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7

이충원 - 한도 가즈토시 '昭和史(1926~1945)'

이충원 - 한도 가즈토시 '昭和史(1926~1945)' "기대를 모은 것은 주중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이 장제스와 일본군... | Facebook


이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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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 가즈토시 '昭和史(1926~1945)'

"기대를 모은 것은 주중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이 장제스와 일본군 사이에서 괜찮은 조건을 제시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참모본부도 응하려고 할 때, 고집불통이었던 것이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입니다. 군보다 더 강경한 자세로 '우리가 이겼으니까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한 것입니다."(204~205쪽)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의 발전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이긴 것도 영국과의 동맹이 매우 유효했고, 가까스로 러일전쟁의 승리가 인정된 것도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중재해준 덕분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앵글로색슨과 협력하거나, 적어도 적대시하지 않는 게 국가발전을 위해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거죠."(218쪽)

"육군은 2.26 사건으로 통제파가 장악, 대중국 일격론이 중일전쟁으로 구체화되어가고 있을 때, 해군에서도 대영미 강경론이 차츰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었다"(222쪽)

결국 일본은 중국 땅을 차지할 욕심에 미국, 영국을 적대시했고,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가 패전으로 치달았다는 결론.
 
1930년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어내고 조선의 독립을 추구할 국내 정치세력은 없었던 거겠죠?

한도 가즈토시(19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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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 Young Bae

참 좋은 책이죠. 제가 인상 깊게 읽은 역사책 중 하나입니다.한 시대를 살아낸 원로 언론인이 쓴 그 시대의 통사라니....2010년에 번역본이 나왔는데, 절판됐네요.





Jin Young Bae

물론 미국의 이승만에게는 그게 보였지요. <재팬 인사이드 아웃>이 정확히 <1930년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어내고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야 그런 큰 시각을 가진 사람의 존재가 가능했겠습니까? 욱일승천하는 '대일본제국'이라는 천리마의 말궁둥이에 착 달라붙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왕국 체제 하의 헝가리, 대영제국 치하의 에이레자유국(아일랜드)쯤 되는 것이 당대 국내 지식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였겠지요. 춘원이나 육당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그래서 친일이라는 오욕의 길을 간 것이겠고....그게 아니면 입을 닫고 칩거하거나....그들에게 일본의 패망 가능성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한 건 태평양전쟁 말기겠지요. 그조차도 극히 일부에게만 보인 것이기에, 함석헌이 "해방은 도둑 같이 왔다"고 할 것이겠죠.


이충원

배진영 일본에는 국내에 있으면서도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이들이 드물게나마 있는데, 조선 그리고 한국에는 왜 그런 이들이 없는지 늘 그게 답답한 점입니다.


Jin Young Bae

이충원 저는 외교-안보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축적 여부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중국에 사대하고 일본과 여진을 달래는 것이 외교-안보의 전부였습니다. 외교-안보 DNA가 아예 삭제된 나라였다고 저는 봅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대한민국은 미국 뒤에 줄을 서는 것이 외교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전략적으로 크게 고민할 일이 없었다고 봐야겠지요.
반면에 일본은, 잘 아시겠지만,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번들이 싸우거나 동맹을 맺는 경험들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주변 정세를 잘 살피고, 실용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이어져 왔을 겁니다. 또 평화로운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사무라이들이 무사가 아닌 이(吏)의 수준으로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무사로서의 DNA까지 없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편전쟁 이후 지방 번의 번주나 무사들까지 위기의식을 느끼고 각성했고, 그것이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졌지요. 이후에도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오히려 열강의 대열에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러일전쟁 전후한 시기의 일본의 외교는 참 현란하면서도 알차게 전개되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또 열강의 일원으로 글로벌 외교와 대전쟁을 해 본 경험도 있지요. 쇼와시대에 선택을 잘못해서 폭망한 후에는,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미국 뒤에 확실히 줄을 서면서도, 늘 중국, 러시아, 동남아 등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면서 플랜B를 마련해 놓는 것도, 오랜 외교-안보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신동준 선생의 <전국책> 해제를 보니 조선에서는 그 책이 이(利)에 대한 책이라고 해서 거의 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연에서 <전국책>을 갖고 스터디하자는 논의가 나오자, 대간에서 난리를 쳤다고 하네요. 반면에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전국책>에 대한 훌륭한 주석서들이 나올 정도로 널리 읽혔고, 그 주석서들을 수입해간 중국인들이 감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2천여년 전에<전국책>을 낸 중국, 300여년 전에 중국인들을 감탄케 할 수준의 <전국책> 주석서를 낸 일본, <전국책>을 이(利)를 논하는 책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한국....이걸 가지고 동양 3국의 외교안보 전통과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요? ㅠ
(저도 늘 같은 의문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기에, 제 생각을 정리하는 셈 치고 답을 올렸는데, 너무 장황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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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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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모은 것은 주중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이 장제스와 일본군 사이에서 괜찮은 조건을 제시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참모본부도 응하려고 할 때, 고집불통이었던 것이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입니다. 군보다 더 강경한 자세로 '우리가 이겼으니까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한 것입니다."(204~205쪽)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의 발전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이긴 것도 영국과의 동맹이 매우 유효했고, 가까스로 러일전쟁의 승리가 인정된 것도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중재해준 덕분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앵글로색슨과 협력하거나, 적어도 적대시하지 않는 게 국가발전을 위해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거죠."(218쪽)
"육군은 2.26 사건으로 통제파가 장악, 대중국 일격론이 중일전쟁으로 구체화되어가고 있을 때, 해군에서도 대영미 강경론이 차츰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었다"(222쪽)
결국 일본은 중국 땅을 차지할 욕심에 미국, 영국을 적대시했고,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가 패전으로 치달았다는 결론.
1930년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어내고 조선의 독립을 추구할 국내 정치세력은 없었던 거겠죠?
한도 가즈토시(19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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