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5
정토회 | 스님의 하루 - "제가 20여 년 간 통일 운동을 하게 된 이유는..."
정토회 | 스님의 하루 - "제가 20여 년 간 통일 운동을 하게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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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하루 제작팀 글 | 2019.03.04 05:59:30 | 9,928 읽음
"제가 20여 년 간 통일 운동을 하게 된 이유는..."
2019.3.2. 통일의병학교 강의 녹화, 정회원 보고회 법문 촬영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평화재단 통일의병학교 강의를 녹화한 후 오후에는 정토회 정회원 보고회 법문을 촬영했습니다.
오전 9시가 넘어서 평화재단에 도착한 스님은 업무를 보다가 10시부터 통일의병학교 강의를 녹화했습니다. 올해부터 평화재단에서는 통일의병학교를 전국 시군구에서 힘차게 열어나가기로 했습니다. 오늘 녹화 내용은 통일의병학교 제1강과 제2강에 사용할 영상 교재로 편집될 예정입니다.
“어제는 3.1 운동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다시 새로운 백 년을 시작하는 첫날, 통일의병학교 강의를 촬영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정말 어려운 시간 내주셨습니다. 법륜스님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촬영은 쉬지 않고 2시간 동안 계속되었는데요. 그중 스님이 통일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 통일의병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활동들을 해오셨고, 그 과정에서 이룬 성과와 앞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점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우리나라가 외세에 의해 분단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서로 싸우고, 이렇게 적대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통일운동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까지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사회주의 이론만 공부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사회 운동하는 것을 보고 지지는 했지만 전적으로 동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참고하는 것은 좋지만, 특히 우리의 평화와 통일,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는 그 출발점을 우리의 민족사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데 있어서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통해 많은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사회운동의 동기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당시 학생 운동의 문제의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진 의문은 ‘학생들이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운동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도하는 학생들에게는 ‘우리 사회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를 전후로 사회주의권이 붕괴되었습니다. 특히 동유럽의 붕괴, 소비에트 연합의 해체와 함께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사회운동을 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들이 꿈꿔오던 세상이 허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국내에 있던 통일운동 세력 또한 힘을 많이 잃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때 저는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사회주의가 무너지는데 왜 통일에 대한 동력을 잃어버릴까? 이제는 무엇이 통일운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에게 통일운동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통일이 이루어져서 통일의 꿈을 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사회주의권이 붕괴되었다고 통일의 꿈을 버린다면, 이것은 진정한 통일의 원(願)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서 소위 사회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비록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통일에 대한 의식이 높은 편이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의식 수준으로는 통일을 이루어낼 수 없고, 무언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념을 넘어서는 통일 운동의 추진 동력은 무엇일까
당시 남한과 북한이 공통적으로 존경하는 지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가 같은 것도 아니고, 사회 시스템이나 체제가 같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사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민족사입니다.
그 전에도 학생들에게 근·현대사를 공부할 것을 많이 권유했는데, 다시 역사로 돌아온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면 민(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꿔온 것을 알게 됩니다. 굳이 사회주의를 논하지 않아도 민(民)이 주인이 되는 나라는 우리 선조들이 지난 200년 동안 꿈꿔온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 꿈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통일된 나라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국가주의에 머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통일된 나라의 주인이 누구여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분단된 나라로 머물더라도 그저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기만 한 것도 불충분합니다. 첫째, 분단된 나라가 통일되어야 하고, 둘째, 통일된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관계가 함께 해결되어야 합니다.
다른 나라로부터 독립된 자주적인 국가가 되어야 하고, 그 국가의 주인이 국민인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갖춰진 나라가 우리 민중이 지난 200년 동안 꿈꿔온 나라입니다.
역사 공부는 책상 앞에서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학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학습하려면 우선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사회주의 공부는 때로는 민족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에서는 민족의 뿌리에 대한 옛날이야기를 마치 전설이나 허구처럼 취급하고, 마치 그것이 허황된 이야기처럼 치부해서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뿌리에 대한 이해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에 고구려, 발해 유적지부터 답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고구려와 발해 이전에 어떠한 나라들이 있었기에 이러한 강성한 나라가 생길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의식과 함께 부여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갔고, 옛 조선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결국 배달나라, 한나라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나라까지 가야 왜 우리나라 국호에 ‘대한(大韓)’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알지 못하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정작 한(韓)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100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투쟁을 했는지를 알기 위해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했습니다. 이런 독립운동의 역사를 알아야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염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공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단순한 역사공부가 아닌 현장에 직접 가서 공부하는 동북아 역사기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우리 민족의 고통은 못 보고 있었구나
역사기행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들로부터 북한에 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사정이 어렵다는 것은 전해 듣고 있었지만, 그래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고, 전 세계에 많은 나라들을 북한이 도와준 전력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북한 사람들의 실상을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더 이상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인도의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천리, 만리 밖에 있는 가난한 아이들은 눈에 보였지만, 바로 내 옆에 있는 우리 동포의 고통은 못 보고 있었던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제가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념에 가려서 못 봤구나’ 했겠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실상을 못 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시각 역시도 하나의 이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설마 북한에서 사람이 굶어 죽겠냐’ 하던 태도가 제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거예요. 저도 모르게 ‘오히려 북한 체제를 험담하려고 저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니냐’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상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던 거예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사실이 어떠한가’ 하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우리는 조금만 호의적이면 두둔하는 쪽으로 치우치기 쉽고, 조금만 비호의적이면 비판하는 쪽으로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해서 1996년 12월 좋은 벗들 전신인 ‘우리 민족 서로 돕기 불교운동본부’를 창립하고, 북한동포 돕기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북한동포를 돕자고 호소했습니다. 당시 저는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업에 찾아가서 호소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주로 학생들과 노조를 찾아가서 호소했습니다. 노조가 모인다고 하면 어디든 다 찾아가서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기대를 많이 했던 학생운동 조직과 노조가 북한동포 돕기에 가장 동참력이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북한에 대해 험담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지금 미국 제국주의와 투쟁을 해야 하는데, 스님이 오히려 북한이 굶어 죽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내부의 전력을 약화시킨다’라는 비판을 많이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북한 동포들이 굶어 죽는다고 하니까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 운동을 하면서 진보세력 안에도 합리적인 사람들이 있고, 또 무조건 북한의 정치 선전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보수세력으로부터는 친북인사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뛰어다님으로 해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물꼬를 트게 되었습니다.
인도적 지원을 하면서 국경을 넘어온 수많은 난민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도우면서 그들을 통해 북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는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를 모아서 UN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북한 난민 지원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미국 워싱턴에 가서도 ‘정치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북한 난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미국이 설득되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구나
저는 미국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는데, 도저히 한국 안에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미국으로 가서 미국 정부를 설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인도적 지원과 난민 지원마저도 미국이 설득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설득을 하고 다녔습니다. 여기에도 많은 비판이 따랐습니다. 보수세력은 제가 허위정보를 가지고 미국 사람들을 설득한다고 비판했고, 진보세력은 제가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수집해서 미국 CIA에 보고한다고 비판했어요.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난민 지원, 그리고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한 설득을 하다 보니 남쪽에서만 갈등의 중심에 서는 게 아니라 중국에서도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북한 난민을 지원하는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난민은 중국에서는 불법입국자입니다. 그들을 돕는 활동을 하는 우리는 중국에서 불법체류자를 돕는 불법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희 활동가들이 체포, 구금, 고문, 퇴출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북한 정부에서는 제가 민족의 배신자를 돕는다고 기분 나빠했습니다. 북한 안에 있는 사람들의 열악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중국 안에 있는 난민들의 열악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니까 북한 안에서는 제가 북한에 적대적인 사람으로 찍히게 되었어요. 그리고 당시 남한에서 북한 난민을 돕는 것은 주로 보수세력이 했습니다. 그런 보수세력과 협력해서 난민들을 돕다 보니 남한의 진보세력들은 저를 진보를 배신한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곤 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은 이 문제가 미국과 북한 사이의 적대관계가 청산되지 않고는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두 나라의 적대관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한 주민의 생활 개선도, 난민 문제 해결도, 인권 개선도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JTS’와 ‘좋은 벗들’을 통해 인도적 지원, 난민 지원, 인권 개선 활동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2004년 평화재단을 설립해서 평화운동을 시작했습니다.
2005년에 북·미 간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거의 해결될 지점에 온 적이 있었어요. 당시 9.19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 ‘이제야 해결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튿날 미국이 방코 델타 아시아(Banco Delta Asia) 은행 문제를 터뜨려서 또 물 건너 가버렸어요.
그 후 한국에는 다시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도적 지원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북미 간의 적대관계도 모자라 남북 간의 적대관계까지 심화되어 전쟁 위기로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전쟁만은 안 된다’ 하는 전쟁 반대 운동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풀려면 우선 남한 정부가 평화와 통일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미국대로 놔두더라도 적어도 남한 정부만큼은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민간이 아무리 뛰어다닌다고 해도 평화 통일은 이루기가 어렵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평화지향적인 한국 정부를 만드는 일을 추진할 집단으로 ‘통일의병’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의병이 필요하듯이,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통일의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통일의병을 양성하고 훈련하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습니다.
남한 정부가 평화와 통일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미국, 중국, 북한이 어떻게 나온다 하더라도 적어도 대한민국 정부만큼은 평화와 통일에 대한 입지가 확고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를 설득하는 것도 꾸준히 해나가야 하는데, 그건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할 일이지 민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서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할 권리는 우리 국민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있어요. 우리는 다시 헌법으로 돌아가서 헌법 정신에 의거해 활동해야 합니다.
헌법 전문(前文)을 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렇게 나옵니다.
3·1 운동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 대한 국민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통일의병은 우리의 헌법을 지키는 ‘헌법 지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의병은 대한민국의 꿈을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통일의병은 이런 역사적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지난 200년 가까이 민중이 가져온 꿈을 잇고, 그것을 위해 희생한 의병들을 잇고, 그것을 계승한 독립군을 잇고, 그것을 계승한 대한민국을 우리가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하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습니다. 하나씩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문제를 직시했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 보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드러난 현상이 다급하니까 덤볐는데, 더 깊이 들어가 보니 결국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실현하는 일이 바로 평화통일을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그 일을 보다 선도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통일의병입니다.”
이외에도 3가지 질문이 더 있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이 상황이 지속될 경우의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통일 대한민국에는 어떤 비전이 있을까요?
통일의병을 설립할 때 왜 ‘의병’이라고 명명하셨나요? 통일의병은 다른 시민단체와 어떻게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나요?
촬영이 끝난 후 방청객으로 참여한 통일의병들은 큰 박수로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오후 1시에는 정토회관에서 정토회 정회원의 날 보고회에 상영할 법문을 촬영했습니다. 다음 주 일주일 동안 전국 정토법당에서는 정회원의 날 모임을 가질 예정인데, 오늘 촬영한 스님의 법문을 함께 시청한 후 모임이 진행됩니다.
스님은 정회원과 일반회원의 차이, 정회원의 역할은 무엇인지, 정회원의 날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행정처와 대의원회, 법사단의 역할이 무엇인지 20여 분간 법문을 했습니다.
오후 2시에는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하고, 오후 3시에는 내일 있을 통일의병 대회를 앞두고 통일특별위원회 사무처 사람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오후 6시에는 국제국 활동가들과 회의를 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3.1 운동 10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발표를 준비하느라 며칠 밤을 꼬박 새웠는데요. 오늘은 오랜만에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2019년 제6차 특위 통일의병 대회가 문경 정토수련원 대강당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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