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반역'이 아니다"
"민족주의는 '반역'이 아니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민족주의 후진국
김기협 역사학자 | 2009-08-17 11:55:00 | 2009-08-16 17:57:00
민족주의 후진국
지난 가을 경쟁적 핵실험으로 세계를 불안하게 한 인도와 파키스탄이 이번에는 미사일 경쟁에 다시 열을 올리고 있다. 국민소득이 몇 백 달러 수준인 이 나라들이 이처럼 과도한 군비 지출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도사 연구자 이옥순 씨의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는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을 이끌어내 주는 책이다. 서양 정복 세력의 공격성 앞에서 동양의 피정복자들이 느낀 열등의식을 남성의 지배에 복종하는 여성의 체념적 굴욕감에 비유한 것이다.
조직력과 용맹, 근면을 자랑하는 영국인은 이런 특성을 보이지 않는 인도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았다. 인도인 엘리트계층은 이들에게 교육받으며 이 관점을 그대로 배워 민족주의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대규모 조직 없이 다양한 형태로 펼쳐져 있던 민간신앙을 묶어 민족종교 힌두교를 만들어낸 것이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주류가 됐다.
힌두교로 뭉친 인도인에게 경쟁의 대상자는 무슬림이었다. 무슬림은 13세기부터 인도에 진출, 유럽인이 올 때까지 지배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찬란하던 인도 문명이 무슬림 지배 때문에 타락했다고 주장하며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을 통해 인도인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들었다. 영국인들이 종교적 조직성을 가진 무슬림을 비(非)무슬림보다 높이 평가하고 등용한 것도 질투심을 촉발하는 이유가 됐다.
유럽인의 남성적 공격성을 무슬림보다 더 많이 닮겠다는 것이 결국 힌두 민족주의 운동의 큰 목표가 됐다.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말대로다. 마하트마 간디의 평화주의는 시대적 투쟁 정신을 벗어나 인도 문명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밀려나고 말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그래서 분리 독립을 했다. 백여만 코소보인의 강제 이주 정책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우리는 발칸에서 보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 당시에는 수천만 명이 종교적 대립 의식 때문에 삶의 근거를 옮겨야 했다. 이 대립 의식은 아직도 군비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배타적 민족주의는 16세기 이래 유럽이 근대로 이행하는 흐름에서 하나의 큰 줄기였다. 19세기 유럽인의 세계 정복을 계기로 이 민족주의는 온 세계에 수출됐다. 원래의 민족주의 주역들이 유럽 통합의 흐름 속에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극복해 가고 있는 지금 늦게 배운 나라들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폐단에 빠져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다. 가장 가까운 나라를 가장 격렬히 미워하는 것이 민족주의 후진성의 첫 번째 증상 같다. (1999년 5월)
▲ 뉴라이트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추수 세력이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도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없이 정략적 목적을 위해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이 사회의 21세기를 열어가는 작업에 민족주의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없다면 크나큰 혼란과 손해를 피할 수 없다. ⓒ연합뉴스
오랫동안 나는 과잉민족주의(hyper-nationalism)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한국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현대 유럽 지식층의 사고방식을 표준으로 한 생각이었다. 나는 모든 학업을 국내에서 이수한 사람이지만 독서를 통해, 그리고 1985년에서 1991년 사이 몇 차례 유럽 체류와 여행을 통해 유럽 지식층의 사고방식에 많은 공감을 키워 왔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라 외친 임지현 한양대 교수도 이 배경을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과잉민족주의를 벗어나는 역사관을 시도한 것이 작년 봄 낸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였다. 그 책을 위해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는 임 교수의 "국사 해체" 주장과 다른 길을 찾았다. 과잉민족주의는 극복되어야 하지만, 민족주의 자체는 지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진부한 표현으로, 목욕통의 물을 버리면서 목욕시킨 아기까지 한꺼번에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사의 구조조정"을 주장했다.
그 후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작업을 하면서 민족주의를 과장하는 풍조보다 무시하는 풍조를 더 경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민족주의가 정의로운 것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하나의 구성 요소이며, 가까운 장래에 사라질 존재도 아니다. 국가의 대외 정책이나 남북 정책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생활 태도에서도 이 엄연한 존재가 무시될 경우, 큰 혼란과 손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학에서 고찰하는 민족주의는 유럽 식 '근대 민족주의'다. 유럽은 원래 민족의식의 발달이 늦은 곳이었다. 근세 초까지 유럽인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정체성의 기준은 '기독교인'이었다. 지역과 종족에 대한 소속감은 강력한 표준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국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도 "같은 기독교인 사이에"라는 명분에 쉽게 억눌리곤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진행에 따라 '기독교인' 사이의 투쟁이 일상화됨에 따라 민족의식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성서 번역으로 시작된 '국어 운동'은 민족의식의 대표적 표현이었다. 중상주의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국가 간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민족의식이 정치적 중요성을 키우면서 근대 민족주의가 모습을 나타냈다. 유럽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확산은 산업화의 뒤를 따라 일어난 현상이었다.
서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화와 민족주의가 19세기 후반 중부 유럽까지 확산되면서 산업화의 모순과 민족주의 모순이 함께 한계점에 도달했다. 식민지 쟁탈전은 두 모순이 결합해 나타난 결과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공산혁명은 이 모순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데서 온 파탄이었다. 이 파탄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결과가 또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20세기 초반의 세계적 비극과 파탄은 산업혁명이 가져온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파국의 진행 과정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맡은 것이 민족주의 모순이었다. 그래서 유럽 지식인들은 민족주의를 죄악시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 정치계에서 민족주의는 극우세력의 독점물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유럽인의 침략을 받으면서 민족주의를 배운 세계 각지의 인민은 유럽인을 따라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위 글에 보이는 인도인처럼 독립국이 된 새로운 상황에서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한 것은 과거의 모든 식민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 온 현상이다.
과거의 피침략 지역 중 동아시아 지역은 안정된 국가체제를 수백 년 이상 누려 왔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가진 곳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1000년 이상 다민족국가로 존재해 왔다는 점에서 그중에서도 특수한 경우고,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은 '민족국가'라 할 수 있는 국가로 오랫동안 존재해 온 나라들이다.
그중 민족국가의 전통이 가장 오랜 한국의 경우, 적어도 고려 초기 이후로는 하나의 국가체제 아래 통합된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1000년 가까이 민족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면서도 근대 민족주의와 같은 민족주의를 빚어내지 않고 있었던 것은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천하체제는 19세기 중엽 유럽인이 도입한 만국공법 체제의 도전 앞에 무너졌다. 만국공법이 구성원들의 배타적 독립성을 바탕으로 원자론적 구조를 제창한 것과 달리 천하체제는 구성원 간의 위계적 상호관계를 강조하는 유기론적 구조였다. 근대 민족주의는 구성원 간의 경쟁관계를 앞세우는 만국공법 체제와 맞물려 나타난 것이었다. 개항기 이전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 개념에 넣어서 본다면, 경쟁보다 협력의 측면을 강조하는 '화이부동' 원리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에 비해 민족국가의 전통이 얕은 만큼 역사적 현상으로서 민족주의가 가지는 의미도 좁다. 산업혁명의 진원지라는 이유 때문에 근대 민족주의를 빠른 시간 내에 고도로 발전시켰지만, 그 한계도 금세 닥쳐왔다. 반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민족주의가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유럽인에 의해 주어진 근대 민족주의의 모델을 벗어나더라도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
21세기는 세계화의 시대라고 한다. 국가의 의미와 역할이 축소되는 세계화의 시대에는 민족주의가 극복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이뤄진 인민의 정체성과 소속감이 수십 년간의 세계화 과정을 통해 해소될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19세기 유럽의 민족국가 시대가 근대 민족주의를 빚어낸 것처럼 21세기 세계화 시대가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빚어낼 전망이 더 그럴싸하다.
민족주의를 '민족의식의 정치적 발현'이라 정의한다면 근대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의 상황에 따라 아주 특이한 형태로 나타난 민족주의였다. 무엇보다 뚜렷한 특이성이 그 철저한 배타성이다. 19세기 유럽 민족국가들의 경쟁 대상은 같은 유럽의 민족국가들이었다. 그래서 타자를 소외시키는 편협성이 근대 민족주의의 기조가 된 것이다.
뉴라이트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추수 세력이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도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없이 정략적 목적을 위해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이 사회의 21세기를 열어가는 작업에 민족주의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없다면 크나큰 혼란과 손해를 피할 수 없다. 민족주의를 놓고도 '제3의 길'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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