 신 노선은 납치와 사형선고로 연결된 첨예한 대치로 이어졌지만 따지고 보면 일제 패망 이후 미국에 의해 재편성된 질서 내에서의 노선투쟁이었다.

강경군부와 보수적 민간 지도자들 간의 갈등은 조국통일의 관점에서 보면 90년대 초반 무렵에는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유사성을 보였다. 반면 미국에 의해 구축된 분단 질서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은 80년 광주항쟁 이후 강경 군부에 대한 반대 투쟁 과정에서 분화되었다.

80년 광주 이후 반전두환 투쟁을 정치적으로 주도했던 것은 DJ와 YS(김영삼)로 대표되는 전투적인 보수적 민간정치인이었다.(1) YS는 83년 5.18 광주항쟁 3년이 되는 날에 맞추어 23일간에 단식 투쟁을 진행하였고 미국에 망명한 DJ와 함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2) 두 민간정치인의 단호하고 결사적인 반전두환 투쟁은 군부의 폭력 앞에 숨죽여있던 민주화운동의 활력을 불어넣고 80년대 중반 이후 역동적인 개헌 투쟁의 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83.8.15 양 김씨는 전두환 정권과의 결연한 투쟁을 호소하면서 이를 단순한 ‘정권투쟁이 아니라 민주구국투쟁’으로 규정했다. 전두환 정권은 ‘친일반민족집단’의 뿌리를 둔 정권으로 모든 부정비리와 반민주. 반민중적인 학정의 뿌리이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은 진정한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일종의 독립투쟁이라고 선언했다. 레이건 정부의 전두환 정권 지원에 대한 중단을 요구하면서 ‘미국의 대한정책이 독재 권력의 국민탄압을 양해하는 것으로 되거나, 독재 권력의 유지에 협력자인 것으로 될 때’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한편 “한국 민중의 의사가 무시된 전쟁 분위기의 조성이나 핵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83년 서울과 워싱턴에서 DJ.YS 공동명의로 발표된 위 성명서는 당시 민족민주세력의 입장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강경한 것이었다. 83년 9.30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85년 3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면서 발표한 선언문 또한 위 성명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미국의 광주항쟁지원의 책임을 묻고자 한다’고 밝히면서도 ‘반미는 아니다’라고 한발 물러서는가하면 남북대화를 이유로 자진해산하는 혼란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85년 가을에서 86년에 이르는 어느 시점 그리고 자주.통일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에 기초해 DJ.YS 등 민간 정치인과 민족민주운동은 결정적으로 갈라서기 시작했다.

83년 8.15 DJ.YS의 공동선언은 민주화투쟁을 민족해방과 독립과 연결시키려 했지만 미국에 의해 구축된 45년 이후의 질서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하 36년-분단과 전쟁으로 얼룩진 해방공간-남북의 독재체제로 이어지는 역사인식을 공유했고 자신들의 민주화투쟁은 남에 형성된 독재체제를 타도하여 새로운 민주질서를 구축하고 독재정권에 의해 왜곡된 민족의 정통성을 회복하여 통일의 전기를 마련하는 출발점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전두환 정권이 보여주는 통일노력은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만술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민주질서가 회복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통일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며, 남에서 민주질서가 회복되면 ‘장기적인 공산독재’에 덧붙여 ‘세습제’까지 운위되고 있는 북정권과의 본격적인 통일노력이 진행될 것이었다.

85년 말 태동하기 시작한 새로운 통일노선은 DJ.YS가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던 미국에 의해 재편성된 분단질서 자체를 문제 삼았다. 80년대 진보학계를 석권했던 해방전후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DJ.YS가 전두환 정권의 뿌리로 규탄했던 친일반민족집단이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필연적인 부산물임을 지적했고 반민중적.반민주적 학정의 근원을 미국에 의해 재편된 구조 자체와 결합시켰다.

85년 하반기 해방서시, 86년 4월의 자민투 선언문, 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선언문에 이르면 분단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규정에서 애매하고 추상적인 설명(3)은 모두 사라졌다. 85년 5월 미 문화원 농성 투쟁에서 보여 준 혼란을 부정이라도 하듯이 가장 격렬한 언어로 모든 문제의 근원을 미국과 결부시켰다.(4)

미숙했던 86년의 반미투쟁은 정권의 집중적인 타격을 받고 좌초되었다. 83년 23일간의 단식과 8.15공동선언, 85년 2.12 총선과 86년 봄의 개헌현판식 등을 통해 반전두환 투쟁을 주도했던 DJ.YS는 비반미. 비용공. 비폭력을 주장하며 민족민주운동의 신조류와 명백히 선을 그었다. 86년 10월 건대사건으로 알려진 애학투련 결성식에서 학생들은 잘 계산된 공권력의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분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막을 수 없는 견인력을 가지고 학생운동과 진보적 사회단체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86년 초 서울의 몇 개 대학에서 출발한 반미노선은 86년 건대사건 무렵에는 이미 전체 학생운동권을 장악했고 88년 대중적 통일운동 공간에서 분출될 통일강령의 대부분은 이미 운동진영의 기본 노선으로 정착되었다.(5)

87년 6월 항쟁의 부분적 승리와 87년 대선의 쓰라린 패배를 주고받은 자주적 통일진영은 88년 노태우 정권 출범에 즈음하여 빠르게 정세를 주도했다. 6.29-6공정부-YS정부-DJ정부를 민주화의 관점에서 보면 고통스럽게 긴 민주화의 여정이거나 잘 계산된 개량화 정책이었다. 이 시점이 되면 노태우 정부의 통일정책은 DJ.YS의 통일정책과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따라서 88년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통일정책에 관한 기본 대치구도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북의 One Korea 노선과의 대립, 보수적인 통일정책과 자주적인 통일노선의 대립이었다.

90년 11월의 범민련은 북의 One Korea 노선과 남의 자주적 통일노선의 조직적 결집체였다. 훗날 범민련의 노선으로 집약될 통일강령은 85~86년 무렵 이미 정착되었고 88년의 통일공간에서 대중적으로 공유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남과 북의 통일역량을 조직적으로 결속하는 일이었다.

88년 이후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 공방전이 본격화되었다. 첫째, 훗날 UN동시가입으로 귀결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89년을 계기로 성사 단계로 접어들었다. 둘째, 91년 합의서로 마무리되는 남북 당국자간 접촉은 89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89년, 90년 초 T.S훈련과 방북자 구속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던 남북 당국자간 접촉은 90년 하반기부터 접점을 찾기 시작해 91년 12월 5차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합의서로 결실을 맺었다. 비슷한 시기 남북을 오가며 진행된 축구대회. 음악회, 탁구와 청소년 축구에서의 단일팀 구성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에 기여했다. 셋째, 둘째 부분과 별도의 차원에서 남북의 통일역량간의 연대가 모색되었다. 통일 축구와 음악회가 남북의 화해와 단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면 범민련으로 이르는 남북간 연대는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기조로 목적의식적으로 추진되었다.

88년 상반기 청년학생운동은 남에서 5차례, 북에서 2차례의 공개서한을 주고 받았다. 이와 동시에 자주적인 민간교류를 추진하는 각계각층의 제의가 줄을 이었다. 88년 상반기 통일운동 활성화에 발맞추어 남측의 진보적 사회단체들이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범민족대회 소집을 제안하였다. 공개서한과 각종 제의 그리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한 판문점 진출 시도가 계속되었지만 88년 상반기에는 실제 이를 실현할 방도나 의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88년 상반기의 성과를 토대로 88년 올림픽 이후 남북을 연결하는 자주적인 대단결 운동이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추진된다.

88년 12월 남의 범민족대회 소집 제안을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이 수락하고, 북의 조선학생위원회는 89년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남의 전대협을 초청했다. 89년 1월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서 남의 정치인과 재야인사 7인에게 정치협상회의를 제안했고 제안을 받은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은 89.2.4 기자회견에서 이를 수락했다. 89년 1월 결성된 전민련이 범민족대회 추진을 공식 결의하고 3기 전대협이 세계청년학생 축전 참가 의지를 확인하는 가운데 범민족대회 추진,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둘러 싼 정부와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한편 해외에서는 89.3월 범민족대회 유럽 추진본부, 북미지역 추진본부, 일본 지역 본부가 차례로 결성되었다.

89.3.25 문익환 목사는 일본, 북경을 거쳐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했다. 문 목사는 북 체류 중 김 주석, 조평통과 회담하고 이 결과를 4.2 문익환-허담 공동성명으로 천명하였다. 4.2 공동성명에서는 7.4 공동성명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Two Koreas 노선반대, TS훈련 반대 등 기존 자주적 통일노선의 성과를 집약했다. 또한 “추진 중인 범민족대회와 세계청년학생 축전 참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여 자주적인 대단결운동의 이후 발전을 위한 징검다리를 놓았다. 4.2 공동성명에서는 당시로 보면 남북간 차이로 남아있던 몇 가지 부분에 대한 이해와 합의들이 도출되기도 하였다. 정치군사적 회담과 병행하여 이산가족 문제 및 여러 방면의 교류와 접촉의 병행 추진, 연방제 통일방안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 등은 문 목사가 제기하고 조평통이 이해를 표명하는 가운데 합의되었고 이는 향후 남북당국자회담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어 89.6.30 남의 전대협을 대표하여 임수경 학생이 북을 방문하여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였다. 7.7에는 전대협을 대표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청년학생공동선언’에 합의하였다. 위 공동선언에서는 남북 청년학생들의 접촉과 교류를 위해 매년 한차례 정기적인 교류를 갖기로 합의하였는데 이는 88년 청년학생회담의 성과를 계승하고 91년부터 연례적으로 진행된 남북청년학생 통일대축전의 토대가 되었다.

88년 청년학생회담과 각계각층의 교류제의, 89년 문익환 목사, 임수경 학생의 방북과 공동성명 발표를 밑거름으로 90녀 범민족대회 소집을 위한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90. 6월 베를린에서 북. 해외가 90.7월에는 서울에서 남. 해외가, 90년 8월에는 평양에서 북.해외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범민족대회 소집을 위한 3차례의 실무회담을 통해 8.15 판문점에서 1차 범민족대회를 추진하며 대회 주제를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며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하여’로 정하고 연구토론회. 문학의 밤. 체육행사 등의 관련 행사를 진행하며 결의문. 호소문 등 공동 문건을 채택하기로 하는 등 9개항에 합의하였다.

90년의 1차 범민족대회는 남측 당국의 반대로 북.해외는 판문점 북측지역에서 남은 서울 연세대에서 각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1차 범민족대회를 마치면서 남과 북. 해외는 범민족대회를 상설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3자 공동기구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기초하여 90.11.19~20 베를린에서 3자회담이 진행되었고 이 자리에서는 3자 공동기구의 명칭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으로 정하고 조직기구와 사업계획을 확정했으며 남북해외에 지역본부와 사무국을 두기로 했다. 위 결의에 따라 90.12.16 해외본부(윤이상 의장), 91.1.23 남측본부 준비위원회(위원장 문익환), 91.1.25 북측본부가 결성됨으로써 범민련 결성이 완료되었다. 한편 청년학생은 90년 1차 범민족대회 과정에서 전대협 산하에 조국통일위원회를 구성하고 91년 7월 박성희. 성용승 학생을 베를린에 파견하여 남북해외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3자 공동성명서를 채택하였다. 이어 91년 2차 범민족대회와 1차 청년학생통일대축전을 마감하면서 92년 범민련 산하에 범청학련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범청학련은 92년 3차 범민족대회에서 결성되었다.

이상 범민족대회 추진과 범민련 결성 과정을 평가해 보자.

첫째, 범민족 대회와 범민련은 85~86년 태동한 자주적 통일노선을 조직적으로 집결시킨 것이다. 85~86년 태동한 자주적 통일노선은 양 김씨로 대표되는 보수적 통일기조와 달리 반미자주화를 전면에 걸고 민주화와 통일문제를 결합시켰으며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비핵지대화 등 일견의 통일강령을 정착시켰다. 이 노선과 강령은 85년 이래 88년 청년학생회담, 89년의 남북공동성명, 90년 1차 범민족대회 결의문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거의 변동없이 일관되게 관철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선의 통일이 없었다면 북과 5~6년이라는 매우 빠른 시간에 범민련을 결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 진보적 사회단체와 학생운동은 시종일관 정세를 주도했고 헌신적인 방북과 강인하고 조직적인 후속 투쟁을 통해 시종일관 상황을 압도했다. 당시로 보면 금기에 가까운 방북과 반미연북노선을 제기하면서도 상황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통일운동의 전술운용과 결속력이 대단히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북의 입장에서 보면 범민련은 민족대단결운동을 목적의식적으로 추동할 조직적인 거점의 출현을 의미한다. 북은 80년 고려연방제와 93년 민족대단결 10대 강령에서 자주적이고 중립적인 성격을 가진 연방 형태의 통일국가 창설을 주장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남북해외 7천만 동포가 민족대단결의 입장에서 연대와 교류, 노선과 행동의 일치 및 조직적 단결할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6)

넷째는 범민족대회와 범민련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해외동포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고 범민련에 결속시킴으로써 통일운동의 지평을 확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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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80년대 초반 반 전두환 투쟁을 놓고 보수야당 내에서 강.온파가 분화하는데 시종 강경 노선을 주도했던 것이 DJ.YS였다. 반면 온건(또는 관제)노선은 85년 2.12 총선 당시 민한당, 86년 말 이민우 구상 등으로 표현되었다.

(2) 『선언으로 본 80년대 민족. 민주 운동』 신동아 90년 1월호 별책부록에 전문이 실려 있다.

(3) 남측의 보수세력의 역사인식에서 가장 애매한 부분이 일제하 친일파→남측 집권세력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그만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주석의 일제하 독립투쟁을 날조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진보진영도 위 부분이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와 연결되고 남북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과 잇닿아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애매하게 처리했다. 최근 주목되는 것은 월간조선의 경우 이승만의 의의를 부각시키면서 보수세력의 약점을 보완하려 하고 있다. 한편, 이종석(NSC 사무차장), 최성(열린우리당 의원으로 아태평화재단 연구원이었다) 등 화해협력 세력은 북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60년대 후반 유일사상체계가 전면화 된 시점을 계선으로 구분한다. 이는 ‘친일파→남 정권, 항일무장투쟁→북 정권’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민족적 정통성이 있는 북 정권→유일사상 체계를 통한 변질로 재구성하여 남측 주도의 새로운 통일노선을 정립하려는 시도이다.

(4) 85년 2학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해방서시」의 목차는 “1.한국사회는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가 파쇼적으로 지배하는 신식민지 사회이다. 2.모든 한국 현대사는 미 제국주의와 한국 민중간의 투쟁의 역사이다”로 되어 있다. 86.4.10 서울대 자민투가 발표한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선언’은 “미제에 대한 적개심과 그 앞잡이 전두환 괴뢰도당에 대한 분노로 피끓는 애국청년학도여!”로 시작하고 있다. 86.10.28일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회 결성 선언문도 기조나 문투가 유사하다. 이상의 자료들은 위 신동아 별책 부록에 원문이 실려 있다.

(5)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비핵지대화, 국가보안법 철폐, 북미 평화협정 체결 등 자주 통일운동의 기본 강령은 모두 이 시기 정착되었다.

(6) 범민련에 대한 북의 애정은 각별하다. 91년 8월 1일 김 주석은 조평통 책임일꾼과 범민련 북측본부 성원들과 한 담화,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에서 “범민련은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북과 남, 해외의 애국적인 단체와 조직들, 각계각층 인사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해 결성”되었고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실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북과 남, 해외 동포들의 공동의 의사를 대변하는 애국적인 통일운동 조직”으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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