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ladimir Tikhonov
s͏d͏o͏t͏S͏e͏o͏n͏p͏r͏7͏t͏i͏4͏h͏l͏8͏2͏f͏g͏l͏8͏t͏u͏m͏m͏t͏f͏a͏h͏i͏9͏0͏t͏8͏9͏1͏6͏h͏1͏g͏g͏a͏t͏g͏6͏l͏m͏0͏g͏a͏5͏a͏g͏6͏c͏7͏a͏8͏9͏ ·
[이추악, '운동' 속 삶과 사랑]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인 학생들의 문서를 연구하는 데에 한 가지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사용했던 러시아식 가명들입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밀정’이 있을 수 있다 하여, 거의 모든 문서들에서는 본명이 아닌 가명, 즉 활동명이 기입돼 있는데, 그 인물이 실제로 누구였는지 확인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코레예바’ (주세죽)나 ‘스베틀리바’ (김명시)는 하도 잘 알려져 있지만, 아직 풀지 못한 가명들도 수두룩하지요.
풀기 어려운 가명 중의 하나는 “미나예바”이었습니다. 문서상으로는 미나예바라는 조선여성이자 중국 공산당 당원은 1906년생, 평안도 출신이었습니다. 빈농의 딸로, 1916년에 보통학교 입학을 했는데 계속 고학을 했으며, 1919년 평양에서의 3.1운동에 앞장서서 지하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22년에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는데 계속 고학을 거듭하고, 1925년에 중국, 광동의 광주를 향해 가고, 1926년에 중국 공산당 부속의 공청에 가입하고, 1927년에 모스크바에 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본인이 작성한 문서로 봐서는 러어를 아주 괜찮게 익혔으며, 전체적으로 성적은 평균이었습니다. 학교는 그녀의 “규율성”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했지만,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야 공산주의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한데 북벌로 들끓고 있었던 1926년의 광동에서 공산당 부속 공청에 가입하고 백색테러에 휩쓸린 1927년의 중국을 벗어나 모스크바에 온 이 조선 여성은 분명히 – ‘사업 경험이 아직 부족하다’는 학교의 평가와 달리 상당히 풍부한 경험을 한 것만 같았는데, 그녀가 과연 누구였는지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도움을 준 것은 그녀를 학교에 추천한 카타야마 센이라는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의 한 통의 추천서였습니다. 거기에서 그녀의 중국 이름을 “리 쭈유에”라고 썼는데, 그걸 보고 그녀가 누구였는지 알았습니다.
이추악 (李秋岳)! 불꽃 같은 그녀의 삶의 흔적을 만지게 되어서 저는 전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삶 속에서 1920-30년대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여성들의 사랑과 꿈, 포부, 그리고 비극들이 다 녹아 있었습니다.
이추악(李秋岳)의 본명은 김금주(金錦珠)입니다.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평양 숭실여학교에 다니던 1919년3월, 어린 김금주는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바로 훗날 중국공산당의 군사 지휘관이자 항일투쟁의 전설이 되는 양림(楊林)이었습니다.
두 사람은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겠다는 뜻을 함께했습니다. 단순히 같은 운동에 참여하는 동지가 아니라, 평생 항일투쟁의 길을 함께 걷겠다고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길은 처음부터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양림은 먼저 중국으로 망명했고, 김금주 역시 체포를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1925년, 김금주는 양림이 활동하고 있던 중국 광저우로 찾아갔습니다. 당시 양림은 황푸군관학교에서 활동하며 중국 혁명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침내 다시 만났고, 결혼했습니다. 이들에게 결혼은 평범한 가정생활의 출발이라기보다 함께 혁명의 길을 걷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김금주는 혁명가로서 새로운 이름을 택했습니다. 중국의 여성 혁명가 추근(秋瑾)에게서 '추(秋)'를, 남송의 충신이자 명장인 악비(岳飛)에게서 '악(岳)'을 따와 자신의 이름을 이추악이라고 지었습니다. 새로운 이름에는 혁명과 항일투쟁에 자신을 바치겠다는 의지, 그리고 중국 문화에 대한 애착과 존중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1925년 2월, 이추악은 광둥혁명군의 제1차 동정(東征)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선전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군사 작전에 참여했고, 같은 해 6월 제2차 동정에도 참가했습니다. 남편 양림이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이추악 역시 혁명군의 일원으로 현장에서 활동했습니다. 즉, 부부가 같이 싸우는 셈이 된 것이죠.
그해 가을, 이추악은 중국공산당 부속 공청에 가입했습니다. 한국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중국공산당 계열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림보다 몇 달 늦게 입당했지만, 이후 두 사람은 중국혁명과 항일투쟁을 함께하는 혁명가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추악은 더 이상 양림의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독자적인 혁명가였습니다.
1927년 장개석이 상해에서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습니다. 수많은 혁명가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고,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이 난리 속에서 양림과 이추악 부부는 당의 결정에 따라 소련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분야를 공부했습니다. 양림은 군사학을, 이추악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니고, 방직공장에서 실습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조직가로서의 실력을 키웠습니다. 두 사람에게 유학은 단순히 학문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중국혁명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더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930년 봄, 부부는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만주로 파견된 두 사람은 동북지역에서 항일운동과 당 조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양림은 군사 분야를 맡아 연길·화룡·왕청 등지에서 농민들을 조직하고 항일 유격대를 건설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이추악 역시 당의 여성 조직과 선전·조직 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9·18사변 이후, 이추악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그녀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부녀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주하(珠河) 지역의 당 조직에서 위원과 부녀부장 등을 맡았습니다. 1934년 봄에는 주하현 철북구위원회 서기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여성 혁명가가 당 조직의 책임 있는 직책까지 올라가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 당시 만주성위 활동을 벌이면서 젊은 날의 김일성도 만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길은 두 사람을 점점 멀리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1933년 7월, 양림은 중국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강서성 중앙소비에트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홍군의 신병 훈련과 포로 재교육을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추악은 만주에 남았습니다. 그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반일회와 반제동맹 등 혁명조직을 이끌며 항일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사실상 생이별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혁명과 같은 당을 위해 일했지만, 한 사람은 중국 남부의 소비에트 근거지에, 다른 한 사람은 일본군의 침략과 탄압이 거세지는 만주에 남았습니다. 1932년부터 활동 근거지가 달라지면서 두 사람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934년 초, 이추악에게 남편과 재회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당시 만주성위원회 대표가 중앙소비에트 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때, 모택동이 이추악을 양림이 있는 중앙소비에트 지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추악의 능력과 혁명 활동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만주성위원회도 그를 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장개석의 포위소탕전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이동 경로는 극도로 위험했습니다. 결국 이추악은 만주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남편과 다시 만날 기회는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1936년 2월, 양림은 황하 도하작전에서 중국 홍군을 지휘하다 전투 중 총탄을 맞았습니다. 그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부하들에게 전진을 명령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양림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중국 땅에서 전사했습니다. 그의 나이 36세였습니다.
그때 이추악은 만주에 있었습니다. 남편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우리로서 알 수 없습니다. 좌우간 남편을 잃은 뒤에도 그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6년 2월, 이추악은 통하(通河)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군을 위한 물자 지원사업을 수행하고 항일 근거지를 건설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밀고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인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된 것입니다. 일군은 그녀를 고문하여 조직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려 했는데, 그녀는 끝까지 ‘조직’만큼 지켰습니다. 1936년 9월 3일, 일군은 이추악을 통하현성 서문 밖에서 총살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30세였습니다. 남편 양림이 전사한 지 약 7개월 만이었습니다.
이추악과 양림의 삶에는 사랑과 혁명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3·1운동의 회오리 속에서 만났고, 조국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광동에서 결혼하고,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에는 서로 다른 전선에서 혁명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함께 살아가는 일상보다는 함께 싸우고 서로를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이어졌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게 ‘단란한 부부 생활’이란 모스크바에서 보낸 그 3년은 전부였을 것입니다….그들은 소련에서도 중국에서도 ‘이방인’이었지만, ‘세계 혁명’에 대한 의지, 신념, 그리고 희생의식을 가지고 여러 장벽을 넘어 중국 공산당 조직의 책임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들의 혁명적 의지와 능력, 그리고 그 당시 동아시아 혁명 현장의 국제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Vladimir Tikho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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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추악, ‘운동’ 속 삶과 사랑
이추악, ‘운동’ 속 삶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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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 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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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
오방덕
·by author
1906년생이고 36년에 사망했으면 30세였을텐데.. 35세란 계산이 나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실제 생년은 1901년쯤 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부부가 한 살 정도 나이차가 난 것 같습니다.
당시엔 특히 여아의 경우 호적에 올리는 데 지체가 흔히 있어서 2~3살 정도의 오차는 다반사로 있었습니다. 5살은... 좀 많긴 하네요, 그런 오차로 간주하기엔.
미나예바란 소련명은 혹 계집애의 평안도 사투리인 에미나이와 상관이 있을 수도? ㅎ

Vladimir Tikho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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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덕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일단 모스크바 문서의 내용대로 이추악 사망시 연령을 맞추었습니다.
오방덕
·by author
3로군이면 허형식과 김책이 활동한 부대인데, 생전에 허형식과 김일성이 상면한 적이 없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추악이 그를 만나본 적이 없을 가능성도 낮지 않아 보입니다. 통화가 김일성 부대의 활동반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 아니었나요.
강서로 전속가기 전에 양림이 김일성을 혹 보았을 가능성이 더 있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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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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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운동가들은 모두 이런 의기와 각오로 지하비합법활동을 했고, 일부는 경찰 또는 정보기관에 끌려가 살인적 고문을 당해 죽거나 육체적 정신적 장애 후유증에 평생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중우 파퓰리즘 선동에 여념이 없는 86 출신 정치인들이 팔아넘긴 건 바로 그 동지들의 희생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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