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마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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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 모양의 섬에 대한 내용은 군함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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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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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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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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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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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Iron and Steel, Shipbuilding and Coal Mining | |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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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造船、石炭産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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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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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tes de la révolution industrielle Meiji au Japon :
sidérurgie, construction navale et extraction houillère | |
국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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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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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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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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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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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섬의 전체 모습.
섬의 내부 모습.
(현재와 1958년경의 모습 비교)
행정구역상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구 다카시마 정)에 소속되어 있는 섬이다.[3]
나가사키 반도 옆의, 관광지로 유명한 다카시마 밑에 조그마한 섬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나카노시마(中ノ島) 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하시마(端島) 이다. 생긴 것 때문에 군함도(軍艦島, 군함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4] 1960년대까지 다카시마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치며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폐광 이후 주민들이 떠나서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1965년 7월 당시의 모습.
크기가 400m×140m에 면적은 6헥타르가 채 안 되는,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섬이지만 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전성기 때에는 헥타르당 무려 835명이라는 당시 도쿄 23구의 9배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인구밀도를 기록하기도 했다.[5]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어 석탄을 캐기도 했다. 그러나 석유 때문에 석탄이 도태되면서 1970년대 이후 에너지 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 1월 15일에 폐광되었다. 폐광 당시 2,000명으로 줄어있던 주민은 3개월 뒤인 4월 20일 모두 섬을 떠났다.
하지만 지금도 당시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있어 찾아가보면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수많은 건물들은 사람이 다 빠져나가고 섬 자체가 통째로 폐허가 되었다. 게다가 인구밀도가 워낙 높았던지라 오밀조밀 뭉친 건축물들은 구룡성채를 방불케 한다. 조그마한 섬 위에 고층건물, 그것도 폐허가 된 고층건물이 떠 있는 광경은 매우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폐광되고 난 뒤에도 섬의 소유권은 미쓰비시 마테리얼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1년에 지자체인 다카시마정에 무상 양도되었으며 지금은 나가사키현으로 편입되어 나가사키시의 시유지가 되었다. 건물이 노후화되어 폐허가 된 곳이 많아 섬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2005년 8월 23일 기자들에 한해 특별히 상륙이 허가되어 완전히 폐허가 된 섬 곳곳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어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이후 2008년에는 나가사키 시에서 조례가 제정되어 섬 남부에 정비된 견학통로에 한해 2009년 4월 22일부터 관광객의 상륙ㆍ견학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견학시설 이외의 섬 전체는 아직까지 출입금지구역이다. 출금 해제 한 달만에 4천5백명이 넘는 인원이 섬을 방문했으며, 1년만에 약 59,000명이 섬을 방문했다. 또한 상륙하는 데 있어서 바람이나 파도 등 기상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나가사키 시에서는 상륙 가능한 일수를 연간10일 정도로 예측하고 있다.
이 섬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5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역사스페셜에서 제대로 다룬 적이 있는데 군함도를 알고 싶다면 참고할 만한 가장 적절한 자료이다. 조금 부담이 적은 자료를 원한다면 같은 KBS의 역사저널 그날 80화에서 다룬 내용을 보는 것도 좋다.
책으로는 안재성의 <신불산:빨치산 구연산의 생애사>가 있다. 경상남도 지역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대원인 구연산이 어린 시절 모습으로, 군함도에 살았던 경험담이 잠시 언급된다. 구연산 자신은 광부인 아버지를 따라 군함도에 와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으로 광산에는 한 번도 안 가봤지만, 강제징용이 시작되기 전의 군함도 모습부터 나오는 진귀한 자료.
2016년 5월에는 작가 한수산의 2권짜리 소설 <군함도>가 나왔다. 같은 작가의 2003년에 나온 소설 <까마귀>[6]에서 군함도 관련 부분만 발췌해서 내용 보강한 소설이다. 15세에 군함도에 징용된 서정우나 조총련계 박민규 등에게 취재한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합중국 해군 잠수함이 이 섬을 진짜 군함인줄 알고 어뢰를 발사하기도 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는데 실은 1945년 6월 11일 잠수함 USS 티란테(USS Tirante, SS-420) 함이 군함섬 앞바다에서 석탄운반선 한 척을 격침한게 '군함섬을 진짜 군함으로 오인공격'했다는 얘기로 와전된 것이다. 하긴 섬 자체가 작고 섬 위의 건물이 군함 상부구조물을 연상케 하는데다 연기를 내뿜는 굴뚝까지 솟아 있으니 얼핏 실루엣만 보자면 군함이라 착각할 만하다. (일본어 위키 하시마 문서, 잠수함 티란테 문서)
메이지 유신 시대의 근대화의 산물로서 유네스코에 등록되었지만 정작 현재 하시마 섬 내의 메이지 시대 건축물은 다 무너져가는 3m 남짓의 제방 하나 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메이지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현재 기준으로 60년 정도 된 건물뿐이다.
2. 식민지인, 전쟁 포로 강제 징용[편집]
김형석 옹, 하시마 강제 징용 피해자[7]
"여기저기 비명소리가 난무했어, "아이고 배고파라, 쥐나서 못살겠다"
최창섭 옹, 하시마 강제 징용 피해자
태평양 전쟁 당시 많은 식민지 주민들과 전쟁 포로들이 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어 끌려왔다. 그 중 조선인은 징용 및 요시다합숙소 노동자가 도합 500~600명 정도였으며, 자의로 온 조선인 노동자가 추가적으로 80명 정도 있었다.
1986년 일본의 시민단체인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서 사료로서 제시한 화장매장인허증에 따르면 1925년~1945년 사이 하시마 탄광에서 총 1295명이 숨졌으며 이 중 조선인은 122명이었다.
섬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당시 조선인들은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지옥문'이라고 불렀으며 섬 자체도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게다가 이들이 받은 대우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 파도가 들이치는 바닷가 집에 강제로 살게 했는가 하면 햇빛도 안 들어오는 아파트 지하층에서 살게 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군함섬을 탈출하려고 시도한 조선인들이 여럿 있었으나 험한 파도에 휩쓸리거나 발각되어 총살당하는 경우가 거의 대다수였다고 한다. 기껏 파도를 헤치고 탈출에 성공해도 다다른 곳은 전시 상태의 일본 본토였다. 즉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다.
한 때 이 섬에 한글로 된 낙서가 있는 것이 알려지기도 했으나 [8]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처참한 학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징용이 본격화된 그 시기에는 한글과 한국어를 썼다는 까닭만으로 엄청난 처벌과 학대를 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를 미루어 생각해 보면 글로 남기지도 못할 학대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임은 틀림없다.
국가 차원에서의 배상 의무는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청구권이 청산되면서 사라졌으며 미쓰비시그룹 또한 청구권이 소멸한 상황에서 추가 배상을 진행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법적 상황이 다르다"라는 표현으로 애둘러 말하고 있다. 이 "법적 상황"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쓰비시그룹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나가사키 시는 군함섬의 가혹한 대접을 받은 조선인 징용자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 내 진보성향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고 있지만 소수의 목소리라서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없는 듯하다.
2015년 5월 초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 산하의 민간 자문기구인 국제 기념물 유적 협의회가 하시마 섬을 비롯, 일본 정부가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건설한 건축물 7곳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권고를 내리며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물론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의 상징인 만큼 문화, 역사 가치를 평가하자면 분명 유산으로 오를 만하지만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 사실은 쏙 빼고 유리한 설명만 남겨 놓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군함도는 메이지 시대의 것은 메이지 40년에 지어진 제방과 바닷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해저 탄광, 아마 섬 밑에 묻혀 있을 무언가들뿐이다. 군함도의 가이드가 소개하는 정작 중요한 건물 들은 쇼와 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는 식으로 사실상 메이지 시대의 것이 아니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1회, 링크)[9]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한 양자 협의를 일본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일본에서는 현재 응답이 없는 상태이다. 여러 한국 시민단체들과 일본 내 진보성향 단체들 또한 인권 탄압의 상징인 해당 시설물을 유산으로 등록하는 것은 인류 보편적 가치에 위배되지 않나 우려된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마리아 뵈머 독일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과 그 외 유네스코 회원국들에 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독일 언론에서도 '공포의 섬'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에 담긴 역사적 문제점을 다루었다.
특히 유네스코 측이 하시마 섬의 역사와 문화 가치에만 관심이 있지 한일관계나 일본 제국에는 전혀 무관심하기에 유네스코를 너무 압박하지 않는 선에서 한국 측의 주장을 어떻게 어필할지가 이번 논란 해결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시마 섬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일본이 하시마 섬을 소개할 때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건설한 섬이라는 걸 인정 및 명시하게 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많이 나오고 있다. 일본은 현재 하시마 섬의 건설 시기를 1850년~1910년, 즉 일제 강점기 이전으로 기재하여 조선인 징용 논란을 피해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하시마 섬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처럼 부정적 세계문화유산(Negative World Heritage)으로 등재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은 조선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을 하긴 했지만 강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고 우기며 산업발달이라는 허울 좋은 상징으로 내세우려 하기 때문에 사실상 각국간의 의견 충돌을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에 유네스코에서 협의를 할 시간을 주겠다며 시간을 미뤘다. 이전까지는 만장일치를 통해 문화유산을 등재했는데 한국 등의 일부 국가가 거세게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라 의견 조율을 위한 시간을 준 것이다. 아무래도 유네스코는 국가와 국가가 충돌하면서까지 등재를 하는 이례적인 행동은 피하고 싶은 듯하다.
한국인들이 본인의사에 반하여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노역을 당해왔던 사실을 문화유산에 기재하도록 합의했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아우슈비츠처럼 안 좋은 문화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차선책을 선택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대놓고 감금시설이기 때문에 네거티브로밖에 홍보할 수 없지만 하시마 섬 같은 경우는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정확하지 않은 모호한 서술로 좋은 면만 극대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설령 합의에선 강제징용을 인정하더라도 일본자국에서는 그 항목을 축소, 은폐하여 홍보수단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높기에 앞으로 상황을 우려하며 지켜봐야 할 듯하다. 그리고 2015년 7월 5일 끝내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역 등을 인정하면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애초부터 강제노동이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각국의 언론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과 일본이 맺은 타결협상안을 보면 강제노동이라는 말을 대놓고 사용하지 않았으나 강제노역이 포함된 사실을(were brought against their will and forced to work under harsh conditions[번역]) 수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강제노역을 시킨 주체를 누구인지는 표기하진 않았으며 그 주체가 당시 일본 정부에 있다고는 볼 수 있다고는 하나 확정 표기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협상안에서는 역사는 인정하되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하여 피해자의 배상은 관련없이 타결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여러모로 강제성이 거의 없다시피한 타결이라 후에 일본이 태도에 변화를 주더라도 유네스코의 이행권고만 있을 뿐 강제성이 없기에 계속된 감시와 관심이 필요할 듯 했었다.
결국 등재결정이 내려지자 마자 일 외무상의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식의 발언을(결정이 난 직후 바로 기자들에게 발언한 내용이다.) 시작으로 일본 번역문에서는 표현수준을 완화하는 등, 여러가지로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일본에 오랫동안 산 외국인들(교수 포함)도 forced to work는 강제 노동이 맞으며 forced to labor와 거의 뜻이 다르지 않다며 반박했다.(참고) 사실 영문 표현 자체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강제노동 여부를 못 박고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행동은 국내 여론몰이용 헛소리라고 볼 수 있다. 이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다르게 해석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기 때문에 당장 일본 우익들 사이에서 강력한 반발이 일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기사[11] 또한 일본 정부는 ‘인포메이션센터, 정보센터 등 피해자를 기리는 시설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이를 점검할 몇 가지 국제기구의 체계가 있다고 한다. 아마 강제성은 없는 듯하지만 약속을 한 뒤에 대놓고 쌩까면 그건 그것 대로 일본의 나라망신이다.
그러나 유네스코가 하시마 섬의 건축 기술성을 높이 사서 세계유산 등재 기준 2번과 4번을 적용시키는 등(아우슈비츠처럼 안 좋은 뜻을 지닌 유산으로 지정되었다면 6번 또한 적용시켰어야 한다.)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되어 잔혹하게 죽은 아픈 역사의 장보다는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의 놀라운 결과물이라는 좋은 이미지가 대체로 더 세기에 한국인들에게는 씁쓸하고 찝찝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결국 국제 사회에서 힘없는 건 죄라는 사실만 또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더군다나 문화유산 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일본 당국이 조선인 징용 사실을 얼마나 잘 알릴지도 의문. 물론 위에 서술했듯 피해자를 기리고 알리는 시설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런 시설들을 얼마나 많이 설치할지와 더불어 방문객들에게 얼마나 자세하게 설명할지는 불분명하다.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당시 하하가 하시마 섬을 방문하였으나 가이드는 강제징용에 관한 언급은 아예 하지도 않고 자랑거리만 잔뜩 늘어놓는 데다가 심지어 관광코스도 근대화가 이루어진 코스로만 이루어져 있고 강제징용 장소는 아예 소개에서 제외되어있다. 다만 관광 코스가 근대화된 장소로 짜여진 까닭은 안전문제 때문이다. 섬 자체가 버려진 지 오래되고 시설이 낙후된 데다가 현재도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시설이 많아서 붕괴위험이 전혀 없는 안전한 장소로 코스를 짜는 것 자체는 당연한 일. 물론 안전 문제가 아니라도 강제징용에 대한 언급조차 삼가고 있는 하시마 섬 측이 강제징용 시설 쪽으로 코스를 짤지는 미지수다. 당연히도 공양탑은 전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길은 수풀로 가득차 있어 어떤 길이 맞는지도 구별하기 힘들었던 상태이다. 그 후 네티즌들이 길을 만들었지만 일본 측에서 위험 표시를 쳐 놓고 강제 폐쇄했다.
2014년 7월 세종대학교의 박유하 교수가 하시마 섬은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들어진 데다가 당시 노동자 착취는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닌데 한국이 직접적인 관계를 주장해야 하는가,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아래 일본이 주장하는 바에 서술되어 있는 진술을 보면 대충 어떤 근거에 기반한 주장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2016년 7월 군함도 관광에 관한 보고기사가 연합뉴스에 게재되었다.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조선/중국인 징용노동자에 대한 명시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등재 1년 전인 2015년 7월 당시 외교부는 외교부 “日 조선인 강제노역 인정, 우리 외교의 중요한 성과” 자축까지 했던 상황이었다. 르포 내용은 군함도에 대한 일본 산업혁명에 대한 소개와 당시 최신식 콘크리트 건물에 대한 부분이었고 징용에 대한 사실은 알기 힘들다고 게재하였다.
2017년에 군함도 정보센터를 도쿄에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유네스코에 제출했다. 10월 6일 일본 정부가 이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동영상이 완벽하게 틀린 것은 아닌데 문제는 이 동영상이 다루고 있는 증언들은 전부 이 문서에서 후술되듯 아직 대우가 좋던 태평양 전선 초기 이전까지에만 해당되던 사항이고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이후의 상황은 쏙 빼놓고 이야기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때 살던 주민들이 미쳤다고 자신들이 한 사실을 대놓고 말할 리가 없다. 더해서 그 증언이라는 것들도 "누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요, 아마 ~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추측성 어미를 쓰는 증언도 다수이다.[12] 이외에도 "조선인들이고 뭐고 원래 사망할 경우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다가 두는 게 원칙이었다"라는 식의 원론적인 소리만 포착하는 취재 동영상이 있다.(이 동영상을 게시한 유튜브 계정을 보면 그런 취재 동영상이 있다.)
결국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2018년 6월 27일(현지시간) 3년 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하시마<端島>) 등 일본 산업시설에서 이뤄진 한국인 등의 강제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릴 것을 일본에 재차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유네스코 결정문 채택…"日, 군함도 전체역사 알려야"(종합2보)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록 당시 일본이 강제징용에 대한 내용을 명시할 것을 조건으로 등록되었으나, 일본이 이를 지키지 않아 2018년 6월 세계 유산 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이를 지적하였고, 유네스코에서는 일본이 강제징용 명시에 관련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며 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하시마 섬 강제징용 이행 보고서가 2019년 12월에 제출될 예정이며, 2020년에 유네스코 위원회에서 검토될 예정이라고 한다. #
2.1. 생활[편집]
태평양 전쟁 이전에는 광부의 강제 모집은 없었고 위험한건 매한가지였지만 조건은 그렇게 막장까지는 아니였다.
조선인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가족단위로 이주하여, 사택을 배정 받고 아이들은 일본인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사택이란 일본에서 자랑하는 최초의 근대식 아파트이다. 무한도전에서 유재석과 하하가 이 섬에 상륙할 때 안내원이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급격한 비탈에 집을 연이어 붙인것과 같은 매우 조악한 구조라고 한다. 특히 채광이 안되어 문을 닫으면 빛이 전혀 안들어 왔다고. 학교의 경우 <신불산>의 주인공 구연철은 40명 학급에 조선인 학생은 3명 있었다고 한다.) 이 때의 광부들은 주로 일본인들이였고 그 다음이 오키나와인(류큐인)들이였다.
물론 매우 위험한 환경이었다는 점은 시기를 가리지 않고 동일하다. 갱도에서는 끊임없이 붕괴며 가스누출과 출수사고가 터져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시신은 나카시마 섬으로 옮겨져 화장되기를 반복하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위험수당을 원하는 사람들이 자진해서 들어오는 환경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하시마 섬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여타 업종 종사자에 비해 상당한 수입을 올렸는데, 숙련 광부는 교사나 면서기 등 전문직을 상회하는 최고 180원이라는 거금을 받았다. 게다가 군함도에서는 돈을 쓸 곳이 없어 돈이 모일 수 밖에 없는 구조였으니 일만 하면서 가족에게 돈을 송금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결국 생계가 막막한 가장들이 이곳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태평양 전선이 개전되자 경기가 더욱 좋아졌고 배급제로 바뀌었지만 일본군이 남태평양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매일 보급선을 통해 파인애플이나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전선이 넓어짐에 따라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1943년에는 열대 과일은 커녕 일본에서 생산되는 귤도 보기 힘들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안 좋아졌다. 쌀 대신 콩깻묵을 먹어야 했는데 이건 식민지인 만주에서 생산한 콩을 군수용 기름으로 짜고 남은 찌꺼기였다. 그마저도 썩고 곰팡이가 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전쟁 중기 젊은 일본인이 징집되어 광부가 될 사람이 부족해지자 조선인을 비롯한 식민지 사람들을 차출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인들이 사는 사택과 학교 사이에 위치한 합숙소에서 생활하였다. 이 합숙소는 현재 한국군의 내무반과 동일한 구조인데 한국군이 이를 벤치마킹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른 멀쩡한 곳 놔두고 여길 왜 벤치마킹 하겠냐
일본인 감독은 이들을 짐승처럼 취급하였는데 몸이 아파 일을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릎꿇려 앉혀 놓고 가죽혁대로 후려치는등 처참한 대우였다. 전쟁 말기에는 조선인들마저 징집으로 차출되자 이번에는 전쟁포로를 만주에서 끌고왔다. 효과적으로 분할통치하기 위해 내지인을 1등국민, 외지인을 2등국민, 중국인 등 전쟁포로를 3등국민으로 대우하였다. 오키나와의 경우 외지인보다는 낫지만 내지인과의 차별이 존재하던 1.5등국민으로 볼 수 있겠다.
이들은 가장 위험한 곳에 투입되었다. 끊임없이 파고 내려간 갱도는 지하 1,000m에 달했으며 그 마저도 좁은 터라 기어들어가야할 정도였다. 이곳 지하에 매장된 석탄은 품질이 꽤 좋았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지하로 파고 들어 경사가 60도 쯤으로 상당히 가팔랐다. 초기에는 근로자들의 안전을 생각한답시고 8시간 3교대 근무제였지만 전쟁이 본격화되고 미국과의 전쟁이 장기화 되자 군수공장을 돌릴 석탄이 부족해져 규정상으로는 결국 12시간 이상을 노역하게 되는데 심할 때는 16시간 이상씩 투입되기도 했다. 안전 대책을 강구할 리 없으므로 죽어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무너지는 것 외에도 가스가 차고, 해저 탄광이라 습도도 엄청 높았으며 해수로 인한 염분이 있는 지하수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지급된 것은 헬멧과 고무줄, 속옷, 주먹밥 뿐이었다. 고무줄은 가파른 경사에 떨어지지 않게 서로를 묶는 용도로 쓰였다. 주먹밥은 콩깻묵을 섞었는데 이는 콩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로 보통 비료로 사용할 만큼 저급한 음식이었다. 위험한 갱내 작업은 수용자들을 우선 투입하여 막바지에는 90%에 이르렀으며 그 수는 800여명에 달했다. 더군다나 나이 어린 12세~15세 어린이들은 개미굴이란 갱내 깊은 곳에 들어가 그곳에서 16시간 이상씩 작업하게 했다.
군함도에서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 따위는 없었다. 못쓰는 가마니짝 따위로 대충 덮어 거룻배에 싣고 가 나카시마 섬에서 기름을 부어 대충 태웠다. 사람 태우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전쟁 전만 해도 나카시마 화장장에서 연기가 안나는 날이 있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온종일 검은 연기가 피어 올라왔다.
일부 식민지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조건에 탈출을 시도하였다. 10km정도 헤엄치면 구마모토현이 있어서 이쪽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중노동으로 몸이 워낙 쇠약해져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해쳐나갈 재간이 없었다. 대부분이 도중에 건너가 익사하였고, 간신히 육지로 도착하면 거긴 자유의 땅이 아닌 일본의 본토였다. 즉시 잡혀서 돌아오게 되었다. 나가사키 주민들은 그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울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그러던 와중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경 채광이 안되어 항상 컴컴했던 사택 집안이 갑자기 훤해졌다. 폭음도 없고 미군기가 날아가는 소리나 사이렌도 없었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일이냐고 어리둥절 하였다.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일본인 감독과 관리직들이 모조리 사라졌다.(8월 18일). 사무실은 서류를 태우거나 가져가 텅텅 비었고, 탄광 입구는 폐쇄되었다. 심지어 일본인 광부들까지 없어졌다. 그제야 조선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전쟁이 끝났다. 집에 갈 수 있다."
모두가 곧바로 해방의 기쁨을 누린 것은 아니고, 일부는 나가사키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다. 원자폭탄으로 인해 방사능이 넘쳐나는 곳에서 잔해와 시체를 치우는 일을 반복하였다. 강제 노역의 대가는 여러 명목으로 보수를 제하여 그들에게 쥐어진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여하튼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사라져버린 이 섬에서 너도나도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선착장 동굴 입구에 붙어 있던 영광의 문이라는 현판은 사라지고 대신 지옥의 문이라고 힘차게 휘갈겨 쓴 현판이 붙어 있었다.
조금 이상한 것은 일본인이 없어진 그 다음날 천여명의 중국인 노동자들도 사라졌다는 조선인들의 증언이다. 설명했듯 노동자들이 자력으로 탈출하기 불가능한 환경이고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본토로 데려가면서 조선인은 두고 갔을 리가 없는 상황. 군함도 등재 당시 중국이 조용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이 당시 중국인 대량 학살이 발생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기 어렵다. 일부에서는 갱도에 몰아넣고 입구를 폭파했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근거는 없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라 군함도에 남은 것은 조선인과 오키나와인들뿐이었다. 원폭 맞은 나가사키시 일대에는 이삼십명을 태울만한 배 한척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큰 배가 없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였다. 일제는 귀국길에 오른 조선인들의 배를 고의로 침몰시키곤 했는데 군함도에서 일본 본토로 이동할 대형배가 없는 덕분인지 조선인들은 덕분에 몇 명씩 작은 배로 육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13] 이에 조선인들은 개별적으로 섬에서 나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 갈수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인들을 위해 일본 전역에서 일하고 있는 식민지 탄광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하고 계속 탄을 캐내라는 지시를 점령군 최고사령관령으로 내렸다. 그나마 군함도에서는 일본인들이 죄다 도망가는 바람에 이러한 명령이 수행되지 않았다. 해방되었는데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해말까지 계속 막장에서 죽어나던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다.
조선인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가족단위로 이주하여, 사택을 배정 받고 아이들은 일본인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사택이란 일본에서 자랑하는 최초의 근대식 아파트이다. 무한도전에서 유재석과 하하가 이 섬에 상륙할 때 안내원이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급격한 비탈에 집을 연이어 붙인것과 같은 매우 조악한 구조라고 한다. 특히 채광이 안되어 문을 닫으면 빛이 전혀 안들어 왔다고. 학교의 경우 <신불산>의 주인공 구연철은 40명 학급에 조선인 학생은 3명 있었다고 한다.) 이 때의 광부들은 주로 일본인들이였고 그 다음이 오키나와인(류큐인)들이였다.
물론 매우 위험한 환경이었다는 점은 시기를 가리지 않고 동일하다. 갱도에서는 끊임없이 붕괴며 가스누출과 출수사고가 터져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시신은 나카시마 섬으로 옮겨져 화장되기를 반복하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위험수당을 원하는 사람들이 자진해서 들어오는 환경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하시마 섬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여타 업종 종사자에 비해 상당한 수입을 올렸는데, 숙련 광부는 교사나 면서기 등 전문직을 상회하는 최고 180원이라는 거금을 받았다. 게다가 군함도에서는 돈을 쓸 곳이 없어 돈이 모일 수 밖에 없는 구조였으니 일만 하면서 가족에게 돈을 송금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결국 생계가 막막한 가장들이 이곳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태평양 전선이 개전되자 경기가 더욱 좋아졌고 배급제로 바뀌었지만 일본군이 남태평양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매일 보급선을 통해 파인애플이나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전선이 넓어짐에 따라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1943년에는 열대 과일은 커녕 일본에서 생산되는 귤도 보기 힘들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안 좋아졌다. 쌀 대신 콩깻묵을 먹어야 했는데 이건 식민지인 만주에서 생산한 콩을 군수용 기름으로 짜고 남은 찌꺼기였다. 그마저도 썩고 곰팡이가 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전쟁 중기 젊은 일본인이 징집되어 광부가 될 사람이 부족해지자 조선인을 비롯한 식민지 사람들을 차출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인들이 사는 사택과 학교 사이에 위치한 합숙소에서 생활하였다. 이 합숙소는 현재 한국군의 내무반과 동일한 구조인데 한국군이 이를 벤치마킹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본인 감독은 이들을 짐승처럼 취급하였는데 몸이 아파 일을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릎꿇려 앉혀 놓고 가죽혁대로 후려치는등 처참한 대우였다. 전쟁 말기에는 조선인들마저 징집으로 차출되자 이번에는 전쟁포로를 만주에서 끌고왔다. 효과적으로 분할통치하기 위해 내지인을 1등국민, 외지인을 2등국민, 중국인 등 전쟁포로를 3등국민으로 대우하였다. 오키나와의 경우 외지인보다는 낫지만 내지인과의 차별이 존재하던 1.5등국민으로 볼 수 있겠다.
이들은 가장 위험한 곳에 투입되었다. 끊임없이 파고 내려간 갱도는 지하 1,000m에 달했으며 그 마저도 좁은 터라 기어들어가야할 정도였다. 이곳 지하에 매장된 석탄은 품질이 꽤 좋았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지하로 파고 들어 경사가 60도 쯤으로 상당히 가팔랐다. 초기에는 근로자들의 안전을 생각한답시고 8시간 3교대 근무제였지만 전쟁이 본격화되고 미국과의 전쟁이 장기화 되자 군수공장을 돌릴 석탄이 부족해져 규정상으로는 결국 12시간 이상을 노역하게 되는데 심할 때는 16시간 이상씩 투입되기도 했다. 안전 대책을 강구할 리 없으므로 죽어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무너지는 것 외에도 가스가 차고, 해저 탄광이라 습도도 엄청 높았으며 해수로 인한 염분이 있는 지하수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지급된 것은 헬멧과 고무줄, 속옷, 주먹밥 뿐이었다. 고무줄은 가파른 경사에 떨어지지 않게 서로를 묶는 용도로 쓰였다. 주먹밥은 콩깻묵을 섞었는데 이는 콩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로 보통 비료로 사용할 만큼 저급한 음식이었다. 위험한 갱내 작업은 수용자들을 우선 투입하여 막바지에는 90%에 이르렀으며 그 수는 800여명에 달했다. 더군다나 나이 어린 12세~15세 어린이들은 개미굴이란 갱내 깊은 곳에 들어가 그곳에서 16시간 이상씩 작업하게 했다.
군함도에서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 따위는 없었다. 못쓰는 가마니짝 따위로 대충 덮어 거룻배에 싣고 가 나카시마 섬에서 기름을 부어 대충 태웠다. 사람 태우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전쟁 전만 해도 나카시마 화장장에서 연기가 안나는 날이 있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온종일 검은 연기가 피어 올라왔다.
일부 식민지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조건에 탈출을 시도하였다. 10km정도 헤엄치면 구마모토현이 있어서 이쪽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중노동으로 몸이 워낙 쇠약해져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해쳐나갈 재간이 없었다. 대부분이 도중에 건너가 익사하였고, 간신히 육지로 도착하면 거긴 자유의 땅이 아닌 일본의 본토였다. 즉시 잡혀서 돌아오게 되었다. 나가사키 주민들은 그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울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그러던 와중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경 채광이 안되어 항상 컴컴했던 사택 집안이 갑자기 훤해졌다. 폭음도 없고 미군기가 날아가는 소리나 사이렌도 없었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일이냐고 어리둥절 하였다.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일본인 감독과 관리직들이 모조리 사라졌다.(8월 18일). 사무실은 서류를 태우거나 가져가 텅텅 비었고, 탄광 입구는 폐쇄되었다. 심지어 일본인 광부들까지 없어졌다. 그제야 조선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전쟁이 끝났다. 집에 갈 수 있다."
모두가 곧바로 해방의 기쁨을 누린 것은 아니고, 일부는 나가사키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다. 원자폭탄으로 인해 방사능이 넘쳐나는 곳에서 잔해와 시체를 치우는 일을 반복하였다. 강제 노역의 대가는 여러 명목으로 보수를 제하여 그들에게 쥐어진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여하튼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사라져버린 이 섬에서 너도나도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선착장 동굴 입구에 붙어 있던 영광의 문이라는 현판은 사라지고 대신 지옥의 문이라고 힘차게 휘갈겨 쓴 현판이 붙어 있었다.
조금 이상한 것은 일본인이 없어진 그 다음날 천여명의 중국인 노동자들도 사라졌다는 조선인들의 증언이다. 설명했듯 노동자들이 자력으로 탈출하기 불가능한 환경이고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본토로 데려가면서 조선인은 두고 갔을 리가 없는 상황. 군함도 등재 당시 중국이 조용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이 당시 중국인 대량 학살이 발생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기 어렵다. 일부에서는 갱도에 몰아넣고 입구를 폭파했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근거는 없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라 군함도에 남은 것은 조선인과 오키나와인들뿐이었다. 원폭 맞은 나가사키시 일대에는 이삼십명을 태울만한 배 한척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큰 배가 없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였다. 일제는 귀국길에 오른 조선인들의 배를 고의로 침몰시키곤 했는데 군함도에서 일본 본토로 이동할 대형배가 없는 덕분인지 조선인들은 덕분에 몇 명씩 작은 배로 육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13] 이에 조선인들은 개별적으로 섬에서 나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 갈수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인들을 위해 일본 전역에서 일하고 있는 식민지 탄광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하고 계속 탄을 캐내라는 지시를 점령군 최고사령관령으로 내렸다. 그나마 군함도에서는 일본인들이 죄다 도망가는 바람에 이러한 명령이 수행되지 않았다. 해방되었는데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해말까지 계속 막장에서 죽어나던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다.
3. 기타[편집]
<자막>나가사키 현 하시마 섬
<내레이션> 섬은 보물섬이었다. 석탄이 발견되어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이 일했다. 둘레 1.2km의 섬이 마을이 되었다. 4,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났다. 크게 자랐다. 1년, 10년, 30년, 석탄을 다 파자 사람들이 없어졌다. 집도 없어졌다. 자원과 함께 섬도 죽었다. 84년만의 일이었다. 우리들도 지금 자원이 없는 섬, 일본에 살고 있다.
<자막> 언제나 생각하고 싶은 우리들의 자원 - 공공광고기구
- 강철의 라인배럴에서 카토 기관의 비밀 기지가 이곳에 있다.
- 이 섬에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BMS의 곡인 End Time이란 곡도 있다(곡의 장르명도 레퀴엠 트랜스이고 BGA는 하시마 섬의 폐허의 사진이다).
7년 뒤에 나올 핵쓰레기 BGA는 부끄러운줄 알아야 된다. - 기시 유스케의 소설인 '다크 존'도 이 섬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 2012년 11월 11일 언론 보도에 의하면 세계 7대 괴기 장소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나무위키에 작성된 다른 장소로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놀이공원, 일본 후지산의 아오키가하라(주카이 숲)와 대한민국의 곤지암 남양정신병원이 있다.
- 라이트 노벨 어느 비공사에 대한 야상곡에서 이를 통째로 카피한 듯한 섬인 '전함도'가 언급된다. '야상곡' 편의 주인공와 히로인이 이 섬 출신.
- 진격의 거인 실사영화의 촬영지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주제곡의 뮤직비디오를 이곳에서 촬영했다.
- 인류 멸망 그 후 다큐멘터리에도 인간이 떠난 도시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실례로 등장한다.
- 2015년 6월 28일 역사저널 그날 80회에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 사망한 강제징용자의 기록을 다카시마 섬에 있는 공양탑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서 기록을 태워 버렸다고 한다(...)
- 포켓몬스터 오메가루비/알파사파이어에 나오는 씨보라의 모티브도 하시마 섬으로 추정된다. 지리적인 위치도 비슷하고,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다만 한국 판매를 의식해서인지 강제징용부분우 안 나왔다.
- 괴짜가족 25권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한 컷 등장한다.
- 마이트 앤 매직 히어로즈 6탄의 생츄어리 타운 나가족의 거주지로써 하시마 섬이 나온다. 이리나 그리핀은 여기에 망명 후 울프 공작의 목을 치기 위한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한다.
- 일본 순정만화 언니의 결혼 에서 중요한 매개체로 다루어진다. 도쿄에서 고향 나가사키로 귀향한 도서관 사서인 주인공이 지역의 문화재로서 애정을 가지고 전국에 홍보하는 곳으로 하시마섬이 등장한다. 모두가 떠나버린 무인도 외딴섬에 감정 이입을 하는 모습이 무척 감수성 돋게 연출되지만 당연히도 조선의 강제징용 및 태평양전쟁의 병참으로서의 역사는 언급되지않는다.
- netflix오리지널 다크 투어리스트:어둠을 찿아가는 사람들 2편 일본편 마지막에 소개가 된다. 일본 최초의 아파트였다는것과 아래 광산이 있다는거만 소개를 하고 과거 거주자의 생활위주로 소개가 된다. 조선의 강제징용 및 태평양전쟁의 병참으로서의 역사는 언급되지않는다.
4. 관련 문서[편집]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외래어 표기법 제3절: 바다, 섬, 강, 산 등의 표기 원칙'에 의해 '시마'라는 낱말이 한국에서 섬이라는 뜻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해당 명칭이 섬의 이름임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섬'이라는 명칭을 보충해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하시마라고 해봐야 한국인들은 한 번에 듣고 그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굳이 섬이라고 한번 더 불러준다는 말이다. (겹말의 3번 항목 참조)[4] 군함도라는 별명은 일본 쪽에서 붙인 것이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폐기된 카가급 전함 2번함 토사의 미완성된 모습과 실루엣이 비슷하다고 하여 이런 별명이 붙여진 것.[5] 세계 최대 인구 밀도를 가진 곳은 그 유명한 구룡성채지만 애초에 그 둘을 비교할 수가 없는지라…[6]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까마귀에게 하듯 돌팔매질을 했다고 해서 징용공을 까마귀로 치환해 붙인 제목. 이런 육시할 놈들[7] 김형석 옹은 2018년 기준으로 98세며 강제 징용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탄가루가 눈에 들어가 시력을 잃었고 몸을 혹사시켜 영구장애가 되었다. JTBC의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라는 프로그램에서 군함도 세계유산등재 시민모임의 관계자에게 이 사람의 증언을 들려주자 낄낄 웃으며 "거짓말 하면 그만이다"라고 개소리를 지껄이고, 증언이 아닌 증거를 가져오라며 비꼬았지만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일본 정부의 공식 강제징용 인증서를 보여주자 그 관계자는 데꿀멍하고 이 문제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대화를 끝냈다. 그리고 앵커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라는 일침에 침묵으로 일관했다.[8] 북한 영화 을사년의 매국노[9] 사실 일본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시절 다른 나라를 침탈했던 대다수 나라들의 몇몇 근대유산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전쟁과 연관된 세계유산 대부분이 그렇듯 지배국과 피지배국의 처지가 갈리는 것. 대표 예시가 바로 레오폴드 2세 시절에 지어진 벨기에의 여러 근대 유산들이다.[번역] 의지에 반하여 끌려왔으며 가혹한 조건 하에 일하는 것이 강제되었다.[11] 링크가 없어져서 wayback에 백업된 페이지로 대체하였다.[12] 당연하지만 이는 자신의 경험과 상식에만 의존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거나 거짓말이거나 둘 중에 하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일본 정부와 사회의 조직적인 은폐 정도를 볼 때 아마 전자로 추정된다.[13] 이상의 내용은 안재성의 <신불산: 빨치산 구연산의 생애사>에서 발췌하였다. 구연산은 전쟁전에 군함도로 간 광부의 아들이었다.[14] 유아용 비스킷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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