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0

"동학농민혁명" 논쟁 농민군 전사자 수



[한국사공부][한말기] "동학농민혁명"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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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란"이냐, "동학혁명"이냐 하는 것이 역사해석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60년대에 한국을 떠난 나는 "동학란"이라고 들어 왔는데, 그것이 "동학혁명", "동학운동", "동학농민혁명"으로 평가가 바뀌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의 성격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끝날 것 같지는 않다.
- 학술적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동학농민군의 후손을 위한 명예회복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학란"이라는 말에는 농민군이 "반란군", 또는 나라의 "역적"이란 의미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04년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 통과되어 농민군이 애국자로 인정되게 되었다고 한다.
- 농민군이 나라의 역적이 아니었다는 명예회복을 받게되는 것은 후손에게 좋은데, 일본군과 협력하여 농민군을 탄압한 관군측의 후손들 과의 관계가 해석 이상으로 문제로 남아 있는 듯하다. 일본의 막부말기의 천황을 지지하는 반란군과 막부를 지지하는 군대가 싸운 보신 전쟁에 막부를 지지한 병정들은 메이지 정부 이후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게 된 것과 비슷한 문제가 있다.
- 동학란이 바뀌어 동학혁명으로 불리우게 되었는데, 이의 제기가 많다. 그중 잘 알려저 있는 것이 갑오농민봉기는 보수적 복고적인 운동이었다고 하는 의견이다. 그들이 꿈꾸던 것은 "사회혁명"이 아니라 (보수적) "사회개혁"이었다는 것이다.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받든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 신복룡은 2001년도에 전봉준은 동학교도도 아니었다고 주장해서 엄청난 사이버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동학에 대하여 공부를 하기 위한 예비 지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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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강준만 <한국근대사 산책> 제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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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10 February 2017 ·



[한국사공부] [한말기] 1890년대 중반기의 한일 비교

-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군 학살의 규모는 최소 20 만 명에서 30-40만 까지. 일본군은 최신식 총을 가진 8000명.
- 1895년의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가 30만. 불결한 환경과 미신. 콜레라는 마귀라고 고양이 부적을 대문에 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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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 "근대화", "근대화" ...
- 그런데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농민병 30만의 목숨이 날아간 것의 책임은 누가 질 것 인가?
- 농민병의 죽음은 콜레라로 죽은 목숨보다 더 고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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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글은 강준만 책 <한국근대사산책>제 2권에서






11이소, Kim GwangYol and 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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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uto Imamura 최대 3∼5만명의 조선인의 사망자라고 하는 것은 본 적이 있습니다만, 최소 20만명∼40만명은 지나치게 과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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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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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다른 자료를 제공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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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uto Imamura 주 127의 참조하고 있는 원전은 무엇입니까? 위안부 20만명과 같은 무근거의 숫자에밖에 현시점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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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김양식 <새야 새야 파랑새야: 근대의 여명을 밝힌 '동학농민전쟁'> (2005) 161, 19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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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uto Imamura 부상자 포함시켜서 30만명, 사망자는 5만명
http://m.blog.naver.com/miraetv/220164887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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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방송]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이 농민군 5만명 대량학살[미래방송]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이 농민군 5만명 대량학살

[미래방송]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이 농민군 5만명 대량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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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9.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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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홋카이도대학 교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의 고의적이고 조직적인 대량학살로 농민군 5만명 이상이 사망”

 

[미래방송‧미래TV]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천도교가 공동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오는 28일부터 29일까지 양일간,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서 개최된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이해 ‘동학농민혁명, 평화·화해·상생의 시대를 열다’라는 주제 아래, 한·중·일 석학들의 기조강연,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의 의미’, ‘동아시아의 미래’라는 3개의 소주제로 진행된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는 동학농민혁명에만 몰두해 온 그동안의 연구에서 탈피해 연구 영역이 청일전쟁까지 확대되고 동아시아 3국의 학자들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의 성관성에 대해 각각의 관점을 발표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이이화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이 ‘농학농민혁명은 기층민의 변혁운동’을, 중국 치쥔지에(戚俊杰) 중국갑오전쟁박물원 원장이 ‘동학농민혁명과 중일갑오전쟁이 국제정세에 끼친 영향’을, 일본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홋카이도대학 교수가 ‘일본군의 동학농민 섬멸작전에 대한 조사로부터 동아시아의 미래로’를 각각 발표했다.
이이화 전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군의 이같은 지향은 근대적 입헌군주제나 선출직 국회와 같은 정치체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사람의 권력집중을 막으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밑으로부터의 변혁을 지향하고 기층민중의 의사를 대변하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의사결정이라는 관점에서는 ‘소박한 수평적 리더십’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일본의 이노우에 교수는  “사료를 보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동학농민군은 부상자를 포함해 30만∼40만 명에 이르며, 그 중 일본군에 학살 당한 농민군 숫자는 5만명 이상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동학농민군의 섬멸작전을 입안, 발령하고 ‘토멸부대’를 파견한 것은 ‘히로시마 대본영’이었으나 일본군 육군참모본부는 이 작전을 전사에서 전혀 기록하지 않고 있다며, 동아시아의 장래를 위해 역사적 사실이 공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일본의 역사교과서에는 1개 출판사만이 동학농민의 항일봉기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면서 “이는 일본 정부가 은밀하게 과거를 지우고 있는 상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고, 동학농민군에 대한 처절한 섬멸작전은 일본 국민 속에서도 깊은 어둠에 파묻히고 있는 현실이다”라며 일본의 과거사 은폐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산하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동학농민군 진압 사료를 발굴·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일본군의 민낯을 공개해 왔다.

중국위 치쥔지에 관장은 기조강연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와중에 벌어진 ‘중일갑오전쟁’(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게 됐는데, 중국에 끼친 충격은 대단히 강렬해서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구호를 앞세운 의화단운동과 나아가 신해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또 일본이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상대로 승리한 일본은 이후 러시아와의 전쟁까지 승리로 이끌면서 열강의 대오에 들어섰고,  침략당한 과거를 잊으면 반드시 침략당한 역사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경고를 주기에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동학농민군의 궁극적인 지향과 목표가 ‘평화와 화해, 그리고 상생’이었다는 것을 한중일 3국 학자들의 주장과 논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천교도 측은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이해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을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민족의 미래 비젼을 제시하는 정신으로 동학농면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확장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미래방송‧미래TV]  보도제작본부장  권오영  뉴스제보 및 보도자료  miraetv.ne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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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위의 책에는 이노우에 교수가 한 말에 대해 조금 애매하게 쓰여 있네요. 
김양식 책의 원자료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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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uto Imamura 민중 사이에서 기반이 강한 동학도들의 총세력은 거의 16만7천 명으로 추산됐다.
(중략)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동학도들의 담력에 일본군 장교들도 가끔 경의를 표했지만, 공주의 관문인 우금치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진압군이 거의 손실을 보지 않은 반면 약 1만∼2만 명, 많게는 3만 명으로 추측되는 동학도들이 서구식 총탄과 포탄에 끔찍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http://h21.hani.co.kr/.../society/society_general/26405.html

16 만 7 천명이 총 세력에서 그나마 과장된 숫자라고 하시는데 그 2 배 이상이 학살되는 모순. 분명히 전쟁으로 인한 기근 등으로 병사 굶어도 포함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도 백발 삼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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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1.HANI.CO.KR
[박노자의 국가의 살인]기관총이 열어젖힌 ‘학살의 시대’[박노자의 국가의 살인]기관총이 열어젖힌 ‘학살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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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uto Imamura “전체 사망자를 추정하면 3 만명 충분히 넘은 것은 확실 부상 후 사망 등을 감안하면 5 만명에 육박한다. 부상자는 사망자 1 백배 정도 보면 사상자 30 만 ~ 사십 만 명이라는 조선에서 잘 알려진 "東学史 '로 꼽히고있는 숫자는 근거가있다.”
조경달(2008)「이단의 민중 반란」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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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uto Imamura 농민군 측의 희생자는 만 명이라고도 5만 명이라고도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10배에 달한다는 설도 유력하다는 말을 복수의 전문가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판명 되지 않고 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070824/848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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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DONGA.COM
[역사는 살아있다]제2장 청일전쟁과 대만 할양(상) : 뉴스 : 동아닷컴[역사는 살아있다]제2장 청일전쟁과 대만 할양(상) : 뉴스 :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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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저는 지금 강준만의 책을 읽으면서, 그 책에 나오는 부분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 이랍니다. 저의 주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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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uto Imamura 책의 그 부분을 굳이 인용 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습니까? 선생님도 그것을 과장이라고 느껴졌다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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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이 책을 읽으면서 큰 숫자라고 생각했지,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아직도 사실은 확실히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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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uto Imamura 선생님의 게시물은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꼭주의 부탁드립니다. 여러 자료를 비교 검토 후, 신빙성이 높은 숫자 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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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하하, 믿는 사람이 많아요? 전문가가 아닌 저는 지금 혼자 한국사를 공부하는 중인데, 현재는 한가지를 가지고 시간을 많이 보내는 단계는 아니에요. 많은 토픽을 카버해야 되기 때문에. 뭐든지 체크해 주시는 이마무라 상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상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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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kuto Imamura 난징 사건도 위안부 문제도, 중국이나 한국에서 나오는 숫자는, 무근거에 해마다 크게 과장되어 간다. 그러므로, 일본의 양심세력조차, 떨어져 가게 된다. 이번에는 동학농민군 학살, 징용자,,,,엔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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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gmook Choi 본인도 한국의 그런 역사인식에 대해서 우려를 금할길이 없지만, 학창시절에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바뀌어야 할 사안이지만 쉽게 바뀌어질 사안도 아니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번에 금년 7월 군함도라는 영화도 개봉된다고 하는데 대충 들어보니 파피용 비슷한 스토리라 하는데...환상속의 한국사회라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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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동학혁명중에 많은 학살이 존재했고 그 와중에 일본군도 참가했습니다만 최근 한국에서 일본군의 역활만을 부각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일본군도 학살에 참가했지만 일본군만 학살을 한건 아니죠.. 일단 우금치 전투에서 이건 논란이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당시 일본군이 개슬링건을 들고 오는데 개슬링건을 직접 동학군에게 갈긴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관군들이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본군이 가지고 온 개슬링건을 관군들이 사격하였고 일본군은 지도했다는거죠.. 물론 일본군들이 직접 사격했다고 보는 기록도 있었고.. 어느쪽이 진실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패배한 동학군을 추격하고 마을에서도 동학도의 가족들을 학살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 일본군도 참여하였습니다만..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정한것은 일본군이 아니고 지역 양반들이었습니다. 일본군으로서는 누가 동학군의 가족인지 아닌지 알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역의 양반들이 일본군을 이끌고 저놈들이 동학교도의 가족이니 죽여야 한다고 지목하고 다녔죠.. 이 지역양반들이 학살을 주도했었다는점은 눈을 감고 일본군의 역활만을 강조하는 게 최근의 유행이더군요.

그리고 동학교도들을 죽이는 의병들도 존재했습니다. 안중근의 아버지만 해도 이렇게 동학교도들을 죽이는 의병들을 거병하였었죠.. 아는 사람들이 극히 드문데 이런식으로 양반들이 동학난에 분노해서 직접 의병을 이끌고 학살을 하고 다닌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관군들도 학살을 하고 다녔고요. 물론 일본군들도 여기에 껴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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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조선 정부가 일본군을 불러드렸고, 관군이 참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저 있는데, 관군이 신식총을 썼다는 것은 아직 읽은 적은 없습니다. 지역 양반의 역활은 중요할 것 같군요. 그런데 농민군이라는 것도 사실은 농민만이 아니라서 계급투쟁까지는 되지 않은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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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국가의 살인
기관총이 열어젖힌 ‘학살의 시대’

19세기 후반 잇따른 식민지 저항군 대량학살의 ‘비법’은 맥심기관총…
근대식 무기·민족주의 퍼지면서 막 내려

제792호
등록 : 2009-12-29 15:27 수정 : 2009-12-31 16:33

1894년 10~11월, 일본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같은 해 6월 말에 집권한 개화파가 조선왕조의 기본틀을 흔들 만한 대변혁을 한창 실행하고 있었다. 양반에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과거제가 폐지되는가 하면, 상인·지주들의 편의대로 일체 조세를 금전으로 상납한다는 조세금납제가 결의되고, 부자의 재산을 보호할 근대적 경무청(경찰청)이 세워지고, 일본인에 의해 새로운 군부대들이 훈련된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뒤 영국군이 항쟁군 포로들을 포구에 묶어 잔혹하게 포살했다. 영국 지배자들은 항쟁 가담자들을 ‘법치’의 원칙대로 재판했다기보다는 거의 중세적 ‘집단 복수’로 일관했다. 한겨레 자료


이 새 세상은 돈과 땅이 있거나 신지식을 얻어 근대적 관료가 될 전망이라도 있는 중앙의 유식층에게 ‘희망’으로 보였을는지 모르지만, 가진 것은 충군애국의 의리뿐인 지방 유생, 그리고 왜군이 조선을 빠져나가 대원군처럼 ‘전통에 기반을 둔 개혁가’가 집권하는 것을 바라거나 조선왕조 자체를 교체해야 한다고 보는 동학도에게는 ‘짐승들이 다스리는 말세’일 뿐이었다. 끝내 철군할 뜻이 안 보이는 일본의 태도에 분개한 동학도들은 제2차 봉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일본군 4천 명이 10만 동학도 ‘도살’

민중 사이에서 기반이 강한 동학도들의 총세력은 거의 16만7천 명으로 추산됐다.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지만, 1894년 11월8일 동학군이 공주성을 포위해 공격했을 때 그들의 깃발이 12∼16km에 걸쳐 인근의 여러 산을 덮쳐버렸다는 일본 쪽 기록으로 봐서는 어쨌든 수만 명의 병력이었을 것으로 봐야 한다. 반대로, 이들을 진압하러 온 일본군과 조선 관군은 숫자상 열세였다. 일본군은 9개 중대, 다 합해도 약 1900명이었고, 나중에 명성황후 시해에 관여할 이두황(1858∼1916) 등 친일 개화파 장교들이 이끄는 조선 관군은 불과 2500명 정도였다. 즉, 봉기군이 진압군보다 30배 이상 더 많았던 것이다. 조선 내각의 수반인 김홍집(1842∼96), 그리고 조선에서 일본 공사를 지낸 당시 정계의 거물 이노우에 가오루(1836∼1915) 등이 과연 무엇을 믿고 이처럼 적은 병력으로 조선 민중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던 저항운동을 말살하려 했을까?

그들의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통시대 같았으면 반란자보다 진압군이 수적으로 강해야 승산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서양식 최신 총을 거의 보유하지 못한 동학군을 서양식으로 무장한 진압군이 수적 열세에도 쉽게 도살할 수 있음을 조선 정부도 일본 공사관 쪽도 다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은 바로 저들의 예측대로 전개됐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동학도들의 담력에 일본군 장교들도 가끔 경의를 표했지만, 공주의 관문인 우금치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진압군이 거의 손실을 보지 않은 반면 약 1만∼2만 명, 많게는 3만 명으로 추측되는 동학도들이 서구식 총탄과 포탄에 끔찍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우금치 전투’라고 하지만, 차라리 ‘도살’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다. 우금치에서 수만 명의 반대자를 최신 무기로 살육한 4천여 명의 조선-일본 연합 진압군은, 그 뒤로 파죽지세로 충청·전라 일대를 휩쓸어 동학운동에 가담한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일본군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지만, 조선군 개화파 장교들도 순천에서 150여 명, 광양에서 190여 명, 함평에서 25여 명의 ‘비도’(匪徒)를 공개 총살했다. 지배계급의 ‘개화’에 반대한 민중운동가들이 ‘개화’의 상징인 서구식 총탄을 맞아 쓰러져 죽어야 했던 것이다.

5천 명도 안 되는 근대적 군대가 수백만 명의 농민이 사는 지방을 일대 도살장으로 만든 조선에서 ‘동학도 진압’은 19세기 세계사에서 예외라기보다는 차라리 보편에 속했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전세계를 덮쳐버리던 그 시기는 말 그대로 ‘인간 사냥의 시대’, 학살의 시대였다. 1840년대부터 유럽 열강 군대에서 일반화된 볼트액션 소총부터 1884년에 발명된 맥심기관총까지, 자본주의국가들이 장거리 연속 발사가 가능한, 그리고 전통사회 ‘원주민’들이 도저히 모방해서 따라 만들 수 없는 첨단 화기를 계속 개발했으며, 이 화기와 철도, 증기선 등을 배경 삼아 전세계적 ‘시장 개방’에 앞다투어 나섰다. ‘자유시장’에 저항하는 ‘원주민’이 있다면, 소총과 기관총 앞에서 참혹한 떼죽음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사막에서 기근과 갈증에 시달려야 했던, 몇 안 되는 헤레로족 생존자들. 헤레로족 제노사이드에 대해 독일은 2004년에 사과는 했지만 “이미 개발원조를 많이 주었다”면서 배상은 하지 않았다. 한겨레 자료


영국-수단 전투 사망자, 47명 대 1만 명

조선으로 이 ‘학살의 시대’가 닥쳐온 것은 이미 1871년, 신미양요 때였다. 그때 미국 쪽은 3명밖에 죽지 않았지만, 미군의 총탄과 포탄은 조선 병사 240명의 목숨을 불과 며칠 사이에 앗아가고 말았다. ‘상것’의 희생에 관심이 없었던 대원군 정권에서는 ‘오랑캐를 막았다’고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었지만, 곧 24년 뒤에 같은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진압군이 대원군의 재집권을 원했던 전봉준의 부대를 무찌르게 된다. 이렇게 포화 속에서 자유시장이 조선왕조의 ‘도덕 정치’를 밀어냈다.

자본주의가 날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던 19세기 후반기에는 ‘원주민’을 학살할 수 있는 능력도 그에 정비례해 일취월장했다. 19세기 중반만 해도 유럽인들은 그 어떤 상대자도 학살할 수 있는 ‘세계 지배자’의 위치에 서지 못했다. 1838∼42년에 걸쳐 아프간 침략을 시도한 인도의 영국 지배자들은 5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주해야 했던가 하면, 대영제국 식민지 구조의 중심지인 인도에서도 1857∼58년 세포이 항쟁(반란을 일으킨 영국 동인도회사의 세포이 용병을 중심으로 한 독립투쟁) 때 영국인들은 약 2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일시적으로나마 주요 도시에서 퇴각해야 했다. 사실 조선이 일본의 총포 앞에서 굴복해 강화조약을 맺었던 1870년대 후반만 해도, 유럽인들의 ‘원주민’ 학살 능력은 아직도 뻔한 한계를 보이곤 했다. 예컨대 1878년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 국가를 침략한 영국군은 1879년 1월22일 줄루군으로부터 불의의 공격을 당해 치욕스러운 일시적 패배를 당한 일도 있었다. 소총으로 무장한 줄루족이 그때의 ‘이산들르와나 대첩’에서 1천여 명의 손실만 보고 영국 군인 1329명을 사살하는 데 성공하는 등 영국의 침략을 잠시 저지할 수 있었다.

상황을 크게 바꾼 것은 1884년 맥심기관총의 등장이었다. 원주민이 당장에 구하기도, 모방해서 만들기도 어려운 이 도륙의 도구로 무장한 유럽인들은 이제야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하나의 큰 도살장으로 만드는 데 더 이상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1898년 9월2일, 동학도들의 후천개벽과 같은 천년왕국의 도래를 믿으며 유럽인 침략자의 축출을 지향한 아프리카 수단의 칼리파(교주이자 세속적 군주) 압둘라가 5만여 명을 이끌고 옴두르만에서 영국군과 교전했을 때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인들은 겨우 47명(!)의 사망자만 내면서 거의 1만 명의 수단 전사들을 도륙할 수 있었다. 1894년의 우금치 싸움과 마찬가지로, 1898년의 옴두르만 대첩은 19세기 말 ‘학살의 시대’의 상징이 됐다. 최첨단 소총과 야전 대포, 그리고 기관총이 지구를 호령하게 된 것이다.



헤레로족 섬멸한 독일 “그들은 인류 아니다”



세계체제 주변부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계화된 도륙에 대해서 그 ‘문명’을 자랑하는 중심부의 입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본의 신문이나 회고록 등을 보면, 동학당이 ‘대원군이 조종하는 광신적 무리’로 그려지고 이들을 탄압한 것은 오히려 조선 정부에 대한 ‘선의’로 해석되는 한편, 일본군 학살의 잔학성은 철저히 은폐된다. 반면 원주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때는, 제국주의 국가의 여론 주도자들은 단순한 은폐에 머무르지 않고 ‘그놈들을 모조리 죽여라’고 외치는 야만인으로 돌변하곤 했다.

인도에서의 세포이 항쟁 소식을 들은 영국의 위대한 문호이자 사형제 폐지론자(!)인 찰스 디킨스는 한 사신에서 “인도에서 군 총지휘관이 되어 인도인이라는 그 인종 자체를 지구상에서 모조리 지워버렸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하고, 그의 동료인 시인 마틴 터퍼(1810∼89)는 시에서까지 “그 종양을 칼로 베어 불로 태워버리고 그 반란 지역을 일체 파괴하고 모든 개 같은 토착민 하층들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뛰어난 시적인 어투로 주문했다.

유럽인에게 ‘감히’ 저항을 시도한 원주민의 종족 전체가 멸종당했을 때에도 구미권 사회의 주류는 박수로 응원하곤 했다. 예컨대 독일이 1884년에 강점한 아프리카 서남부 나미비아에서 독일인 이주민의 토지 약탈에 불만을 품은 헤레로족이 1904년 1월에 반란을 일으키자 독일군은 이 종족 전체에 대해서 ‘섬멸의 전쟁’을 선포했다. 모든 헤레로족 남성에 대해 반란 가담 여부와 무관하게 살육령이 내려졌고, 아이들도 같이 살육되는 한편, 살육을 면한 일부 젊은 여성들은 독일 이주민에게 성노예로 증여됐다. 그렇게 해서 헤레로족의 약 80%(6만 명 정도)가 섬멸되고 말았다.

20세기 최초의 ‘종족 섬멸’(제노사이드)인 이 사건에 대한 당대 독일 사회의 반응은? 자유주의적 경제학자인 모리츠 본이 “이와 같은 전쟁 방법들을 옹호할 경우에는, 종족 섬멸이 나중에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질 우려가 있다”고 부드럽게 지적한 것은 보기 드문 비판적 의견이었다. 나중에 히틀러 집권 시기에 망명의 길에 올라야 할 본은 인간 도살의 중심지가 된 유럽의 어두운 미래를 잘 예견했지만, 그의 말에서는 기관총 총탄의 빗발 속에서 쓰러지고 만 헤레로족에 대한 동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민간인 학살이 국제법에 어긋난다는 비판에 “헤레로족은 인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답하던 당시 독일에서는 베른슈타인(1850∼1932)과 같은 온건 사민주의자마저도 “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한다 해도 식민지 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미국을 인디언들에게 돌려주란 말이냐”라고 하는 등 원주민에 대한 끝없는 경멸과 공격성이 거의 ‘통념’이 되고 말았다.



‘학살의 시대’를 막 내리게 한 것은, 몇 안 되는 중심부 양심가들의 반대운동이라기보다는 주변부에서의 근대적 화기와 (많은 경우에서 사회주의와 뒤섞인) 민족주의 사상의 대중화였다. 1946년 2월18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영국령 인도 군함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 군함에 인도국민회의와 공산당의 당기를 게양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미 많은 손실을 본 영국 지배자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인도 독립에 대한 승인을 해주지 않을 경우, 저들의 승인도 없이 성공적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이 될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학살의 시대’를 종료케 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국의 패주였다. 아무리 학살을 저질러봐야 근대 무기와 민족주의화된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원주민에게 질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완패는 약 한 세기 동안 지속돼온 구미권의 ‘절대적 세계 제패’의 종료를 의미했다. 이를 아직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미국의 지배자들이- 이명박 정권의 한국으로부터까지 군사적 지원을 받으면서- 아프간에서 토착민의 저항을 꺾어 괴뢰정부를 공고화하려 하지만, 이 침략 역시 허사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근대적 무기 제작법을 익힌 주변부 민족주의자들의 승리는 ‘학살의 시대’를 끝냈지만, 저항적 민족주의가 경직된 억압적 지배담론으로 변신해 새로운 문제를 낳게 된다. 이 문제의 전형을, 조선왕조의 성리학을 많은 면에서 방불케 하는 ‘우리 식 사회주의’를 핵폭탄으로까지 사수하겠다는 북한의 사례에서 그대로 볼 수 있다. 전국의 요새화와 획일화, 수령주의와 ‘우리 민족 제일주의’ 등이 해방적 의미의 근대와 한참 사이가 멀다는 걸 세상이 다 알지만, 6·25 전쟁 때 이미 집단 도살 격인 ‘융단폭격’을 경험했으며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또다시 미군의 폭탄에 의해 ‘석기시대로 돌아가야’ 할 동북아의 최빈국에게 먼저 무장해제하라고 주문하기가 쉬운가?



아직 한반도 떠도는 ‘학살 시대’의 망령들



지난 ‘학살의 세기’의 주역인 미국과 같은 패권국가들이 먼저 침략전쟁에 대한 포기 선언을 해야 할 터인데, 며칠 전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필요하다”고 공언한 미 대통령 오바마의 발언으로 봐서는 그들도 한참 멀었다. ‘학살의 시대’ 망령들은 앞으로도 한반도를 계속 괴롭힐 모양이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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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1. <동학 농민봉기와 갑오경장> 유영익, 일조각, 1998, 60∼70쪽

2. <이단의 민중반란> 조경달 지음, 박맹수 옮김, 역사비평사, 2008, 297∼330쪽

3. <근대 이행기 민중운동의 사회사> 박찬승, 경인문화사, 2008, 197∼233쪽

4. <서울에 남겨둔 꿈> 한상일 옮김·해설,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3,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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