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9

알라딘: [전자책] 게 공선

알라딘: [전자책] 게 공선

[eBook] 게 공선  epub 
고바야시 다키지 (지은이),양희진 (옮긴이)문파랑2011-08-04 원제 : 蟹工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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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200쪽, 약 8.6만자, 약 2.2만 단어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E-ink(크레마 터치,크레마 샤인, 페이지원, SNE-60)
ISBN : E978899589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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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 계급주의 소설의 대표적 명작으로 꼽히는 소설. 캄차카 바다로 나가서 게를 잡아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배 안의 어업노동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게 공선은 '선박'이 아닌 '공장선'이기 때문에 항해법이 적용되지 않고, 또 순수한 '공장'이긴 하지만 공장법에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법의 사각지대에서 혹사당하고 학대받는 어업노동자들이 그 가혹한 노동조건에 분노를 느끼며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은 지옥 같은 '게 공선'에서 일하는 막장 인생의 노동자를 한 축으로,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자본권력에 충견 노릇을 하는 감독과 일본 해군을 세워서, 이 대립 구조를 통하여 지배 권력들이 어떻게 서로 결탁하여 자본주의적 착취를 자행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게 공선>에서 드러난 그 권력 관계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써 여전히 현실에서 그 힘을 휘두르고 있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아프게 일깨워준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게 공선>에서 개인을 내세우지 않고, 각 개인의 성격과 심리를 없앤 '노동의 집단'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처음 이 작품을 읽다보면 느껴지는 어떤 낯섦 혹은 당혹감은, 무엇보다도 이 '집단묘사'라고 하는 소설기법에서 비롯된다. 이 소설기법을 통하여, 작가는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써의 '집단 연대'에 대한 뜨거운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책속에서
날이 어두워질 즈음이었다. 갑판 승강구에서 보초를 서던 어업노동자가 구축함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서둘러서 '똥통'으로 뛰어들었다.
'아뿔싸!'
학생 하나가 용수철처럼 뛰어 올라왔다. 차츰 얼굴색이 변해갔다.
'착각하지 마.'
말더듬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우리의 상태와 처지, 그리고 요구 등을 사관들에게 자세히 설명하여 도움을 받으면, 오히려 이 파업은 유리하게 해결할 수 있다. 당연한 거야.'
다른 사람도 ‘그건 그렇다’고 동의했다.
'우리나라의 군함이다. 우리 국민의 편일 게 분명해.'
'아니야, 아니야…….'
학생은 머리를 흔들었다.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말조차 더듬었다.
'국민의 편이라고? 아니 아니야.'
'바보처럼 굴지 마! 국민의 편이 아닌 우리나라 군함이라는, 그런 이치에 안 맞는 일이 어디 있겠어.'
'구축함이 왔다!'
'구축함이 왔다!'
모두의 흥분이 학생의 말을 우격다짐으로 깔아뭉갰다. 다들 어디어디 하면서 '똥통'에서 갑판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한목소리로 난데없이 '우리 군함 만세'를 외쳤다.
뱃전사다리 앞쪽에는 얼굴과 손에 붕대를 감은 감독과 선장이 마주하고, 말더듬이, 시바우라, 뻐기지 마, 학생, 선원, 보일러공 등이 서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구축함에서 작은 함선 세 척이 나와서 본선 옆으로 붙었다. 첫 번째 함선엔 열대여섯 명쯤 수병이 가득 타고 있었다. 그들이 한꺼번에 뱃전사다리를 올라왔다.
아! 착검을 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모자의 끈을 턱에 걸고 있지 않은가!
'당했다!'
말더듬이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 본문 174쪽 중에서  접기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두 사람은 갑판 난간에 기대어, 달팽이가 한껏 기지개를 켜듯이 몸을 늘여가며, 바다를 껴안고 있는 하코다테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업노동자는 손가락에까지 닿도록 피운 담배를 침과 함께 내뱉었다. 담배는 재주를 부리듯 빙글빙글 몇 번을 돌며, 위쪽 뱃전을 스칠 듯 말 듯 떨어졌다.... 더보기
"응 그래, 다시 한번 더!"-178쪽 - 먼산
저자 및 역자소개
고바야시 다키지 (小林多喜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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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적 작가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이때부터 교우회지를 편집하거나 중앙 잡지에 작품을 투고하거나 하면서 일찍부터 발휘된다. 1921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이라는 세계사적인 변동으로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새롭게 대두하기 시작한 때로, ≪씨 뿌리는 사람≫이 창간되고,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의 조직적인 전개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1924년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홋카이도 다쿠쇼쿠(拓植)은행 오타루 지점에 취직한다. 그는 초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정의감에 차 있었지만, 점차로 사회적 근원을 추구하면서 비판적 현실주의로 나아가, 하야마 요시키와 고리키 등의 작품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27년경부터 그는 사회과학을 배우면서 사회의 모순을 알게 되고, 그 후 오타루의 노동운동에 직접 참가하며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도 적극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1928년 3월 15일 일본에서 비합법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단체가 큰 탄압을 받게 된다. 소위 3·15사건이다. 오타루에서도 2개월에 걸쳐 500명 이상이 검거되어, 다키지 주변의 친구와 동지들이 다수 체포되었다. 그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구라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의 영향을 받아 완성한 데뷔작 ≪1928년 3월 15일≫은 이 사건을 취재한 것으로,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과 경찰의 참혹한 고문을 폭로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노동자의 불굴의 정신력과 이것에 대비되는 천황 지배 권력의 잔학성을 폭로해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다. 그는 이 작품을 ≪전기(戰旗)≫(1928)에 게재하며 본격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 활동에 들어간다.
다키지는 1929년 북양어업의 실상을 취재해 ≪게잡이 공선≫을 완성한다. ≪게잡이 공선≫은 그의 대표작으로,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뿐만이 아니고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획기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다키지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인정받는다. 접기
최근작 : <방설림>,<방설림 (큰글씨책)>,<게 가공선> … 총 38종 (모두보기)
양희진 (梁喜辰)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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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오中央대학교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 동교 문학연구과에서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하고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현재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게 공선」,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이 있다.
최근작 : … 총 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88만 원 세대, 비정규직, 양극화, 워킹 푸어(Working Poor)……
혹시 이 현상이 <게 공선> 아닌가요?

<게 공선>은 일본 계급주의 소설의 대표적 명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은 캄차카 바다로 나가서 게를 잡아 통조림으로 가공하는 배 안의 어업노동자를 다룬다. 게 공선은 ‘선박’이 아닌 ‘공장선’이기 때문에 항해법이 적용되지 않고, 또 순수한 ‘공장’이긴 하지만 공장법에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법의 사각지대에서 혹사당하고 학대받는 어업노동자들이 그 가혹한 노동조건에 분노를 느끼며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은 지옥 같은 ‘게 공선’에서 일하는 막장 인생의 노동자를 한 축으로,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자본권력에 충견 노릇을 하는 감독과 일본 해군을 세워서, 이 대립 구조를 통하여 지배 권력들이 어떻게 서로 결탁하여 자본주의적 착취를 자행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게 공선>에서 드러난 그 권력 관계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써 여전히 현실에서 그 힘을 휘두르고 있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아프게 일깨워준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게 공선>에서 개인을 내세우지 않고, 각 개인의 성격과 심리를 없앤 ‘노동의 집단’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처음 이 작품을 읽다보면 느껴지는 어떤 낯섦 혹은 당혹감은, 무엇보다도 이 ‘집단묘사’라고 하는 소설기법에서 비롯된다. 이 소설기법을 통하여, 작가는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써의 ‘집단 연대’에 대한 뜨거운 신뢰를 보여준다.

최근의 몇몇 신문기사에 따르면, 요즈음 일본에선 <게 공선>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올해 들어 벌써 30만 명 이상의 독자들이 이 소설을 찾았다고 한다. 일본 매스컴이 일본 사회의 빈곤 현상을 ‘워킹 푸어’(아무리 일해도 최소한의 생활조차 꾸려나가지 못하는 빈곤층)와 <게 공선>의 작품세계를 연결해 보도한 것이 <게 공선>의 인기몰이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런데 <게 공선>을 구매한 독자층의 대다수가 이삼십 대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러한 <게 공선> 열풍은 현재 일본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지금 일본은 9년 연속 봉급생활자의 소득이 줄어들고, 비정규직의 비율이 전체 고용인구의 1/3을 넘어선 상황이라고 한다. 일하기는 하지만 비정규직으로, 정규직과 똑같은 노동 강도에 시달리면서도, 상대적으로 무척 낮은 임금 탓에 안정된 생활을 꾸려갈 수 없는, 이른바 ‘일하는 빈곤층’인 워킹 푸어는, 현대판 ‘게 공선 어업노동자’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항해법에도, 공장법에도 적용받지 못하는 ‘게 공선’에 어쩔 수 없이 값싼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어업노동자가 곧 지금의 비정규직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일본 사회의 문제일 뿐이라고 할 수 없다. 88만원 세대, 이태백, 장미족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실상은 일본보다도 더 심각한 수준임을 생각할 때, 이 땅의 젊은이들도 날마다 조금씩 절망에 길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작품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은 ‘게 공선’의 작품세계를 암시한다. 또한 현대판 ‘게 공선’의 현실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러나 <게 공선>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절대적 빈곤이 아닌, 문화적 허기에 시달려야 할 젊은이들에게 <게 공선>은 말한다. 이 잘못된 현실은 너희 탓이 아니라고, 이 잘못된 현실은 너희가 바꿀 수 있다고, 즉 ‘좌절 금지’에서 “응, 그래 다시 한 번 더!” ‘희망의 연대’로 나아가자고 용기를 북돋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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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공선, 제목 그 자체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구매
상실의시대 2009-09-2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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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년 일본, 발간 80년만에 새롭게 이슈가 됐다는 소설. 공장이면서 배인 `게 공선`에서 자본에 의한 악랄한 노동자 착취 벌어지고 노동자는 힘을 모으기 시작한다. 우리가 `게 공선`의 노동자와 무엇이 다를까?  구매
정신 2014-06-1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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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공선 .. 거장 고바야시 다키지의 80년 전 역작....  구매
윤재홍 2012-04-2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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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게 거짓말 같을때 새창으로 보기
신년부터 뻘짓이다.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라는 저 제목은 <게 공선>을 검색하자 바로 밑에 나온 공선옥(공선이라는 단어 때문에 같이 검색된) 책의 제목인 것.  

아무튼 그렇다, 이 책을 읽고나면 사.는.게.거.짓.말.같.을.때.가 정말로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 1930년대에 작가가 쓴 이 책이 현 세대에 주는 의미는 자못 크지만 심정적으로는 그 반대였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읽는다.  

그 때 그렇게 고통 받던 노동자들이 아직도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한다면, 도대체,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을 한번이라도 받아들여주고 있는 걸까 싶고, 인간이라는 종족이 하는 짓이라곤 무한반복 속에서 이기심을 차곡차곡 늘려가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인가 싶고.  

지독한 고문에 가까운 일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태업을 했을 때 공장 안의 감독은 생각 외로 그들에게 어떤 행동을 가하지 않았고, 파업을 했을 때 감독은 의외로 태연했지만 사실은 윗선을 불러 공권력으로 해결하려는 꿍꿍이가 있었고, 윗선은 노동자들을 한꺼번에 제압하는가 싶더니 파업을 막지 못한 감독을 잘라버려서 윗선 편에 서서 똥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는 감독에게 '내 편이라고 생각한 쪽이 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만, 노동자들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모두가 하나로 뭉쳐서 대항하면 적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는 스토리.  

눈물이 날 정도로 현실과 닮아 있는 이 스토리에서, 영하 10도의 추운 새해벽두부터 길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방송언론인들을 우선 떠올린다. 귀족들의 놀음이라고? 박혜진 아나운서가 명품을 입고 전단지를 돌리니까 더 그렇게 보인다고? 1억 연봉이라고? 이러지들 말자. 뭉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다시 지난 해 말처럼 뒤로 가는 민주주의를 할 사람인데도 돈 좀 벌게 해줄까봐 뽑아주고, 지난 여름처럼 아이들을 배반할 사람을 내 아이 돈 좀 벌게 해줄까봐 뽑아주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해서 게 공선의 노동자 신세가 될텐가. 그 때는 좀 더 여유있게 사는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살 수가 없는 지경이 될 게 뻔한데도. 제발, 이제는 내가 살자고 남 모르겠다 하지 말고 남이 잘 살아야 나도 잘 산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나부터!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6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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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1-01 공감(8) 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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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 새창으로 보기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변증법을 다룬 내용이 기억난다. 양이 일정량에 도달하면 질로 변화하는 것을 말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유물론적으로 사회적 현상을 하나의 과학적인 연구로서 접근했다. 바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분야는 매우 크며, 사회과학은 보통 사람들에게 다소 마음속으로 꺼리는 말일 수 있으나 사회과학은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심리학, 지리학, 법학 등이 있다. 따라서 사회과학이란 단어는 결코 낯선 단어는 아니나, 마르크스의 <자본>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회과학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사회라는 인간이 모인 공간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인 논리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말하고 있다. 물론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도 나온다. 그런 요소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이다. 예전에 내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던 중, 공장법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령 영국에서 하루에 노동자에게 권고하는 노동시간은 10시간이나, 사실 실제 노동시간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이고, 때에 따라서는 9시를 넘고, 더 심하면 그 다음날 아침까지 일을 할 때도 있다. 그러니깐 아침 7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다.

 

사람이 하루 노동시간을 두고 말할 때 과연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까? 참고로 이 소설의 토대가 실제 일본에서 있었던 하쿠아이호를 소재로 했다고 한다. 게공선이란 이름처럼 게를 잡아 가공하는 이 선박은 해양관련법규나 또는 공장관련법규에 전혀 저촉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2가지 법에 해당되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중간으로 빠져 나갔다. 이런 문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은 법에 의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근무하는 장소가 육지가 아닌 바다라는 점이다. 바다에서 근무하게 되면 교통수단의 문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누가 어쩌다 죽게 되어도 그저 사고사로 위장하면 그만인 것이다.

 

문제는 사고사 내지 의문의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멈추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게공선>처럼 어류를 잡는 선원이 아닌 화물을 나르는 선원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을 넘을 경우도 있고, 선박이 워낙 노후 되어 가스배관에서 연기가 새어나와 일과를 마치고 나서 정리할 쯤에 세수하다보면 코에는 그을음이 생기고, 목은 가래로 가득하다. 게다가 악독한 노동환경으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고, 온 몸에는 상처와 화상이 가득하다. 이것이 내가 본 우리나라 노동자 1명에 대한 시선이다.

 

그만큼 선박에 타고 있는 노동자, 선원들은 매우 가혹한 환경에서 일을 한다. 허먼 멜빌이 만든 소설 <모비딕>을 보면 알겠지만, 배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버림 받거나 또는 갈 곳이 없어서 몰려든 사람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처럼 비참함을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리고 심한 노동 뒤에 아무리 대가가 온다고 해도 과중한 노동에 의한 육체적 손상, 기계적인 일상과 비인간적 대우는 인간의 가치관을 긍정적이지 못하게 바꾼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하나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부조리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런 세상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습은 솔직히 말하자면 안타까울 분이다.

 

그런 점에서 <게공선>에서 보인 일본 게 낚시 선원들은 비참함을 넘어 죽음과 마주보고 있다. 선박의 환경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바닥은 언제나 악취로 가득하며, 감독이란 자는 고용주에게 직접 고용되었다는 것만 믿고 횡포를 부린다. 제일 기억나는 장면은 파도가 일어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흰색의 토끼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다는 언제나 위험으로 가득하고, 특히 기상조건은 재해사고로 이어진다. 폭풍이 불어오면 배는 육지 근처에 정박하거나 혹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하나 감독인 아사카와는 무리하게 배를 움직인다. 그리고 게공선에 달린 통통배를 보내어 그 배들이 폭풍에 휘말려도 배 안의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 대신 배들이 없어지는 것이 더 큰 걱정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로 취급당하며, 그것도 고정적인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의 베어링 내지 벨트로 취급당하면 매우 심각해진다. 만약 당신이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고 있다면 차 그 자체는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차 안의 타이어나 와이퍼는 쉽게 바꾸고 버릴 수 있다. 그런 자동차의 부품처럼 인간이 동원된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끔찍한가? 그런 상황에서 계속 인간은 참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받고, 증오를 품을 것이다. 그 고통과 증오가 일정 라인을 돌파할 경우 인간은 자신의 인내력을 잃어버린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말하던 질과 양의 교환법칙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몰리면 성향이 바뀌기 시작한다. 단지 그 바뀌는 순간까지 관성의 법칙이라는 습성으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계속 비관하면서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착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상황이 바뀌게 되며, 그 상황은 다른 상황과 전재로 이어진다. <게공선>에서 잔혹한 노동착취로 한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진행시켜주지 않은 아사카와에 대한 분노가 결국 선박 내부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아사카와가 해군전투함에 신고하여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두 번째는 파업이 성공하여 배가 다시 항구로 돌아오자, 파업을 하던 선원은 경찰서에 수감 후 풀려났으나, 아사카와와 그의 일당들은 돈 한 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쫓겨난다. 결국 권력의 앞자리가 된 자 역시 그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버림 받는 것이다. 이런 소설을 보면서 권력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는 권력에 충성하여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는 소수이고, 권력을 찾으러 오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찾으러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 가는 실처럼 이어진 권력의 끄나풀을 잡기 위해 달려들고, 결국에는 버림을 받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래도 계속 인간들은 달려든다. 아니 오히려 그 끄나풀이 잘리면 그것을 대신할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려고 경쟁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는 아사카와 같은 인간들이 넘치는 것이 아닌가 했다. 권력에 아부하여 자신보다 불리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을 말이다. 작가인 코바야시 다키지는 일본인으로서 일본 노동자의 현실만 고발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고통 받는 대만과 한국도 같이 거론했다. 특히 조선인들이 겪는 고통이 매우 심하다고 기술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포인 일본인 중에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일본은 전쟁을 멈추고, 다른 민족을 자유로이 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자본과 권력이 결탁하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이데올로그가 결국 국가라는 이름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게공선> 내에서 처음 일본군함을 보던 선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외치나, 처음 아사카와 감독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일본군함에서는 무장한 일본수병을 보트로 태워 보내 파업을 주도한 9인을 체포하였다.

 

결국 군함이란 국가라는 권력은 약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게공선의 사장인 국회의원에게 협조한 것이다. 게공선의 선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훗카이도 위의 소비에트연방 국경으로 향하고, 일본군함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국경으로 향한다. 게공선과 같이 동행한 이유는 선박보호 차원도 있지만, 해양측량 및 기상관찰이란 명목으로 첩보를 펼친다. 결국 군함이 보호하는 것은 게공선의 선원이 아니라 게공선의 게가 든 통조림인 셈이다. 초반에 하쓰코호가 근처에 있던 다른 게공선이 선박이 너무 노후 되어 침몰하자, 하쓰코호에게 구조요청을 보내지만 아사카와 감독은 반대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악마 따위나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어이 도대체 이게 누구 배지. 회사가 돈 내고 빌린 배잖아. 뭐라고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회사대표 스다님과 여기 있는 나뿐이야. 당신, 선장이라고 잘난 척을 하는데, 그 까짓 건 똥간 종이만도 못해. 알기나 해. 그런 일에 상관하지 마. 일주일을 허비할 수 있어. 하루라도 늦기만 해봐. 게다가 지치부호는 과분할 정도로 큰 보험에 들어 있어. 다 낡은 배야. 가라앉으면 오히려 이익이야.”

 

생각하면 아사카와 감독이 타던 배도 매우 오래되어 언제 침몰 되도 이상하지 않은 배인데도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되는지 상관 없다와 오히려 그런 일로 보상금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왠지 요새 우리 사회를 보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란 착각에 빠진 게 우리 사회의 모순처럼 아사카와 같은 인간은 국가와 기업에 충성심에 빠져 그것을 망각한다. 물론 소실이지만 치지부호라는 게공선은 SOS가 닿지 않은 채 배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

 

왠지 이 모습을 보면 2014년 대한민국 최고의 악몽인 세월호 사건이 생각난다. 아마 선장이나 선주 그리고 정부기관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에 무책임하게 도망치는 것을 말이다. 물론 선장과 선원들은 아사카와의 말로처럼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게공선의 하쓰코호를 만든 자들은 아직도 근엄하게 큰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에 억눌린 자들은 매일 힘들게 일을 하나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늘 병마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타락한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고통과 착취가 가해지면,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시킨다. 즉 피해자가 가해자로 되는 일들이 생긴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바꾸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서 <게공선>에선 연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폭력적 방법으로 되어서도 안 되고, 그 자체도 불가능하다. 결국 작은 변화를 꾸준히 모아 해결갈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상징하는 인물로 의사가 있는데, 그는 아마 인도주의적인 자일 것이나, 결국에 현실의 모순을 바꿀 수 없었다. 당시 현실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법학자, 의사, 언론인 등과 같은 엘리트 들이었다. 하지만 상류계급에 속하는 이들의 인도주의는 번역가의 지적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동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인도주의자조차도 참 드물지 않나 싶다. 아직까지 인간이 대체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하는 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 도구가 없다면 사회조차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다. 재생산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이른바 88만원 세대에서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이길 수 있을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변증법이란 질과 양의 관계처럼 단순히 한 번에 모든 것을 뒤집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바꾸어 가는 길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알아야겠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혹은 거부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확신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몇 %일까? 매년 자살로 또는 산업재해로 또는 혼자 외로이 죽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현실에서 <게공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시라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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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4-07-18 공감(3)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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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년전 , 게 공선 새창으로 보기 구매
 
추석, 고 3 수험생 딸아이 때문에 , 또 와병 때문에 여행을 갈 수 없어서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 게공선<蟹工船게잡이 배>을 읽었다 . 

이 책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고전적 명작이라고 한다. 전에 서경식 선생이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어서  읽고 싶던 차에 재출간이 되었기에

다행이다 .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는  그 자신의 출신 성분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

1903년 아키타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홋카이도의 오타루 고등상업학교를

나왔다 . 은행원 생활도 했지만  문학활동과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했다.

세계 대공황이 일어난 해인 1929년에 쓴 대표작이  바로 이 <게공선>이다.

소련령 캄차카 영해를 침범해 게를 잡고 배 위에서 가공해 통조림으로 만드는

게송선을 무대로 지옥 같은 혹사와 학대를 당하며 일하는

노동자 모습을 그렸다.




거기서 자행되는 폭력은 회사의 이윤과 대일본제국 국책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 이런 상황을 견디다 못해 어업노동자들은  결국

태업(사보타주)을 거쳐  스트라이크에 돌입하지만 상황이 쉽게 풀리진 않는다 .

그들은 순진하게도 일본 해군 국민인 자신들을 보호해 주리라 믿었지만

천황과 자본가는 따뜻하게 결탁한 동지들이었다 .

그래서 스트라이크 주동자들은 입건되었고  풀려난  그들은 

“경찰서 문을 나서자 , 다양한 노동 계층 속으로

각각 파고들게 되었다는 것 ” 으로 마무리를 한다 .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흠칫, 했던 것은 이 소설이 1929 년 작이라는

사실이다 . 이미 80 년 전에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노동과

복종을 강요했으며 노동자들이 거처하는 곳을 “ 똥통”으로 지칭했다는

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 똥” 으로 취급받으며

오로지 노동, 노동만을 강요당하며 살아야 한다 .




문득 , 한 이십 년 전에 내가 노동하던 **케이블공장이 떠오른다 .

아침에 한 일고 여덟시쯤 출근하면 면장갑 한 켤레를 지급받고

현장에서 일을 한다 . 속이 빈 케이블 피복에 전선을 끼워 넣어야 하는데

이게 빡빡하니까 잘 안 들어간다 . 그러니까 손에다 화학약품 오일을

바르고 선 채로 4 시간 동안 노동을 해야 한다 .

그 약품에서 심한 냄새가 나는데 환기도 신통찮고 마스크 같은 것도 없다 .

그리고 케이블 피복 덩어리는 한 사오십 킬로 정도 하는데

그걸 들어 작업대 위에 올리면 허리를 펼 때마다 허리가 끊어진다 .

화장실은 갈 수 없다 . 12 시 점심때만 가능하다 .

일이 잘 진척되지 않으면 작업반장 새끼가 와서 뭐라고 독촉하며

반말 짓거리로  욕을 한다 .

점심은...따뜻하긴 하지만 10 분정도에 먹어야 한다 . 뒤에 줄 서서

기다리는 노동자들 때문이다 . 무국에 굴이  들어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냥 맹탕이다 .설익은 김치에서는

늘 모래 비슷한 게 지금거렸다 .

그리고 쉴 장소는 전혀 없었다 .야근은 지시하는 대로 해야 했다 .

한 달에 열두 번 이상 하고 생리휴가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

그러다 나는 일어날 수 없을만치 목과 허리가 아파서

몇 달 만에 그만 두고 정양해서 걷게 되기까지 괘 오랜 시간이

걸렸다 .




게공선에서도 마찬가지다 .

작업시간은 ‘감독’ 이 정했다 .

-노동자들은 몇 천 해리나 떨어진 북쪽

어두운 바다에서 ,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파도와 바람에 맞서

죽음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

 

그리고 감독은 ,

-자기가 직접 손을 써서 죽인, 노동자 사오백 명의 목숨에 대해

저렇게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하다니, 바다 속에 처박아도  성이

안 차는  놈이다 .




게공선 자본가는 어업노동자 한두 명 죽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

2008년 대한민국 기륭 자본가는 노동자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을 해도 “누가 굶으라고 했냐 ” 고 반응한다 . 기륭 업주는 오늘도

한우쇠고깃국에 햅쌀밥, 대구전유어에 햇김치 그리고 와인을

마셨을 거다 . 그리고 속으로 , 저 지독한 노동자 ‘가이나’들 빨리

지쳐 떨어지길 바라진 않았을까 ?




게공선 자본가는 한 번 출어하면 보통 오륙십만 엔(1029 년에)을

번다고 했다 . 어업노동자들은 목욕을 못해서 훈도시 끈 매는 부분을

늘 시퍼런 이 蝨슬가 깨물곤 한다 . 그리고 조금만 일이 진척되지 않으면

감독에게 가혹한 고문을 장하거나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

돈은 ? 물론 못 번다 .




그런 과정을 거쳐 이 소설은 ,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파업하고

세상 속으로 흩어져 연대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 명쾌한 대단원을 보여준다 .




우리 사회가 국제중고, 종부세 폐지, 종교 편향, 경부운하,

영어몰입교육, 외제차, 이런 터무니없는 망상에 빠져있는 동안

진짜 많은 노동자들이 목을 옥죄는 현실 속에서 악몽을 꾸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




나는 사는 게 너무 불안해서 때로 , 일부러라도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한다 . 자발적이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인데다

재산도 별  거 없고 나이는 먹는데다 아이가 자라 취업을 해서

나를 봉양할 거라는 희망도 별 반 없다 .

제 밥벌이는 할 수 있을까?




그런데다 사회보장제도는 너무도 미미하다 . 국민들더러 다 알아서

살라고 한다 . 억울하면 부동산 투기를 해서   자본을 축적하라고 한다 .

못 하면 바보라고 한다 . 나는 바보다 .




그런데 그 바보가 나 하나만이 아니라는 건 이 나라가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 . 부동산 투자는 아무나 하나 ?

종잣돈이 없는 인민들은 제 집 한 채 갖기도 힘들다 . 그런 판에

아이는 그냥 놔두면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고 사교육을 시키려면

부모들은 노후를 위한 대책을  세우기가 어렵다 .

우리 부모는 내게 땅 한 평 유산도 못 남겨주셨다 .

그런 처지에 내가 무슨 수로 부동산 투자건 투기건 하며

무슨 수로 노후에 10억인지 20 억인지를  여퉈둔 단 말인가 ?




그보다 더욱 암담한 건 딸아이가 졸업해서 사회로 나가는

5 년이나 6 년쯤 후에 거의 모든  청년들이 “비정규직” 이 되어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암울한 성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

저 기륭전자에서 , KTX노동자들이, 이랜드, 성신여대 ...

모든 사업장에서 죽음의 비정규직 투쟁 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

모든 상황이 <게공선> 노동자들과 이란성 쌍생아처럼 똑/같/다 !




연대! 이 소설에서는  노동자들이 각성해서 연대를 해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

이 비정규직, 워킹 푸어 문제를 외면하고 싶었던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 함께 연대를 하는 것만이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 일 것이다 . (내 기분 같아서는 세상을 확, 뒤집어 엎고

싶지만 너무 힘이 없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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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연못 2008-09-1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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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게 공선 새창으로 보기 구매
별 생각 없이 누가 추천해서 읽었었는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놀랐네요. 게를 잡아 가공하는 게 공선에서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탄압과 그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몰랐는대 작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앞장서다 경찰에 잡혀 메 맞다가 타계했었네요. 그러한 저자의 사상이 잘 드러난 책입니다. 좀 과격한 사상은 안 좋아하는대 너무 감정이입하지 않는 선에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전체를 강조해서 개인이 드러나지 못 하는?독특했던건 주인공이 딱히 정해진게 아니라 게 공선에 탄 모두가 주인공 같은 느낌이었어요.
독서하자곰 2018-02-2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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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의 프롤레타리아가 오늘의 88만원 세대에게 말을 건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게 공선(1)

  고바야시 다키지/양희진 역, <게 공선(蟹工船)>, 문파랑, 2008.08

1> 80년 전의 프롤레타리아가 오늘의 88만원 세대에게 말을 건다

무려 80년 전(1929년)에 발표된 이 ‘고전적인’ 프로소설이 작년부터 느닷없이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켰다. 열기는 올해까지 이어지고 TVㆍ여성지 등에까지 작품이 소개되면서, 무려 30만권이나 책이 팔렸나갔다 한다. 출판대국이라는 일본에서도 요즘은 워낙 책이 안 읽히기 때문에 이 정도 셀러도 대단한 수준이라 한다. <yahoo Japan>에 들어가보니, 아예 ‘蟹工船 ブーム(게공선 붐)’, ‘蟹工船 감상문’도 등록된 검색어가 되어 있다.

이 붐은 느닷없는 것이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 배경은 신자유주의가 일본의 청년 계층에 강요하는 고통이다. 일본의 ‘88만원 세대’인 ‘워킹푸어(working poor)’ 세대에게 80년 전에 씌어진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메시지가 ‘현실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공산당도 이 붐에 크게 고무되어 있다. 마이니치 방송에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당수가 직접 나가서 당원이었던 고바야시 다키지와 일본 공산당의 인연을 강조하는가 하면, ‘게공선 붐’ 덕분에 작년 10월 이후 일본공산당에 무려 1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새로 입당했다 한다.
http://headlines.yahoo.co.jp/hl?a=20080831-00000011-maip-pol
그런데 이 붐을 위해서 진보적인 일본 근대문학 연구자들이 시간을 두고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쓴다.)

그러나 이런 정도만으로 역시 ‘붐’은 설명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지옥 같은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내놓은 채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 때문에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이 결국 투쟁에 나서고 패배한다는 서사는 보편적일 수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캄차카 해에 떠 있는 게 가공선에서의 상황이 '2008년 현재'의 상황이 세부적으로 같을 리는 없다. 더구나 설정돼 있는 '바다'와 '선상파업'의 상황이란 그야말로 극한적이고, 또 노동자들을 둘러싼 정치와 이데올로기적 지형도 다르지 않을까?

또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고(의도적으로 이렇게 창작되었다 한다. 구레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에게 고바야시가 보낸 편지의 일부가 작품해설에 인용돼 있음.), 많은 노동소설이 그러하듯이 서사는 (좋은 의미에서) 상당히 거칠다. '섬세한(?)' 일본 독자들이 이런 걸 어떻게 읽었는지도 의문이다. 참으로 중요하고 또 고무적인 수용 현상이 아닐 수 없다. 

2> 독서와 한일 국제 연대

이런 붐을 타고 책이 서울에서 8월에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많은 기대를 갖고 읽었다.
명성으로만 듣던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은 훌륭했고, 새로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일본 자본주의와 ‘제국’이 한편 자국의 노동계급을 처절하게 착취하며 건설된 것이라는 점과 더불어, 1920년대 말 일본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정세’가 어떤 것이었는지 새삼 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리얼리스트로서 고바야시는 고립된 게 가공선에서의 투쟁을 둘러싼 ‘총체’를 붙잡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노동자들의 목숨에 닥치는 일본 자본주의의 현재를 군국주의화 과정과 국제정세에 연관시킨 것이다. 시공간적 배경과 자연스럽게 결부된 미묘한 러시아니즘이나 국가주의 문제는 특히 흥미롭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 눈에 번쩍 뜨일 수밖에 없다. 

“넷, 그리고, ‘조직’, ‘투쟁’이라는, 이 위대한 경험을 처음으로 알게 된 어업노동자와 젊은 잡일꾼들이 경찰서의 문을 나서자, 다양한 노동계층 속으로 각각 파고들게 되었다는 것. / 이 한편의 글은 ‘식민지에 있어서 자본주의 침입사’의 한 페이지이다. (1929년 3월 30일)”

이 식민지란 당연히 조선과 대만이며 또한 홋카이도라는 내부 식민지이기도 하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오타루상고 출신이며 홋카이도 노동운동에 참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투쟁경력을 시작했다. 물론 조선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81) “내지에서는, 노동자의 힘이 커져서 무리하게 일을 시킬 수 없게 되었고, 시장도 대부분 개척해버리자, 자본가들은 ‘홋카이도, 사할린으로’ 갈고리 같은 손톱을 드러냈다. 그곳에서는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와 똑같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노동자를 ‘혹사’시킬 수 있었다.”

82~3) “사람들은 아침에 어두컴컴할 때부터 일터로 내몰렸다. 그리고 곡괭이 끝이 힐끗힐끗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주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했다. 근처에 세워져 있는 감옥에서 일하는 죄수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특히 조선인은 십장들에게도, 같은 동료 인부(일본인)들에게도, ‘짓밟히는’ 대우를 받았다.”

위의 두 단락은 식민지 시기 한일 노동자의 연대의 조건을 잘 정리해서 말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일본과 한국의 ‘독서’의 교류는 구조화되어 있다. 특히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일본 소설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으며, ‘문학’을 넘는 차원의 새로운 동시성과 문화‘교류’도 일상화되어 있다. 이는 국경을 넘는 자본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교류는 연대의 기반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자본주의적 동시성은 ‘연대’를 꿈꾸게 했었다. 1920년대의 조선 노동자와 청년들은 일본의 좌파와 노동운동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반대로 그들이 일본 노동운동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1920-30년대의 <게 공선> 독자 중에도 식민지 청년들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연대의 조건은 1920년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식민지-제국의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에서 노동자-청년들은 유사한 조건에 처해있다.

‘88만원 세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희망청>에서 한일 청년 단체들 사이에서 청년실업ㆍ비정규직 문제로 작은 연대가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본 여성들이 <대장금>이나 <내 이름은 김삼순> 때문에 한국(여성)에 국경을 넘는 연대감을 느꼈듯이, 이런 소설이 연대를 위한 상상력의 기반이 되면 좋겠다. 연대야말로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라는 지상(至上)의 악(惡)에 맞설 수 있는 힘이다. 

진보적 메시지를 담은 소설이나 문화산물이 교환되고, 그래서 '헌법 9조'든 ‘88만원세대(워킹푸어)'에 대해서든 한국과 일본의 청년세대가 공동의 전선을 설치하는 미래를 꿈꿔본다. 물론 1차적인 조건은 <게 공선>의 노동자들처럼 지옥 같은 상황에 맞서, 스스로 먼저 일어서는 일일 것이다. ‘당사자 운동’ 말이다. (*<게 공선> 붐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와 논의는 다음 기회에 차차~.) 

덧>
변형 문고판 200페이지 가량의 책이라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다 아마추어인지 악문과 졸문이 참으로 많다. 단어 선택, 구두점 사용도 그야말로 '초벌(또는 초보) 번역' 티를 못 벗었다. 이러면 책장을 못 넘긴다. ‘편집자주’나 책 말미에 붙은 작품 해설 자체에 악문과 졸문이 많아서, 안타까웠다.
편집자가 이 글을 보신다면, 다음 쇄를 찍을 때 반드시 전문적인 교정자의 도움을 받아서 전체 원고를 개정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오자와 어색한 문장을 바로잡고, 그대로 남아 있는 일본어식 문장도 고치기 바란다. ‘어업노동자’ ‘잡일꾼’ 등의 어휘 선택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많은 한국 젊은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이 일본소설을 읽을 텐데, 지금 이대로는 정말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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