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연구 제34호 한국종교학연구회, 2016, pp. 91-114.
‘대한승공경신연합회’의 사상과 실천
: 민족종교로의 지향성을 중심으로
신자토 요시노부(新里 喜宣)*1)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
目 次
1. 서론
2. 대한승공경신연합회와 경신회보
3. 극복대상인 ‘미신’과 ‘무속인’
4. 민족종교로의 지향성
5. 결론
---------------------------
1. 서론
본고는 ‘대한승공경신연합회’(현 대한경신연합회, 이하 ‘경신회’로
함)를 대상으로 하여, 이 단체의 사상과 실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경신회는 1970년대에 설립된 단체로서, 현재 수많은 무속 단체들 가운데 그 효시로서의 역할을 지녀왔다. 물론 그전에도 일제 시대에 는 ‘숭신인조합’, 해방 후에는 ‘대한정도회’와 같이 무속인들이 모여 설립된 단체는 있었다. 그러나 경신회는 그 사상과 실천의 면에서
이전 단체들과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으나, 경신회는 무속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려 꾸준히 노력해 왔으며, 어찌 보면 그들의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 다. ) 뿐만 아니라 경신회는 88년에는 ‘천우교’(天宇敎)라는 종교 단 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에는 무속이 정당한 종교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열렬한 바람이 함의되어 있었다. 경신회의 이러한 실천은 무 속인 개인의 차원으로는 실행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즉, 경신회는 단체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시대에 대응하려 했다는 점에 그 특 징이 있으며, 이것이 본고에서 경신회에 주목하려는 첫째 이유이다.
경신회를 살피려는 둘째 이유로서, 경신회에 주목함으로써 무속인 들의 시대인식과 실천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음을 들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무속 단체 또한 무속 학원이 많이 생겼으며, 이는 인터넷이 발달되어 사람들의 일상에서 온라인 공간이 보급되어가는 가운데 무속인들이 벌인 대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혹은 이러한 움 직임은 무속인이 시대에 대응하여 무속의 가치를 알리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무속은 시대적 및 사회적 상황에 대해 수 동적으로만 있는 존재가 아니며, 그들은 나름대로의 대응 방식으로 시대에 응하려 해왔다. 그 중에서 무속 단체로서 경신회는 무속인들 의 자율적 대응의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사상과 실천 을 알아보는 것은 무속의 시대인식과 대응을 살피는 데 유익한 시각 을 열어준다.
시대적 상황에 대해 무속인들이 벌인 활동에 대한 선행연구로서, 무속인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거나 독특한 방식으로 무업을 행하 는 모습을 추적해온 김동규의 연구, 혹은 앞에서 지적한 인터넷 공 간을 이용하거나 무속 학교를 운영하는 무속 단체를 살핀 홍태한의 연구가 있다. ) 이들의 연구는 모두 현대사회에서 무속이 보여주는 생생한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해방 후의 무 속 단체로서 제일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경신회를 체계적으로 밝힌 연구는 아직 없다. 경신회에 대한 학술 연구로는 김태곤에 의한 보 고가 있으며, ) 그 외에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에서 충청남도 ), 충청북도 ), 강원도 ), 경기도 ) 편에서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은 모두 기본적 정보를 제공할 뿐 경신회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연구 가 요구되고 있다. 본고는 경신회에 관한 이러한 틈을 채우려는 의 도도 가진다.
뒤에서는 경신회가 1982년부터 88년에 걸쳐 간행한 경신회보 (대한승공경신연합회 편집부)를 중심으로 무속인들의 사상과 실천의 구체적 모습을 살펴본다. 경신회는 이 외에도 91년부터 한국민속신 문(한국민속신문사)을 간행해왔으나, 한국민속신문에 비해 경신 회보가 보다 경신회의 내부적 의견을 풍부히 담고 있다는 점에 주 목하려 한다. 또한 경신회보와 더불어, 경신회 설립에 깊이 관여 한 최남억의 자취를 기록한 한국무교: 최남억 회장과 대한승공경신 연합회 30년 발자취(장호근 지음, 출판시대, 2000)도 경신회의 사 상과 실천을 읽어내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므로 적절히 참조 하도록 한다.
본고는 경신회보를 통해서 무속인들이 1980년대까지의 사회적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시대인식을 바탕으로 어떠한 대응을 보였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고는 무속 인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려고 하였던 동기와 그들의 목표 사항을 밝 히려 한다. 단체 설립의 동기와 목표 사항이 경신회의 핵심을 이룬 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점을 토대로 뒤에서 전개하는 논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2장은 경신회에 관한 기본적 정보를 정리 하여 경신회보에 주목하는 이유를 확인한다. 이어서 3장에서는 조 직을 만들어 무속인들이 뭉치고 단합해야 했던 배경, 즉 단체 설립 의 동기를 ‘미신’과 ‘무속인’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낸다. 4장은 무속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바꾸려고 경신회가 벌인 활동과 실천을 추적 하는 작업이 된다. 이때 부각되는 것이 천우교의 창교이다. 경신회 의 사상과 실천은 한 마디로 무속을 미신으로 보는 시각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민족종교’로 승화시키려 했던 점에 있다. 이것이 바로 무 속 단체로서 경신회가 가졌던 특징이다. 결론에서 언급하겠으나, 본 고의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무교’(巫敎) 담론이 지니 는 의미를 밝히는 데도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2. 대한승공경신연합회와 경신회보
경신회는 무속인들이 모여 1971년 1월 6일에 설립된 단체(문공부 등록 제273호)다. 서울의 중앙본부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지회와 지부를 두었으며, 83년의 단계로 지부수가 173 개, 회원수가 41,481 명이었다. ) 경신회는 주로 70년대 및 80년대의 체제에 영합 한 단체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 그들의 기관지를 살펴보면 그 대부 분이 유신체제 또한 전두환 정권에 의한 사회정화 정책을 무조건 긍 정하는 내용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으나, 경신회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참조하는 자 료는 경신회보이다. 이 잡지는 전국에 있는 회원에게 보내어 당시 한국을 둘러싼 국제적 정세나 국가의 기본자세, 또한 무속의 종교적 세계에 관한 설명이나 단체의 활동 상황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경신회보에 의하면 경신회의 목적과 사업은 다음과 같다.
목적: 반공정신에 입각 문화선전 계몽을 통해 승공태세를 확립. 유언 비어 봉쇄, 확고한 국가관 확립.
사업: (목적 달성을 위하여)
가. 반공사상 앙양을 위한 선도 계몽 사업.
나. 출판물 발간에 의한 문화 사업.
다. 회원 상호 간 유대 강화 및 복지 사업 촉진.
라. 기타 목적 달성을 위한 제 사업.10)
목적에 명시되어 있듯이 경신회의 핵심적 주제는 반공이었다. 이 는 무속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이 매우 어려운 것이기에 국가적 가치 관에 영합하여 살아남으려는 그들 나름대로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또한 최남억의 존재도 경신회의 강력한 반공정신에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11) 최남억은 경신회를 주도한 인물이며, 전두환 대통령 과 직접 만나 표창장을 수여받는 등 경신회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 키는 데 큰 역할을 맡았다.12)
경신회가 설립되는 배경으로 최남억과 그 주위 사람들의 의향이 크게 작용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국무교 에서는 무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최남억이 우연한 인연으 로 경신회 설립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과정이 그려지며, 경신회를 설립하여 선거에서 활용하려는 주변 사람들의 의도도 아울러 지적되 고 있다.13)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경신회보에 나오는 내용을
10) 「현황」, 경신회보 1(1982), 8. 밑줄은 필자. 뒤의 인용문도 마찬가지임.
11) 최남억은 1948년에 “한국 반공 학생연맹 위원장 취임”, 57년에 “자유당 서울 시당 정무부장 취임” 등 정치적 활동을 벌였으며, 이와 함께 79년에는 “대한승 공경신연합회 회장 취임”을 거쳐, 80년대에는 “민정당 서울시당 통일안보 분과 위원 부위원장 위촉”(1985년), “민정당 중앙당 중앙위원 위촉”(1986년) 등 당 대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해왔던 인물이다. 「최남억 초대 교령님의 약력과 근황」, 경신회보 12(1988), 9.
12) 「본연합회 최남억 회장/ 전두환 민정당 총재 각하로부터 포창장 수여/ 민정당 제5주년 창당대회 석상에서」, 경신회보 7(1985), 19.
그대로 무속인의 사상과 실천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 잡지 에 나오는 기사의 대부분은 무속과 별로 관계가 없는 정치적 내용이 며, 무속인들 스스로가 쓴 것이라기보다 정치에 관한 언론이나 학술 담론을 그대로 쓴 것처럼 보이는 글이 많다.
이렇듯 경신회보는 무속인들의 활동과 전개를 알아보려는 데 한 계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경신회는 국가에 영합하면서도 무속인의 단체다운 측면도 보였다. 본고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이러한 점이다. 다음 인용문은 무속의 ‘현실적 명제’로서 무속이 지니는 의의나 사회 적 기능을 논하는 것이며, 그들이 국가의 방침에 따르면서도 무속인 으로서 절대 간과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여준다.
전국방방곡곡, 사회의 그늘에서 괄시와 천대에 허덕이는 이들 20만 무 속인들 본연합회 산하 각급조직을 통하여 정화적 차원에서 교육과 선도 및 대화에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접신무당, 령의 접매를 통 한 무당이여서 무의(굿)를 않을 수 없다. 2. 세습무당, 부모로부터 이어 받은 무당으로 무의를 않을 수 없다. 3. 공통결론, 당국에서 여하한 벌을 준다 해도 무의(굿)만은 않을 수 없다. 무의를 않으면 무병을 앓게 되며 무병에 걸리면 생사를 측정키 어렵다. 그러므로 무의만은 꼭 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상황을 지금의 시대적 대오화합과 계도의 차원으로 연결코져 전술한 무속인들의 명제가 행정적으로 조속히 조처되어 현실 사회에서 외면당하지 않는 새 시대의 참여자로써의 긍지 속에 안식의 뜻을 키울 수 있는 기도처가 하루속히 이룩되길 소망하며 본 제언을 끝맺고져 합니
다.14)
‘정화적 차원’이라는 말에 잘 드러나듯이 국가에 영합하는 자세는 견지하면서도, ‘무병을 앓’기 때문에 ‘무의(굿)만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 경신회를 조사 대상으로 삼는 의의가 있다. 즉, 경신회는 맹목적으로 국가에 따라가는 자세를 보이면서도 무속인 나름대로의 요구 및 견해를 피력해갔다. 무속의 시대인식과 대응 을 살피려고 할 때 경신회보는 유용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
13) 장호근, 한국무교: 최남억 회장과 대한승공경신연합회 30년 발자취(출판시대,
2000), 18.
14) 「20만 무속인의 현실적 명제를 중심으로/ 대한승공경신연합회 부회장 이의정」, 경신회보 1(1982), 71. 이 글을 비롯하여 경신회보의 문장에는 지금 시점 에서 보면 종종 오타가 있으나, 원문 그대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3. 극복대상인 ‘미신’과 ‘무속인’
3-1. 무속을 미신으로 보는 시각
승공태세의 확립이라는 표면적 이유와 더불어, 무속인들이 모여 경신회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자신들을 바라보 는 사회적 시각에의 대항, 즉 ‘미신’에의 대항이었다. 이는 자신들을 미신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경신회의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에서 확 인할 수 있다. 경신회보에는 무속을 미신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규탄하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들의 인식에서 무속은 시대를 넘어 미신으로 천대를 받아왔다. 이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 회’나 ‘무형문화재’ 제도 등 국가의 다양한 시책으로 인해 무속에 대 한 사회적 시각이 점차 호의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1980년대가 되어 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해방 직후의 상황에 대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인식하였다.
우리 정부의 수립(1948년)으로 정치와 종교가 헌법상 분리되었으며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외래종교들은 날개가 도친 바와 같이 포교되어 “섰다면 교회 망했다면 계”의 유행어까지 유포되었으나 우리 고유의 토속 종교는 계속 금지되어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늘에서부터 햇볏을 보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15)
해방 후 헌법으로 정교 분리가 보장되어 다른 종교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으나 무속은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1960년대의 무속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은 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등록된 제주 칠 머리당굿에 관해, 민속학자 현용준과 같이 연구하여 드디어 무형문 화재로 등록되게 되었음을 보고하는 것이다.
15) 「신앙인의 좌세/ 부회장 이의정」, 경신회보 2(1983), 41.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평가받기 위하여 제일차로 63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미신이라는 지탄을 받아 외 면당했고 다시 65년 대전에서 열리는 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내놓았다. 여 기서 칠머리당굿의 인정을 받아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그 후 네 번의 대상 과 9번의 개인상을 받았다.16)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는 1958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제1회 대회에 서는 경북의 무당춤이 수상되는 등 무속식 제의가 사회에서 인정받 는 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해왔다.17) 반면 해방 후에 국가는 미신타 파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명확한 모순이었지만 국가는 이 모순을 그대로 방치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국가의 미신타파 운동이 무속을 표창하는 국가적 행사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되었 다는 모순된 상황을 알려준다.
무속을 미신으로 삼는 시각이 무속인에게 일종의 장애가 되는 상황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다음 글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17회 단종문화재에 태백산 신령굿을 주관해 달라는 관계기관의 요 청을 받았으나 지난해 애로가 너무 많았음으로 금년에는 그만두려 했으 나 이곳 유지들의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승낙은 하였으나 임원의 일부에 서는 문화재 행사에 무당을 시켜 굿을 함은 좋지 못할뿐더러 교육상에도 문제가 있다는 반대를 펴고 강경히 맞서 나왔다. 그러나 단종위원회는 단 종행사에 태백산 신령굿이 빠지면 이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려 단연코 신 령굿을 하기로 결정하였다.18)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대한 글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도 무 속이 문화 행사에 참여하려고 할 때 항상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을 미신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단종문화제’ 때에는 그러한 장애를 넘어 무사히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미신으로 보는 시각이 무속인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16) 「무속 행사는 우리의 민속예술/ 제주 칠머리당굿 제71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 정/ 편집실」, 경신회보 2(1983), 21.
17) 「단체일등상에 경북/ 민속예술경연대회」, 경향신문, 1958년 8월 23일자. 경 향신문과 동아일보에 관해서는 네이버가 제공하는 ‘뉴스라이브러 리’(http://newslibrary.naver.com/)를 참조하였다.
18) 「단종문화제를 마치면서/ 강원도 영월지부장 김춘자」, 경신회보 2(1983),
48-49.
3-2. 뭉치지 못하는 무속인들
자신들을 미신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과 더불어, 경신회가 맞서야 할 대상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무속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단 결하여 뭉치지 못하고 조직의 의향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무속인 들이었다. 경신회의 사상에서 무속이 미신으로 간주되는 가장 큰 이 유는 자신들을 잘못 이해하는 사회적 시선이었지만, 단결하지 못하 는 대다수의 무속인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간주되었다. 단결하지 못 하는 무속인들 때문에 무속을 미신으로 여기는 사회적 시선이 초래 되었다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다음 글은 뭉치지 못하는 무속인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정화적인 차원에서 많은 퇴폐적인 제의식 등을 정리해 나왔으며, 20만 무속인 여러분들의 의식개혁도 추진하여 온 것이 사실입 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많은 난제를 안고 있으며 특히 회원 여러분들 의 협력에서부터 각 지도급 간부들의 협조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 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떤 국가나 단체를 막론하고 단합되어 나가야 발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간부급이나 회원들이 본회에 등한시 및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우 리는 말로만 단합해서는 안 되며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 실천으로 옮기는 단합을 해야 하겠읍니다.19)
부드러운 표현이지만 무속인들 스스로가 단결하지 못하고 있는 실 정에 대한 불만이 엿보이는 글이다. 이들의 생각으로 무속인들 중에 는 국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가 매우 많 았다. 그 때문에 이들이 무속의 가치를 회복시키려는 경신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럼 어떤 행동들이 문제시되었는가? 다음 글은 ‘정화사업계획’ 중에서 ‘1. 목적’과 ‘2. 방침’을 이어 ‘3. 세
19) 「전국에 계신 회원님들께/ 강동지부장 고용언」, 경신회보 4(1984), 30-31.
부 추진계획’으로서 무속인이 조심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다.
가. 전국지회 산하 전 회원에게 상반기 멸공교육 시간을 활용하여 본
사업에 관해 선도 계몽한다.
1. 새시대 제5공화국의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국가 건설에 역군으로서 동참시킨다.
2. 자기 집 주변을 정화하고 자연경관을 보호하며 사회질서와 도시 미 관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교육시킨다.
3. 주택가 또는 시중 및 야외에서 일체 무의(굿 행위)를 못하게 선도
계몽한다.20)
이와 같이 경신회가 문제시한 것은 자연경관을 해치거나 주택가에 서 굿을 하는 행위였다. 사회정화 시책이 벌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굿을 하는 것은 민폐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컸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택가에서 굿을 하고 길가를 더럽히는 무속 인들이 많았으며, 이러한 행위로 인해 무속을 미신으로 보는 시각이 또 늘어난다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경신회는 이 점을 자각하여 무속인들의 활동과 실천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려 하였다고 볼 수 있
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속인들을 문제시하여 통제하려는 의도는 경 신회 설립에 크게 관여한 사람들의 목소리에서도 확인된다. 다음 인 용문은 한국무교에서 등장하는 1961년 5.16 직후의 한 장면으로 서, 최남억과 더불어 경신회 설립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박성호(가 명)의 말이다. 박성호는 길가에서 우연히 보게 된 굿에 대해 상기하 면서, 경신회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제 혁명을 하였으니 사회를 좀 더 안정시킬 필요가 있는데 최근에 보니까 일부 무속인들 중에는 남의 가정의 대소사를 빌미로 굿을 크게 벌 여 몫돈을 챙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걸 방치할 경우 사회의 기풍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운데에는 금품을 노리고 혹세무민하는 자들도 생겨나기
20) 「정화사업계획」, 경신회보 1(1982), 82.
마련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관에서 단속을 벌이면 무속인들을 탄압한 다는 오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번 기회에 무속인들을 위한 단체를 만들어서 그들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 잡자는 것입니다.21)
사회의 안정을 위해 무속인들을 단결시켜 교육해야 한다는 의도가 분명히 제시되고 있다. 또한 무속을 무조건 미신시하는 시각이 아니 지만, 단결하지 못하고 있는 무속인들에 대한 불만과 의심이 표명되 고 있다.
자신들을 미신으로 보는 시선, 그것을 초래하는 단결하지 못하는 무속인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해야 함이 경신회 설립의 큰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가 원동력이 되어 경신회는 다양한 활동 을 벌이게 되었다. 그 중에서 경신회가 가장 중시한 것은 교단의 창 립이었다. 즉, 경신회를 민족종교로 승화시키는 일이었으며, 무속을 종교로서 강조함으로써 무속인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한꺼번에 해결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4. 민족종교로의 지향성
4-1. 종교로서의 무속
경신회는 자신들을 종교로 승화시키는 것을 최종목표로 두었다. 다만, 그들은 무속이 지니는 문화적 측면을 내세우기 위해서도 다양 한 활동을 벌였으며, 무속을 주제로 한 행사나 각종 공연에 대한 지 원도 아끼지 않았다. 대체로 1970년대 후반부터 공적 행사나 문화공 연에 무속인이 나와 굿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었으나, 경신회 역시 이러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예를 들어 85년에는 “우리 고유인 전통무속을 각 지역 별로 발굴하여 전승하자는 데 뜻이 있어 전통무속 보존회를 발족”시켰고, 동시에 “제1회 경신예술제 이름 아 래 발표회”를 열었다.22) 또한 경신회가 주체가 된 것이 아니지만,
21) 장호근, 한국무교, 18.
경신회 고문으로 있었던 이선호가 참가 및 출연하여 개인상을 받은
‘영변성황대제’(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1985)의 성과를 크게 홍보하는 등 무속의 문화적 측면을 내세우는 활동을 전개하였다.23) 그러나 경신회가 선호한 것은 무속을 문화로 삼는 시각보다 종교 로 보는 시각이었다. 이 점이 바로 경신회라는 무속 단체가 지니는 특징이었으며, 개인이 아니라 무속인이 집단으로 뭉쳐 가지게 된 지 향성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는 무속이 지니는 문화적 측면에 대해 언급할 때 반드시 무속의 종교적 측면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 다. 다음 글은 그것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1. 무속신앙은 한국고유의 신앙이다.
현재 학계나 종교계에서는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자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한국문화의 뿌리나 한국종교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5 천년간 서민 속에서 서민의 신앙이 되여온 무속신앙을 찾아야만 가능한 일이며 이를 목적으로 하여 대한승공경신연합회가 창립되었다.24)
학계나 문화계의 동향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음과 동시에, ‘한국 문화의 뿌리’임과 더불어 ‘한국종교의 근원’이라는 말도 언급되고 있 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경신회는 학술계의 연구로서 문학자 서정범 이나 민속학자 김태곤의 논문 및 에세이를 경신회보에 싣기도 하 였다.25) 서정범과 김태곤은 해방 후의 학술 담론에서 무속을 높이
22) 「전통무속굿을 발표하면서/ 보존회 부위원장 박인오」, 경신회보 6(1985),
28.
23)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영변성황대제’ 강릉서 이선호 씨 개인 연기상 수상」, 경신회보 7(1985), 26.
24) 「무속은 한국 고유의 신앙/ 무속 종교화 시급/ 부회장 이의정」, 경신회보
4(1984), 39.
25) 특히 서정범은 경신회보에 계속해서 글을 실었다. 그 중에는 무속을 ‘미신’으 로 보는 시각의 부당성을 규탄하고 무속을 진정한 종교로 삼자는 논문도 있었다. 학자의 이러한 견해는 경신회가 활동을 벌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흔히 무교에 대해서는 미신이라고 밀어부치는 경우가 있다. 미 신이라 하는 말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전통적인 것을 말살하려는 데서 사용되었고 기독교가 그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전략적 의 도에서 재래적인 것을 미신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미신이라고 하는 말은 기독교
평가한 주체들이었으며, 경신회가 목표를 이루는 데 그들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하나의 예로서, 최남억은 경신회를 설립하기 전에 무 속에 대해 배우려 서정범을 찾아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회고 한다.26) 무속을 미신으로 보는 시각이 사회적으로 여전히 우세했던 가운데, 학술계는 무속을 종교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거의 유일 한 세력이었으며, 최남억과 서정범의 만남은 경신회에서 무속을 종 교로 인식시키려 노력해 나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경신회에서 보이는 종교로의 지향성을 알아볼 때, 무속과 의료의 관계는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적어도 일제 시대부터 있어왔던 것이지만, 무속이 미신으로 언급될 때 흔히 쓰이는 논법이 의료와의 관계였다.27) 즉, 병이 들면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 하는 데, 사람들은 그릇된 치료법으로서 미신인 무당을 찾아가 굿을 한 다, 이것이 무속과 의료를 연결시키는 일반적 논법이었다. 근대적 의료라는 관점이 크게 작용한 이러한 시각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 으며, 무속을 부정하는 하나의 상투적 말로 정착되었다. 이에 관해 경신회보의 목소리를 살펴보면, 근대적 의료라는 관점에서 무속을 미신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무속인들의 분노와 불만을 확인할 수 있 다. 병 고치기는 무속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으며, 치병 의례의 부정은 용납할 수 없는 무속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 졌다.
의료에 대한 반론으로 동원된 것이 무속은 종교라는 논법이었으 며, 이때 주로 강조된 것이 심리적 치유였다. 다음 글은 심리적 치유 에 대한 경신회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종교를 믿는다. 또 영(靈)과 육(肉)이 소멸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영혼불멸을 믿는다. 이런 사상
쪽에서 즐겨 쓰는 말인 것이고 무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버릇이라고 하 겠다.” 「화랑/ 오늘의 무당을 본다/ 서정범(경희대 교수・문학박사)」, 경신회보
12(1988), 75.
26) 장호근, 한국무교, 38-46.
27) 예를 들어 일제 시대의 의료와 미신에 관한 글로 다음 기사를 참조할 것. 「질 병 치료상으로 본 민간비법(미신)에 대하야(2)」, 동아일보, 1934년 11월 27일 자.
아래 세워진 것이 현 기성 종교라고 생각한다. 현 기성 종교의 교리에는 내세(來世)를 믿는 현실 도피성 교리가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허지만, 우리 무속은 단 1분 후에 미래도 모르고 사는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예 언, 위안 시켜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안정 시켜주는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를 왜? 미신이라고 하는가? 설령 그것이 미신이라고 해도 그로 인하여 위안과 행복해질 수 있다면, 곧 그것은 미신이라 말할 수 없다.
미신이라는 개념은 그것으로 인하여 불행이나, 파멸이 올 때에 붙혀지 는 이름이라고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무속 신앙은 절대로 미신시 되어서는 안 되겠다.28)
자신들을 미신으로 보는 시선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명하며 무속 나름대로의 의의를 강조하는 글로서, ‘정신적으로 위안’을 주는 한에 무속은 미신이 아니라 종교라고 주장한다. 또한 무속은 종교이기에 그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으며, 기성 종교 단체는 종교로서 인정받고 있는데 왜 무속만이 미신으로 규탄되어야 하냐고 분노의 목소리를 토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근대적 지식, 그 중에서 특히 의료와 비교하여 무속이 지니는 종교적 의의를 내세우는 것이 경신회가 벌인 대응의 하나였 다. 다음에는 근대적 의료를 명확히 의식하여 무속의 가치를 강조하 는 글을 확인해 보자.
현 세속 인심추향이 민속신앙인 무속을 미신행위라 단정하고 병자는 무조건 그 운명을 현대의학 의술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독경과 제를 올림으로 낳는 예(例)가 많이 있다. 무슨 이유 이치에 의하여 병이 낳는가 그 무슨 이치가 밝혀지지 않음으로 사람 들은 미신이라고 믿지 않으려고 한다. 무슨 이치(理致)를 명확하게 밝힌 철학자는 과거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중략) 그렇다고 국민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는 사회풍규에도 영향이 있는 그 행위를 미신이라는 명칭 하에 영원히 그대로 방치할 것인 가 국가 사회에 철학계에 의학계에 시비물의가 일어나기를 호소하는 바이다.29)
28) 「무속신앙이 왜? 미신시 되어야 하는가/ 강동지부장 고용언」, 경신회보
3(1983), 45.
29) 「민속신앙의 신비성/ 목포시 양동 김동현」, 경신회보 5(1984), 43-44.
‘현대의학 의술에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여, 무속 또한 나름대로 의 치료효과가 있음을 강조한 글이다. 경신회는 근대적 의학을 전적 으로 부정하는 것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근대적 의학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는 논법을 사용하였다. 즉, 무속에는 종교로서 인간이 도달 하지 못하는 신비적 힘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무속이 지니는 종교 적 가치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4-2. 민족종교, 단군, 천우교
무속이 종교임을 보다 강력하게 내세우기 위해 경신회는 자신들을 순수한 종교 교단으로 조직화하여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 려는 움직임을 벌였다. 이 움직임을 살필 때 우선 부각되는 것이 타 종교에 대한 시각, 특히 기독교나 불교에 대한 반발과 부러움이었 다. 위에서도 언급했으나, 경신회는 무속이 미신으로 천대 받는 이 유를 단결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속인들 때문이라고 여겼 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뭉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 였고, 무속인의 모임이라는 차원을 넘어 보다 강력한 연대 관계를 지녀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교단을 만 들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야 무속이 종교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 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 다음 글은 이 점을 자세히 설명한다.
한국무속신앙의 건전한 발전과 무속신앙의 종교화를 위하여 71년도 창립해서 13년간 활동을 해온 본 대한승공경신연합회는 무복자들의 연합 기구로써 자리를 굳혀왔다. 이제 국가적인 차원이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무속신앙의 민족종교화와 집단화할 필요성이 있다.
(중략) 무속신앙의 종교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ㄱ. 종교화가 되어야 건전한 발전이 가능하고 무속인들이 사회 속에
서 사이비성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ㄴ. 불교는 18개 종단이 있고 기독교는 66개 교단이 있는데 무속도
하나의 종단으로 제정될 필요성이 있다.
ㄷ. 무속신앙의 집단화(기도처 지정장소)가 필요하다.
무속인들이 대부분 개인집이나 산 등에서 의식을 행하기 때문에 주위 경관을 해치고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무속행위를 잘하 기 위해서는 집단화(지정장소)가 필요하다. 즉 기도처를 만들어줌으로써 건전한 발전을 꾀할 수가 있다.31)
타종교는 교단을 가지고 있는데 무속은 그것이 없기 때문에 사회 적 요청에 맞출 수 없으며, 무속의 사회적 지위를 올리기 위해서도 교단화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또한 교단이 되는 것은 개개인이 제멋 대로 활동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지정장소’를 만듦으로써 무속이 미신으로 비판받는 요소를 없앨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3장에서 보 았듯이 경신회 설립의 큰 동기는 무속을 미신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 과 그것을 초래하는 뭉치지 못하는 무속인들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종교 교단이 되는 것은 그 유일한 해결책으로 받 아들여졌다.
타종교가 교단을 갖춤으로써 누리고 있는 특권를 무속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무속을 종교로 승화시키려는 큰 원동력이 되었 다. 이와 함께, 교단이 됨으로써 무속의 병 고치기 또한 종교적 치유 의례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다만, 경신회 는 단순히 종교 교단을 갖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민족종교 교단이 되기를 소망하였다. 이는 타종교와 무속을 차별화하는 전략의 일환 으로 볼 수 있다.
경신회의 사상에서 무속은 한국 고유의 민족종교였다. 무속을 단 순히 종교로만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기독교나 불교와 차별화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그럼 기독교나 불교와 무속을 구별하는 지점
31) 「무속은 한국 고유의 신앙/ 무속 종교화 시급/ 부회장 이의정」, 경신회보4(1984), 39-41.
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경신회는 ‘민족’을 강조하는 길을 택하였 으며, 무속이 지니는 고유성 혹은 역사성을 강조하여 타종교와 무속 의 차이를 부각시키려 하였다. 무속의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민족종교’임을 선언하는 것은 경신회에 있어 핵심적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글로서, 다음 인용문은 경신회 발족 전 에 최남억이 무속에 대해 배우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나름대로 무속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지 몇 달여, 최남억은 자신의 생 각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이야말로 종교에 대해 무척 애착 을 지닌 민족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땅에 들어온 종교는 그게 어떤 종 교이건 간에 발아(發芽)해서 결실을 맺는 것이었다. 과거에 유(儒), 불 (佛), 선(仙, 道敎)이 그랬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기독교가 급속도로 교세 를 확장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땅의 백성들이 종교에 목말라하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유교도 외국에서 유입된 종교일 뿐 순수한 우리의 종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통적이고 순수한 우리의 민족종교란 무엇일까.
어쩌면 무속신앙이야말로 우리들의 전통적인 민족종교일는지 모른
다.32)
특별한 말이 아니라고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경신회에 있어 민 족종교라는 말은 자신들을 종교로 승화시켜 한국사회에서 자리 잡기 위해 꼭 필요한 개념이자 목표였다. 무속인을 단결시켜 자신들을 미 신으로 보는 시선을 물리친다는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 민족종교로 되는 것은 그들이 양보할 수 없는 소원이었다. 혹은 ‘민족’의 강조는 경전이나 교단이라는 측면에서 타종교보다 체계화가 안 되어 있는 무속을 또 다른 측면에서 그 가치를 올리려는 전략이었을지 모른다. 민족종교로의 지향성은 단군에 대한 인식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경신회에서 단군은 무속의 숭배 대상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위치가 주어졌다. 이에는 최남억의 사상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신회, 더 나아가 무속의 사회적 위치를 상승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을 가진 최남억에게 단군 사상은 그 핵심이었다. 민족과 무속을 연결시키려는 데 단군보다 적절한 신적 대상은 없었다.33)
32) 장호근, 한국무교, 50.
경신회보에는 단군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글이 자주 등장한 다.34) 단군과 연결되는 것은 무속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시각이자 타 종교와 무속을 차별화하는 방법이었다. 경신회가 단순히 종교임을 강조하지 않고 민족종교임을 강조하였던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 다.35) 다만, 경신회의 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민족종교로의 지향 성은 담론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 가 1988년에 단군을 모시는 교단을 창립하게 되었다. 그것이 ‘천우 교’(天宇敎)다. 천우교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교단으로 최남 억을 교령으로 한 교단이었다. 교단을 만들어 민족종교가 되는 것은 경신회가 무엇보다 갈망한 일이었고, 이것이 무속을 미신으로 삼는 시선에 대한 경신회의 최종적 대답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그런 인식 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제 경신연합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온갖 각고를 치루면서 우리의 뿌 리를 알고자 모태적 숭앙의 국조 단군님과 한인 한웅님을 삼신(三神)으 로 받드는 천우교를 창교하였으니 5천여 역사를 지닌 무속의 전통을 이 어 받아 20여년 동안 수련해온 지식과 저력으로 똘똘 뭉쳐 천우교를 당 당한 민족종교의 종단으로 승화 발전시켜 우리 무속인의 긍지로 삼고 후 세에 부끄럼 없는 자취를 남기고자 함이니 회원 여러분께서는 일치단결 하여 현실이 안고 있는 많은 어려운 일을 하나하나 연구 개척하면서 민족 종교를 발전시키는 데 앞장섭시다.36)
33) 최남억이 경신회를 주도하는 데 단군을 중시하였다는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 글 을 참조할 것. 장호근, 한국무교, 279-280.
34) 예를 들어 다음 글을 참조할 것. 「단군 한배검의 나리심과 임금되심/ 편집국」,
경신회보 11(1987), 20-23.
35) 단군을 모시는 경신회에 기독교는 큰 장애물로 부각되었다. 특히 1985년에 단 군성전 건립에 관한 보도가 나오자 기독교는 이에 반대의 뜻을 표명하였다. 경 신회는 기독교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기독교 내부에서도 단군성전 건립의 뜻 을 이해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을 지적하여 단군성전의 의의를 강조했다. 이 사 건은 한편에서 종교 교단인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만큼 무속을 민족종교로 만들려는 경신회의 의지를 굳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독교인이 본 단군 문제/ 덕양교회 목사 임일」, 경신회보
7(1985), 31-34.
국조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 이것이 미신으로 천대받는 무속을 살리려고 경신회가 선택한 길이었다. 교단이 됨으로써 제멋대로 행 동하는 무속인들을 제지할 수 있고, 혹은 교단이 되어야 무속을 미 신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무엇보 다 민족종교 교단이 되어야 기독교나 불교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여 겼던 것이다. 천우교는 창교 후 특별한 전개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37) 그러나 자신들을 미신으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 단군과 연결시켜 무속을 민족종교 교단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은 무속인들의 시대인식과 대응의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할 만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결론
경신회의 사상과 실천으로서, 2장에서는 경신회 및 경신회보에 주목하는 의의를 간략히 서술하였다. 이어서 3장에서는 경신회를 만 들어야 했던 이유를 보다 깊이 다루었고, 무속을 미신으로 보는 사 회적 시선, 그리고 뭉치지 못하고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무속인의 존 재와 그것을 해결해야 함이 경신회 설립의 큰 동기가 되었음을 지적 하였다. 4장에서는 경신회가 이룩하려 했던 것으로, 기독교나 불교 에 못지않게 종교로서, 혹은 민족종교로서 자신들을 승화시키려는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무속을 민족종교로서 인정시키는 것은 타종교 와 무속을 차별화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이때 동원된 사상적 근 거가 단군이었다. 경신회의 이러한 사상과 실천은 천우교 창교로 이 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경신회라는 존재는 한국사회에서 무속의 자율
36) 「회장님 인사 말씀/ 민족도약의 88을 보내면서/ 경신연합회 종앙회장 천우교 교령 최남억」, 경신회보 12(1988), 4.
37) 언론에서 천우교 창교를 전하는 기사는 있었지만 이후의 활동에 대한 보도는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극적 활동은 벌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속인 모여 ‘천우교’ 창교식 가져 이채」, 경향신문, 1988년 5월 27일자.
적 대응으로 위치 지을 수 있다. 이 중에서 경신회는 무속인 개인이 아니라 조직으로서 지니는 장점을 적극적으로 살렸다는 점에 그 특 징이 있다. 1980년대는 전국적으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 는 시기였으며, 무속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그 연장선상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속인들이 시대에 대응하여 활 동을 벌이려 할 때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 공연이나 행사에 출연하여 무속이 지니는 문화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신회의 선택은 이들과 다른 길이었다. 경신회는 다양한 문화적 행사나 공연에 출연함으로 써 무속의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뭉치고 단결하여 자신들을 종교 조직으로 만드는 길을 택하였다. 이는 개인적 차원으로는 불가 능한 일이었으며, 조직을 갖춰야 가능한 실천이었다.
문화공연이나 행사에 출연하는 것과 종교 단체를 만들려는 것의 직접적 동기에는 공통적으로 자신들을 미신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을 바로잡고 무속의 지위를 올리려는 의도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 한 점에서 볼 때 1980년대에 무속인들에 의해 벌어진 다양한 실천 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동기는 유사한 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신회는 민족종교로의 지향성을 가져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 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경신회의 이러한 움직임은 90년대 이후에 활발해지는 무속인들의 사회적 실천과 또 다른 모습을 가지는 것이 었으며, 이 점을 밝혔다는 데 본고가 지니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경신회가 자신들을 민족종교로 강조한 것은 ‘무교’ 개념의 전개 과 정, 더 나아가 해방 후의 무속사를 살피는 데 유용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민족종교로 되는 것은 경신회의 소 원이자 필수적 선택이었다.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무속을 종교 로 보는 시각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무속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무속을 종 교로서 강조하려는 자세는 무속인들이 한국사회에서 자리 잡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무교라는 개념 이 사회에서 정착되는 데 무속인들, 그리고 무속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시한 연구자들의 전략이 중요한 역할을 지녔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해방 후에 몇 번이나 걸쳐 미신타파운동이 이루어지는 가 운데, 무속이 점차 한국사회에서 호의적 평가를 받게 되었던 과정에 는 무속인들과 함께 연구자의 다양한 움직임이 작용하였다. 그러한 노력이 열매를 맺어 무교 개념 또한 정착되게 되었으며, 경신회의 사상과 실천은 종교로서의 무속 인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되어가는 가 운데 무속인들이 보였던 전개 중 하나로 위치 지을 수 있다.
종교로서의 무속 인식, 이는 한국의 근현대 동안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왔다. 경신회라는 사례는 무속을 종교로 보는 시각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검토할 필요를 촉구한다. 무교 개념의 역사적 과정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회에 논하려 한다.
주제어: 대한승공경신연합회, 무속, 샤머니즘, 민족종교, 단군,
미신
투고일: 2016.9.28. 심사종료일: 2016.10.15. 게재확정일: 2016.11.1.
참고문헌
경신회보. 대한승공경신연합회 편집부.
경향신문. 경향신문사.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중앙일보. 중앙일보사.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강인철. 저항과 투항: 군사정권들과 종교. 경기도: 한신대학교 출판부,
2013.
김동규. 한국무속의 다양성: 학적 담론과 무당의 정체성 형성 사이의 “고 리효과” . 종교연구 66. 한국종교학회, 2012. 193-220.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서울: 집문당, 1995.
장호근. 한국무교: 최남억 회장과 대한승공경신연합회 30년 발자취. 서 울: 출판시대, 2000.
홍태한. 무속사회 홍보의 콘텐츠 활용: 자서전 출판과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 한국무속학 19. 한국무속학회, 2009. 165-188.
. 서울굿판에서 무속 지식의 전승과 교육.어문학교육 44. 한국 어문교육학회, 2012. 179-200.
<Abstract>
Thoughts and Practices of ‘Korea Federation of Kyŏngsin’
: The Directivity toward Ethnic Religion
Shinzato Yoshinobu(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article attempts to examine shaman (mudang) thought and practice, focusing on the Korea Federation of Kyŏngsin. The Korea Federation of Kyŏngsin was first formed by a group of mudang in 1971 and has continued to carry out various activities in Korea. Analyzing their ideas and activities will help us to study how mudang understood their times and the measures they took to deal with different situations.
The Korea Federation of Kyŏngsin was organized to change the widespread stigma against musok (Shamanism) as superstition. In order to raise the social status of musok, mudangchose to promote the federation as an ethnic religion. In addition, when they tried to distinguish musokfrom Christianity or Buddhism, it seemed that an ethnic religion was more appropriate than a religion.
The directivity toward an ethnic religion that the Korea Federation of Kyŏngsin demonstrates poses a question regarding how perspectives on musok as a religion has been formed in Korea. In a sense, such a viewpoint is natural. On the other hand,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efforts to destroy superstition has been developed many times throughout Korean history. Under such circumstances, mudang and scholars struggled to build up the image of musok as a religion, though ultimately, the perspective of musok as a religion has been gradually established. Through the case study of the Korea Federation of Kyŏngsin, we can better understand the process through which shamans constructed musokas a religion.
Key words: Korea Federation of Kyŏngsin, musok, Shamanism, ethnic religion, Tan’gun, superstition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