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1

대동사회를 추구하던 대기업가 이종만은 왜 1949년에 남에 있는 가족을 두고 북으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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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1 July 2017 ·


[2차북한방문][이(리)종만] 대동사회를 추구하던 대기업가 이종만은 왜 1949년에 남에 있는 가족을 두고 북으로 갔을까? 그리고 북에서 어떻게 살았기에 애국열사능에 묻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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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의 나와 누나 반아님의 북한방문의 제 1차 목적은 외조부 이종만의 북에서의 삶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모우기 위해서 였다. 그 성과를 간단히 보고하자면 자료로서 크게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얻은 것이 있다면 리(이)종만은 북한에서 비교적 잘 알려저 있는 인물이었다는 이해였다. 젊은 층은 빼고 중년층 이상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대동강가에 산보를 하다가도 말을 부친 사람에게 우리는 해외교포라며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혹씨 리종만이라고 아세요? 하며 물어본다. 놀랍게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과거에 신문이나 잡지나, 력사관이나, 테레비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자료들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 그러나 그 대신 이번 여행에서는 북한 사회에 대한 여러가지 인상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 방문 이전부터 이종만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북한 자료들을 이번 여행에서의 인상을 가지고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여러가지 자료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자료는 북의 신문 통일신보 1974년 11월 15일자에 나온 리종만의 회고의 글이다. 이 글을 썼을 때의 연령은 89세 였다. 이 글에서 리종만이 보통 사람은 은퇴할 나이인 60대 중반에 북에서 살며 일하기로 한 동기와 그 성과에 대하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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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 관계 자료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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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가지 전의 글 (여러 잡지 신문의 글을 빼고)
1941. 이종만. 대동일람.서문. 대동출판사.
1948. 이종만. 대동교학취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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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후의 글:
1949. 김일성전집. 9권, 312-315, "리종만과 한 담화". [***]
1954. 평양신문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 일군들과 한 담화".
1954. 평양신문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장에게 하신 교시". (요지)
1955. 평양신문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당중앙 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과 통일전선과장에게 하신 교시".
1956. 평양신문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모란봉 극장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에게 하신 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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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통일신보 글, 리종만, "어버이 수령님의 품속에서" (15페지 정도의 분량)[***]
1977. 평양신문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 허정숙국장에게 하신 교시"
2001.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출판. 리형우 글. "태양의 품에 안기어 빛내인 삶 8" (리종만 편)(62 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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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의 글:
2007. 전봉관. 럭키경성, 제2부 근대 조선을 들썩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pp.145-180.[***]
2010. 일선 이남순.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 북으로 간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의 딸 이남순 영혼의 회고록, 정신세계원.[***]
2012 이준열 글, 이달호 편저, 선각자 송강 이준열의 삶, 3.1운동, 고학당 교육, 광주학생운동, 대동사업의 증언. 도서출판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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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나온 책:
2015. 허영욱. 나의 아버지 허헌. 평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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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보 1974년 11월 15일의 리종만의 글은 우리 가족 멤버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글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카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었다. 1949년 북으로 가신 외조부가 남쪽의 친척들 사이에는 돌아가신 것으로 여겨저서 제사까지 지내고 있었던 상황에서, 1968년에 브라질에서 카나다로 재이민을 가서 부터 계속 외조부의 북쪽에서의 행방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어머니가 아무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때였다. 70년대 당시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던 때라 여러가지 선전물들을 북미의 한인 교민 사회에 뿌리고 있던 때였다. 어디서 주소를 얻었던지 우리 집에도 북한에서 정기적으로 잡지와 신문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1974년 어느 날, 신문의 기사에 외조부가 쓰신 글이 올라왔다. 모두가 놀랐다. 짧게 말하자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갔고, 돌아와서는 통일운동을 시작했고, 우리 가족내에서는 의견이 갈라젔고, 교민사회에서는 빨갱이로 몰렸고, 나도 친구관계도 끊어젔고,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하여 한국에서 가르치려던 희망을 포기하게 되어, 결국 전공을 바꾸어 사회학을 하게 되었고, 호주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이 신문기사가 아니었으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 그런데 리종만은 왜 북으로 가서 남으로 돌아오지 않게 된 것일까? 그 답이 이 1974년도의 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닐 수도 있다. 

- 1974년의 회고의 글은 오래 전에 읽었는데, 70년대에 읽었을 때는 북에 살아 계신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어서 그 동기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다. 2000년대에 와서 전봉관 교수에 의하여 "아름다운 부자"로 재조명이 된 이종만은 돈을 벌기위해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사업을 하기위해 돈을 버는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젔다. 그후에 어머니 일선님의 자서전에서는 이종만은 기업가라기 보다 대동사회를 실현하려는 사상가이며 실천가라는 것이 조명되었다. 리종만의 가장 중요한 글이라고 생각되는 대동사상에 대한 1948년도의 글은 다음 기회에 논한다. 

- 그런데 대동사상과 대동사회를 추구하며, 해방후의 시기에는 조선산업건설협의회의 회장이라는 책임있는 직을 맡으며 남쪽에서의 산업 발전에 큰 역활을 하고 있던 그가 왜 북으로 갔을까? 우선은 그는 1949년 6월 26일에 평양에서 열린 "조선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러 간 것이다. 그런데 참석 후에 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에 머물게 된 것이다. 

- 그래서 이번에는 나는 그가 왜 가족을 두고 북에 머므르려고 했는가에 대한 답을 1974년의 회고의 글 찾으려고 하며 같은 글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1948년 이후의 그의 글로서는 이 글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1949년부터 25년 후의 글이기 때문에 그 간격이 너무 크다. 북한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글이 없다. 이 글에서의 리종만이 말하는 북에 머물기로 한 동기는 간단히 말하여 "태양의 품에 안기기 위하여"였다. 리종만이 말하는 또 하나의 다른 면은 "이승만과 미제의 치하"의 남쪽 사회에서는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수령님의 품"안에서라면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마지막 남은 내 생을 바쳐서 일을 하면 보람있는 성과가 있으리라는 기대가 북으로 오기도 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구 허헌등에게서 수령님에 대하여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북에 왔더니 수령님이 너무 자상하게 잘 해 주셨다는 것이다. 허헌에게서 자기 리종만에 대해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중요한 직책를 마끼시고, 정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실력을 발위 할 수 있는 조건과 신뢰를 주셨다는 것 이다. 그래서 가족을 "버리고" 라도 북에 남아 일하고 싶어졌고, 북에서 살은 것이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령님에게 감사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나는 외손자가 아니라 이런 "고백"를 읽는 한 자유사상가로서 이 글이 이종만의 진심에서 쓰여진 것 인가, 북의 정부의 지시하에 누가 편집을 하여 고친 것인가, 모르겠다는 것이 나의 양심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의문이 왜 나오는가 하면 "태양의 품에 안겨서" 행복하다, 라는 개념은 북의 정부의 공식 개념이고, 북으로 간 모든 인물들이 공적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허헌이나 최승희에 대한 책이나 다큐에도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나로서 할 수 있는 것은

1) 의문을 계속하며 북한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 과
2) 김일성 주석에 대하여 더 공부하여, 과연 그가 대동사상을 추구하던 이종만이 우러러 볼 만한 인물이었나를 알아보는 것 이다.
- 북은 과연 이종만이 추구하던 대동사회에 가까운 사회일까?
- 이번 방문에서 본 농장이나 공장은 대동사회의 실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이종만은 50-60년대의 남에서는 같은 일을 할 수 없었을까?
- 우선 또 떠오르는 문제는 북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숙청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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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










14Vana Kim Hansen, Namgok Lee and 12 others

10 comments

李宇衍

생각이 복잡하시겠네요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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