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푸른 눈의 증인 -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폴 코트라이트 (지은이),최용주 (옮긴이),로빈 모이어 (사진)한림출판사2020-05-01
원제 : Witnessing Gwangju: A Mem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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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선택
"외국인 최초의 5.18 광주민주항쟁 회고록"
1980년, 26세의 외국인 봉사단원 폴 코트라이트가 목격한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기록이 40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한센병 환자를 도우며 평화로운 생활을 하던 그가 5.18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휩쓸려간 과정이 세밀한 묘사, 생생한 대화로 복원됐다. 여러 매체들 덕분에 이미 잘 알게 된 광경임에도 외국인의 눈을 통해 보니 새롭게 아프다.
그는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세상에 나오는 이 책이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란다며, 그간 5.18을 떠올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그날이 구체적으로 괴롭다.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 이들과 아픈 기억을 조롱하고 혐오하는 자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일은 그날의 참상을 빼곡히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 알라딘 인문 MD 김경영 (2020.05.12)
책소개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청년 폴 코트라이트는 광주민주항쟁이 있던 80년, 전남 나주 호혜원에서 한센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호혜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고, 좁은 방에서 달걀과 감자로 요리를 하고 음악을 듣던 평범한 청년은 의례적인 건강검진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광주민주항쟁을 마주하게 된다. 현지 국가의 정치적 행동에 개입을 금지하는 평화봉사단의 지침을 따를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에 저항할지 심한 갈등을 하다가 폴은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 광주의 상황을 알리러 서울 미 대사관으로 향한다.
폴은 광주민주항쟁 기간 동안 목격한 내용을 끊임없이 기록했다. 당시 그 경험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기록은 엄청난 양의 메모가 되었고 기억을 모두 쏟아내 겨우 살아갈 수 있게 되자 그는 메모와 기억을 한편에 미룬 채 삶을 지속했다. 목격자로 그 자리에 존재해야 했던 그의 마음속에 짐으로 남아있던 기억과 메모는 40년이 지난 후에야 절제된 언어로 세상에 나왔다. <5.18 푸른 눈의 증인>에는 아주 짧은 기간 한 청년의 삶과 성격을 바꾸어 버린 강력했던 한국 현대사가 담겨있다.
목차
저자의 말
지도
프롤로그
첫째 날 (5월 14일 수요일)
- 서울의 데모
둘째 날 (5월 15일 목요일)
- 승자 없는 데모
셋째 날 (5월 16일 금요일)
- 집으로 가는 길
넷째 날 (5월 17일 토요일)
- 일상으로 돌아가기
다섯째 날 (5월 18일 일요일)
- 무성한 소문들
여섯째 날 (5월 19일 월요일)
-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일곱째 날 (5월 20일 화요일)
- 군인들의 행진과 마지막 버스
여덟째 날 (5월 21일 수요일)
-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아홉째 날 (5월 22일 목요일)
- 항쟁의 흔적들
열째 날 (5월 23일 금요일)
- 우리는 ‘불순분자’
열한째 날 (5월 24일 토요일)
- 시신 안치실에서 통역하다
열둘째 날 (5월 25일 일요일)
- 산 너머에는 평화가 있을까
열셋째 날 (5월 26일 월요일)
- 서울로 가다
에필로그
감사의 말
부록
1. 또 다른 증인, 어느 선교사의 5.18 일지
2. 1980년 광주를 목격한 외국인 최초의
회고록
번역자의 말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1980년 5월 중순, 나는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서 근무한지 2년이 되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겐 목소리가 없어.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게.' 할머니는 두려움이 없는 눈으로 나를 뚫어질 듯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나는 여기에 '목격하기 위해' 있었다. 그 할머니가 내게 분명한 임무를 준 것이다.
나는 할머니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40년이 지난 이제야, 그 책임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접기
내가 2019년 5월에 서울에 도착했을 때, 5.18과 관련된 수많은 진실들이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광주항쟁은 실제로 있었다. 5.18은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의 반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누구는 폭력적 학생들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하고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내 친구 및 동료들의 요청에 의해 한국의신문, TV 그리고 불로그 등의 매체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렇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서 기뻤다. 접기
8시쯤 되어 어느 정도 조용해진 것 같아 여관 문밖으로 머리를 내밀고살펴봤다. 전투 경찰들이 거리를 깨끗하게 정리한 것 같았다. 몇몇 가게와식당들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아주머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내가 나갈 수 있도록 여관 문을 열어주면서 매일 하는, 같은 말을 했다.
˝여관문은 밤 10시에 닫으니까 그 전까지 들어오세요.˝
아침을 먹었던 가게로 갔다. 가게 아주머니는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TV 앞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경찰차가 불타는 장면이 나오는 뉴스를 봤다. 뉴스 진행자와 젊은 경찰의 사진이 함께 보였고 경찰 강윤석이 오늘이른 시간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 이런.‘ 접기
나는 수술이 다 끝날 때까지 병원에서 기다려야 하는 게 싫었다. 그 병원이 하는 일을 존경했으나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병원 측의 전도가 늘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선한 일을 하는 건 좋은데 그걸 꼭 종교로 포장을 해야 하는 걸까? - 라*티
나는 잠깐 멈춰 서서 이 장면들을 자세히 눈에 담았다. 지금 여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공포일까, 분노일까? 대로에 시민들은 거의 없고 군인들모습만 보여서 잘 알 수 없었다. 일요일과 월요일 사이 군인들의 강경 대응이 시민들의 항복을 받아낸 것일까? 군인들과 간격을 충분히 두면서 도청 쪽으로 난 대로를 걸었다. 군인들 숫자가 너무 많고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걸었다. 만약 내가 고개를 숙이면 머리만보여서 잘못하다가는 한국인 대학생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부러고개를 들고 내가 ‘푸른 눈의 외국인임을 애써서 강조했다. 접기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 라*티
머니가 크게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주머니는 늘 예의가 있고 자상했다. 나는 밥을 다 먹어 치우고싶었으나 3분의 2 정도만 먹고 남겼다. 반찬 자국이 전혀 없이 아주 깨끗한 하얀 밥을 남겼다. 한국 사람들은 남은 밥은 나중에 다시 섞어서 나누어 먹기 때문에 밥을 다 먹을 수 없으면 아주 깨끗한 상태로 남겨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알게 되었다. 접기
˝당신 같은 외국인이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요.˝
다른 학생이 이렇게 말했을 때 엄청난 책임감이 느껴졌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이미 우체국 앞에서 할머니로부터 임무를 부여 받았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내가 만일 이곳을 벗어나 목격한 것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한국정부는 나를 추방시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국을 떠날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평화봉사단의행동 가이드라인을 따르고 싶었다. 관여하지 말고, 정치적 행위를 하지 말라. 그 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의견을 말하지 마라. 손님으로서 당신의 위치를 손상하는 행위를 하지 마라. 하지만 이제까지 보고 겪은 사태에 대해이런 지침을 지키는 게 가능한 것일까? 접기
˝네. 조심하겠습니다. 군인들이 보이면 돌아올 겁니다. 당신 통역을 맡게 되어서 좋았어요. 여기 소식을 세상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모인 기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많은 일들이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개되었다. 이제 내 계획을 실행할 차례였다.
나는 증인으로 책임에 충실할 의무가 있었... 더보기
아버지는 1980년 하반기에 돌아가셨다. 1981년 중순, 평화봉사단 한국 사무소는 문을 닫았다. 평화봉사단 임무는 다 끝났으나 아직은 한국을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국제학교에서 교사 자리를 얻었다.
1982년 9월, 나는 한국을 떠났다. 왜 머물렀을까? 한국의 어떤 역사는 고통스러웠지만 한국과 한국 사람들, 그... 더보기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 라*티
머니가 크게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주머니는 늘 예의가 있고 자상했다. 나는 밥을 다 먹어 치우고싶었으나 3분의 2 정도만 먹고 남겼다. 반찬 자국이 전혀 없이 아주 깨끗한 하얀 밥을 남겼다. 한국 사람들은 남은 밥은 나중에 다시 섞어서 나누어 먹기 때문에 밥을 다 먹을 수 없으면 ... 더보기
˝당신 같은 외국인이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요.˝
다른 학생이 이렇게 말했을 때 엄청난 책임감이 느껴졌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이미 우체국 앞에서 할머니로부터... 더보기
˝네. 조심하겠습니다. 군인들이 보이면 돌아올 겁니다. 당신 통역을 맡게 되어서 좋았어요. 여기 소식을 세상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모인 기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많은 일들이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개되었다. 이제 내 계획을 실행할 차례였다.
나는 증인으로 책임에 충실할 의무가 있었... 더보기
아버지는 1980년 하반기에 돌아가셨다. 1981년 중순, 평화봉사단 한국 사무소는 문을 닫았다. 평화봉사단 임무는 다 끝났으나 아직은 한국을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국제학교에서 교사 자리를 얻었다.
1982년 9월, 나는 한국을 떠났다. 왜 머물렀을까? 한국의 어떤 역사는 고통스러웠지만 한국과 한국 사람들, 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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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폴 코트라이트 (Paul Courtright)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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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전남 나주의 나환자촌 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이후 열대성 질환과 안과 질환을 전공하고 공중보건 분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년간 이집트,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탄자니아에서 근무했으며, 탄자니아 모시 지역에 아내 수잔 박사와 함께 킬리만자로 안과 센터를 설립해 운영하였다. 250개가 넘는 의학 논문을 게재하였으며 미국안과학회를 비롯해 실명 예방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수여하는 다수의 상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 의대 겸임 교수이자 영국의 실명예방전문 NGO인 사이트 세이버(SightSavers)의 트라코마 예방 사업의 고문을 맡고 있으며 현재는 아내와 함께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살고 있다. 한국과는 1981년부터 깊은 관계를 이어 오고 있으며 여러 한국 연구자들과 공동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2014년에는 국제보건 및 국제개발협력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연세대학교에서 ‘현장 연구와 역학’ 단기 코스를 진행하였고, 그 외에도 수 차례의 특강 등을 통해 한국의 후학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근 아프리카에서의 트라코마 퇴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여왕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 접기
최근작 : <5.18 푸른 눈의 증인> … 총 7종 (모두보기)
최용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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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연구자. 전남대, 서울대, 미국 켄터키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정부 공식기구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조사1과 과장을 지냈다. 해외의 과거사 청산 사례와 광주항쟁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관련 도서도 여럿 번역했다. 그간 옮긴 책으로는 욘 엘스터의 『책장 덮기: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를 비롯해 『5.18 푸른 눈의 증인』(폴 코트라이트), 『나의 이름은 임대운』(데이비드 돌린저) 등이 있다.
로빈 모이어 (Robin Moyer)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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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타임지 사진 기자로 한국에 있다가 광주민주항쟁에 관해 듣고 광주로 향했다. 이후 1999까지 타임지에서 속보와 특집 기사를 다루었고 1982년에는 레바논 팔레스타인 학살 사진으로 세계보도사진상과 로버트 카파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아시아 지역 타임지 수석 사진 작가로 캄보디아 난민, 피플 파워 혁명,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항쟁, 텐안문 사태 등을 취재했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 아시아 리더들의 초상 사진을 찍기도 했다 2014년에는 홍콩의 우산혁명을 촬영했으며 현재 홍콩에 머물면서 민주시위에 관한 도서를 만들고 있다. 이번 <5.18 푸른 눈의 증인>에 실린 그의 사진은 전량 광주민주항쟁의 미공개 본이다. 접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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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큰 꽃 작은 꽃>,<고양이 멸치>,<미운 말 대회 일등>등 총 602종
대표분야 : 그림책 7위 (브랜드 지수 131,602점), 그림책 7위 (브랜드 지수 1,634,327점), 외국창작동화 15위 (브랜드 지수 72,986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평화봉사단 외국인 청년, 광주민주항쟁을 마주하다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청년 폴 코트라이트는 광주민주항쟁이 있던 80년, 전남 나주 호혜원에서 한센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호혜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고, 좁은 방에서 달걀과 감자로 요리를 하고 음악을 듣던 평범한 청년은 의례적인 건강검진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광주민주항쟁을 마주하게 된다. 현지 국가의 정치적 행동에 개입을 금지하는 평화봉사단의 지침을 따를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에 저항할지 심한 갈등을 하다가 폴은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 광주의 상황을 알리러 서울 미 대사관으로 향한다.
폴은 광주민주항쟁 기간 동안 목격한 내용을 끊임없이 기록했다. 당시 그 경험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기록은 엄청난 양의 메모가 되었고 기억을 모두 쏟아내 겨우 살아갈 수 있게 되자 그는 메모와 기억을 한편에 미룬 채 삶을 지속했다. 목격자로 그 자리에 존재해야 했던 그의 마음속에 짐으로 남아있던 기억과 메모는 40년이 지난 후에야 절제된 언어로 세상에 나왔다. <5.18 푸른 눈의 증인> 에는 아주 짧은 기간 한 청년의 삶과 성격을 바꾸어 버린 강력했던 한국 현대사가 담겨있다.
"우리에겐 목소리가 없어.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주게.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게." 할머니는 두려움이 없는 눈으로 나를 뚫어질 듯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나는 여기에 '목격하기 위해' 있었다. 할머니가 내게 분명한 임무를 주었다.
나는 그 할머니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40년이 지난 이제야, 그 책임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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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 bookple

6월의 시작이다.지난 달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고 걸었다. 이제 봄도 끝나고 여름이 된 것 같다. 지난 달 읽은 책들과 이번 달 읽을 책들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1 - 5월에 읽은 책들 - 올리브 키터리지- 역사의 원전- 파친코(총 2권)- 냉전과 새마을- 5.18 푸른 눈의 증인- 얄타의 딸들- 해러웨이 선언문- 도나 해러웨이- 이란의... 더보기
거리*** 2022-06-01 공감 (21) 댓글 (16)

차별과 배제, 편견은 사건을 감추고 왜곡하며 원하는 그림으로 조장한다. 1980년 광주는 20대 이전까지만 해도 내게 희미한 존재로 남아있을 뿐이었다.TV와 언론에 비춰진 당시의 광주는 폭도들의 봉기가 일어난 위험한 도시였다. 이 책은 5.18 40주년이 되던 2020년 5월 1일 발간되었다.작가인 폴 코트라이트는 당시 평화봉사단으로 파견되어 있는 상태... 더보기
거리*** 2022-05-19 공감 (21) 댓글 (10)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일주일에 한 번 성경수업을 받았다. 뺑뺑이로 돌려서 들어간 고등학교인데 이런식으로 강제 교육은 정말 옳지 않은일인것 같다. 요즘도 그런 수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당시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었다. 젊은 남자분이었는데 수업시간 도중에 난데 없이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 더보기
라*티 2020-07-06 공감 (3)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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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역사적 상황은 누가 쓰느냐에 그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그 당시 외국인 청년 눈에 비친 5.18은 ...말 그대로 ‘본대로 느낀 대로‘이다. 늦게나마 귀한 기록을 책으로 남겨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쎄*트 2020-05-04 공감 (3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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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와 정보를 포함하는 책이 출간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아픔을, 실제로 겪지 않은 저희 세대의 눈으로 직접 겪은 것과 같이 책을 통해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ai**********o 2020-04-04 공감 (1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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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나주 간 도로 양민학살의 진상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de****e 2020-04-15 공감 (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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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정도 지나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그 날이 돌아온다.
바로 작년에 광주 민주화 운동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그 곳에서 독재타도를 외쳤을 그들을 생각했었다.
이 책을 쓴 푸른 눈의 이방인은, 당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정말 궁금하다.
피* 2020-05-06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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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잊겠습니까 어찌 잊으라하겠습니까
그저 처절한 진실을 배우고 알게 된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하는 것일 뿐....
it********1 2020-04-05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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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기록한 사진들.. 기다해 봅니다.
看*痴 2020-04-13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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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귀한 책입니다. 5.18 40주년을 맞아서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bl*****d 2020-05-12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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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하고 가슴 아픈 시대를 함께 지나오신 분들의 숭고한 역사의 기록 앞에 저린 먹먹함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그날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 닿아 계신 분들의 현재를 흐르는 사실과 진실을 새기고 또 새기며 그분들께서 목숨을 바치시며 바라신 가치들을 지켜내는사람이되기를다짐합니다.늘 평온하소서.
행복*** 2020-04-24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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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 오래 기억해야하겠습니다. 4.19나 부마항쟁도 기억해야겠죠
po********9 2020-04-20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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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이지만 알아야하고 밝혀져야하는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기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5.18 잊지말고 기억하게되는 좋은 책인거같습니다
ls*******4 2020-04-08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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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증인이 된다는 것
차별과 배제, 편견은 사건을 감추고 왜곡하며 원하는 그림으로 조장한다.
1980년 광주는 20대 이전까지만 해도 내게 희미한 존재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TV와 언론에 비춰진 당시의 광주는 폭도들의 봉기가 일어난 위험한 도시였다.
이 책은 5.18 40주년이 되던 2020년 5월 1일 발간되었다.
작가인 폴 코트라이트는 당시 평화봉사단으로 파견되어 있는 상태에서 광주 상황을 목격하였다.
(그는 당시 광주에서 30여분 정도 떨어진 나주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인 호혜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이전에는 나주 보건소에서 1년 반을 일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 독일 외신기자인 위르겐 힌츠페터는 현장 사진과 보도로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외국인이 쓴 회고록은 이 책이 최초라고 볼 수 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일종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 행위이며 사건에 대한 솔직한 나의 목소리가 더해질 것이다. 문제는 당시 내가 목격했던 사건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건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그 역사를 내가 어떻게 전부 증언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꼈던 것만을 말하는 것이다. - P14
그는 5월 14일 비무장지대와 가까운 강원도에서 평화봉사단 건강 교육을 마치고 서울로 온다.
평상시와 달리 평화봉사단 건물 근처 도로를 학생들이 점거한 채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한국에 온 후 나는 단 한번도 위험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한국은 사실상 강력범죄가 없는 나라였다. 지금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장면도 안전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 P17
제3자의 눈에서 본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외부인이지만 그는 당시 한국에 들어온 지 2년 정도가 지났기에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다만 외부인이기에 한국의 내부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0.26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신군부가 들어섰기에 국민에 대한 감시와 압제는 여전했으나 외국인이었기에 서울 시위를 보고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광주 현장에서 만난 한 할머니의 당부 때문이었다.
알려진 바대로 당시의 광주는 철저히 외부에서 고립되었고 방송과 언론에서는 전두환 정권에 구미에 맞는 보도만 내보내고 있었다.
광주는 외부와의 연락선도 끊겼기에 지인이 있다고 해도 연락하기 어려웠고 내부의 사정을 알기에 어려웠다.
"미국인인가요?"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봤지요?"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주어야 해요."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 주세요."
내가 목격한 이 사태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나는 이미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답은 더듬거렸고 나는 이 소극적인 대답을 속으로 자책했다. - P70
할머니는 광주의 상황을 외부에 알려달라며 애원하였다.
광주를 떠나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왔지만 평화봉사단원들은 위험을 감수한 채 그곳에 남기로 한다.
폴 코트라이트, 팀 원버그, 주디 챔벌린, 데이브 돌린저는 위르겐 한츠페터를 비롯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상황을 통역했다.
구타당하는 민간인을 목격하면 보호하고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작업을 하는 등 평화봉사단원들은 비폭력적 개입을 통해 미국인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현장에는 1980년 타임지 사진 기자로 한국에 왔다가 광주민주항쟁 소식을 듣고 광주로 향한 로빈 모이어도 있었다.
그가 촬영한 광주항쟁 사진은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처음 공개되는 사진들이라고 한다.
그를 비롯한 평화봉사단원들은 군인이 민간인을 구타하고 살상하는 모습을 똑똑이 지켜보았다.
평화봉사단원은 한국인과 정치적 문제로 토론을 하거나 정치 상황과 관련된 행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들은 시민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주체였으나 점차 다양한 계층의 범위로 항쟁은 확대되었다.
여기 작은 도로에서 그 요구와 분노는 학생들을 넘어서 놀랍게도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하고 근면한 집단이었던 '할머니'와 '아주머니'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들은 현재의 암담한 상황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마주치는 군인들을 향해서 '부끄러운 줄 알라'고 당당히 외치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들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 - P68
5월의 봄은 잔혹한 피로 물들었다.
그는 안치된 시신들을 보면서 분노하고 군과 정부가 민간인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모습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충격과 혼돈에 빠진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괴리감이 느껴졌다. 거짓말처럼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마치 영혼들이 이 지역을 접수한 것 같았다. 5월의 태양은 여전히 따뜻하게 나를 비추고 있었고, 새는 지저귀고, 은행나무이 여린 잎은 바람에 팔랑이고 있었다. 과연 누가 여기에 있었던 이 일을 목격했을까? 육신 없는 영혼들은 이 장면을 증언하지 못할 것이다. - P97
그는 다시 호혜원으로 돌아와 마을 지도자를 만났는데 자신에게 온 편지를 발견하고 놀란다.
'보호'대상이 된 그는 군인 한 명이 배치되어 그동안 감시를 당해왔다는 것이다. 마을 지도자는 그의 행적을 군사당국에 보고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졌다.
한달쯤 후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국의 군사정부가 광주에 머물며 외신 기자들의 통역을 맡았던 그들을 추방할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화봉사단 책임자가 사실 증명을 요구하며 완강히 버틴 끝에 그는 다행히 한국에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결코 광주 항쟁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미국의 국민이었다.
때문에 이 상황은 그를 내내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할머니와 했던 약속을 뒤늦게 이렇게라도 지키는 것은 부름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 P182
평화봉사단원, 외신기자들을 비롯해 광주를 위해 나서준 외국인들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어제 5.18 기념식이 열렸다.
보수 진영 정당 포함 1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통합을 강조한 정부가 말 뿐이 아니라 광주 정신을 계승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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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2022-05-19 공감(21) 댓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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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그날,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40년 전 그 날, 광주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하여 선교사들, 그리고 평화봉사단 의사들. 이들 중 한 사람,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의 나병환자들을 돌보던 폴 코트라이트. 그는 뒤늦게나마 광주에서 한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 회고록을 출간한 최용주님은 이 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회고록은 아마도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출판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광주 시민이 아닌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며, 광주항쟁을 둘러싼 수많은 왜곡과 폄훼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를 반증하는 증언록의 가치를 갖는다. P 232
작년 겨울, 난 광주에서 5.18의 흔적을 따라 돌아다녔더랬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당시 들렀던 장소들, 당시 보았던 사진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얼마전 광주법정에 참석한 전두환이 5.18 당시 헬기 사격을 계속 부인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비롯하여,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시민학살에 대한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건지. 시민학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왜 아직도 떵떵거리며,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있는건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폴 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나주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인 호혜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때로는 환자들의 수술을 위하여. 환자들과 함께 순천의 병원까지 가야 할 때도 있었다. 나병 환자들은 일그러진 외모로 인해 밖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으나, 순천에 있는 병원을 가려면 밖에 나가는 건 당연하고 버스도 수차례 타야했다.
병원 가는 길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환자들 대신에 차라리 외국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 033
아, 폴 코트라이트, 그러니까 저자는 정말 환자을 생각하는 참된 의사였다. 이런 사람이 40년 전 그날, 광주에 방문하게 된 건, 순전히 나병 환자들 수술을 위해 순천에 가기 위함이었다. 당시 나주에서 순천까지 가는 버스는 광주 터미널을 경유했다. 5월 19일, 그는 환자들과 순천까지 가는 길에 광주 터미널에 들렀다. 거기서 그는 참상을 마주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바닥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P 056 (5월 19일)
문이 닫히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까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 흘낏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도대체 군인들이 국민을 왜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어제 이곳, 광주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P 057 (5월 19일)
“어제는 정말 참혹했어. 전두환의 군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만 보이면 달려들었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사람들 얘기로는 백 명은 넘을 거래.” P 063 (5월 19일)
저자가 광주를 들렀던건 5월 19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시행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당시 광주의 상황은 이러했다.
5월 18일, 공수부대가 전남도청, 금남로,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시위대 진압을 실시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눈 앞에 있는 시민들은 전부 짓밟혔고, 맞았고, 죽어나갔다. 폴이 광주에 들렀던 5월 19일에는 11 공수여단이 추가로 증파되어 더 많은 광주시민 학살이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때였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주어야 해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P 070 (5월 20일)
폴을 향한 할머니의 슬픔어린 이 말은, 폴이 회고록을 쓰고자 한 이유였다. 그렇게 폴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폴에게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까.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P 085 (5월 21일)
폴은 외국인이라는 무기를 방패삼아 광주와 나주를 오갔다. 물론 광주 밖을 나오는 교통편은 끊긴지 오래였고, 모든 길목마다 군인들이 검문중이었지만. 5월 21일, 이날은 신군부가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한 날이다. 요지는 단순했다. 광주사태를 일으키는 불순분자들이 바로 빨갱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이날 공수부대에게 발포명령을 내리며 실탄을 지급했다.
대형 시내버스 두대, 승합차 한 대, 그리고 승요차 한 대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량 여기저기에 총알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모든 차에 성한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내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제 환호하던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버스였다.
길 한가운데 자전거를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어제 아침 남평으로 들어오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성취감과 정열이 넘치던 바로 그 청년들. 그들이 한국의 미래였다. P 097 (5월 22일)
광주를 짓밟았던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다. 외곽에서 광주 진출입로를 원천 봉쇄하며, 이 곳을 지나려하는 시민들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무차별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폴이 이 도로를 지나 광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본인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무기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지금 친북 공산주의자들이 광주를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겪은 사건은 이 나라의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의 실제 모습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P 105 (5월 22일)
“미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전두환이 미군과 모종의 협의가 없이 광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것 같아. 젠장! 그렇다면 미국이 이 만행의 공모자가 된 거잖아! 미국 대사관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글쎄, 대사관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가만 있으면 안되지.” P 113 (5월 23일)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 미국 문화원 운영자가 전화를 했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에게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대.” P 124 (5월 23일)
폴을 비롯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브, 팀, 주디. 그들은 어떻게든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했다. 심지어 자국, 그러니까 미국 정부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에도 분노를 표했다. 아마 이때부터 이들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것 같다.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광주에 들어온 또 다른 푸른 눈의 외국인 기자들을 만나자고.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해요.”
독일 기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떨리고 있었다. 옳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동굴처럼 어두컴컴하고 침울한 이 방에 모두 있었다. P 134 (5월 24일)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러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P 136 (5월 24일)
“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면 쉽지 않을 거에요.”
내가 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과연 로빈이 이 사진을 해외로 제대로 반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군인들이 그의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할 수도 있었다. P 146 (5월 24일)
폴 일행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인터뷰를 하며 광주의 진실을 알렸고, 광주시민들과의 통역도 맡았다. 최대한 사실 그대로 독일기자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폴 역시 상상하지 못할 참상을 계속해서 마주했으나, 그럴 수록 폴의 마음속에는 더욱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만 불타오를 뿐이었다. 푸른 눈의 외국인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어난, 이 참극을 어떻게든 외부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팀은 계속해서 독일 기자들의 통역을 맡았고, 폴은 광주를 떠나 서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알리기 위해 떠났다.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 푸른 눈의 외국인이어도 광주를 벗어나기가 어려워졌기에, 폴은 정말 죽음을 무릅쓰고 인적없는 산을 넘어, 광주를 벗어나 나주까지 왔다. 본인의 ‘원래’ 근무지였던 나주 호혜원으로.
물론 나주에서도 서울까지 나오는 길은 힘들었다. 군인들은 광주 뿐만 아니라 전남의 길목을 막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광주보다는 덜 했는지, ‘푸른 눈의 미국인’이라는 무기로 겨우 겨우 서울까지 올라왔다. 드디어 미국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릴 수 있겠구나 싶었던 폴이었다.
우리는 대리대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과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도청 앞의 할머니가 들려주기를 원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P 178 (5월 26일)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P 182, 에필로그
폴을 비롯한 평화봉사단원이 ‘설마?’하고 의심했던 그 생각. 아니었길 바랬던 그 생각은 나중에야 사실로 밝혀졌다. 미국의 비밀해제 문건 중 미국이 신 군부의 무력진압을 용인한 내용이 남긴 문서들이 속속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폴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미국이 묵인했으리라는 생각을 안고 살았다. 광주의 진실을 알릴 그 때를 기다렸고, 바로 지금이 그 때라는 생각을 했기에 이 회고록을 출간한 것이리라.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작년 겨울에 포스팅을 했었다. 그리고 이 포스팅은 지금도 여전히 논란의 댓글들이 달린다. 포스팅을 했던 당시에는 그런 논란 댓글들은 바로 삭제했었는데, 이제는 삭제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앞서 제주 4.3항쟁에 관련된 포스팅에도 위와 비슷한 덧글들이 아주 자주 달리고 있다. 이런 덧글들의 공통점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과, 정부군에 학살된 피해자들을 ‘폭동, 폭도, 빨갱이’라고 지칭한다. 전두환이 발표했던 ‘광주사태 담화문’의 내용을 그대로 믿으며, 독재 군사정권을 찬양하는 그런 사람들. 지금까지 경험상 이런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미국을 찬양하고, 성조기를 흔든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국인이 쓴 이 회고록을 어떻게 바라볼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 포스팅에도 위와 같은 논란을 일으키는 덧글들이 달리겠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정말 좋아하는 미국인 조차도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에 의해 일어난 학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일이 빨갱이가 일으킨 폭동인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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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2020-05-12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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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어떤 이야기로 시작을 해야할까...
이 책은 80년 5.18 당시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직접 겪었던 미국인의 회고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당시에 남겼던 개인의 기록이 이제는 역사속에서 증언이 되고 증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5.18에 대해서는 더 깊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속마음이었다. 그 끔찍한 이야기들, 제주 4.3의 증언들도 너무 무서운 이야기가 많아 이제는 그 증언들을 그만 듣고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만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알만큼 안다고 생각을 했었던 이야기들은 화수분처럼 끊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역사의 진실 규명에 다가서고 있지만 '학살 원흉'들에 대한 공식적인 재판과 그들의 만행에 대한 사죄가 없기 때문에 아직도, 여전히, 광주 5.18과 제주 4.3은 진행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 평화봉사단에서 파견되어 온 폴 코트라이트는 나주의 호혜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80년 5월 14일부터 26일까지 광주를 오가며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일들을 풀어놓고 있는데, 광주의 중심은 아니더라도 그 주변부에서 시작할 줄 알았던 이야기가 나주에서의 일상으로 시작하고 있어서 조금은 5.18과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의외로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고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관찰 카메라처럼 폴 코트라이트의 시선을 따라 사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책의 중간에 실려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 택시 운전사로 잘 알려진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인터뷰를 했던 일행 중 한명이 바로 이 책의 저자 폴 코트라이트였다.
그의 이야기에서 광주 5.18이 참상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을 원하는 수준높은 정치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중에 그는 보호 대상으로 군인 한명이 배치되어 감시를 당했고 한국에서 추방당할 위험에까지 이르렀지만 평화봉사단 책임자의 강력한 사실증명 요구로 추방당하지 않고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라 생각했는데 이 기록들을 읽으며 새삼 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전두환은 광주에 첩자를 심어놓았을거야. 여기에 스파이를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어제 도청광장에서 시민들이 한 명을 잡았대. 하지만 여전히 많은 스파이들이 있을거야. 분명해"(112)
우연이었을까? 오늘 아침 뉴스에서 5.18 당시 군의 스파이로 도청에 잠입하고 시민군을 잡아 고문을 했던 군 장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순간 좀 부끄러웠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내가 광주 5.18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빙산의 일각이며 당시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은 내가 도저히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때문이다.
"당시의 내 노트, 편지. 사진 등 자료들을 꺼내 이 책을 쓰기까지 40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광주를 기억한다는 일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고, 일에 몰두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181)
그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광주 우체국에서 우연히 마주친 할머니가 '증인이 되어 진실을 알려달라'고 했던 그 약속을 40년만에 지키게 된 그는 이제 그 당시의 고통과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을까...
이런 증언과 증인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사실을 부인하고 광주 5.18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떠들어대다 결국 실형까지 받았으면서도 뻔뻔하게 다시 거짓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고,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외면하는 그 인간들에게 이단옆차기를 한번 해보고 싶어진다. 아니, 심정으로는 정말 심한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참는다. 반드시 죄의 댓가를 받게 되기를. 인간이기를 거부한 그들의 살이 썩어 문드러지기를 바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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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2020-05-21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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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5.18 푸른 눈의 증인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일주일에 한 번 성경수업을 받았다. 뺑뺑이로 돌려서 들어간 고등학교인데 이런식으로 강제 교육은 정말 옳지 않은일인것 같다. 요즘도 그런 수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당시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었다. 젊은 남자분이었는데 수업시간 도중에 난데 없이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공수부대로 투입된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줬는데 시민군에게 죽은 자기 동료들의 이야기 그리고 폭도로 생각했던 시민군들에게 가한 공격행동등을 횡설수설했었다. 나중에 학교를 떠났던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도 엄청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던걸로 추정된다. 정작 주범들은 모두 잘 먹고 잘 살고 아직까지 반성을 안하지만 죄 없는 시민들과 가해자들로 둔갑한 군인들만 평생 짐을 안고 살아가야 되는 우울한 현대사의 단면이 아닌가 싶다.
전두환은 아직도 뻔뻔스럽게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왜 그 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울분은 둘째치더라도 처벌만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아직도 전두환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믿음이 담겨있는걸까? 알 수 없다.
이 책은 광주 민주화 항쟁이 있던 시기에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서 봉사했던 폴 코트라이트 박사의 실제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회고록이다. 외국인 최초의 수기인만큼 의미가 좀더 크고 다르게 다가온다. 당시 한국사회에 대한 묘사나 외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정서등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게 서술된다.
평화봉사단은 종교가 아닌 순수봉사단체로 저자도 종교와 전혀 관계없는분이다. 호혜원이라는 나주의 나병원에서 아무 조건없이 봉사를 하신건데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종교인도 아닌데 그런 희생과 봉사가 가능한지 미국인지만 정말 존경스럽다. 역시 대단한 나라임은 분명한것 같다.
뜨거웠던 1980년의 봄, 서울에서 건강검진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와 겪게 된 엄청난 일을 꼼꼼하고 객관적으로 메모에 담았다. 많은 세월이 지나 메모와 함께 기억을 떠올려 책을 써내셨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셨던것 같다. 그만큼 기록이 생생하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히며 책에서 얻은 수익금은 그가 봉사하는 단체에 전액 기부하겠다고 말한다.
˝우리에겐 목소리가 없어.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주게.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게.˝ 할머니는 두려움이 없는 눈으로 나를 뚫어질 듯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나는 여기에 ‘목격하기 위해‘ 있었다. 할머니가 내게 분명한 임무를 주었다. 나는 그 할머니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40년이 지난 이제야, 그 책임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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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티 2020-07-06 공감(3)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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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미국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된 저자는 전남 나주의 나환자 정착촌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이 책에 담아낸다. 책 제목처럼 증인이며 증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책 한 권이다. 날짜별로 기록된 회고록. 그가 한국에서 경험한 글들은 그의 시선에서 그 당시 모습들을 전해준다. 풍경들과 가옥들, 나환자의 생활환경과 가족들과의 관계들과 경제생활들이 기억들과 함께 펼쳐진다.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이동하려면 사람들의 시선들에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어려움들이 있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는 일부러 나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악수'를 하였다고 전한다.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행동으로 말없이 환자들에게도 보여주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작은방, 일주일에 한번 가는 목욕탕, 자전거, 혼자 걷는 산행을 좋아했음을 알게 된다. 쌀밥과 김치, 김 등이 생소해서 체중이 감량되어 아주머니가 걱정하는 모습도 회고한다. 양계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환자 정착촌의 모습들도 차분히 떠올리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대학생들의 데모하는 모습과 버스터미널에서 목격하는 군인들의 젊은 학생들을 구타하는 모습은 그에게 충격을 남긴다. 계속되는 질문들과 버스 안 승객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과 표정들까지도 그는 또렷하게 기억하며 회고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그가 직접 경험하고 본 것들을 기록한다. 그의 증언들은 역사이며 기록이 된다.
글과 함께 사진들도 수록되어 있는 회고록이다. 이방인들의 시선에 한국은 어떠한 상황이었을까?
저자가 계속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들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평화봉사단이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었기에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어떠한 언행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게 된다. 그의 눈앞에서 펼쳐진 총격의 흔적을 남긴 버스들과 혈흔들, 그리고 사라진 승객들의 행방은 그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독일 기자들의 통역 역할을 수행하면서 광주의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언론이 거짓된 정보를 보도하고 있음까지도 그는 직접 경험하게 된다. 도청에서 목격한 할머니와 어린이의 시신은 그에게 더욱 충격을 남긴다. 젊은 청년들만이 희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헬기로 총격을 가하여 피살된 할머니와 어린이의 사체였기 때문이다.
5,18 관련 책들을 이미 여러 권들을 읽었는데 가장 충격적인 것은 어린이가 총격에 피살된 것이었다. 역시나 이 책에서도 어린이 시신에 대해서 기록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차별하게 국민을 사살한 그들은 누구이며, 발포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인가는 역사에 반드시 드러나야 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왜 광주시민들이 정부에 의해서 철저하게 버려져야 했었는지는 이 책은 분명하게 명시해 준다. 김대중, 전라남도, 대학생들, 김대중 체포, 계엄령, 전두환 ....
며칠 전에 광주에서 전두환 재판이 있었고 그가 보였던 과거의 언행과 재판하는 날의 그가 보여준 언행들은 국민들의 관심을 충분히 주목시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날의 광주시민들이 느꼈을 분노와 충격, 가족들의 죽음, 군인들이 보였던 과격한 충격들은 그 당시 목숨처럼 지키고 진실을 전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까지도 함께 기억하게 된다. 진실을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기나긴 시간 광주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만들었던 사람들도 우리는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책은 불꽃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던 책이 바로 광주 5.18책이었다. 이해되지 않고 믿을 수 없었던 한국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당시 받았던 충격은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연장선이 되었기에 책은 말없이 진실을 전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무서운 힘을 간직한 것이다. 읽는 자만이 볼 수 있는 것이며 보이는 것의 힘은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지게 되기에...
오늘도 읽는다. 그동안 읽었던 5.18 책들의 기록들과 중첩되어가는 기억들은 또 한 번 선명하게 진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저자가 이 책을 출간된 이유도 분명히 전한다.
지금 우리에겐 목소리가 없어.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게. 할머니는 두려움이 없는 눈으로 나를 뚫어질 듯 보았다... 나는 여기에 '목격하기 위해' 있었다. 그 할머니가 내게 분명한 임무를 준 것이다.
나는 할머니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40년이 지난 이제야, 그 책임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책 중에서 -
역사의 사실 앞에 시간은 흘러왔다.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보았지만 시간의 흐름 앞에서도 한치의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5.18 광주시민들이 보여줬던 모습들도 쉽게 잊히지 않았던 내용 중의 하나가 된다. 정부는 광주시민들을 버렸지만 광주시민들은 학생들의 외침과 정부가 보이는 모습에 분노했고 총격으로 거리가 지저분해지면 자발적으로 시민들은 거리를 청소했다고 저자는 기억한다. 늘 깨끗한 광주 거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도 놀라워하는 광주시민들의 자발적인 모습과 군인들을 사살하지 않고자 무기를 반납하는 모습과 시민들을 설득하는 지도자들의 모습까지도 책은 전한다. 광주시민들이 원하였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책은 목소리를 전한다.
민. 주. 주. 의
광주의 택시 기사들과 버스기사들이 군인들로부터 시민들을 지키고자 희생한 내용도 이 책은 담아내고 있다. 그들이 왜 군인들로부터 시민을 지켜내야 하였는지 아이러니할 뿐이다. 광주에 왔던 군인들은 누구이며, 광주의 시민들을 희생시킨 발포명령권자는 누구인지 우리는 묻게 된다. 그 당시 미국이 보여줬던 모습까지도 저자는 모두 회고해 주고 있다.
역사는 잊히지 않아야 한다. 그 누군가가 잊고 살면 그 역사는 또 반복될 수 있기에....
민주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면서 이룩한 것임을 또 한 번 기억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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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2020-05-1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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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푸른 눈의 증인
1980년 광주에 있었던 푸른 눈의 증인들 중의 한 명이다. 익히 영화로 알려진(택시운전사)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AP 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 타임지 사진기자 '로빈 모이어'가 그때 광주에서 일어난 일의 증인들이다. 저자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서 그 역사적인 참혹한 현장에서 처음에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시위와 진압의 현장에 있었고, 공포감과 불안감에 안전한 곳으로 - 또는 자신의 일터로 - 피신을 하였으나 다른 봉사단원들의 용기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또한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다시 광주로 들어간다.
후진국으로 봉사를 하러 머나먼 타국에 온 푸른 눈의 평화봉사단. 그들의 눈에 광주는 어떠한 모습이었나? 군부독재는? 전두환은? 아마도 여타 다른 나라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까이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독재국가들, 멀리는 아프리카까지.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과 광기가 어떻게 자국민들을 몰살시키는지. 그때 광주는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저자의 말'에서 자신이 겪은 사건의 객관성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푸른 눈의 미국인, 광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 당시 목격한 실태는 그만큼 그 자신도 이성을 잃을 만큼 분노했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리 감정적이고 자극적이지는 않다. 저자의 말은 아마도 사태의 심각성과 일촉즉발의 순간들이 자신의 기억과 기록에 대해 오기와 부정확함을 이야기하는듯하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 2019년 5월 - 제대로 된 진상조사도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무척 놀랍다고 한다.
20대 초반의 순수한 청년들(물론 여성도 있었다)의 눈에 비친 광주의 참혹한 광경은 그들의 깊은 두려움 속에서도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고취시켰다. 외신기자들의 통역을 자처하며 그날의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전 세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곳에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 했던 이 책의 저자를 비롯한 평화봉사단의 '주디 챔버린', '데이브 돌린저', '팀 원버그'.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지금 그날, 광주에서 있었던 진실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는 - 5월 18일의 목격자이며 군인들에게 구타당하는 시민들을 구해준 - '팀 원버그'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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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l 2020-05-1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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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잊지 말아 주십시오, 『5.18 푸른 눈의 증인』
『하나, 책과 마주하다』
✒
나는 멈춰 섰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결코 늘 봐오던 그런 일상적인 시위가 아니었다. 여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불타고 있는 경찰차를 피해서 지하도를 이용해야 해야 했다. 지하도의 넓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아래쪽에는 깨진 벽돌이나 최루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최루가스가 온통 지하도 안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뿌연 안개 색의 가스가 얼굴을 덮쳤고, 나를 포함하여 주변의 사람들은 연신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뒤엉켜 출구를 찾느라고 법석이었다. 나는 다른 출구를 찾아서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애를 썼다. 그야말로 내 꼴은 말이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이런 날 콘택트렌즈를 끼고 있었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
"고 선생, 어서 여길 나갑시다."
우리는 순천 가는 버스로 향했다. 막 버스에 올라타려는 순간,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네! 사람을 죽여!"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땅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군인 하나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노려봤다. 놀란 군중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군인이 소리쳤다.
"다들 비켜. 당장!"
✒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 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 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려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모두 도청으로 나오셔서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는 학생, 시민들을 살려주십시오. 우리 형제, 자매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도청을 끝까지 사수할 것입니다."
읽는 내내 괴로웠다.
읽다가 덮고, 읽다가 덮기를 반복했다.
책장 한켠이 역사와 관련된 책들만 가득할 정도로 역사를 좋아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마음이 무겁다.
이 책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 책장에 꽂힌지는 꽤 되었으나 읽고 덮기를 반복해 꽤 오랜 시간동안 읽을 수밖에 없었다.
전재산이 29만원이라는 인간이, 부유하게 살고 있고.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인간이, 건강하게 골프 치고.
그 인간의 모양새를 보면 정말,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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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6-2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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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5.18하면 떠오르는건 광주민주화운동이다.
하지만 그 운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영화나 뉴스에서 보는 정도만 알고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 얼마전 또 한번의 5.18이 지났고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 26살의 나이의 외국인이 봉사를 하기 위해 왔고 5.18 광주민주항쟁을 목격했다.
그의 이름은 폴 코트라이트,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기록이 40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5.18하면 떠오르는 영화 택시운전사,
택시운전사에 나왔던 독일 기자 위르겐 히츠페터의 이야기정도였는데
폴 코트라이트가 직접 그일을 겪은 외국인의 눈으로 본 그날의 이야기,
생생하면서도 세밀한 묘사까지 정말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폴 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30분정도 떨어진 나주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의 호혜원에서 근무했고
환자들을 위해 버스를 몇번이나 바꿔 타는 수고를 하고도 환자들과 순천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고
그러던 5월도 환자와 순천으로 가는길에 그날의 일들을 겪었다고 했다.
" 문이 닫히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올때 까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 흘낏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 (p57)
책을 읽으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음을 잘 알지 못하고
그곳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서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 기억나고
외국인의 눈으로 본 그 모습들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이해할수 없었는지를 다시 알게 되고
그런 일들을 겪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국민에게 그렇게 해야 했는지....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고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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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 2021-06-0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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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평화봉사단 외국인 청년, 광주민주항쟁을 마주하다
올해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41년이 지난해이다. 아직 정확한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아 희생자 유가족의 가슴에 응어리가 남아있다. 오늘 소개할 책은 한림출판사의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인 <5·18 푸른 눈의 증인>이다.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회고록과 영상매체가 다수 존재하지만, <5·18 푸른 눈의 증인>은 당시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청년 폴 코트라이트가 느꼈던 객관적인 시선이다.
그는 전남 나주의 호혜원에서 한센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한국 이름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에서의 생활이 이전에 자신이 살았던 생활방식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한국인의 본받을 점은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고 있던 시기였다.
자신이 외부의 뉴스를 통해 들었던 광주항쟁과 본인의 눈으로 확인한 광주에서 벌어진 실상을 너무나 달랐다. 평화봉사단은 정치적인 입장을 피력할 수 없었음에도 그는 현장에서 만난 할머니의 부탁을 잊을 수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목소리를 낼 수 없네.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변해 주게.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게.”
폴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았다.
“노력하겠습니다.” 할머니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던 마음속으로 다짐하던 약속은 40년이 지나 기억에 의존해 회고록으로 대신한다.
그는 1980년 5월 14일에서 5월 22일까지 일어난 일을 자신이 경험하고 기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회고록을 기술하고 있다.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군인들이 무장하지 않은 대중을 향해 총을 발포하고 있었다.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의 봉기가 북한 불순 세력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가 바라본 시민군은 ‘북한’의 위협에 무기를 들 사람이었다. 그들은 시골 농민들, 가게 주인들, 운전기사들이었고, 바라는 것은 오직 정의로운 사회였다.
군중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가 필요하다는 측과 군인들의 보복이 우려되기 때문에 무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측으로 갈렸다.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펼쳐진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규모를 짐작할 수 없었다. 군중 위로 비행기가 나타나서 최루 가스를 뿌리자 사람들은 공중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티비 속에 나오는 광주에 관한 내용은 진실과 달랐다.
“폭도 학생들이 공공 재산을 파괴하고 있으며 우리 군인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은 악의적으로 상황을 조작하고 있었다. 방송을 통해서 전국에 전달되고 있는 광주항쟁은 현실에 불만을 가득한 폭력적인 공산 집단에 의한 폭동이었다.
폴, 팀과 데이브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이용해 평화봉사단에 도착하고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리기로 한다.
수많은 시민이 총알 앞에 목숨을 잃었다.
광주에서 그가 경험한 일을 떠올리는 건 40년 동안 그에게 힘든 고통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학살이 시작된 날인 5·18로 통칭되고 있는 당시의 항쟁이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서구인, 특히 미국인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길 원했다. 미국인들 중에는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광주항쟁 동안 워싱턴주의 헬레네 화산이 폭발해 광주 소식이 미디어에 거의 소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리아에서 일어나는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의 군인이 자국민에 총을 발포하는 행위는 막장에 벌어지는 일이다. 과거 내가 살았던 동네의 아저씨 한 분은 5·18 민주화운동에 공수부대로 참여했고, 수많은 경험 뒤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동네에서 실성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나는 성인이 되어 광주에서 벌어진 진상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훨씬 더 많은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5·18과 관련된 수많은 연구가 있음에도 사건의 총체적인 진상이 여전히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광주에 머물렀던 외국인들의 이야기는 객관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다른 주목할 점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진작가 로빈 모이어의 당시 기록사진이다. 새롭게 공개된 사진 속에는 누군지 모를 관을 자전거 뒷자리에 싣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체육관 내에 줄지어 있는 관의 행렬은 당시 치열한 현장을 대변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관해 궁금증을 가진 분이라면 <5·18 푸른 눈의 증인>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518푸른눈의증인 #폴코트라이트 #로빈모이어 #역사 #근현대사 #광주 #한림출판사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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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0 2021-06-0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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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518 푸른 눈의 증인
이 책은?
이 책 『5.18 푸른 눈의 증인』은 <외국인 첫 5.18회고록, 오월 광주 13일의 기록>이다.
저자는 폴 코트라이트, <미국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전남 나주의 나환자촌 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봉사활동을 하던 중에, 운명의 시간을 광주에서 보냈다.
그의 눈앞에서 518 광주가 그대로 펼쳐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생생하게 벌어진 광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저자인 폴 코트라이트는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에 가까운 나주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인 호혜원에서 평화 봉사단원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운명의 그날 5월 20일, 그는 광주의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러 들렀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 순간 최류탄 한방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터졌다.
우체국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각기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저자가 우체국에서 나와 바삐 길을 가는데, 어떤 할머니 한분이 저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70쪽)
한국 사람들은 지금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이 말이 그의 가슴 속에 남았다.
그 순간부터 그는 증인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광주를 누비며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가 그 운명의 현장에서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다. 역사적인 기록이다.
그를 망설이게 한 것들
그는 당시 평화봉사단원이었다. 당연히 외국인 미국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갈등했다. 과연 미국인인,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 있는 처지에서 광주에서 시위에 참가한 것처럼 보인다거나,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에 어떤 형태든지 관련될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심지어 계엄령 철폐 관련 구호가 적힌 시민군의 버스에 타는 것조차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83쪽) 시위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 역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군인들이 압수하여 시위자들을 체포하는데 증거로 쓰일까봐.
이런 상황을 고려해볼 때, 외국인이라 해서 당시 광주에서 활동이 자유로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기록이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기록, 또 기록
그는 당시 한국어 공부를 위해 작은 공책을 가지고 다녔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적어 놓고, 공부하는 공책이다. 그는 이 공책에다 당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한다. 그렇게 기록한 것을 나중에 다시 새롭게 기록해 두는 것이다.
나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서 내가 겪은 일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모든 것을 세세하게 반추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문장을 쓰다가 멈췄다. 일단 여기저기 메모해 두었던 것을 정리하기로 했다. 일을 겪을 때마다 공책의 여백에 적어두었는데 급히 쓴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다.(127쪽)
그런 기록들이 살아남았다. 기록이 바로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가 있었던 곳, 피와 눈물이 흐르는 곳
1980년 5월 19일
광주 고속버스 터미널 (56쪽)
군인이 청년 한 명을 구타하는 것 목격.
<그 젊은이가 땅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돌아오는 길, 광주 버스 터미널 5분전 앞둔 곳
버스가 급정거하고, <버스 앞에는 시내버스 한 대와 여러 대의 택시들이 마치 어린애 장난감처럼 서로 뒤얽혀서 불타고 있었다.> (61쪽)
광주 <도시 전체가 공포와 파괴를 피해 집단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을 삼간 듯 적막했다.> (62쪽)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사람들 얘기로는 백 명은 넘을 거래.>(63쪽)
1980년 5월 23일
도청 시신 안치실 (132- 쪽)
<나는 우리를 안내하는 의대생을 눈여겨봤다. 그의 얼굴은 침울했다. 그는 조심스러운 자세로 관이 늘어선 아래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런 상황은 이미 일주일 전에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시신 숫자가 중요할 것 같았다. 쭉 늘어선 관을 세기 시작했다. .....대략 오십 개의 관이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다시, 이 책은?
그런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저자는, 외곽을 철통같이 막고 있는 광주를 빠져나와 전주로, 그리고 전주에서 다시 서울로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광주의 기억과 기록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 그 기억과 기록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기록이다. 해서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다.
이 기록을 아직도 광주 그날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읽기를 엎드려 당부한다.
역사가 광주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읽어봐 주시라. 그리고 기억해 주시라. 광주의 아픔과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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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 2020-05-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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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모*루ㅣ 2021-06-21
한 국가의 보통의 시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투쟁의 역사의 안에서 그날을 또렷히 목도하시고, 겪으신 뼈 아픈 사실을 비로소 민주주의를 이룬 국가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알게 해 주시기 위하시어 애써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 감사합니다. 그날의 언저리를 상기하시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우셨을 심정을 누르셨던 날들에 작은 위로를 전합니다.그럼에도 그 나라의 국민에게 전하셔야 하신다는 사명과 소명으로 이 한 권에 담아주신 모든 이야기를 준엄히 듣겠습니다. 기본으로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를 투쟁하지 않으면 지켜낼 수 없었던 시대의 참혹함과 슬픔 안에서 목숨 바쳐 이루신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은 매 순간을 흐르고 있습니다. 05월 18일에 이르는 억압과 탄압을 없애기 위한 이후의 투쟁의 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 위에서 모든 당연한 것을 지켜내시기 위하시어 우리의 가족과 같은 분들께서 목숨을 바치신 피와 한이 서린 역사입니다. 다시 그 정신을 고취하며 그분들의 의미가 먼 역사가 아닌 그 역사를 현재로 미래로 살고 있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분들의 삶과 시간 안에서 숭고한 가치를 누리고 있음을 늘 기억하겠습니다. 모두가 민주주의와 인권이 지켜지는 안에서 보통의 매일을 보내게 하시기 위하시어 삶을 바치시고 새 세상을 이루어 주신 고귀하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존경을 전하며, 감사합니다 언제나 눈에 마음에 담긴 그날의 역사에 이르는 참혹한 날들을 엄중하게 새기겠습니다. 그 두려우셨을 순간마다 당신들의 안위가 아니라 암담한 나라를 살아가야 하는 모두의 미래가 더 두려우셨던 그 절실하신 마음을 감히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저리고 시린 날들을 결코 잊어내실 수 없으셨을 심신의 아픔들을 어떻게 다 헤아릴까요.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으로 늘 지키겠습니다. 부디 어디에서도 평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행복***ㅣ 2020-04-24
꼭 필요한 책 두고두고 남길 역사의 진실이 기록되어 좋네요 작은 힘이라도 참여하게 되서 의미있습니다 so*****7ㅣ 2020-04-24
좋은 책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ㅣ 2020-04-23
책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래**ㅣ 2020-04-17
펀딩 목표 금액 7백만 원 가즈아~ de****eㅣ 2020-04-12
당시에 현장에서 마주한 모든 사건들이 저자에게 매우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 주었을텐데, 이후에도 지속된 무거운 마음을 ‘기록하는 것‘으로 다 잡았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그 기록들이 진실을 전하는데 기여하고, 감춰진 역사를 알게 하는데 기여하게 되었으니 부디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애써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진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고 강하게 숨쉬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Sm*** *Jㅣ 2020-04-08
책 표지에 싣고 가는 게 관이라는 걸 알아채고서야 저 사람의 앞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안간다. 이 길에 선 그 어떤 사람들의 표정도 지금 내표정 같으리라. 벌써 40년이나 지났다. 한순간도 변함없이 학살자를 처벌하라는데 역사는 그대로 흘렀다. 역사를 잊으려는 자, 역사가 그 안에 가두리라. 비로**ㅣ 2020-04-07
진실은 언제나 빛을 발하는 법이죠 go********9ㅣ 2020-04-06
꼭 기억하겠습니다. ha*****4ㅣ 20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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