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매국매족 방씨족벌 방상훈 사장의 조선일보 뿌리(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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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매국매족 방씨족벌 방상훈 사장의 조선일보 뿌리(223)
작성일2001년4월2일
조선일보 80년...史? -7-
조선일보 80년...史?..^0^ 詐! -7 의혹들-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를 둘러싼 몇 가지 의혹들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하고 조선일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없는 점들이 몇 가지 눈에 띕니다. 이 글에서는 그것들을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이 글은 '조선일보 80년史'의 내용 중 미심쩍은 부분들에 대해 섣부른 추측이나 결론은 유보하고 일단 의혹을 제기해 본 것입니다. 혹시 필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 내용을 잘못 이해했는지도 모르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일보 80년史' 중 이 글과 관련된 부분, 즉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 당시에 대한 내용 원문(한글파일 17p 분량)을 위에 올려놨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고 이 수수께끼를 한번 풀어보십시오. 조언도 부탁드립니다.]
- 금광의 매각동기
이 사람들 스타일이 늘 그렇지만 방응모가 금광을 처분한 동기도 역시 아리송하게 처리해 놓았습니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읽는 사람들이 헷갈리게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취미치고는 더러운 취미를 가졌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계초 방응모는 조선일보 인수설이 나올 당시 교동광산을 경영하던 조선의 금광왕이었다"(6-3-6)는 구절만 보면 금광을 경영하던 중 조선일보 인수를 결심하고 금광을 처분했다는 말같이 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단의 "그러나 금광 매도는 선뜻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 계초의 조선일보 인수설이 나왔고....."(6-3-6)라는 글을 보면 또 조선일보 인수를 결정하기 전에 이미 금광 매각을 결심했다는 얘기 같기도 합니다. 이건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 경위나 동기를 알수있는 중요한 내용인데 이렇게 허술하게(?) 다뤘더군요.
당시 교동광업소는 종업원 수만 1,000명이 넘는 조선 5대광산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큰 사업체를 매각하는데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이 사람들이 밝히기를 꺼리는, 방응모가 한참 잘 돌아가고 있던 금광을 처분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광 매각에 일본이 개입?
금광을 매각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글 중 [日本은 중추원 참의 고일청(그때 義州邑長)의 중개로 일본의 중외광업주식회사로 하여금 방응모의 금광을 매입하도록 종용하고 있었다.](6-3-6)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건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하는데 총독부나 일본이 직접 간여했다는 얘깁니다. 그것도 단순한 개입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매각을 도왔다는 의미입니다. 한 개인의 사업체를 매각하는데 일본이 직접 나서서 도움을 준 이유는 뭘까요?
☞ 잠깐! 금광매각의 또 다른 의미
조선일보 인수와는 별개로 당시 금광을 일본회사에 매각한 점에 대해서도 한번쯤 짚어봐야 할 점입니다. 당시 일본은 통화정책의 일환(금 수탈정책)으로 조선에서 생산되는 금을 거의 싹쓸이 하다시피 일본 본토로 실어 날랐습니다.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한 다음 해(1934년)만도 조선의 전체 금 생산량 16t 중 10t이상, 즉 2/3 이상의 금을 일본으로 가져갔을 거라는 자료도 있습니다.(전봉관 "황금광시대" [emergy] 2000. 11)
조선인이 소유한 금광에서 채굴한 금은 일단 조선 중앙은행에서 사들여 다시 일본 중앙은행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나 일본인이 소유한 금광에서 나는 금은 조선의 은행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일본으로 가져갑니다. 즉, 일본으로 금은 빠져나가지만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돈은 없다는 얘깁니다. 결국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금은 금대로 뺏기고 돈은 구경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금 같은 광물은 개인의 재산이기 전에 우리 민족의 자산입니다. 그것도 무한정 묻혀있어서 맘만 먹으면 파 먹을수 있는 것도 아닌 '한정된 자원'입니다. 노동력과 자본만 있으면 아무 때나 만들어 팔 수 있는 다른 상품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재화인 것입니다. 이런 걸 일본회사에 넘겼다는 건 제 배 불리기 위해 우리의 소중한 자원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겨 준거나 다름없는 행위인 거지요.
김대중정부 들어서 공기업의 해외매각을 입에 거품을 물고 가장 반대하던게 조선일보였죠 아마? 그러나 금광을 일본회사에 매각한 것은 공기업 해외매각 따위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매국'이라 볼수도 있거든요. 이 부분에 대한 조선일보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 조선일보 인수동기
조선일보는 이 부분에 대해 [(주요한의 증언) "조선일보는 사장에 曺晩植 선생, 내가 편집국장, 趙박사가 영업국장으로 새로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때 주요한은 정주의 방응모를 여러 번 찾아가 조선일보의 인수를 종용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조만식을 내세워 설득 했다](6-3-6)고 말합니다. 그리고 방응모는 그 '강청'을 못 이겨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로 맘먹었다고 말입니다.
'80년史'에는 조선일보가 조만식, 조병옥, 주요한 체제로 출발한 시점이 1932년 11월 23일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한 시점은 1932년 말, 공식적으로 조선일보에 참여한 시점은 1933년 1월 16일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주요한의 권유와 고당의 간청, 방응모의 금광매각과 조선일보 인수 결심이 불과 한달 남짓한 시간에 이루어 졌다는 얘깁니다. 이건 물리적으로 가능한 얘기가 아니겠지요.
이번에는 두 페이지정도 앞부분에 있는 이 글을 한번 봅시다.
[주요한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임경래는 조선일보에 대한 채권자로서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우선 임경래와 접촉해서 1천원을 줄 터이니 판권을 빌려달라고 해서 발행권은 확보하였으나, 그 다음은 사무실이 문제였다. 그래서 염주동 貞信學校 근처에 서양 사람이 살던 세 채의 벽돌 2층 집이 비어 있는 것을 알아가지고 이 집을 교섭해서 그 곳에 사무실을 차리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방응모씨가 돈을 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때까지 방응모씨는 광산을 팔지 않았었기에 실제로 수중에 돈을 쥐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조병옥과 주요한은 일단 임경래로부터 8월 1일 판권을 인수했다. 임경래는 3만원에 조선일보 발행권을 조병옥 주요한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선불로 2500원밖에 낼 수 없었던 조병옥과 주요한은 양도 대금을 완불할 때까지 부사장 직위와 발행인 명의를 그대로 임경래로 두기로 하고 운영권만 우선 받아낸 것이었다.](6-3-6)
여기서 주요한이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에 대해 말한 시점, 즉 '1천원에 판권을 빌린 때'란 판권을 인수한 8월 1일 이전을 말하는 겁니다. 이때는 고당을 영입하기 전이지요. 따라서 이 증언은 주요한과 고당은 처음부터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를 종용한 적이 없으며, 방응모가 인수를 결심한 시점도 1932년 8월 이전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고당의 간청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했다'는 조선일보의 말도 사실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된 동기가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미디어 오늘]의 '신문자본연구'에는 그것이 "동아일보와의 감정(동아일보 지국 운영 시 차압을 당하는 등 수모를 당함; '80년...史?' 5 참고)'때문일 거라고 했지만, 이건 사실 조금 무리한 추측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신문 발행은 수지가 맞는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동아가 밉기로서니 요새 돈으로 수십 수백억이 들어가는 사업을, 그것도 성패가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 든다는 것은, 고당의 간청에 못 이겨 인수를 결정했다는 조선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를 결심하게 된 진짜 동기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 총독부와 사전협의 있었을 것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판권을 담보로 조선일보에 돈을 빌려준 임경래는 이를 기화로 판권기재사항 변경 신청을 총독부에 냈다. 조선총독부에 발행인 변경을 요구했고 총독부는 즉각 이를 허가했다. 임경래는 총독부 허가를 근거로 조선일보 발행인-편집인-부사장에 취임했다.](6-3-2)
여기서 보듯 신문의 발행인 변경이 허가사항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업가인 방응모가 이걸 몰랐을 리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총독부와의 협의를 통해 사실상의 허가를 받아두지 않고 신문인수를 결정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 사전협의는 언제 어떻게 이루어 진 것일까요?
- 조선일보 인수에 총독부가 특혜?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에 대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의 편집국장으로 있던 주요한이 계초의 조선일보 인수 상황을 증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다 마침내 방응모씨는 광산을 일본 사람에게 팔았다. 그리고는 4천원이 든 예금통장을 총독부에 제시했다. 그러자 총독부는 조선일보의 판권문제가 복잡하니 종래의 인가를 취소하고 새로 인가를 내주는 형식을 취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수하게 된 것이다."](6-3-6) 이건 전에 있었던 조선일보라는 신문을 아예 없애버리고 같은 제호의 전혀 새로운 신문 발행을 허가해 줬다는 얘깁니다.
이 증언에서 우리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는 비록 '조선일보'라는 같은 제호를 쓰고는 있지만 현재 발행되고 있는 조선일보는 1933년 창간된 전혀 다른 신문이며 1920년 창간된 기존의 조선일보는 이미 1933년 폐간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창간)하는데 총독부가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당시는 신문발행이 허가제였습니다. 또 신규진입을 억제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해당사자들이 엄연히 있는 사업을, 굳이 기존의 허가까지 취소해 가면서 별도로 허가를 내줬다는 것은 여간한 특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총독부가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를 간절히 원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파격적인 특혜를 줄 리가 없습니다. 총독부에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를 원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 고당이 말없이 사라진 이유는?
고당 조만식은 1932년 11월 23일자로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서 1933년 7월 10일 방응모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고문으로 추대됩니다. 말이 좋아 '추대'지 밀려난 것으로 봐야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 조선일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당은 33년 7월19일 사주인 계초에게 사장 자리를 넘겨주고 고문으로 물러난다. 당시 모습을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홍종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님은 하루저녁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슬쩍 평양으로 내려가셨다. 자신이 신문사 사장을 하실 분이 못되고 신문사 사장으로 하실 만한 일을 발견할 수 없다는 태도의 확실한 표시였다."](조선일보 사장열전 고당 편)
이 글대로라면 고당은 무능력한데다가 무책임하기 까지 한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고당과 방응모 간의 불화를 미화시킬 의도라 하더라도 민족지도자인 고당을 졸지에 이렇게 방응모만도 못한 인물로 만들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말은 아마도 고당이 무언가에 격노하여 모든 걸 훌훌 털고 조선일보를 떠났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고당이 이렇게 노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 결론: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는 총독부의 작품?
방응모는 특별한 동기도 없이(?) 잘나가던 금광을 매각합니다.
그리고 그 금광의 매각에는 일본이 깊숙히 개입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묘하게도 당시 조선일보를 경영하던 민족지도자들의 망명, 구속 등으로 조선일보가 궁지에 몰려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거기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로 결심한 동기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 조선일보의 인수를 결정하는데 총독부와의 사전협의가 있었음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조선일보 인수 시(창간 시) 총독부의 엄청난 특혜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지도자 고당이 무언가에 진노하여 사장취임 8개월 만에 뛰쳐나갑니다.
이 복잡한 매듭을 풀 '알렉산드로스의 칼'은?
(자료출처= 안티조선우리모두 홈페이지 http://neo.urimodu.com/index.html )
태그:#친일매국매족 방씨족벌 방상훈 사장의 조선일
조선일보 80년...史? -7-
조선일보 80년...史?..^0^ 詐! -7 의혹들-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를 둘러싼 몇 가지 의혹들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하고 조선일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없는 점들이 몇 가지 눈에 띕니다. 이 글에서는 그것들을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이 글은 '조선일보 80년史'의 내용 중 미심쩍은 부분들에 대해 섣부른 추측이나 결론은 유보하고 일단 의혹을 제기해 본 것입니다. 혹시 필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 내용을 잘못 이해했는지도 모르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일보 80년史' 중 이 글과 관련된 부분, 즉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 당시에 대한 내용 원문(한글파일 17p 분량)을 위에 올려놨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고 이 수수께끼를 한번 풀어보십시오. 조언도 부탁드립니다.]
- 금광의 매각동기
이 사람들 스타일이 늘 그렇지만 방응모가 금광을 처분한 동기도 역시 아리송하게 처리해 놓았습니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읽는 사람들이 헷갈리게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취미치고는 더러운 취미를 가졌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계초 방응모는 조선일보 인수설이 나올 당시 교동광산을 경영하던 조선의 금광왕이었다"(6-3-6)는 구절만 보면 금광을 경영하던 중 조선일보 인수를 결심하고 금광을 처분했다는 말같이 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단의 "그러나 금광 매도는 선뜻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 계초의 조선일보 인수설이 나왔고....."(6-3-6)라는 글을 보면 또 조선일보 인수를 결정하기 전에 이미 금광 매각을 결심했다는 얘기 같기도 합니다. 이건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 경위나 동기를 알수있는 중요한 내용인데 이렇게 허술하게(?) 다뤘더군요.
당시 교동광업소는 종업원 수만 1,000명이 넘는 조선 5대광산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큰 사업체를 매각하는데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이 사람들이 밝히기를 꺼리는, 방응모가 한참 잘 돌아가고 있던 금광을 처분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광 매각에 일본이 개입?
금광을 매각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글 중 [日本은 중추원 참의 고일청(그때 義州邑長)의 중개로 일본의 중외광업주식회사로 하여금 방응모의 금광을 매입하도록 종용하고 있었다.](6-3-6)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건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하는데 총독부나 일본이 직접 간여했다는 얘깁니다. 그것도 단순한 개입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매각을 도왔다는 의미입니다. 한 개인의 사업체를 매각하는데 일본이 직접 나서서 도움을 준 이유는 뭘까요?
☞ 잠깐! 금광매각의 또 다른 의미
조선일보 인수와는 별개로 당시 금광을 일본회사에 매각한 점에 대해서도 한번쯤 짚어봐야 할 점입니다. 당시 일본은 통화정책의 일환(금 수탈정책)으로 조선에서 생산되는 금을 거의 싹쓸이 하다시피 일본 본토로 실어 날랐습니다.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한 다음 해(1934년)만도 조선의 전체 금 생산량 16t 중 10t이상, 즉 2/3 이상의 금을 일본으로 가져갔을 거라는 자료도 있습니다.(전봉관 "황금광시대" [emergy] 2000. 11)
조선인이 소유한 금광에서 채굴한 금은 일단 조선 중앙은행에서 사들여 다시 일본 중앙은행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나 일본인이 소유한 금광에서 나는 금은 조선의 은행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일본으로 가져갑니다. 즉, 일본으로 금은 빠져나가지만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돈은 없다는 얘깁니다. 결국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금은 금대로 뺏기고 돈은 구경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금 같은 광물은 개인의 재산이기 전에 우리 민족의 자산입니다. 그것도 무한정 묻혀있어서 맘만 먹으면 파 먹을수 있는 것도 아닌 '한정된 자원'입니다. 노동력과 자본만 있으면 아무 때나 만들어 팔 수 있는 다른 상품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재화인 것입니다. 이런 걸 일본회사에 넘겼다는 건 제 배 불리기 위해 우리의 소중한 자원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겨 준거나 다름없는 행위인 거지요.
김대중정부 들어서 공기업의 해외매각을 입에 거품을 물고 가장 반대하던게 조선일보였죠 아마? 그러나 금광을 일본회사에 매각한 것은 공기업 해외매각 따위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매국'이라 볼수도 있거든요. 이 부분에 대한 조선일보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 조선일보 인수동기
조선일보는 이 부분에 대해 [(주요한의 증언) "조선일보는 사장에 曺晩植 선생, 내가 편집국장, 趙박사가 영업국장으로 새로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때 주요한은 정주의 방응모를 여러 번 찾아가 조선일보의 인수를 종용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조만식을 내세워 설득 했다](6-3-6)고 말합니다. 그리고 방응모는 그 '강청'을 못 이겨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로 맘먹었다고 말입니다.
'80년史'에는 조선일보가 조만식, 조병옥, 주요한 체제로 출발한 시점이 1932년 11월 23일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방응모가 금광을 매각한 시점은 1932년 말, 공식적으로 조선일보에 참여한 시점은 1933년 1월 16일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주요한의 권유와 고당의 간청, 방응모의 금광매각과 조선일보 인수 결심이 불과 한달 남짓한 시간에 이루어 졌다는 얘깁니다. 이건 물리적으로 가능한 얘기가 아니겠지요.
이번에는 두 페이지정도 앞부분에 있는 이 글을 한번 봅시다.
[주요한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임경래는 조선일보에 대한 채권자로서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우선 임경래와 접촉해서 1천원을 줄 터이니 판권을 빌려달라고 해서 발행권은 확보하였으나, 그 다음은 사무실이 문제였다. 그래서 염주동 貞信學校 근처에 서양 사람이 살던 세 채의 벽돌 2층 집이 비어 있는 것을 알아가지고 이 집을 교섭해서 그 곳에 사무실을 차리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방응모씨가 돈을 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때까지 방응모씨는 광산을 팔지 않았었기에 실제로 수중에 돈을 쥐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조병옥과 주요한은 일단 임경래로부터 8월 1일 판권을 인수했다. 임경래는 3만원에 조선일보 발행권을 조병옥 주요한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선불로 2500원밖에 낼 수 없었던 조병옥과 주요한은 양도 대금을 완불할 때까지 부사장 직위와 발행인 명의를 그대로 임경래로 두기로 하고 운영권만 우선 받아낸 것이었다.](6-3-6)
여기서 주요한이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에 대해 말한 시점, 즉 '1천원에 판권을 빌린 때'란 판권을 인수한 8월 1일 이전을 말하는 겁니다. 이때는 고당을 영입하기 전이지요. 따라서 이 증언은 주요한과 고당은 처음부터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를 종용한 적이 없으며, 방응모가 인수를 결심한 시점도 1932년 8월 이전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고당의 간청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했다'는 조선일보의 말도 사실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된 동기가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미디어 오늘]의 '신문자본연구'에는 그것이 "동아일보와의 감정(동아일보 지국 운영 시 차압을 당하는 등 수모를 당함; '80년...史?' 5 참고)'때문일 거라고 했지만, 이건 사실 조금 무리한 추측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신문 발행은 수지가 맞는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동아가 밉기로서니 요새 돈으로 수십 수백억이 들어가는 사업을, 그것도 성패가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 든다는 것은, 고당의 간청에 못 이겨 인수를 결정했다는 조선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를 결심하게 된 진짜 동기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 총독부와 사전협의 있었을 것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판권을 담보로 조선일보에 돈을 빌려준 임경래는 이를 기화로 판권기재사항 변경 신청을 총독부에 냈다. 조선총독부에 발행인 변경을 요구했고 총독부는 즉각 이를 허가했다. 임경래는 총독부 허가를 근거로 조선일보 발행인-편집인-부사장에 취임했다.](6-3-2)
여기서 보듯 신문의 발행인 변경이 허가사항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업가인 방응모가 이걸 몰랐을 리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총독부와의 협의를 통해 사실상의 허가를 받아두지 않고 신문인수를 결정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 사전협의는 언제 어떻게 이루어 진 것일까요?
- 조선일보 인수에 총독부가 특혜?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에 대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의 편집국장으로 있던 주요한이 계초의 조선일보 인수 상황을 증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다 마침내 방응모씨는 광산을 일본 사람에게 팔았다. 그리고는 4천원이 든 예금통장을 총독부에 제시했다. 그러자 총독부는 조선일보의 판권문제가 복잡하니 종래의 인가를 취소하고 새로 인가를 내주는 형식을 취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수하게 된 것이다."](6-3-6) 이건 전에 있었던 조선일보라는 신문을 아예 없애버리고 같은 제호의 전혀 새로운 신문 발행을 허가해 줬다는 얘깁니다.
이 증언에서 우리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는 비록 '조선일보'라는 같은 제호를 쓰고는 있지만 현재 발행되고 있는 조선일보는 1933년 창간된 전혀 다른 신문이며 1920년 창간된 기존의 조선일보는 이미 1933년 폐간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창간)하는데 총독부가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당시는 신문발행이 허가제였습니다. 또 신규진입을 억제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해당사자들이 엄연히 있는 사업을, 굳이 기존의 허가까지 취소해 가면서 별도로 허가를 내줬다는 것은 여간한 특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총독부가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를 간절히 원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파격적인 특혜를 줄 리가 없습니다. 총독부에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를 원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 고당이 말없이 사라진 이유는?
고당 조만식은 1932년 11월 23일자로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서 1933년 7월 10일 방응모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고문으로 추대됩니다. 말이 좋아 '추대'지 밀려난 것으로 봐야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 조선일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당은 33년 7월19일 사주인 계초에게 사장 자리를 넘겨주고 고문으로 물러난다. 당시 모습을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홍종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님은 하루저녁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슬쩍 평양으로 내려가셨다. 자신이 신문사 사장을 하실 분이 못되고 신문사 사장으로 하실 만한 일을 발견할 수 없다는 태도의 확실한 표시였다."](조선일보 사장열전 고당 편)
이 글대로라면 고당은 무능력한데다가 무책임하기 까지 한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고당과 방응모 간의 불화를 미화시킬 의도라 하더라도 민족지도자인 고당을 졸지에 이렇게 방응모만도 못한 인물로 만들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말은 아마도 고당이 무언가에 격노하여 모든 걸 훌훌 털고 조선일보를 떠났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고당이 이렇게 노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 결론: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는 총독부의 작품?
방응모는 특별한 동기도 없이(?) 잘나가던 금광을 매각합니다.
그리고 그 금광의 매각에는 일본이 깊숙히 개입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묘하게도 당시 조선일보를 경영하던 민족지도자들의 망명, 구속 등으로 조선일보가 궁지에 몰려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거기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로 결심한 동기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 조선일보의 인수를 결정하는데 총독부와의 사전협의가 있었음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조선일보 인수 시(창간 시) 총독부의 엄청난 특혜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지도자 고당이 무언가에 진노하여 사장취임 8개월 만에 뛰쳐나갑니다.
이 복잡한 매듭을 풀 '알렉산드로스의 칼'은?
(자료출처= 안티조선우리모두 홈페이지 http://neo.urimodu.com/index.html )
태그:#친일매국매족 방씨족벌 방상훈 사장의 조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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