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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1 July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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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일선님] 통일신보에 실린 아버지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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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수령이신 김일성 장군님을 처음 만나뵈옵게 된 것은 1949년 6월 25일, 평양에서 열린 전국적 민족통일전선 조직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서이다.
- 해방 직후 허헌 선생을 비롯한 일부 동료들이 북으로 같이 가자는 것을 말미를 달라고 하고는 그만 떨어졌었고, 남북연석회의 때에도 북으로부터 초청까지 받고서 용단을 내리지 못한 채 리극로 선생을 위시한 제씨와 공동보조 취하기로 약속까지 하고는 고향에 있는 어머님의 무덤에 비갈을 세우고 뒤쫓아 가겠다고 하고는 그냥 주저앉고 말았었다. 뒤늦게나마 떠난 길이 개성에서 경찰에 구금되어 좌절되고만 기왕지사를 여기 이야기해 무엇 하랴. 겨우 대회 날짜가 되어서야 도착한 나는 ‘자다가 나는 새가 오래 간다’는 말도 있다는 생각으로 자위하며 개회시작인 오후 3시를 기다렸다.
- 옆에 앉은 한 친구가 나의 팔소매를 잡아 흔들며 장군님께 나를 부르신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창황히 머리를 들며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장군님께서 “리종만 선생 여기에 왔으면 주석단으로 올라 오십시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 그 이튿날도 계속된 대회에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강령과 선언서를 채택하고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을 선거하였다. 우리는 민족의 의사를 받들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님을 중앙위원으로 추대하는 영광을 지니었다. 이날 나는 과분하게도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으로 선거 받았다.
- 8.15 해방을 맞아 지루하던 기나긴 밤이 새고 려명은 닥쳐왔어도 남녘 하늘에만은 머국름이 뒤덮여 찬란한 태양의 빛발이 비치는 것을 가로막았었다. 혼돈에 바진 대지 위로 탁규만이 휩쓸었다. 나는 험난한 시련의 와중에서 넘길수록 험산인 현실을 놓고 광복의 기쁨을 저주와 분노로 바꾸어야 하는 좌절감에 치를 떨었다.
조국이 해방되었으니 산업을 일으켜 보리라, 출판 사업을 크게 벌려 언론을 창달시켜 나가리라, 교육사 업을 진흥시켜 국가의 기둥감을 키워나가리라... 평생소원이 이루어질 듯만 싶던 조국광복이 안겨주던 그 부풀어 오르던 이상은 거무하에 신기루처럼 속절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고뇌와 암중모색 속에 오래도록 방황하였다. 바로 이럴 즈음에 김일성 장군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셨던 것이다.
재산도, 사회적 지위도, 가족들의 거취 따위도, 이 영예에 대배될 수는 없었다. 그것은 한 개 인간의 정치적 생명과 관련되는 것이었고, 개가죽을 쓰고 굴욕을 참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루를 살아도 지조를 지키는 보람 속에 사느냐 하는 매우 소중한 문제였기에 비장한 결의를 다지고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세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석코자 창황히 달려온 입북의 길이었던 것이다.
- 나는 전쟁이 일어나자 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외국에 가있다가 54년 정초에야 조국으로 돌아왔다. 압록강을 넘어서서 상처 입은 조국강산의 참혹한 모습에 가슴이 꽉 막히던 그 아픈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 광업부의 고문이라는 요직에까지 배치해주신 어버이 수령님의 두터운 신임에 보답할 만큼 지하자원 개발에서 이루어놓은 것이 없다. 게다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중책을 지고 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의 직채에 있을 때에도 무엇 한가지 변변하게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정말 공밥 먹는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하기가 그 몇 번인지 모른다.
- 서울에 두고 떠났던 아들도 지난 조국해방전쟁 시기 의용군에 입대하여 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운 자랑을 안고 수령님의 품에 안기어 오늘은 어엿한 설계기사로 자라났다. 잃어버린 것으로 치부하던 혈육을 다시 찾은 부자상봉의 감격도 컸지만 수두룩한 손자 녀석들의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지금이 기쁨 또한 그에 못지 않다.
- 이 글을 끝내면서 꼭 남기고 싶은 말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나 남조선과 같은 사회에서는 초보적인 민족적 염원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그런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하여 모르고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내가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영명하신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서야 비로소 자기를 찾게 되었고 인간의 참된 삶을 위하여 어떻게 살며 싸워야 하는가는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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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수기를 읽고 또 읽었다. 이로써 아버지에 대한 많은 궁금증이 해소되기도 했고, 또한 많은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이 글에 실린 내용의 진실성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글에 담기지 않은 지난 26년간의 아버지의 삶은 진정 어떠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아버지를 꼭 만나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 기회를 하늘이 이렇게 열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다른 것 다 떠나서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것을 천륜(天倫)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버지를 만나서 그냥 부둥켜 앉고 실컷 울고 싶었다. 그리고 또 많은 얘기를 나누며 부녀간의 정을 나누고 오랜 세월 가슴에 쌓인 한을 풀고 싶었다. 저승에 가 계신 어머니의 혼도 그러길 간절히 바라실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정말 왜 북으로 가셨는지, 거기서 아버지의 삶은 얼마나 행복하셨는지도 묻고 싶었다. 온 가족을 남겨두고 가실만큼 그곳의 의미와 가치가 진정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버지가 내 영혼에 심어준 대동정신으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남과 북의 두 개의 조국 앞에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답도 듣고 싶었다. 나는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의 운명이 아니었기에, 이제는 민족의 일원으로서 민족 공동체의 발전과 행복에 기여하는 공적인 삶을 함께 살아야한다는 자각이 움트던 때였기에 더욱 아버지의 그런 말씀도 듣고 싶었던 것이다.
27년만의 아버지와의 만남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집으로 들어가니 아버지께서 내가 왔다는 전갈을 들으시고 나를 맞이하기 위해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당당한 풍채와 활력 넘치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쓰고 있는 노쇠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실로 27년만의 부녀상봉이었다. 그 세월이 주마등같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가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는 나를 보시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순간은 일생일대의 감격의 순간이었다. 시간이 멎은 듯 했고 내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께서 먼저 그 정적을 깨뜨리셨다. "너 머리가 어째서 그렇게 희어졌느냐?"는 첫 말씀에 나는 달려가서 아버지의 두 손을 부여잡고 참을 수 없이 복받치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도 우셨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으로 기적적인 만남의 인사를 올렸다. 감격이 극에 달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가보다.
나흘 째 되는 날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방문했고 일주일 째 되는 날 일행들은 단장만 남고 모두 떠났다.
아버지와 한 방에서 3박4일을 지내다
나는 펄쩍 뛸 만큼 기뻤다.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은 3박4일간이었다. 그 공간과 시간은 분명 하늘이 마련해준 자리였다. 아버지와 단 둘만의 시간을 이렇게 오붓하게 가질 수 있다니! 지난 27년간의 각자의 삶을 이 시간 안에 최대한 농축해서 서로 주고받아야 했기에 아버지와 나는 시간이 아까워 한 발자국도 방 밖에 나가지 않은 채 밥도 방에다 날라다 주는 것을 먹으면서 오로지 대화하는 것으로 모든 시간을 보냈다. 밤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잠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건강이 염려되어 일찍 주무시기를 권했지만 아버지는 최대한 말씀을 하시려고 하셨다. 나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느끼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하는 딸에게, 그리고 대동정신의 동지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들려주고 최대한 값진 영혼의 선물을 주시려고 하셨던 것 같다.
다정한 아버지로서, 인생의 스승으로서,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염원하는 대동주의자로서, 아버지는 당신의 정신과 혼을 몽땅 나에게 쏟아 부어 나를 당신의 분신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으로 느껴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애기를 들으실 때는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셨고, 그랬기에 원망도 크셨던 어머니의 존재가 아버지에게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큰 의미로 다가오셨던 것 같았다. 천우신조의 만남, 그 천재일우의 기회는 그러나 집안 얘기만 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대동주의를 생명으로 삼으셨던 아버지에게 민족의 분단이 빚은 남북한 동포들의 애환과 고통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기여하는 것은 일생의 최대의 과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나, 이미 기력이 쇠잔하시고 아무 힘도 쓰실 수 없는 일개 노인이 되어 있으실 뿐이었으니 그 안타까운 마음이 얼마나 크셨겠는가.
나는 아버지가 다 못하신 하늘의 소명을 이어받는 운명이었고 그 만남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다. 40년 전 여고시절에 아버지가 나에게 심어주신 대동정신의 씨앗이 아버지의 강렬한 기운이 내 영혼을 적시면서 그 자리에서 싹터 오르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나의 정신은 고양되고 내 가슴은 힘차게 뛰었다. 우리 민족이 분단을 극복하고 대동단결하고 다시 하나 되어 세계의 평화를 선도하는 길, 그것은 ‘남북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이루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이념의 차이와 모든 정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오직 민족의 동질성으로써 이루어내는 중도(中道)의 길이고 대통합의 길이었다.
아버지가 일찍이 대동일람 서문에서 밝히신 바와 같이 “모든 차이와 분별을 넘어서서 모두 다 같은 그 본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대자아의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대동평화세계를 열어갈 있다”는 말씀이 내 의식에 찬란한 빛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것이 아버지와 나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혼연일체가 되는 시간의 의미였고, 이것이 하늘이 우리의 만남을 이루게 한 목적이었다. 이제 나의 삶의 목표는 선명해졌고 그날 이후 나의 삶의 중심은 오로지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3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다. 헤어져야 되는 날이 되니 눈물부터 앞섰다. 그날 아버지는 목욕을 하시겠다며 등을 밀어달라고 하셨다. 이제 이역만리 머나먼 나라로 돌아갈 막내딸을 붙잡을 수 없는 일이니 그렇게라도 헤어짐의 쓰라림과 쓸쓸함을 달래보려고 하셨던 것이리라. 메마른 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리면서 내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돌아앉아 계신 아버지도 필경 그러셨으리라.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제 뜻이 되었으니 모든 염려 놓으시고 부디 편안한 여생을 보내세요.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저절로 이런 결심이 샘솟아나고 있었다.
남북통일을 위한 정치적 행보를 시작하다 1975~1982
통일신보에서 아버지의 수기를 읽고 10개월간의 간절한 기다림 끝에 이루어진 아버지와의 극적인 만남은 내 삶에 일생일대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캐나다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제 나는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치리라. 그리고 내 자신부터 대자아의 활연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또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리라.
이제는 내 삶이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차원에 들어와 있는 것을 나는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자신과 내 가정을 위하는 삶을 넘어서서 이웃을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공적(公的)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러내가 북한에 다녀온 일로 해서 나는 교민사회에서 친북인사로 분류되었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요주의 인물로 간주되었다. 나로 인해서 우리 가족들에게도 그런 따가운 시선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한도 나의 조국이요 북한도 나의 조국이었으며,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자본주의의 길도 아니었고 공산주의의 길도 아니었으며, 오직 대동과 평화통일의 길일뿐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찬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 뜻을 펴나가기 위해서 토론토의 교민들의 정치적 논의 단체인 ‘통일문제연구회(통련)’와 ‘여성동우회(여동)’의 주요 멤버가 되어 토론 모임과 세미나에 열심히 참가했고, 내 생각을 여러 지면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 당시 내 생각으로는 남북의 골이 더 깊어지고 우리 동포들의 고통이 더 심화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통일을 이루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는 대동사상이 그 중추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 점에서는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더 가능성이 큰 것으로 당시는 판단하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온 직후인 1975년 10월 5일자 내 일기에 적혀있는 내용을 여기에 옮겨본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이나 철학, 실체에 대해서 아직 깊이 알지 못하고 있던 때였기에 나중에는 여기에 대한 많은 생각의 변천이 있어 왔지만 당시의 내 행동의 배경에 있었던 생각은 이러했다.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을 현실사회에 실현시켜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데는 공산주의에서 지향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개인의 자유를 제일 중요시 하는 자유주의자인 내가 공산주의 노선과 발을 맞출 것을 결심한 것은 이 점 때문이다. 우리 백성들이 하루 속히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보다 신속한 길이 바로 이 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물질적으로 잘 산다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충족, 정신적인 희열, 인간을 포함한 이 우주의 법칙과 질서를 알고자 하는 갈망은 물질적인 충족이 달성되고 먹고 입고 사는 데 대한 걱정이 없어지면 질수록 더욱 강력해질 것으로 믿는다.
마르크스가 생각하고 레닌이 생각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은 물질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물질 위주가 아니라 사람 위주가 되어야 하며 물질사회 건설이 토대가 되고 인간 위주의 물심양면의 합리화된 사회만이 참다운 인간의 이상사회일 것이다.
산업화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해 문제는 심각하며 이것은 지상낙원이란 이상사회 건설의 입장에서 볼 때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 해결은 자본주의적인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하고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또한 내가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향하는 미적 사회, 정서적 사회의 실현은 이 체제하에서는 더딜 것이 예감된다."
이것은 이미 35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히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개인 간의 경쟁을 유발하고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편차와 계층을 발생시키는 자유경제 체제의 자본주의보다는 사회 구성원의 균등한 복지와 전체의 행복을 이상으로 삼는 공산주의의 이념이 더 대동정신에 맞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북의 통일에 있어서도 자본주의보다는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삼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것은 북한정권을 지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고, 오히려 공산주의 이념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북한의 현실에 대해서 비판의 눈으로 보게 되는 면도 많았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오랜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 사회 시스템이었겠으나 그동안 인류 사회가 체험한 결과 둘 다 각각 자체의 모순과 병폐를 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각자의 체제 내에서 스스로 그 모순과 병폐를 극복하기 위한 다각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고, 자유경제와 통제경제,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나아가 물질주의와 정신주의가 그 조화를 이루는 데에서 새로운 이상적인 사회 시스템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나는 사회학이나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대해 깊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어떤 이론을 전개할 수는 없다. 다만 인류가 더불어 같이 잘 사는 대동 평화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적 시스템이 이상적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여고생 시절부터 깊은 관심을 가져왔기에 내 나름대로 성숙된 주관적 견해는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자본주의보다는 공산주의 이념과 가까운 면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공산주의의 깊은 사상적 배경과 그리고 북한의 실체와 실상을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이라 많은 오차와 오류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경우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안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건 신의 차원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언제나 겸손해야 하는 것이지만 진정으로 겸손해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평생을 통해서 뼈져리게 느껴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알아가는 존재이면서, 또한 부족한대로 아는 만큼 매순간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이렇게 시행착오를 계속하면서 깨달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면 우리가 겪는 모든 시행착오는 보다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필연적인 과정일 것이니, 우리는 나와 너의 불완전함을 탓하기보다는 과거를 이런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써 과거의 잘못됨과 모자람을 용서하고 또한 반성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나가는 원천으로 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때의 나는 보다 바람직한 사회체제를 통해서 남북의 평화통일을 이루는 길을 모색하며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인 때였다. 문제의 핵심이 사회체제의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영적인 성숙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은 이 단계가 어느 정도 지난 다음이었다.
아버지의 별세와 제2차 평양 방문
형우 동생과 함께 찾아간 아버지의 임시 묘소는 평양 인근 한적한 야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생이 보여준 장례 직후의 사진에는 김일성 주석의 이름으로 보내진 조화(弔花)가 흰 눈에 덮힌 묘지 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치워져 있었고 눈도 다 녹아있었다. 나는 아버지 영전에 절을 올리며 오열하였다. 내 뇌리에는 일제 식민지 시절 가난하고 힘없는 동포들을 위해서 대동 사업체를 일구시고 민족통일의 염원을 품고 북을 선택하셨던 아버지의 풍운아로서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에서 본 김일성 주석이 보낸 조화는 큰 휜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거기에 양 갈래로 걸린 리본의 한 쪽에는 “고 리종만 동지를 추모하여”라고 적혀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김일성‘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아버지보다 27년 연하였던 김일성 주석과의 동지적 관계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1949년 6월 25일 평양에서 열렸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장에서 김 주석을 처음 만나시고 그 다음날 바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북한의 남북통일 정책의 요직을 맡으신 것으로 출발하신 아버지의 북한에서의 행적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아버지의 대동주의는 여기에서 얼마나 반영되었을까.
평양에서 백회가 열리는 신비한 체험을 하다
나는 아버지 묘소 참배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가누기 힘들어 침대에 누운 채 깊은 상념에 빠졌다. 머릿속은 온통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여학교 시절 나를 밥상머리에 앉혀놓으시고 들려주시던 대동정신에 대한 말씀들, 그리고 저번 만남에서 토해내셨던 남북 평화통일에의 간절한 열망의 말씀들이 아버지의 생생한 육성으로 내 귀를 다시 울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육신은 땅 속에 묻히셨지만 아버지의 영혼은 내 안에 그대로 살아계신 것이었다. 아버지가 64세부터 93세까지 29년간 활동하셨던 북한의 심장부 평양에서 나는 아버지와 우리 민족과 남북의 평화통일만을 생각하며 나도 모를 깊은 의식의 차원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신은 지극히 맑고 마음은 지극히 평온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 별안간 내 몸 안 깊은 곳에서 어떤 기운이 솟구쳐 올라와 머리 정수리를 통해 고래가 물을 뿜어 올릴 때처럼 순간적으로 몸 밖으로 터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순간 내 마음의 평온은 사라지고 정신은 아득해지고 내 몸은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때 내 마음의 눈에 보인 것은 머리 정수리를 통해 분출하는 은백색의 빛이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그때의 기운과 느낌이 되살아난다.
생전 처음 체험하는 신비한 현상이었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몸에서 분출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당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잠깐의 순간이 지나자 내 몸의 피로가 싹 가시고 몸이 무척 가벼워진 것을 느꼈고 의식은 더욱 맑아졌고 마음도 다시 깊은 평온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 몸에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 충만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체험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답을 얻은 것은 후에 내가 기 수련과 영성 수련을 하면서 몸과 마음과 영적인 차원의 기운을 터득하게 되면서였다. 한의학에서는 머리 정수리를 백회(百會)라고 부르는데, 여기를 통해 밖으로 터져나간 그 기운은 내 안에서만 생성된 기운은 아니었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으나 여기에는 땅의 기운, 하늘의 기운, 그리고 사람의 기운이 다 연결되어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믿고 있다. 그것은 북한 땅의 기운이었고, 북한 주민들의 순수한 의식의 기운이었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아버지와 나의 하나로 이어진 영적인 기운이었고, 그리고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하늘의 기운이었다.
2차 북한 방문 후의 정치적 활동과 가족 간의 갈등
두 번째 북한 방문 후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은 더욱 커졌고 나는 통일문제연구회와 여성동우회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토론토 교민사회는 친남과 친북의 성향으로 나뉘어져 서로간의 갈등이 깊어져 가고 있었고 나는 친북파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 나는 공산주의 이념에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참여했던 두 모임이 친북단체로 규정되고 있었던 ‘한민련’과 노선을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한민련은 1978년에 결성된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의 약칭인데, 한국이 민주화보다는 통일을 먼저 이루어야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여러 가지 점에서 북한의 통일정책과 맞닿아 있었다.
나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서 우리 집안에 갈등이 생겼고 특히 장남 세진이와 둘째딸 은명이 남편의 반발이 컸다. 토론토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던 세진과 캐나다에 와있었던 의사인 사위는 둘 다 나중에 한국에서 활동할 것을 계획하고 있던 때라서 더욱 그러했다.
79년도에 세진이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의 나의 친북활동으로 인한 갈등이 잘 드러나 있어 여기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어머니, 이 편지에는 오랫동안 저의 머릿속에 머물러 있었지만 직접 어머니께 말씀으로 전달할 수 없었던 생각들을 적습니다. 이는 어머니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생각들입니다. 어머니가 정치적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의 첫 번째 북한 방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가족의 어머니 북한 방문에 대한 의견은 은명 부부와 아버지의 반대, 그리고 옥경과 나의 중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당시의 저의 자세는 “북한 여행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상당히 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근 삼십 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아들로서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두 번째 북한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장례에 참가한다는 것이 이유라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첫 번 방문보다 상당히 마음이 꺼림직 한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은명 부부에게는 알리지 않고 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인가 그들도 알게 될 터이고 그때는 그들과 어머니 사이는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정치적 활동이라면 지금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한 가지는 남한의 현 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이며, 또 한 가지는 북한의 정부를 지지하는 활동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볼 때에는 이 두 가지는 한 가지 원칙 아래서 나타나는 두 활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건 활동인에게는 위의 두 활동은 서로 거의 상반되는 두 원칙에 속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정부를 지지한다는 데에서 이 북미 땅에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한인 교포들 사이에 “북한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나라를 통일하는 것이 가장 우리나라에 좋은 길이다” 하는 것을 퍼뜨리는 일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이러한 활동에 반대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러한 활동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전쟁이 나서 북한이 남한을 점령하기 전에는 북한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의 통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 전쟁이 난다면 남한은 지난 전쟁에서처럼 손쉽게 북한의 탱크에 밀리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전쟁은 오랜 기일 동안에도 승부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이러한 두 힘의 투쟁 사이에서 또다시 수백만의 죄 없는 백성들이 희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생각 아래에서 어머니가 북한 중심의 한국 통일을 주장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전쟁을 초래하는 것을 불구하고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 어머니의 활동의 핵심이라면 저는 하나의 한국인으로서, 아니 하나의 인간으로서라도, 그러한 활동에 대하여 눈감고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누가 전쟁을 원 하겠는가 마는 통일을 위하여서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저의 판단으로는 누구의 입에서 나왔다 하여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쟁이 없이 북한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만큼 그러한 생각을 지지하는 활동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현실적 통일의 길을 막는 행동입니다.
3차 북한 방문
1995.
아버지 묘지 비석에는[리종만 선생, 조국전선 의장, 1985년 1월 14일생, 1977년 1월 17일 서거]라고 새겨져 있고, 1990년에 추서된 ‘조국 통일상’ 상장에는[조국 통일상 상장. 리종만.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의 자주권과 조국의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애국투쟁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웠으므로 이 상장을 수여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김일성. 1990년 8월 15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버지가 광업부 고문으로서의 역할이 아마도 북한에 실질적으로 제일 크게 기여하신 부분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나, 자본가 출신으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인물인 아버지에게 추서된 ‘조국전선 의장’, 그리고‘조국 통일상’은 북한에서의 아버지의 대표적인 역할과 업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아버지가 북으로 가신 이유가 무엇보다도 민족통일의 염원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직함과 상장이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 나에게는 그 의미가 각별한 바 있었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셨을지라도 분단에서 통일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의 행로에 아버지의 이러한 행적이 하나의 큰 디딤돌이 될 것이며 이것이 아버지에게 주어진 천명이었으리라 믿는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다음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것이 또한 나의 천명일 것이다.
한 대동사상가의 일생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그 차이와 갈등을 넘어서서 하나로 만나는 길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도록 한 것은 하늘의 일이었고 아버지는 그 천명을 받은 분이었다. 아버지의 사상과 행적이 올바르게 이해되고 빛나게 되는 것은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이 이루어진 다음이리라.
애국열사릉의 ‘조국전선 의장’ 묘비명 앞에 ‘조국 통일상’ 상장을 놓고 아버지 영전에 분향하고 꽃다발을 바치고 절을 올리면서 내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18년 전 아버지를 상봉하고 돌아가면서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을 위해 신명을 바치리라 다짐했던 나였건만 아버지 앞에 떳떳하게 내세울 만한 성과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나의 입장에 있으셨다면 아마도 그동안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놓으셨으리라 생각하니 송구스런 마음이 한량없었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내적 성숙의 과정을 아버지는 이미 다 초월하시고 대자아의 활연한 경지에 이르러 계셨을 터이니, 그 넓고 깊고 따뜻한 품으로 국내외 각계각층의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동정신으로써 함께 마음의 통일을 이루어 나가셨으리라.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아버지는 정치가가 아니시고 사회개혁 사상가이시고 실천운동가이시니 아버지는 아마도 북으로 가시기 전에 구상하신 ‘대동교학회’ 성격의 사회정신 운동으로써 남북 간의 마음의 통일을 먼저 이루는 일에 매진하셨으리라 믿어진다. 나는 아버지의 이러한 뜻과 구상을 되살려 진정으로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에 큰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신명을 바칠 것을 다시금 다짐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북한에서만의 애국열사가 아니시고, 북한에서만 받으신 조국 통일상이 아니고, 우리 동포 모두가 인정하는 그러한 인물로 인정받으시고 그런 상이 되도록 해드리는 것이 나의 최대의 효도이고, 애국이고, 천명에 따르는 길이라는 것이 나는 확연히 자각하고 있다.
이것이 헛된 꿈이 아니고 현실로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내 자신이 대자아의 활연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절대적인 필요조건이 되리라는 것은 이미 깨달은 바이기 때문에 이제 오로지 그 길로 정진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었다.
4차 북한 방문
반아의 남편 에릭의 사업과 연관하여 북한 관계자와의 교신이 이루어진 것을 계기로 반아가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007년 4월, 나는 반아와 비디오 촬영 담당을 맡은 캐나다 교포 여성과 함께 네 번째 북한 방문길에 올랐다. 12년만의 재방문이었다.
<내용 보충>
- 반아님 글에서
2007년 4월에 이루어진 우리 모녀의 평양 방문의 목적은 ‘가슴의 연결’이었다. 일선님으로서는 네 번째의 방문이었고 12년 만에 북한 땅을 다시 밟게 되는 것이었다. 일선님의 이번 방북은 캐나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남한 땅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깊었다. 한 시간이면 날아갈 거리를 일선님은 또 다시 북경을 통과해서 가야만 했다. 나는 사전에 뉴욕의 북한 대표부를 통하여 우리 두 사람의 입국신청을 하면서 이종만 할아버지 묘지를 참배하고 우리의 북한에서 행적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고자 한다는 방문목적을 알렸고 허락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도착한 다음날 평양 외각에 자리잡고 있는 애국열사릉을 찾아가 외할아버지 묘비 앞에서 일선님은 절을 올리고 이렇게 고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려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때 나는 전에 보지 못했던 일선님의 진면목을 보았다.
나도 절을 올리고 일선님이 하신데로 할버아지 비석을 쓰다듬자 울컥 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두살 때 떠나가셔서 기억에 남지 않은 할아버지이지만 그 분은 어머니를 통해 내 영혼 안에 항상 살아 계셨고 나의 정신적인 지축이 되어주신 분이셨다. 이렇게 한 자리에 서게 된 30분 남짓한 시은 우리 3대가 혈연관계를 넘어 동지로서 만난 것같은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단 5일간의 나의 방북 체험은 짧고 제한된 것이었으나 북한 사람들이 같은 동포이며 남과 북이 한 몸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고 이 사실에 대해 나의 감성과 영혼이 놀라울 강도로 깊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가서 여러부류의 북한 사람들을 만나고 보고나니까 불현듯이 �구치는 애정이 일순간에 우리 동포 전체를 향한 민족애를 불러이르켰다. 이 과정에서 4.19 군정때 어려움을 겪고 떠나 해외 생활 사십년 동안 조국에 대해 닫혀 있던 나의 가슴이 열리게 되고 그 결과로 남북 전체를 향한 조국애가 내 안에 용솟음치는 것을 생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내 삶의 대전환을 체험하게 된 것은 분명히 일선님이 삼십년 걸려 쌓아올리신 교량 역할 덕분이었다.
도반관계에서 함께 창조의 관계로
이제 일선님과 나의 관계는 도반의 관계를 넘어 함께 창조의 관계에 가 있다. 2007년 4월 29일 일선님이 양쪽 군인들이 마주보고 경비를 서고 있는 판문점의 파랑집에서 ‘38선 없어졌다, 38선 없어졌다’ 하시면서 테이블 중간을 지나간다는 38선을 두 팔을 휘저으며 지우시는 행위예술을 연출하셨을 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던 우리말을 모르는 중국 관광객들로부터 박장대소를 자아내는 희귀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 나의 뇌리 속에 어떤 화살이 날라와 박혔고 그 후 일선님에 대한 나의 인식이 바뀌었다. 결국 우리는 먼 별나라에서 신성한 사명을 띄고 이 세상에 함께 나온 동지였다. 이 통찰이 생기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도반은 수행기간의 일이고 이제 우리 앞에는 함께 해야 할 일들이 놓여있다. 일선님은 이를 위해 평생을 걸려 만반의 준비를 해오신 것이다.
- 세진님 글에서
이런 의문을 가지고 기록을 통해서 어머니의 생각과 활동을 살펴보면, 정치적 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하셨던 1979년에도 어머니의 종교적이고 영적인 관심이 전혀 바뀌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는 1975년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공산주의적인 관점에서의 낙원의 개념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마침내는 둘 다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만, 정신적인 조건에 앞서 물질적인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얻으신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는 신문광고문에서 언급하셨던 지상낙원은 불교와 공산주의의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신 것 같았다. 물질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정신적인 면이 함께 가야 하는 것이었다. 이 정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물질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북한을 방문하신 직후 이런 생각은 주체사상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꽤 크고 갑작스러운 도약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동안 어머니가 인간 해방을 위한 영적 탐구를 지속해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또 나의 지금 입장에서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순전히 정치적인 차원에서 어머니의 70년대의 정치 활동을 비판할 당시에는 어머니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내면의 과정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지금은 그 것을 정신적인 연결로서 이해한다. 이것은, 더 논의할 바가 많겠지만, ‘김일성 주의’와 같은 개인숭배를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1979년의 일기에 보면 정치적인 언급을 하시면서 종교적인 내용을 함께 얘기하고 있으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 자본주의를 수정하기 위한 공산주의. 공산주의를 수정하기 위한 종교 (3월 3일)
- 공산주의와 종교가 건전하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라야 만이 진정한 인간행복을 위해 발전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한다(4월 14일)
-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정치적인 사람이나 종교적이다(4월 20일)
나는 어머니 글에서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지난 30년간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다””라는 말로 나 스스로를 표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영적’이라는 단어가 내가 나타내고 싶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어머니의 일기를 읽고 난 지금에야 이해하고 있다. 1979년 당시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한다.
‘선 민주’ 노선이든, ‘선 통일’ 노선이든, 북미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영적 성숙의 수준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보다 오히려 낮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어머니는 그들과 접촉하면서 알게 되셨다. 1980년 4월에 뉴욕의 한 정치적인 집회에 다녀오신 후 거기서 벌어진 일들에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가 일기에 적어놓으신 내용에 ‘영광과 치욕, 시기와질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간단한 문구만으로도 그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치적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성숙이 요구되는 유토피아 건설의 대업에 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영적인 발전에 역행하는 사소하고 지엽적인 감정적 대결에 빠져 있었다. 어머니가 1970년대 말에 더 이상 정치적 활동에 나서는 것을 그만 두게 된 것은 어머니 스스로 바로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1982년 2월의 일기에 보면 ‘인간적으로 선량하고, 진실하고, 지혜로운 사람들 하고만’ 상대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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