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5

일제강점기의 불편한 진실 일본 당신이 모르는 일제시대 조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평범한 조선인의 사회와 경제 경성 사람들의 삶 조...

일제강점기의 불편한 진실 일본 당신이 모르는 일제시대 조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평범한 조선인의 사회와 경제 경성 사람들의 삶 조선인들은 왜 조선왕조를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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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59 views  Jan 13, 2024  #일제강점기 #조선왕조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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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조선인 사회와 경제 #경성 사람들의 삶 조선인들은 왜 #조선왕조 를 버렸나?

일반인 관점의 다시읽는 사회과부도와 함께 
세계의 변화와 흐름에 대해 함께 알아보아요!

비즈니스 문의: junkiminm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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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채널의 모든 컨텐츠는 발표된 자료, 논문, 기사, 서적 등을 바탕으로 개인적 학습과 의견을 통해 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주관적인 의견이 포함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판단은 구독자 여러분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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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대한 불편한 진실
일제시대 조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평범한 조선인의 사회와 경제 경성
사람들의 삶 조선인들은 왜 조선왕조를
버렸나 일제 강점기 우리 역사는
독립운동가나 전투 약탈 등에 대해서
주로 포커스를 맞춰서 교육하고
콘텐츠를 만듭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보통 조선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그러한 궁금증으로 오늘은
우리나라 교과서나 뉴스에서 알려주 지
않는 일제시대 조선인의 삶에 대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이번 영상은 일본측
사료를 많이 참고하였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당시에 한반도 지배층이 조선
총독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독부에서 많은 조사와 자료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데이터가 영상
자료에 많이 사용되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그럼 다시 읽는 사회가 부도
지금
시작합니다 일본에 응한 통치 기간은
1919년에 3일 독립운동까지 a
무단 통치기 그 이후 중일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문화통치기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에서 종전에 이르기까지
전시 체제기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1910년 대일본 제국은 대한제
국가의 사이에 맺어진 한국 병합 니
간술 조약 한일 병합 조약의 체결에
의해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한국병합
조선 총독부의 통치하에 두었습니다
일본군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나 독일 중화민국 등의 세계
주요 국가는이를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조선 한반도는 일본의 옆구리에
위치하게 되며 일본 토 방위를 위한
중요한 핵심이자 일본 중에서도 가장
뒤쳐진 지역 중 하나라고 일본 정부는
파악했습니다 부국 강병 정책에 따라
거액의 국가 예선을 한반도에
투자했습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철도 도로 상수도
하수도 전기 인프라 병원 학교 공장
발전소 등의 인프라 정비를 실시하여
근대 교육 제도나 의료 제도의 정비를
추진하여 한반도를 근대화에 나갔습니다
병합 당초에 10년간은 조선은 소득세
면제 조치를 받았고 군대 공업의 도입
등 통치하에 둔 한반도의 개발에 힘을
쏟았고 개발 공사나 운영의 주요
노동력을 조선인에게 일자리를 창출해
주었습니다 철도 노선은 간선뿐만
아니라 생활용 지선도 많이 부설되어
미스비시 제철 가네후사 제철 소나
일본 제철 기어스 제철소에 따르면
제철소 건설 일본 질서 재료 현
치소의 진출에 의한 수력 발전소 건설
등이 행해져 조선 총독부로부터
보조금에 의한 157건 농업용 댐과
410건 수 건설 5억 9천만 개
이상의 조림이나 사방 재방 건설 등의
수리 사업도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구미 제국에 의한 수탈적
식민지 정책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920년부터 30년대에
한반도의 경제 성장률은 연간 4%
Pro 같은 기간에 유럽 1% 대나
일본 미국 3% e 비해 더 높은
성장을 하고 있었으며 한 번도 1인당
생산 성장률도 약 2.4%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조선 시대를 2조라고
부릅니다 이조 말기 시점에서는 대부분
도로 포장 등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 2조 경성은
구획 정리가 진행되어 노면 전차 서울
시전 차가 달리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위생 면에서는 생활 면에서의 위생
지도나 집단 예방 접종이 실시되어
당시 한반도에 유행하고 있었던 콜레라
천연두 패스트 등의 전염병으로 인한
유아 사망률이 감소하고 평균 수명은
2세에서 56세까지 증가했습니다
인구는 병합시 1910년에 조사에서는
1,312 88780 1944년
조사에서는 212만 174명이 되었고
평균 수명도 병합시 24세였다 것이
1942년에는 45세까지 늘었습니다
또한 농지 개발이나 농업 기술의
지도로 식량 생산량도 급증한 것으로
총독부는 토지 소유자의 조사를
실시하고 소유자가 없는 토지는 동양
타크 쇼크에 매입시 일본인 주자나
조선인 유력자 이게 분배했습니다
이렇게 총독부가 접수한 농지는 전체
경작지에 3.26 6% 있습니다 이조
말기의 조선은 도로 농지 산 하천
항만 등이 황폐해져 있었고 민중은
관리 지주 양반에게 고리대금 돈놀이
의한 수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이 조선의 농지에서 수방
공사나 수위 공사를 하고 금융 조합도
만든 것으로 농민은 저렴한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조선인
농민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리 조합의 설립으로
안심하고 농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중 대지주 조선인은
생산성에 높아져 일본의 쌀을 수출할
수 있게 됨으로써 거액의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삼성
그룹의 창시자 이병철 있니다 그는
경상남도의 대주주의 차남으로 태어나
쌀 수출로 얻은 거액의 자금을
바탕으로 1938년에 대구에서 삼성
상사를 설립하고 이것이 훗날 삼성
그룹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노는 병합
전에 84만 마지기가 1920년에
1550만 마지기가 되었고 1928
8년에는 162만 마지기가
1942년에는 177만 마지기가
됐습니다 면적당 수확량도 1910년에
한 반당 0.79 6석에
1937년에는 1.63 5석으로 두
배로 늘었습니다 이렇게 농지가 새롭게
개관되어 수리 사업에 의해 생산
능률이 향상됨에 따라 식량 생산은
해마다 증가하여 병합 전
1909년에는 746 man
석이었지만
석으로 두 배 이상으로 1942년에는
2489 석이 되었습니다 쌀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때문에
조선인 1인당 쌀 소비량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평균
0.68 proc 쌀 한석은 참고로
약 150kg 있니다 1932년부터
1936년에 걸쳐서는 0.4까지
감소했습니다이 상황을 가르쳐 기아
수출이라고 비판하는 연구자도 많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일본 시대의 쌀
소비량은 평균량 0.58 석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후반기에는 오히 려
소비량이 약간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 경제 전체로 봤을 때 쌀 이해의
잡곡이 대량으로 수입되고 있었고
고가의 쌀을 판 대금으로 싼 잡곡을
더 많이 구입함으로써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의 식량을 보완했다는
의견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한국의 일제에 의한
토지 스타일로는 신화라고 하며 우리가
식민지 시대에 대해 알고 있는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은 많은 경우
만들어진 것으로 교육된 것이다라고
하며 식량을 일본의 반주 한 것도
시장을 통한 상행위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조선인의 키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1920년대 중반까지는 조선인의 생활
수준이 꾸준히 향상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한편으로 계속
늘어나는 노동인구를 동천에서 흡수하지
못하고 경성 등의 대도시에서
노동자로서 생계를 추구하는 사람이
나왔지만 도시에서도 산업이 미발 달로
인구를 충분히 흡수할 수 없었고
일자리를 찾아 일본이나 만주로 도항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경성 등의 농촌
출신의 노동자 층 중에는 도시
주변부의 허술한 오두막을지었습니다
그들은 빈민가를 형성했고 토막민이라고
불리는 것도 존재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라는 성질상이 시기에 조선의
경제 발전의 성과는 대부분이 자본을
낸 제조 일본인이나 일일본 기업에
분배되어 하지만 한편으로 시장을 통한
상행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익을
얻고 있던 조선인도 존재했고 통치
시대 후기에는 많은 조선인 자본가가
존재했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사기행위가
다발하고 있는 것을 경계하고
1910년에 회사령을 공포하여 주식
회사를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로
했습니다 산업 지능을 위한 무역 수출
전략을 위해 조선 무역 협회를 경성에
설치 봉천 다렌 하얼빈 등 대륙
각지에서 관민 의한 조선 건물의
선정과 판핵 촉진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종업원 다섯명 이상의 공장 수는
1910년에는 조선인 경영 39살에
대해 일본인 경영은 1124 있지만
1939년에는 조선인 경영 4185
4에 대해 일본인 경영 2768 4가
되어 가동 공장 수의 증가와 함께
현지 경영자의 급격한 증거가
일어납니다 다만 1939년에 규모가
커질수록 일본인에 의한 경영이
많았습니다 2004년 서울대학교는
1911년부터 1937년에 걸친
조선의 각 산업의 종사자 비율이 1차
산업이 75% 45% 2차 산업이
7% 22% 3차 산업이 18%
33% Pro 각각 변화하고 자본
경제화 급속히 진행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19 12년부터
1937년에 걸친 연평균 실 7
GDP n 4.1% 있습니다 실 7
gde 4.24% 성장세를 이루고
있으며 동시대 일본이나 미국은 3%대
유럽은 1% 대에 불과했습니다
1923년에 대공항 하에서도 조선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한국이나 북한에서는
현재도 조선의 자본주의의 맹아를 조선
시대에 요구했고 싹튼 조선의
자본주의는 성장하기 전에 한일 합병에
의한 식민지화에 의해 1945년까지
크게 억제되어 있다는 설이 통설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하버드 대학
교수로 조선사가 전문인 카터 제이
에커트 교수는 연구 결과 이시 조선
시대의 경제 규모는 동시대의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보좌할 것 없었고 당시의
상인과 후대의 자본가와 관계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EC
조선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고 하일라
방에 의한 일본의 정책에 의해서
생겨났고 특히 전후 한국의 자본주의나
공업화는 상기와 같은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근대 정책을 본뜬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신분 해방
통감부는 1909년에 호적 제도를
조선에 도입하여 이시 조선 시대를
통해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고 성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쿠초 등의 천민에 성을 자칭하고
하여 호적에는 신분을 기재하지 않고
등록시켰다 신분이 해방된 백정의
자재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분 해방에 반발하는 구
양반의 사람들은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버렸지만 신분의 관계 없이 교육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 는 일본
정부에 의해 즉시
진압되었지만 창시인 조선의 호적에
의한 관리 시스템 공간과 성에 새롭게
가족 명인 씨를 더해 일본 및
구미에서 일반적인 가족 단위의 관리
시스템 아래 통합하며이 과정에서 중국
식으로 부부 별성 가지던 안해도
미국이나 일본처럼 남편과 같은 하나의
가족명의 관리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계명이란 성명을 신고할 때 이름을
일본식으로 변경하는 제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시 계명입니다
1940년 이전에는 일본에서 쓰는
성명은 조선인에게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지만 1940년에 취해진 이러한
조치를 창식의 명이라고 부릅니다
창신은 필수였음 모든 조선인에게
적용되었습니다 후자는 선택이며 당초
난지로 총독 자신도 그렇게
언명하였는데 미즈노
나오키에게 계시 이후 신고한 사람들의
비율이 4% 정도로 현저하게 낮았고
조선 총독부는 방침을 전환하여
조선인에게 추천 장려하는 캠페인을
시작하여 결과적으로 80 % 이상의
조선인은 일본적인 시에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한편 나머지 2할은 법정 창
시에 의해 조선식 성을 그대로 시로
설정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중에서 개명자 비율은
99.6% 있습니다 1919년에는
3일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일본의
헌병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거는 조선의 지배층이
일본에게 항복했다고 얘기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일본이 없을 경우에 더
기득권을 소유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들만 일본에게 자신들의 권한을
포기했고 일반 시민들은 저항했다는
생각도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1920년에
니앙 사건에서는 조선인 빨치산
400에서 1천명 정도가 더해진
적군은 니콜라에 프스크 주민을
학살하고 소수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전멸시키고 일본인 거류민을
몰살시켰다 정치 정책을 수정하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언론이나 결사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조 조선인에
의한 다양한 민족운동이 펼쳐졌습니다
조선은 일본 통치 이전에는 엄격했던
신분제도에 힘입어 전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조선 2시 시대는
독립협회 등의 단체가 민주주의 운동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나까야마 나리아키
의하면 1933년에 일본 정부에 의해
민주적 선고가 도입되면 도의회 의원의
8알 이상이 조선인이 되어 일본 통치
시대를 통해 도지사의 절반 정도가
조선인이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대중
문화의 발전도 폭발적이었습니다 만주
국가 접하는 북부 국경 지대에서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지원을 받은
조선 독립을 내거는 공산 게릴라와
조선 총독 부하의 산발적인 전투도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형 댐에 건설을 통해 전력을
공급했습니다 일본어로 스티 토요
때이라 부릅니다 1929년에 카네기
재단에서 한반도에 파견되었던 미국인
기자들은 일본은 합병 일래 19년
동안 수백년간 잠잠했던 조선과 근대
문명국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물론 조선인의 고통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막대한 이익을
조선에게 주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이시 조선 시대보다도 일본 통치에
의해 조선 인민은 구원받고 있었다고
평가를 하기도 했습니다 1944년
9월부터는 조선인에게 징병이
적용되었지만 이병은 1945년
1월부터 7월 사이에 한정된 다다
한반도나 일본 내지에서 훈련 중에
종전을 맞아 전장에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교육제도의 정비와 문맹률
향상 조선 에서는 1895년에 가보
개혁으로 근대 교육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1906년 시점에서도
초등학교가 전국에서 40개교
미만이었으며 양반이나 중인의 자재는
관리 등용을 목표로 서당이 불리는
사수에서 주로 한자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초대 통과에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학교 건설을 개혁의 최우선
사항으로 했습니다 이토가 추진한 학교
건설 사업은 병화 후에도 조선
총독부에 의해 계속되어 조선의 각종
학교는 1940년대에는 천 개교를 를
넘었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조선인에
의한 자주적인 교육에 대해서는 경계
통제를 실시하면서 교육 내용의 정비를
진행하여 일본어 한국어를 비롯해 산수
일본사 조선사 조선사는 조선
사력이라는 이름으로 교육받고
있었습니다 수신 등의 교육을
공립학교를 중심으로 전개하였습니다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관공 사립의 구제
전문학교가 다수 설립된 것 외에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이 조선
유일의 구제 대학으로서 또 일본
전체에서 여섯 번째 제 대학으로서
일본 본토의 오사카 제국 대학이나
나고야 제국 대학보다 빨리
설치되었습니다 경성 제대는 일본
통치하에 조선에서 유일한 구제
대학이었다 않았고 유일한 대학 외과로
경성제대 예가가 놓였습니다 일본
통치시대 말기에 있어서 경성 제대에서
내지인 학생의 비율은 6할 0도
조서진 학생의 비율은 4할
정도였습니다 경성 치과의학 전문학교
치가 의사의 육성이 이루어졌습니다
게이조 제국 국 대학이나 게이조 의학
전문학교에서는 의사 육성도
이루어졌습니다 병합 당초 조선의 초등
중등 교육에서는 일본 본토인 위한
학교와 조선인을 위한 학교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인
대상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
조선인 대상의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 고등보통학교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어 능력이 특히 높으면 예외적으로
내지인 학교로의 진학도 인정되었으며
조선 총독부 학무국 간행의 쇼화
9년도 편찬 조선 여학교 남에 따르면
국립 중학교의 조선인 학생 수는
324명 고등 여학교의 조선인
학생수는 공립이 517명 사립이
27명이 있습니다 1938년 조선
교육령 개정에 의해 보통학교 고보
여고보 폐지되었고 일본인도 조선인과
동일한 학제 정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 통치하에서 초등교육이 순차적으로
확충되어 초등교육 취학률은 일본 통치
시대의 말기로 남자가 60% 여자가
40% 정 정도였습니다 초등 교육
기간의 교원은 조선의 사범 학교에서
양성되는 교원과 일본 본토에서
파견되는 교원이 혼재하고 있었습니다
1946년도 터는 일본 내지와 같은
8년제 의무교육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제국의 멸망과 항복으로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625
이후 본격적으로 의무 교육이 시작된
것은 1959년에 95.3% 치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시 조선 는
청나라의 종속화 있어 한자가 중시되는
한편 한글은 경시대 공문서에서
채용되지 않았지만 이조 말기가 되어
개 아파와 조선의 일본인 고문인
가쿠고와 협력으로 조선에서 첫 한글을
사용하는 신문 공문서 발행되었습니다
이시 조선에서는 일반인을 위한 교육
기간은 전무했고 당연히 의무 교육
제도도 없었습니다 대다수의 조선인은
잃고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통치하에서 일본의 부국
강병 정책으로 인해서 조선 총독부에
의해 학교 교육의 과목 중에 하나로
한글과 한자의 혼용에 의한 한글어
도입되었기 때문에 한글어 문맹률은
일정한 상승을 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조선 총독부는 제 1차
교육력을 공포하고 한국어는 필수
과목으로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한국어 시간 이외에 교수 언어로는
일본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총독부는
1912년에 근대에 처음 작성된
한국어의 정서법 있 보통 학교용 속담
문제자을 작성하고 193 30년에는
아동의 학습 능률 향상 한국어의
철자법이 정리 통일을 위한 신 정서법
있 속담 문제자 법을 작성하고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문맹률의 상승으로 인해
한글로 쓰여진 타쿠지 책이
1920년부터 30년대에 걸쳐
유행했습니다 중일 전쟁 이후 총독부는
일본군의 병사로서 조선인을 동원하는
것 등도 염두해 두고 조선인의 황민화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1938년에 제
3차 교육 령에 한국어 교육은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제 제 86회
제그 9회 설명 자료에 따르면
1938년에는 그거를 쓰는 조선인의
비율이 전년도에 88% 미만에서
13% 아지 성장했고 1943년
22% 아지 성장했습니다 1945년
8월 이후 미국에 의한 점령이 시작된
당시 남조선의 12세 이상의 총인구의
78% n 한글 문맹이었다 미국의
조사도 있었습니다 초등교육 취향은
1910년에 1% 1923년에 11%
1935년에 21 1.7%
1943년에 49% 있습니다 조선
총독부에서 1921년부터 1945년에
일본 통치 종료에 이르기까지 한국어
능력 검정에 합격한 직원을 승진
급여에서 유리하게
처우하는 마이니치 신보는 일본 통치
종결까지 발행이 계속되었습니다
1910년의 한국 합병 1920년
인구 조사에서는 1726 4119을
기록했습니다 1753년 730만
명에서 1904년 710만 명
1920년 16923 명 1930년
199만 명 1940년 295만 명
1942년 253만 명까지 폭발적으로
늘게 됩니다 식민지 시대의 침략 약탈
착취만 이루어졌다면 이렇게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지 이러한
의문도 드는게 사실입니다 한반도에서는
1931년에 제한 선거에 의한 지방
의회가 개설되어 1933년 5월
11일 조선 나사이에 따르면 13도
의회의 당선 의원 중 약 80%
조선인이었다 중의원 의원 선거법에
의해 대만과 조선에도 제국 의회의
의석이 주어져 선거에 의해 외지에서도
중의원의 의원을 보내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의석수는 중원
정수 466 그에서 대만 여석 조선
22석 정했습니다 또한 1943년
일본에 편입된 사할린에서 동시에 세
명의 의석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패전 때문에이는 실시되지 못하고
계획으로만 그쳤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철도는 이시 조선 시대에서 일본이
한일 잠정 합동 조항에 근거하여 철도
부설권을 1894년 8월 20일에
얻어 사량진 강남 서안 재물 포관
설도를 1899년에 개통시기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후에 이것은 경인선이
됩니다 1905년에 개입 부선을
시작으로 다음 1906년에 러일
전쟁에 군사 수송을 목적으로 의선을
일본이 시켰습니다 개이 부선 경부선
경의선은 러일 전쟁 후에 일본이 얻은
남만주철도 만철이 접속을 도모하고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1910년 한국
병합으로 일본이 조선의 통치권을
얻으면 경원선이 주호선 호남선 목을
부설 있습니다 조선 총독부 철도는
조선으로의 관광객 유치에도 힘을 쏟고
조선 호텔의 근대적인 서양식 호텔
건축도 시작했습니다 또한 조선왕조
말기에는 대부분 도로 포장 등이 이루
어지지 않았던 경성은 구획 정리가
완료되고 노면 절차가 부설되어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간 후 포드 자동차와
제너럴 모터스의 판매 대리점이 영업을
시작했고 처음으로 도입된 승합
자동차와 택시가 도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1937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으로 터 지원병을
모집하고 많은 조선인이 이에
응했습니다 같은해 8월 2일자
조선일보 사설에서 군사 후원 연맹을
지지하고 조선인의 출정을 장려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1942년에 행해진
조선 출신자에 대한 모집에서는
모집인원 4,077명에 대해 25
4,27 3명의 조선인 지원병이 모여
경쟁률은 62.4대 1이었습니다 다른
군속으로 전쟁터에 향한 사람도
존재했습니다 1944년 4월 법
개정에 의해 9월부터는 조선인에게
징병이 적용되었지만 이병은 1945년
1월부터 7월 사이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훈련 기간 중에 종전을 맞아
실전에 투입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후에
한국 대통령이 이 된 박정희도
초등학교 훈도 연령에 따라 체용
조건에
부적합했는지 등을 세 번에 걸쳐
제출하는 등 만주국 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15년에는 시정 5년
기념 조선 물상 공진회 1929년에는
조선 박람회가 총독부 주체로
개최되었습니다 대일본 맥주와 현지
자본의 공동 출자에 의해 조선 맥주
현 하이트 맥주가 설립되었습니다 또한
기린 맥주 자회사로 쇼화 맥주 현
오비맥주가
설립되었습니다 조선 맥주와 효화
맥주에 의해 조선에서 맥주가
보급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인들과
경성 시민들의 삶에 대해서 조선시대와
비교해 어떻게 발전했는지 대해 아예
얘기도 꺼내지 못하다 보니 제대로 된
연구나 조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은 일본의 자료를 기반으로
교과서나 우리나라 뉴스에서 알려주지
않는 일제 시대의 조선인들의 삶에
대해서
찾아보았습니다이 영상은 제대로 된
우리 역사에 대해서 알리기 위한 도로
제작되었음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오늘 영상 재밌게 보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리고 궁금한
점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
부탁드립니다 그럼 오늘 영상
마치겠습니다
[음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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